13화
살면서 꽤 다양한 인간상을 만나 왔다고 자부한다.
특히 전쟁터에서 청년기를 보내면서, 섬 안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다양한 인연을 겪었다.
하지만 맹세코 알은 처음이었다.
‘알로 만든 주인님…….’
나는 대형 침대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한 채, 내 신장의 족히 반은 되는 듯한 알의 크기와 생김새를 면밀히 살폈다. 알치고 예쁘기는 한데.
‘혹시 이건 웨더우즈 가문식 농담인 걸까?’
당황하는 사이에 방 안쪽에서 진짜 웨더우즈 자작이 등장하는 거지.
혹시나 싶어 과장된 몸짓으로 놀란 척을 했다.
“세상에!”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진짜 웨더우즈 자작 같은 건 나타나지 않았다. 흠. 어쩌면 내 반응이 너무 시시했던 것일지도.
조언을 얻기 위해 하녀장을 바라봤지만, 차마 입을 열지는 못했다. 하녀장의 얼굴이 너무도 진지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난 도피했던 현실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인 하얀색의 알.
‘이 알은 진짜 웨더우즈 자작이야.’
허리를 곧게 펴고 알을 마주했다.
하녀로서 주인님과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이지 않은가? 좋은 인상을 심어야만 한다.
나는 알의, 아니, 웨더우즈 자작의 껍데기를 살살 쓸어내리며 인사했다.
“자작님.”
매끈하시네요.
당연한 말이지만,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알의 껍데기 안쪽에서 심장 박동 같은 부드러운 울림만이 전달될 뿐.
“어떤가요, 데이지 양?”
어떠냐고?
“보들보들. 따끈따끈.”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하녀장이 입을 가린 채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호탕하게 웃는 하녀장의 모습은 처음이라 조금 어색했다.
“당신은 정말…….”
흠흠. 어색하게 목청을 가다듬은 그녀는 다소 후련해 뵈는 눈으로 알을 쳐다봤다.
“지금의 웨더우즈 자작님을 처음 뵌 건 4년 전이에요. 그때는 정말 달걀보다 작으셨는데, 지금은 한 품에 겨우 안을 만큼 쑥쑥 성장하셨죠.”
4년 동안 계속 자랐다고?
“부드러워 보이고, 심장 박동이 느껴져도 껍데기 자체는 굉장히 단단해요. 아마 웬만한 검으로는 뚫을 수도 없을 겁니다.”
이 알, 정말 살아 있는 거야?
내 표정을 물끄러미 살피던 하녀장이 작게 속삭였다.
“의심하지 마세요, 데이지 양. 이 알은 전 주인님이 제게 직접 맡기시면서 ‘내 후계자를 잘 부탁한다’고 당부한 알이니까요.”
“음.”
“그레이 웨더우즈 자작님은 전 주인님의 유일한 후계자입니다. 전 주인님은 마도 전쟁에서 전사하셨거든요. 인류의 영웅이자 제국의 위인이며 가문의 자랑이시지요. 무려 10년 동안 모든 재산을 바쳐 헌신하셨습니다. 저택 네 채를 기꺼이 의무대에 내주셨고, 제국 곳곳에 부모와 가족 잃은 아이들을 돌볼 보육원을 지으셨죠. 생전에 굉장히 많은 훈장을 받으셨던 기억이 나네요.”
하녀장이 과거를 더듬는 눈으로 작게 웃을 동안, 나는 알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마도 전쟁이라.’
이곳 미드윈트리는 남부 전선과 멀찍이 떨어진 도시로, 마도 전쟁과는 큰 인연이 없는 땅이다.
전쟁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이 땅 전역에 알게 모르게 분명한 영향을 끼치기는 하나, 그마저도 지역에 따라 격차가 컸다.
미드윈트리의 시민들은 아마 강제 징병 등을 통해서 겨우 전쟁을 실감했을 것이다.
완성된 퍼즐처럼 견고하고 빈틈없이 깔끔한 미드윈트리의 풍경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희미했다. 무너진 건물의 흔적도, 전사자를 태우는 소각장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에 정착한 이후부터는, 이따금씩 전선에서 살아온 과거가 까마득해지고는 했다.
‘전쟁터에서 전 웨더우즈 자작과 한 번쯤 마주쳤었을까?’
웨더우즈라는 성은 미드윈트리에 와서 처음 들었지만, 전쟁 중에 우연히 마주쳤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가문의 재산을 아낌없이 나눌 만큼 헌신적인 인물이었다고 하니. 필시 한 번쯤 지나쳤을 것이다.
‘귀족답지 않게 저택 내부가 초라했던 건 다 이유가 있었어.’
원래 좋은 사람은 빨리 떠난다.
이것만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전 웨더우즈 자작이 살아남았더라면 혁혁한 공훈을 세운 영웅으로 추앙받아 가문의 위세를 드높였겠지. 하지만 죽으면 훈장과 명예만 남을 뿐.
더군다나 유일한 후계자는 사람이 아닌 ‘알’이기까지 하니…….
“전 주인님께서는 전쟁 통에 결혼까지 하셨어요. 정말 로맨틱한 분이시지 않나요?”
하녀장의 시선이 침대 맞은편의 벽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등불을 든 채 벽으로 다가가자, 어둠에 가려져 있던 대형 초상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는 에나트 로즈벨. 로즈벨 백작 가문의 하나뿐인 영양이자 후계자셨죠. 전 주인님이 전사하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뒤따르듯 눈을 감으셨습니다.”
초상화 안에는 두 명의 남녀가 서 있었다.
금발의 남녀는 눈에 띄게 젊다는 점 빼고는 평범했다. 질 좋은 옷감과 부드러운 표정에서 상류층 특유의 여유가 묻어났다.
“현 로즈벨 백작이 타계하면 로즈벨 가문의 작위와 재산은 모두 주인님의 소유가 될 거예요.”
로즈벨 백작이라면 나 또한 아는 이름이었다. 검성 버클리그레이튼 공작과 함께 전장을 누비던 노장이었다.
‘아직 정정한가 보구나.’
그리 가까운 인연은 아니지만 생존했다는 소식 하나만으로 기분이 유쾌해졌다.
“사실 이미 적잖은 일부가 웨더우즈 가문에 귀속되어 있어요. 전 자작 부인께서 어마어마한 수준의 지참금을 들고 오셨거든요. 다만 결혼 전 계약 사항에 의해서, 전 자작 부인의 지참금은 꽁꽁 묶인 상태예요. 현재로선 아무도 사용할 수 없죠. 법적 후계자인 웨더우즈 자작님조차요.”
웨더우즈 가문 입장에서는 악재가 연달아 겹친 격이었다.
“암살자들이 노리는 건 바로 그 재산일 거예요. 지금의 웨더우즈 가문은 아주 다양하고…… 창의적이면서 악의적인 소문에 시달리고 있으니까요. 뭐, 명망 높은 가문의 새로운 후계자가 아무런 활동도 하고 있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네요.”
‘전 자작 부인의 재산.’
돈 많은 귀족이 세상에 그 여자뿐인 것도 아닌데. 고작 묶인 재산을 노리고 여러 번 암살자를 보내왔다고?
수상하다, 수상해.
하녀장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암살자를 보낸 이유가 재산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아도 되는 비밀들?”
물끄러미 초상화를 올려다보던 하녀장이 나를 바라봤다.
“맹세까지 나눈 마당에 못 할 건 뭐 있나요? 앞으로 입을 조심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데이지 양이죠. 허심탄회하게 밝히니 속이 다 시원하네요. 4년 내내 입 닫고 살기가 얼마나 힘들던지.”
고개를 돌려, 침대 위의 거대한 알을 살폈다.
전 웨더우즈 자작의 후계자는 왜 알일까.
많고 많은 것들 중 왜 하필 알일까? 그리고 이 알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시간이 조금 더 흘러서, 알이 깨지고 사람이 태어난다면 그나마 다행일 테다. 하지만 만약 그 외의 것이 태어난다면…….
‘아니. 상식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적어.’
오히려 후계자가 알의 껍데기 안쪽에서 보호받고 있다는 가정이 가장 그럴싸했다.
유사시를 걱정한 웨더우즈 자작 부부가 갓난아기였을 후계자를 비호하기 위해 ‘보호막’을 걸어 둔 거지.
깨지지 않는 알 안에서 아이가 안전히 성장할 수 있다면, 재산에 눈이 먼 친척들에게 위협받을 일도 없을 테니까.
한마디로, 이 알은 진짜 웨더우즈 가문의 후계자였다.
“웨더우즈의 비화가 당신에게는 부담스럽나요?”
“딱히.”
“다행이네요. 데이지 양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음. 으음. 조금…… 이상하잖아요?”
“실례되는 표현.”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 말아요. 그래도 당신보다는 루 씨가 더 이상하니까.”
그건 그렇지.
“데이지 양은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아요. 당신을 그토록 힘차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한데. 말해 줄 수 있나요?”
어쩐지 철학적이게까지 느껴지는 의외의 질문이다.
‘원동력이라. 디안 케트의 유산이 내 삶의 원동력인가?’
그건 내 삶의 목표지 원동력이라 할 순 없었다.
나는 디안 케트의 유산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다.
영혼을 고칠 희망이 없었더라도, 나는 내게 주어진 3년의 시간을 오롯이 살아갔을 것이다. 목표나 원동력이 없다고 자결할 수는 없잖아?
“혹시 아무것도 없나요?”
“딱히 생각나는 건.”
“그렇군요. 그래서 당신을 골랐어요.”
“…….”
“보통 데이지 양 같은 사람은 남을 배신하지 않거든요. 타인에게도 관심 없고 자신에게도 관심 없는 자들 말이에요. 생각해 보니 재밌네요. 관심이 없어서 배신도 하지 않는 걸까나.”
생각 없이 산다고 조롱하는 건가 싶었는데. 하녀장 나름의 사람 보는 기준이 확고해 보였다.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자, 조금 머쓱하게 웃은 하녀장이 침대맡으로 돌아가 등불을 껐다.
“미안합니다. 너무 무례하게 넘겨짚었던 것 같네요. 너그럽게 용서해 줬으면 해요. 오늘은 어쩐지 당신에게 말이 많아졌네요. 그럼 이만 돌아가죠, 밤이 늦었어요.”
우리는 침실을 나와 1층으로 돌아갔다.
하녀장은 피우다 만 담배를 다시 피울 생각이었는지, 나를 앞질러 주방을 통해 뒷문으로 나갔다. 나 또한 그녀를 따라서 저택 뒤뜰로 나갔다.
처리해야 할 잡일이 있었으니까.
“아, 이런. 그러고 보니 저들은.”
담배에 불을 붙이기도 전에 멈칫한 하녀장을 지나쳐서, 두 짐짝을 어깨에 얹었다.
암살자 중 한 놈이 뒤척이며 깨어나려 하기에 꿀밤을 한 대 더 때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담장 위로 살포시 뛰어오르자, 하녀장이 다급히 질문해 왔다.
“그들을 어떻게 할 예정이죠?”
일단 집사 암살자에게 맡길 예정인데, 자세한 처분법은 그와 논의해야 할 것 같았다.
에슐라 저택, 그러니까 앞집의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당분간은 그곳에 박아 두는 게 최선일 것이다.
……라고 설명하면 길어지니 대충 짧게 대답했다.
“매장.”
창백해진 하녀장을 뒤로하고 에슐라 저택으로 넘어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집사 암살자는 두 짐짝의 존재를 환영하는 모양새였다. 마침 일손이 부족했다나 뭐라나.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전 주인의 친우라는 페데가일 남작의 뺨을 날리고 폭행죄 및 협박죄로 고소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