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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9/195)

9화

심부름 목록 중 남은 건 당근과 양파. 그리고 꽃 피울 씨앗.

시장으로 들어선 나는 당근과 양파를 구입하며 상인들에게 상인 연합회에 관해 물었다.

처음에는 대충 얼버무리는 모습이었지만, 골목길의 노인이 당한 일을 언급하자 한숨을 푹푹 내쉬며 혀를 차기 바빴다.

“연민도 없는 놈들이야. 마도 전쟁 때 자경단으로 시작한 녀석들인데, 전쟁이 끝난 후 변해 버렸어. 회비 운운하면서 돈맛을 보고 나선 괴롭히지 말아야 할 사람들까지 괴롭히더군. 그때나 지금이나 먹고살기 참 힘들어, 안 그래?”

“우두머리는 여섯 명 정도 되고, 그 아래로 스무 명 정도가 수금하러 돌아다니는 것 같아요. 이 근방은 그들 손바닥 안이에요. 가입을 거부하면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죠. 경찰과 결탁했는지 신고해도 소용없어요. 이제는 다들 더러워서 회비를 내고 있죠.”

예상대로, 상인 연합회라는 이름의 양아치들은 이 근방을 제 땅처럼 주무르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 도시에 대한 정보도 빠삭하다는 뜻이겠지.’

유물을 찾는 데 쓸모 있겠는데? 장을 다 본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더 고민할 필요 없었다.

당장 오늘부터 행동에 나서야겠다.

그날 밤, 자정에 가까운 시각.

나는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하녀장 몰래 저택을 나왔다.

이런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탈출은 하녀가 지양해야 할 행동 중 하나였지만,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때때로 사람을 속이지 않고서는 이루지 못할 과업도 존재하는 법이다. 하녀라는 신분을 숨겨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나는 감자 파는 노인이 알려 주었던 펍 안에 들어섰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내부를 밝히고 있던 주홍빛 등불이 옅게 흔들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정면에 떡하니 걸린 액자였다. 빛바랜 흑백 사진에는 그리운 내 친우들의 얼굴이 담겨 있었는데, 신문을 통해 공개된 마도 전쟁의 영웅들이었다.

펍 내부에 있는 인원은 중년 여성 한 명, 중년 남성 넷, 그리고 바텐더. 전해 들은 대로 우두머리는 여섯이었다.

‘이런 놈들은 구역에 문제가 발생한 당일 밤 본거지에 모여 대책 회의를 하는 게 원칙이지.’

놈들의 허리 근처를 살폈으나 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바텐더만 조심하면 된다는 뜻이다.

안에 들어간 나는 바에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기에, 내가 먼저 서두를 던졌다.

“손님 접대.”

바텐더가 코웃음을 쳤다.

“이봐, 아가씨. 이 도시 사람이 아닌가 본데? 장사 안 하니까 곱게 나가시지.”

“왜 안 해?”

“뭐?”

“왜 안 하냐고.”

험악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설렁설렁 다가온 덩치 좋은 남성이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었다.

“잠깐, 잠깐. 기다려 보시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가씨, 어디서 왔어?”

남자는 실실 웃는 낯을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이름이 뭐야?”

익숙한 생김새라 했더니.

“왜 대답이 없어? 아가씨지? 내 동생 얼굴 반으로 뭉개 놨다는 미친 하녀가.”

쓰레기의 형이었다. 아니, 형 쓰레기인가?

철컥.

순식간에 테이블 아래에서 산탄총을 꺼내 내 이마에 겨눈 바텐더가 냉혹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경고했다.

“이 여자였어? 죽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따라 들어와. 곤죽을 만들어서 노예선으로 보내 주지.”

그 행동은 혹시나 했던 나의 마지막 기대마저 저버리게 했다.

제국에서 펍이란 고향과 사람을 위한 공간. 한데 이곳은 아닌가 보다.

바텐더의 경고에 따라 순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바 옆을 따라 걷는 동안 총구 역시 내 머리를 뒤따랐다.

그렇게 바 안쪽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섰을 때. 몸을 순식간에 낮추면서 다리를 반 바퀴 돌려 바텐더의 팔목을 걷어찼다.

쾅! 술잔이 늘어선 진열장으로 날아간 바텐더가 바닥에 쓰러지자, 눈꽃처럼 부상한 유리 조각들이 그의 몸 위로 흩어졌다.

“잡아!”

그다음은 용기 있게 달려온 형 쓰레기의 뺨따귀를 후려쳐 벽에 박아 버렸고. 원형 식탁에 모여 있던 둘은 식탁에, 나머지 둘은 의자와 진한 입맞춤을 시켜 주었다.

“으윽…….”

이제야 조용해졌네.

이게 내가 아는 펍이다. 쓰레기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공간.

“숨겨 둔 총 있어?”

양쪽 팔을 든 채 벌서고 있던 중년 여성이 어깨를 덜덜 떨며 나를 쳐다봤다.

“있냐고.”

“창고에 있습니다! 드,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나는 다시 바텐더에게로 돌아갔다.

내 머리에 총구를 겨누던 용기 있는 바텐더는 한쪽 다리가 맛이 갔는지 바닥을 데구루루 구르고 있었다. 몸을 잘 펴서 위에 앉아 주자 죽을상을 지었다.

“그래서 내 질문에는 언제 대답해?”

“질문이라면…….”

“장사 왜 안 하냐는 질문. 가게 밖에 표기된 펍은 장식이야?”

“장사하겠습니다.”

“장사도 안 하는 친구들이 상인 연합회인지 뭔지는 왜 꾸린 걸까?”

“장, 장사하겠습니다.”

“질문에 대답이나 해. 상인 연합회는 왜 꾸렸냐니까?”

“시내 상인들의 이권 보호를 위하여…….”

“누가 동의했어?”

“상인들 전부…….”

“진심으로 동의한 거 맞아? 협박한 거 아니지? 지금 당장 이 근방을 한 바퀴 돌아서 물어볼까? 널 개처럼 끌고 다니면서 차례로 대면하는 거야. 억지로 가입됐다는 사람이 한 명씩 나타날 때마다, 네 수명도 20년씩 깎일 거야. 그렇게 할까?”

이상하지.

이 녀석들 상대로는 말을 길게 해도 불쾌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내 귀로 들려오는 내 목소리가 끔찍하지 않았다.

마치 안데르트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어 입꼬리도 더 쉽게 오르내렸다.

덕분에 내 혀도 물 만난 물고기처럼 열심히 요동쳤다.

“죄송합니다.”

탁자에 앉아 양손을 들고 있던 남성 중 한 명이 어금니가 깨진 어눌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아, 아가씨는 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여섯의 낯을 차례로 훑어보다가 벽을 가리켰다.

“쟤.”

기사에서 도려낸 듯한 흑백 사진이 자랑스럽게 걸린 액자.

사진 속에는 안데르트 시절의 나와 라파엘로, 그리고 제국의 유일한 황녀였던 나타샤를 비롯해 총 영웅 7인이 술잔을 하늘로 향한 채 웃고 있었다.

대단한 뒷이야기가 있는 사진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대마법사 메피스토의 공세로 전선이 북쪽으로 밀리던 와중, 펍의 주인이 연합군의 사기를 높이는 용도로 찍어 간 사진이었다.

이런 사진으로 어떻게 사기를 높이려는 건지 의아했는데, 승전 후 신문을 통해 풀렸나 보다.

“내가 쟤야.”

“그게 무슨…….”

“열심히 굴러서 세상을 구했지. 그렇지만 너희 같은 놈들 설치라고 구한 세상은 아니거든.”

나를 보는 바텐더의 눈이 정신 나간 미친 하녀를 보는 눈으로 바뀌었다. 나는 탁자의 의자를 끌어와 앉은 후 물로 목을 축였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다고 했나? 잠깐만 내 이야기 좀 할게. 들어 줄 수 있지? 말이 조금 어색해도 웃어넘겨. 내가 말솜씨가 부족해서.”

“예? 아, 예.”

“나에게는 3년 안에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중요한 목표가 있어.”

“예.”

“그런데 아무래도 말이야.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저택 주변이 말끔해야 할 것 같아. 특히 너희 같은 애들. 누굴 말하는 건지 알지? 도둑놈들 말이야.”

“저, 저희는 도둑이 아닙…….”

“그 길목이 너희 거야?”

나는 도둑놈들을 스윽 훑었다. 다들 슬금슬금 내 눈을 피하느라 바빠 보였다.

“그 골목이 너희 거야? 대답 좀 해 봐.”

“아닙니다.”

“너희 게 아닌데 사용료를 받으면 도둑질 맞지. 너희 같은 도둑놈들 때문에 오늘 저녁은 맛이 없었어. 감자 상태가 고약했거든. 감자 상태가 고약한 이유는, 자릿세를 두려워한 상인이 골목길에 숨어서 장사했기 때문이야. 골목길은 눈에 띄지 않아서 물건이 오랫동안 팔리지 않아. 그러면 썩기 쉽겠지?”

“……예.”

“그러니까 자릿세가 없으면 감자 상태도 좋아질 거야. 신선한 식재료는 음식의 맛과 질을 살리지만, 질 나쁜 식사를 하면 병에 걸릴 수도 있어. 병에 걸린 사람은 운이 나쁘면 어떻게 된다? 머지않아 죽는다.”

“예.”

나는 바텐더 도둑놈을 가리켰다.

“요약해서, 너희가 자릿세를 받으면 나는 죽는다.”

“예. ……예?”

“그러니까 내가 죽기 전에 너희를 먼저 죽일 생각이야. 다른 말로는 정당방위.”

나는 그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이야기 끝. 누구부터 죽을래?”

도둑놈들의 안색이 희게 질린 건 당연지사였다.

누군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물론 나는 이들을 죽일 마음이 없었다. 폭력과 살인은 엄연히 다른 차원의 범죄이다. 둘 다 중범죄이기는 하지만.

그때, 나뒹굴고 있던 바텐더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겁에 질려 있던 눈이 어느덧 기세등등한 분위기를 풍긴다 했더니.

“우리 위에는 <베리드 렛>이 있소.”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건가.

바텐더는 흔들거리는 송곳니를 뽑아 내던지며 내게 삿대질했다.

“그러니 당신은 우리를 죽일 수 없소. <베리드 렛>은 당하면 배로 갚는 곳이니까! 우리의 목이 전부 잘리면 당신은 <베리드 렛>의 적이 될 테고,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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