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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8/195)

8화

다음 날 오전.

빨래를 걷기 위해 뒤뜰로 나온 나는 언뜻 보이는 정원의 풍경에 놀라고 말았다.

이틀 사이 웨더우즈 저택의 소정원은 꽤 그럴싸한 모양새를 갖춰 가는 중이었다.

첫날 이후로 특별히 업자가 다녀간 것도 아닌데, 죽은 풀은 전부 사라지고 물기 먹은 부드러운 흙으로 땅이 덮여 있었다.

‘이 저택에 들어오겠다는 목적 하나로 아무 일이나 떠맡은 줄 알았는데.’

요리 솜씨도 그렇고. 쓸데없이 잘하는 게 왜 저렇게 많은 거지, 더 수상하게.

마음을 뒤흔드는 미모를 떠올리려니 어젯밤의 감자 어쩌고 하는 전언이 떠올라 또 마뜩잖아졌다. 그 순간 삽을 들고 지나치는 루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마침 잘됐다는 듯 내게 손짓했다.

“이리로 오세요, 하녀 양.”

마음 같아서는 무시하고 싶지만.

‘어떤 놈인지 제대로 탐색하려면 어느 정도 교류는 해야겠지.’

나는 바구니에 빨래를 담다 말고 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내가 들어도 뚱한 음성으로 툭, 말했다.

“데이지.”

현관 계단에 등을 굽히고 있던 루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그런 그의 휘황찬란한 낯에 대고 재차 입을 열었다.

“내 이름.”

“……아아.”

루는 예의 그 습관과도 같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내 앞에 섰다.

“좋아요, 하녀 데이지 양. 사흘 만에 드디어 제대로 된 통성명을 하게 됐군요.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관계 진전이에요.”

무슨 말을 해도 다 비꼬는 것처럼 들린다면, 그건 말하는 사람의 문제일까 듣는 사람의 문제일까?

“이 화분을 그쪽에게 맡기겠습니다.”

나는 루가 내민 작은 고동색 화분을 엉겁결에 받아 들었다. 한눈에 봐도 질 좋아 보이는 촉촉한 흙이 가득 담긴 화분이었다.

“맡겨?”

“뭐든 좋으니까 화분에 꽃을 피워 보세요. 대신 옮겨 심는 건 금물. 모종이 아닌 씨앗부터 시작할 것.”

“내가? 왜?”

어이가 없어 되묻자, 루는 외려 당연한 걸 묻는다는 투로 답했다.

“궁금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에 대해서.”

그게 꽃이랑 무슨 상관인데?

“공교롭게도 내 정체는 아주, 몹시, 눈이 돌아갈 정도로 대단한 비밀이라서 말입니다. 누구에게라도 공짜로 알려 줄 마음이 없네요. 그런 의미에서 꽃 피우기 정도면 꽤 소박한 대가가 아닐지?”

나는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내 품에 안긴 화분을 바라봤다.

‘왜 하필 꽃이지?’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지금 그가 나를 가지고 장난치는 걸까.

‘이제 와서 굳이?’

이 화분은 루가 내 의심과 불신에 처음으로 보인 그럴싸한 답이었다. 첫날처럼 무시하지 않고, 답을 듣는 조건이랍시며 건넨 유일한 반응.

기분 나쁘다고 거절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일 수도 있었다.

“싫으면 500금.”

“……500금?”

“꽃 안 피우고 비밀 듣는 값입니다.”

이 사기꾼이 미쳤나. 500금을 어디서 구하라고? 그 거금이 땅 파면 나오는 줄 알아? 하녀로 100년을 일해도 못 벌 돈인데!

나는 화분을 두 팔로 꽈악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피울 거야.”

“잘 생각했어요.”

“약속 지켜.”

다정하게 웃은 루가 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가 보인 미소 중에 가장 가볍고 또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그래요, 하녀 데이지 양. 무슨 꽃을 피울지 기대할게요.”

열받는 자식.

루의 너른 등을 흘겨보다가, 화분을 원래 자리에 내려놓고 다시 빨래를 걷으러 갔다.

일단 루를 조사하는 건 잠시 멈추기로 했다.

그의 정체를 파헤치는 걸 포기한 게 아니었다. 단지 한 발자국 물러섰을 뿐.

결론적으로 하녀장의 말대로 당분간 지켜보는 게 가장 나은 수라고 판단했다.

나에게는 루에 관해 뒷조사할 사람이나 자금이 없었고, 당사자 역시 쉬이 입을 열 성격이 아니었으며, 손쉽게 제압해서 강제로 입을 열게 할 상대도 못 됐다.

‘게다가 수상하다는 것도 심증일 뿐이지. 당장 무슨 짓을 벌인 것도 아니잖아.’

이 이상 루에게 신경 쓰는 건 정신력 낭비이며 시간 낭비다. 일단은 집사 암살자와 협력하는 정도로 만족하자.

하녀 일에도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졌으니, 이제 디안 케트의 유물과 관련된 정보를 모으는 것에 집중해야겠다.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니까.

“빨래 다 챙겼나요, 데이지 양?”

“네.”

“정리는 내가 할 테니 식재료를 사 오세요. 필요한 재료 목록과 돈은 주방에 두었어요.”

“네.”

나는 저택을 나오며 구입할 식재료를 확인했다. 달걀이 더해진 점을 제외하고는 저번과 동일한 목록이었다.

비록 이번에도 고기는 없었으나 크게 아쉽지 않았다. 루라면 필시 고기 없는 식탁도 든든하게 채워 줄 게 분명했다.

요리를 할 줄 안다는 것.

그 재능이야말로 루가 가진 유일무이한 장점이지.

시장에 들어가기 전, 좁은 골목 안쪽에 쭈그리고 앉아 칙칙한 채소를 파는 앙상한 노인 앞에서 멈추었다.

‘흠.’

영 좋지 않은 상태의 감자가 보였지만 나는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노인의 초라한 행색이 신경 쓰였고 요리사의 실력이 제법인 만큼 식재료가 조금 구려도 괜찮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감자 일곱 개.”

꾸벅꾸벅 졸던 노인이 두 눈을 번쩍 뜨며 나를 올려다봤다.

“으응? 아이고, 이제 손님이 오셨네.”

이 노인은 감자를 어느 정도 팔기 전까지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지.

“고마워요, 아가씨. 또 와요.”

노인은 앙상한 몸으로 내게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감잣값을 지불한 후 시장 쪽으로 걸음을 돌리며 개수를 확인했다.

‘하나, 둘, 셋……. 여덟.’

일곱 개가 아니라 여덟 개네. 노인이 감자 개수를 잘못 센 것 같다.

나는 감자 한 개를 돌려주기 위해 오던 길을 돌아갔다.

그사이, 나와 노인 말고는 텅 비어 있던 골목에 새로운 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쩐지 눈에 거슬리는 그림이었다.

“아이고! 이 할머니 드디어 돈 좀 버셨네.”

덩치 큰 세 명의 남자가 감자 팔던 노인을 둘러싸고 섰다.

가운데의 덩치 큰 남자가 노인을 향해 손바닥을 드러내 보였다.

“이리 주시죠.”

“이, 이보시게. 한 달만 기다려 달…….”

“상인 연합회 회비가 일주일 넘게 밀렸습니다. 이런 데서 숨어 판다고 안 받을 줄 알았어요?”

“연합회고 뭐고, 나는 소소하게 장사하는 노인네라 가입하지 않는다고 몇 번을…….”

순간, 남자의 다리가 제 바짓자락을 붙잡은 노인의 몸을 거칠게 걷어찼다.

앙상한 노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붙잡은 이마가 구두 굽에 찢겨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덩치 큰 남자는 동그랗게 굽은 노인의 등을 인정사정없이 짓밟았다.

“이놈의, 노인네가, 회비 낼, 여력이, 없으면! 장사를 접든가 우리 구역에서 꺼지든가 해야지!”

퉤! 바지를 턴 남자가 잘게 떠는 노인의 등으로 침을 뱉었다.

“됐고. 내일도 같은 시간에 받으러 올 테니 알아 두십쇼.”

그렇게 노인의 몇 안 되는 수입이 탐욕스런 손아귀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노인의 볼품없는 감자를 바라봤다. 스무 개도 넘지 않은 수. 그나마도 내가 여덟 개를 가져가 열 개 남짓 남았고, 두어 개는 파란 싹이 돋아 있었다.

이 노인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감자를 파는 이가 아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감자를 파는 이다. 한나절 내내 감자를 팔아 하루를 버티는 이이기도 했다.

저 앙상한 몸을 보라. 단 하루라도 감자를 못 팔면 노인은 굶다가 앓을 게 분명했다. 이틀을 못 팔면 노인은 움직이기도 힘들 테고, 사흘을 못 팔면 죽음의 문턱에 이를 수 있었다.

이 남자들은 결국 노인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길거리의 소유를 주장하면서.

“야.”

남자들이 나를 돌아봤다.

“뭐?”

나는 진심을 담아 그들에게 물었다.

“쓰레기통에서 왜 기어 나왔어?”

미간을 와락 구긴 대장 쓰레기가 뒤뚱거리며 다가왔다.

“이 미친 계집이 여기가 어디라고. 이봐, 행색을 보아하니 하녀 같은데. 뭘 믿고 깝죽거리는 거지? 앞으로 이쪽 길로는 걷지도 못하게 해 줄까? 응?”

나는 기세등등한 얼굴을 꼼꼼하게 살핀 후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잘 걸렸어, 친구들. 내가 요 며칠 스트레스를 꽤 받았거든.

곧장 손을 들어 대장 쓰레기의 얼굴을 가볍게 타격했다.

“컥.”

벽에 박혀 쓰러진 대장 쓰레기가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나는 멍하니 서서 넋을 빼고 있는 두 번째 쓰레기도 대장 쓰레기와 똑같은 꼴로 만들어 주었다.

“켁.”

그제야 정신 차린 세 번째 쓰레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잡을까 말까. 고민은 짧았다. 쫓아가는 대신 노인 옆에 쭈그려 앉아 대장 쓰레기의 품을 열심히 뒤적였다.

“오.”

한 다발의 지폐가 주머니에서 튀어나왔다. 이게 그 상인 연합회라는 곳에 강제로 가입돼서 지불해야 하는 회비인가? 사실상 자릿세나 마찬가지인 듯했다. 심지어 금액도 적잖았다.

“아가씨, 어서 일어나. 다른 놈들이 오기 전에 도망쳐야 해, 응? 어서.”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노인은 내가 두 명의 장정을 쓰러트린 것에 놀라면서도, 나를 일으켜 골목길에서 내보내는 데 급급했다.

피가 줄줄 흐르는 이마를 닦을 때마다 소매가 붉게 물들었다.

“아주 무서운 작자들이니 다시는 이쪽으로 나오지 마. 나 같은 늙다리야 죽어도 별일 없다지만, 아가씨가 나쁜 일에 엮이면 부모님이 무척 슬퍼하실 게야.”

팔을 붙잡은 주름진 손등이 아직도 잘게 떨고 있었다.

육체에 직접적으로 각인된 공포는 쉬이 잊히지 않는다.

나는 긴장해 뵈는 노인의 낯을 바라보다가, 쓰레기들이 밟고 바닥에 굴러 엉망이 된 감자를 툭툭 털었다.

이렇게 오늘 일을 넘어가게 되면, 오히려 이 노인 같은 이들이 다시 피해를 보게 된다.

쓰레기들의 사고 회로는 언제나 그랬다. 그들은 자신의 화를 약자에게 푼다. 자신들이 당한 일을 곱씹으며 폭력을 빌미로 자릿세를 올릴지도 모를 일이다.

피해자는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거고, 이 노인은 도시를 떠나게 될 것이다.

“할머니.”

“어서 도망치래도?”

“이 사람들이 어디서 지내는지 알아?”

의문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노인은 시장으로 향하는 포장도로 너머, 말끔한 외관의 1층 가게를 가리켰다.

『펍 피스 오브 랜드』

요주의 술집은 약자들만 괴롭히는 양아치들이 놀기에 적격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희한한 일이지.

내가 아는 한 제국에서 펍이란 그런 공간이었다.

고향과 사람을 위한 공간.

특히나 대마법사 메피스토의 영향권이었던 제국 남부에서, 펍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자경단의 본거지나 다름없었다.

펍에 모인 이들은 고향과 가족, 친구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전선에서 가까운 펍은 마을 자체적으로 힘을 모아 보급 역할을 맡기도 했다. 기억 속 그들의 모습은 자부심과 애환이 가득한 낯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인 연합회라.’

어쩌면,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꽤 쓸모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정보를 수집하는 면에서 말이다.

나는 바닥에 나뒹구는 감잣값을 노인에게 돌려주었다.

“내일은 장사 나오지 마. 세요.”

그리고 지폐 다발 일부를 떼어 내 노인의 손 안쪽에 구겨 넣었다.

“이마 상처 덧나기 전에 치료해. 세요.”

쓰러진 두 쓰레기를 골목길 안쪽 깊숙한 곳에 내버린 뒤, 지폐 다발을 가슴에 품고 다시 시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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