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95)

7화

나는 천천히 머리를 굴렸다.

기실, 4년 만에 나타난 퀸 섬의 생존자인 내가 국가의 감시를 받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실제 난민 보호소행을 거절한 후 내 뒤를 밟은 자들도 있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들은 한 달간 어떠한 접촉도 하지 않았고, 멀찍이서 지켜만 보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정확히는 내가 미드윈트리에 도착해 인력 사무소에서 면접을 본 후 더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거지가 되어 동냥으로 빵과 돈을 얻고, 묵묵히 미드윈트리에 도착해 하녀 일자리를 얻으려 하는 내게서 그 어떤 수상한 점도 발견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거기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공교롭게 같은 저택에 취직한 남자가 앞집으로 이사까지 오다니.’

우연이라기엔 너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타이밍이지 않은가.

어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만약 루가 나를 따라온 거라면 이거, 웨더우즈 자작을 노리는 것보다 문제가 더 커지는 건가?

‘아니. 외려 개인적인 소통만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웨더우즈 저택이라는 일자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다시 죽어라’라든지 ‘부활한 근원이 궁금하니 생체 실험 당해 줘’ 정도의 무모한 요구만 아니라면 수상한 자와도 대화할 용의가 충만했다.

‘일단 내 쪽에서 먼저 미끼를 던져 보자.’

말이 길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쪽지에 용건을 적기로 했다.

어제처럼 하녀장을 빌미로 도망칠 수 있으니 미리 선수 치는 게 낫겠지.

나는 하루 일과가 끝난 직후, 하녀장 몰래 루를 뒤뜰로 불렀다.

“미안합니다, 하녀 양.”

그런데 나보다 5분이나 늦게 나타나서 한다는 소리가.

“당신의 고백은 거절하겠습니다. 만난 지 이틀 된 여자와 교제할 만큼 운명적인 사랑을 추구하거나 망나니는 아니라서.”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루의 다분히 진보적인 상상의 나래가 더 무궁해지기 전에, 쥐고 있던 쪽지를 내던지듯 건넸다.

쪽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당신의 행보를 수상하게 여기고 있다. 나를 감시하는 임무를 받았거나, 웨더우즈 가문 탐색이 목적이라면 솔직히 밝혀라. 경우에 따라 협력할 의사가 있다.

당신이 의심스러운 근거.

• 나와 비슷한 시기에 웨더우즈로 취직함.

• 돈이 많은데 정원사 겸 요리사로 취직함.

• 급여는 심지어 반값. 직장은 가난한 웨더우즈 가문.

• 게다가 취직하자마자 앞집으로 이사를 옴.

결론. 루의 정체가 상당히 의심스럽다.』

차근차근 읽어 내린 루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걸 주려고 날 부른 건가요?”

“그래.”

루는 별 시시한 농담을 다 듣는다는 눈으로 웃었다.

“당신을 감시한다라……. 놀라운 수준의 자존감인데.”

누가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뒤뜰로 불렀다고 고백 운운하던 본인의 경우는 벌써 잊은 건가.

“어제는 나에 대해 묻더니. 오늘은 왜 이곳에 취직했느냐고 묻는군. 그게 이 쪽지의 요점, 맞습니까?”

“정확해.”

“한 번 말했던 것 같지만 건망증이 심한 우리 하녀 양을 위해 다시 답해 드리죠. 취미입니다.”

“안 믿어.”

“아하, 그렇군요. 아쉽네요. 그래도 당신 믿으라고 만든 취미는 아니니까.”

미련 없이 등을 돌릴 기세라 다급히 입술을 뗐다.

“내빼지 말고 속 시원하게 밝히는 게 어때? 나는 당신처럼 수상한 자가 이 저택에 머무는 게 마음에 안 들던 참이야.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줘서라도 쫓아내고 싶은 심정이니까 솔직히 불어. 목적이 나야? 아니면 웨더우즈 자작?”

너무 길게 말해서 혀 깨물 뻔했네.

애써 쪽지까지 적어 왔는데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와 마주하면 말이 길어지는 기분이라 심히 불편했다.

묵묵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던 루는 시선을 낮춘 채 제 손에 잡힌 쪽지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흠. 그래요……. 그 정도로 껄끄럽단 말이지. 뭐, 그 부분은 내가 상관할 바 아니고. 내가 왜 이 저택에 들어오게 됐는지 그렇게 궁금합니까?”

나는 온 진심을 다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해.”

“정말로?”

“정말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나는.”

그때였다.

뎅, 뎅. 저녁 7시를 알리는 괘종시계가 울렸다. 울리든 말든 뒷목을 빳빳이 든 채 루를 바라봤다.

그런 내 얼굴을 바라보며 생긋 미소 지은 루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걸음을 옮겨, 옆을 스쳐 지나갔다.

“어디 가?”

“퇴근합니다.”

뭐?

“칼같은 퇴근은 고용인의 기본 소양이죠.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네요. 하녀 양도 좋은 밤 보내길.”

설렁이며 손을 흔든 루가 뒤뜰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나는 해가 져 가는 노을 아래에 혼자 남게 되었다.

처음에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지만. 덕분에 조금은 지지부진했던 내 판단력에 가속이 붙었다.

‘그 암살자, 아직 루의 집에 남아 있으려나.’

이런 식으로 계속 답을 피한다면 나도 직접 움직일 수밖에.

일단 앞집에 몰래 숨어들어 가서 내부를 샅샅이 뒤져 봐야겠다.

그날, 해가 지고 자정이 넘은 새벽 시각.

나는 이틀 전 그러했듯, 담장을 넘어서 앞집 저택으로 건너갔다.

한데 그때와 달리 오늘은 1층과 2층의 창문이 단단히 잠겨 있어서 숨어 들어갈 구석이 요원해 보였다.

‘굴뚝이라도 타고 들어가야 하나?’

그즈음 저택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인기척은 정확히 주방으로 이어진 뒷문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마치 손님을 기다려 온 것처럼.

조심스럽게 움직였는데 알아챈 것일까. 뒷문 뒤쪽에 숨은 채 인기척을 죽이려던 찰나, 뒷문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그쪽이군.”

날 위협했던 그 암살자의 목소리였다.

문이 열리고, 얼굴을 완전히 드러낸 암살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의 외양을 확인한 순간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놀랄 것 없다, 하녀.”

너 왜 집사복을 입고 있어?

“주인이 말하기를, 딱 이맘때쯤 그쪽이 숨어들어 올 거라고 하더군.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뻔뻔한 암살자는 내가 자기 복장에 놀랐을 거란 생각은 못 한 모양이다.

“주인께서 당신을 만나면 이 말을 전하라 하셨다.”

루를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주인이야?

“무슨 말?”

“헛걸음할 시간에 감자 깎기나 연습하는 게 어떻습니까?”

“…….”

“라고.”

이가 좀 갈렸지만 참았다. 루를 만난 이래 그를 생각하면 항상 이가 갈려서 그런지 이제는 참는 것도 익숙했다.

“둘이 한패?”

애초에 둘이 한패였던 걸까?

내 물음에 암살자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한패냐고? 본인이 나를 이곳에 가두었단 사실을 벌써 잊었나 보군. 주인님의 말대로 건망증이 있는 건가?”

그딴 시시콜콜한 농담 따먹기까지 암살자한테 말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이곳에 자의로 남아 있는 거다.”

나는 암살자의 군더더기 없는 집사 복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네 차림을 보면 신뢰가 안 가.”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단순히 굴복했을 뿐이다. 약자가 강자에게 굴복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너는 모르겠지만 주인님은 아주 대단하고도 끔찍한…….”

영 좋지 않은 기억을 되새겼는지, 뒷말을 흐린 암살자가 굳은 표정으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후. 이 저택에는 고위 마법이 걸려 있다. 외부에서 저택 내부의 전경을 절대 확인할 수 없지.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길드의 감시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니, 나는 당분간 주인 밑에서 지내며 살길을 도모할 생각이다.”

저택에 그런 마법이 걸려 있었나?

‘고위 마법은 물론, 숙련된 암살자에게 공포를 각인할 정도의 실력자라는 거구나.’

역시 성급하게 몸의 대화를 하지 않길 잘했다.

나는 여인의 몸으로 돌아온 후 다시 검을 잡은 적이 없었다.

원래 몸도 익숙지 않은데, 익숙지 않은 몸으로 루 정도의 실력자를 상대하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일 테다.

“네 주인.”

“말해라.”

“너를 내게 보냈던 의뢰자일 가능성은?”

암살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처음엔 그런 생각을 했지. 하지만 글쎄, 모호해. 주인은 분명 웨더우즈 가문에 관심이 있다. 그렇지만 암살 길드에 의뢰해 웨더우즈 자작을 감시할 성정처럼 보이지는 않아.”

“…….”

“그쪽이라면 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거라고 본다. 주인님은…… 조금 특이하시니까.”

“특이한 게 아니야.”

“그럼?”

“이상한 거야.”

암살자의 입가에 처음으로 웃음이랄 게 걸쳐졌다.

“그래, 네 말대로 주인님은 수상하다 못해 이상한 분이다. 심지어 내겐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관심이 없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군. 나도 아직 주인님을 탐색하는 단계다. 아직 무어라 확언하기 힘들 만큼 오리무중이야.”

탐색이라.

보아하니 암살자는 날 속이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가 생존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건 자결 알약인 <자비로운 한 입>을 제거했을 때부터 눈치챈 사실이다.

살려 달라며 내게 매달리기까지 했으니.

그러니 암살자가 구태여 이 저택에 남은 이유도, 미지의 인물인 루를 탐색하는 이유도 모두 납득이 갔다.

“그럼 나와 거래해.”

“거래라니?”

“서로 탐색한 결과 공유하기.”

암살자는 퍽 놀란 눈으로 내 얼굴을 꼼꼼히 살피다가 한 박자 늦은 답을 뱉었다.

“이미 말했지만, 주인님은 그쪽이 오늘 밤 이곳에 숨어든단 사실을 이미 예측한 바다. 이런 대화라고 다르지 않을 거야.”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방식은?”

“일주일에 한 번. 이 시간, 이 장소에서.”

“알겠다.”

이건 꽤 쓸모 있는 소득이었다.

‘일과가 끝난 후 루가 어떤 수상한 짓을 벌이는지 알 수 있겠어.’

그가 오늘 일을 안다 해도 상관없었다.

내가 그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그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를 안고 웨더우즈 저택으로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암살자가 돌연 나를 불러 세웠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몸을 돌리자, 암살자는 이제껏 지은 표정 중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이불 빨래하는 팁이 있나?”

“…….”

“혼자 하려니까 너무 힘들어서 말이지. 손으로 꾹꾹 누르는 것보다 나은 수는 없는 건가?”

너는 명색이 집사면서 하녀 일까지 다 도맡아 하는구나.

측은지심이 든 나는 암살자에게 ‘이불을 손으로 꾹꾹 누르지 말고 발로 꾹꾹 누르라’는 팁 아닌 팁을 남긴 후 방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잠이 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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