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 끔찍한 이야기다, 끔찍한 이야기야…….
- 어우, 소름 돋아.
- 제 애미 이야기를 듣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걸 봐. 과연 황실의 핏줄이야.
- 내가 그랬잖아. 저 핏줄에는 뭔가 있다니까!
까르르, 웃어 대는 이들의 장난스런 속삭임에 루크가 눈을 감았다.
“궁이 어지럽다 했더니, 헛된 것들을 불러들였구나.”
앳된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그의 귀에 속살거리던 실체 없는 잡귀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천천히 그의 앞으로 걸어온 도로테아가 받아 온 정화수를 그의 옆에 내려놓았다.
“네 마음이 어지러우니 저들이 너를 괴롭히는 거지.”
“확실히 성가시군.”
“저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거야.”
매순간을, 살아 있는 이들에게 ‘없는 존재’로 취급되면서도 이곳에 남아 있을 만큼 삶에 미련이 가득한 것들이다.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세계의 질서를 깨트리면서까지 이곳에 남아야 할 만큼 절박한 자들.
“저들은 살아 있고 싶은 거야. 그러니 자신을 ‘인식해 주는’ 존재를 발견하면 괴롭혀 대지 않을 수가 없는 거지.”
짜증을 내든, 분노를 하든, 연민을 주든 간에.
적어도 자신이 이곳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지만 살아 있는 이들의 슬픔과 공포와 분노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면에서 이미 저들은 죽었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
이를테면 이제껏 네가 받을 상처를 염려하여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시종장이 황제에게만 고한 은밀한 대화를,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옮긴다거나 하는 것들이.
도로테아의 말에 루크가 줄곧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뭘 하는 거지?”
“헛된 것들의 짓궂은 놀림조차 쫓아내지 못하는 가여운 어린 양을 위해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해 줄까 하고.”
싱긋 웃은 그녀가 한 손에는 맑은 물을, 다른 손에는 잿물을 담가 천천히 주위에 흩뿌렸다.
품에서 꺼낸 소지를 세 장 태우고 다시 그의 주변을 돌기를 반복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루크가 입을 열었다.
“내 어미는 너와 같은 존재였나?”
담담하고도 짤막한 물음에 도로테아는 쉬이 답하지 않았다.
그의 주위를 두 번, 세 번 돌며 마지막 물 한 방울마저 모두 떨쳐 낸 그녀는 흥건한 바닥 위를 느리게 걷다 이윽고 자리에 앉았다.
약간의 기다림 후, 답이 돌아왔다.
“그랬더라면 오히려 그리 쉽게 죽이진 않았겠지. 나와 같은 재주를 타고나기가 쉬울 줄 아니? 그 정도의 그릇이라면 침을 질질 흘리며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 눈을 희번덕거렸을 거야. 죽여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도로테아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싱긋 웃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태어날 적 당산에는 벼락이 쳤고 온 천지가 나를 반기듯 진동했었단다.”
“…….”
“신어미는 나를 보고 눈을 뒤집을 만큼 내 그릇에 감탄했었지. 실제로도 나는 그 어느 대보다도 가문이 번성하게끔 만들었고.”
“물음 한 번에 자랑이 과하군.”
“어쩌겠니.”
도로테아가 애석한 듯 자신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저 사실을, 극히 일부의 사실을 언급했음에도 자랑으로 보일 만큼 대단히 타고난 것을.”
나는 잘난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잘난 거란다.
“한 가지는 확실하군. 내 귓가에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온갖 주의를 끌어 보려던 형체도 없는 것들보다는 네가 더 내 화를 돋울 줄 안다는 거.”
루크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던 그녀는 똑똑, 가볍게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밝게 답했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우드는 훅 밀려드는 익숙한 향에 자동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오랜 경험을 토대로, 그는 이것이 도로테아가 ‘제(祭)’를 지낼 때 으레 풍기는 향임을 눈치챘다.
“대체 궁에서 무슨 짓을 하는 게냐? 잊었나 본데, 너는 지금 지체 높은 후작가의 영애가 아니야. 몸을 좀 사리란 말이다.”
“좋은 일 해 주고 있었어. 얘가 잠을 잘 못 자는 것 같아 주변의 잡귀들을 걷어 내어 줄까 해서.”
자신의 의로움을 칭찬해 달라는 듯 으스대는 도로테아의 모습에 우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녀석이 대가도 없이 수고를 들일 리가 있나.
확실히 루크에게는 종종 관대하게 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가도 없이 남 좋은 일을 할 인물은 아니었다.
“그거야 나중에 들어도 될 일이니 넘어가고.”
우드의 눈이 어쩐지 유독 피곤해 보이는 루크에게로 향했다.
“한밤중에 아이의 눈앞에서 저 녀석을 데려가면 어쩌자는 겁니까?”
“…….”
“그 때문에 제 아들이 놀랐단 말입니다.”
정색하는 우드의 말에 도로테아가 볼을 부풀렸다.
“그리고 나가는 길에 창문은 좀 닫고 나가십시오. 제 아들 감기 걸립니다.”
“딸한테 너무하는 거 아니야?”
“네가 날 아버지로는 생각하고 있고?”
‘딸’을 향해 냉랭하게 되물은 우드가 곁에 앉아 테이블 위의 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말은 그리해도, 눈을 뜨자마자 바로 입궁하느라 고생한 듯했다.
“네가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였더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다. 이 궁에 얼마나 오랜 시간을 있든, 어떤 일들을 벌이든 간에.”
“…….”
“하이클레어 가문이 네 뒤에 있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너를 귀애하는 황제 폐하와 황자 전하가 계시니.”
잠시 뜸을 들이던 우드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새까만 머리카락에 낯선 이목구비를 가진 소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너는 고작해야 가문의 종기사인 내 딸일 뿐이야. 궁을 드나드는 것조차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해. 네 지금의 신분을 좀 자각하란 말이다.”
“아니, 이번에 난 정말 억울한걸?”
도로테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루크를 가리켰다.
“일방적으로 불려온 거야. 이쪽이 친 사고를 해결하라며.”
희한하게도, 평소라면 헛소리 작작 하라며 한마디 했어야 할 루크가 조용했다.
늘 과묵한 편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과묵한 황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처음으로 먼저 우드의 눈을 피했다.
그 순간 우드는 무언가 확실히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무슨 사고를 쳤다는 거냐?”
“음, 그게 말이야…….”
밀려드는 불안함에 찜찜한 목소리로 물은 그 순간이었다.
싱글거리며 막 답을 건네려던 도로테아 뒤로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 마침 왔으니 다 같이 모여 있을 때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지.”
기다렸다는 듯 문 앞까지 다가갔던 그녀가 별안간 문고리를 잡으려던 손을 멈췄다.
그러고는 드물게도 뒤를 돌아보고 허락을 구했다.
“그래도 될까?”
우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저 애가 고작해야 문을 여는 일에 허락을 구한다고? 누군가의 의사를 묻고 있어?
그 순간, 가만히 문을 바라보고 있던 루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그러고는 닫혀 있던 문을 열고서 그 앞에 선 늙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자신을 보고 얼어붙어 있는 황제를.
* * *
우드는 점점 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황녀는 아주 능숙한 손놀림으로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 차를 우려내어 찻잔에 따랐다.
물론 그것이 딱히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심신을 안정시켜 주는 차입니다. 부디 마시며 천천히 담소를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나치게 깍듯하고 익숙하게 다른 이들을 챙기는 것이, 윗사람이라기보다는 잘 훈련된 관리인 같아 보인달까.
“자, 경께서도 식기 전에 마시는 것이 몸에 좋습니다.”
싱긋 웃어 보이는 저 얼굴만 보아도 그랬다.
어린 황녀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연륜의 향기에 우드가 미심쩍은 얼굴로 찻잔을 들어 막 한 모금 머금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처음 보는군. 루크, 네가 데려온 아이더냐?”
“아, 아닙니다. 이 아이는 제가 데려온 아이입니다.”
“경이?”
방에 들어오고부터 줄곧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던 황제가 의외라는 듯 시선을 돌렸다.
우드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쩌다 보니 거두게 된 아이인데 황녀 전하의 말동무로 삼고 싶으셨나 봅니다. 전하께서 이 아이를 데리고 입궁하라는 명을 내려서…….”
횡설수설 내뱉는 대로 꺼낸 변명에 루크는 부정하지 않았고, 도로테아 또한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차를 들이켜고 있었다.
우드의 말에 황제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렇군. 황녀를 위해…… 네 양녀를 위해 말동무까지 준비했던 것이로구나.”
또다시 무거운 침묵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이해할 수 없을 만치 어색하고 숨 막히는 분위기에 우드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황자가 데려가 버린 자신의 사고뭉치 딸내미를 데리러 왔더니, 황제가 방문을 하질 않나.
황녀는 애늙은이처럼 찻잔을 쥐고서 향을 음미하고 있질 않나.
심지어 분위기는 마치 장례식장에라도 온 것처럼 축축 늘어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성실하고 가여운 기사가 최선을 다해 눈치를 보는 사이, 버나드가 대접한 차를 비워 낸 도로테아가 찻잔을 내렸다.
그녀는 온화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버나드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마셨어요. 이 궁에는 그리 자주 드나든 것도 아니었는데 제 취향을 기억해 주셨었군요.”
버나드는, 어린 황녀의 얼굴을 하고서 다정하게 소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어디에 계시건 늘 공허한 얼굴을 하는 황자 전하께 처음으로 인간 같은 얼굴을 하게끔 만든 분이 아니십니까. 저야말로 늘, 언젠가 한 번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자 했습니다.”
“…….”
도로테아의 말도, 어린 황녀의 말도 수수께끼투성이였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저거, 힐데가 아니로군.’
이마를 짚은 우드가 재빠르게 황제를 살폈다.
놀랍게도 황제는 두 소녀의 괴상한 대화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찻잔을 내려 보고 있었다.
마치, 다른 일로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뱉어 내셨다면, 이제는 가야 할 길로 향해야 할 때로군요.”
도로테아의 말에 그제야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든 황제가 의아하게 물었다.
“어디를 가야 한다는…… 누구에게 하는 말이더냐?”
“그 누구에게도 차마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안고서 오랜 세월을 견디어 낸, 저분을 향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도로테아가 가리키는 방향을 본 황제가 미간을 좁혔다.
아직까지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 도로테아는 제법 친절하게 말을 꺼냈다.
“듣자 하니 제국의 오랜 역사에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던 인간들이 종종 나타났었다 하더군요. 아마 폐하께서는 황녀 전하께서 신의 힘을 빌어 과거의 편린을 본 것이 아닌가 싶으셨던 것 같지만.”
“…….”
“물론 아니지요, 폐하. 옛 인물들의 사정까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황녀 전하의 육신에는 다른 누군가가 자리하고 있는 것뿐이랍니다.”
“누굴, 말하는 건가?”
“오랜 시간 황궁에 머무르며 황자 전하가 없는 궁을 지켜 온 사람이지요.”
눈을 끔뻑이던 황제의 얼굴에 서서히 경악이 서렸다.
그제야 황녀가 처음 대화를 시작할 때, ‘시종장의 죽음’을 언급한 것을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말도,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성녀가 아니냐. 어찌 다른 영혼이 저 육신에 들어설 수가 있어!”
“신의 힘을 받을 만큼 강건한 그릇이기 때문이지요. 맑고 거짓이 없는 육신이기에 원한다면 그 무엇이라도 실을 수 있는 겁니다.”
황제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던 버나드가 공손히 고개를 숙여 송구함을 전했다.
“이리 소란을 피울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생의 마지막 순간 황자 전하를 뵙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뿐인데 눈을 뜨니 평생을 머물렀던 궁에 와 있었지요. 돌아오는 순간을 마중할 수 있어 다행이라 여겼는데, 또 육신을 얻으니 평생 담아 두었던 말을 꺼낼 용기가 나더군요.”
창백해진 얼굴의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버나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무례라면 차고 넘칠 만큼 저질렀으나, 한 번만 더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여전히 아득한 정신을 겨우 붙잡고 있던 황제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러도록 하라.”
생전 처음 보게 된 광경에, 처음 듣게 된 충격적인 이야기까지.
무엇 하나 그의 정신을 위태롭게 하지 않을 것이 없었으나, 황제는 제법 잘 버티고 있었다.
‘하기야 오랜 세월을 저 높은 곳에서 버틴 셈이니.’
그 정도의 강건함은 가지고 있었겠지.
흐릿한 미소를 띠고 있던 버나드가 이윽고 말했다.
“황자 전하께서 태어나고 이토록 장성하실 때까지. 폐하께는 여러 차례, 선택의 순간에 놓이셨지요. 그리고 선택을 하셨습니다.”
“…….”
“황자 전하를 연민하는 마음이 없었다거나, 애정이 존재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늘 그분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지요.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황제의 흔들리는 눈이 차분하고 담담한 루크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의 장성한 아들을.
“지금 폐하께서는 또다시 선택의 순간에 놓이셨습니다. 어쩌면 이제껏 덮어 두었던 진실을 파헤칠 수 있는 길과, 조용히 다시 덮어 두는 길.”
“그건…….”
“어느 쪽을 선택하실지, 그 답을 여쭈어 봐도 괜찮겠습니까.”
황제가 주름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달싹이는 입술 새로 당장이라도 황자를 위해 진실을 밝히겠다, 큰소리를 탕탕 칠 수도 있었지만 저 굽은 등의 주인은 그리 말하지 않겠지.
저렇게 등이 굽을 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무겁게 짊어지고 있었으니까.
이단 재판을 두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성국을 향해 검을 겨누는 일과 같았다.
지금의 제국이 과연 성국을 상대할 수 있을까.
동맹국들의 반응은 어찌할 것인가.
제국 내의 신실한 신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한 번의 약속에 고려해야 할 수많은 것들이 그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도로테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늙은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다정한 미소를 띤 채, 그를 향해 속삭였다.
“폐하께서 짊어진 무거운 ‘책임’ 탓에 ‘아버지’로서의 선택이 어려우신 거라면, 이제 그만 저 아들을 버려 주세요.”
어차피 한 번도 잡아 준 적 없는 손이 아니었던가.
아들을 버리는 것이, 그나마 그가 할 수 있는 선택 중의 가장 쉬운 길이었다.
책임은 져 주지 않으면서 의무만 지웠던 무정한 아비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늙은 황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제 와서 아들을 택할 수 있을까.
그가 이제껏 아버지이기를 포기하면서 지켜 낸 것들을 손에서 놓아 버릴 수 있을까.
“루크, 나는…….”
목 메인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부른 황제가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루크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이리 될 줄 알았다는 듯이.
도로테아는 미세하게 흔들리는 좁은 등을 다정하게 토닥이며 황제를 달랬다.
“괜찮아요, 폐하. 아드님은 상처받지 않으셨어요. 왜냐하면, 폐하가 한 번도 저 황자 전하의 아버지일 수 없었듯이, 그도 폐하의 아들이 아니었으니까요.”
처음부터 무엇 하나 시작되지 않은 관계였으니, 없는 관계가 무너지거나 끊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도로테아의 말은 매정했지만 사실이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드님을 위해 진실을 밝히고 성국이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수작질을 단죄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요.”
“누구 말이냐?”
황제가 잠긴 목소리로 묻자 도로테아가 자신을 가리키며 환히 웃었다.
“바로 루크를 거두고 이제껏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 준 삶의 이정표와 같은 존재가 바로 여기 있지 않나요. 저는 제 사나운 양을 위해 울타리를 쳐 주고, 먹이를 주고, 정성껏 길러 줄 자신이 있답니다.”
“…….”
“그러니 제게 분양하세요.”
저 양을 데려가 잘 돌보겠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소녀의 말을 들으며 미간을 좁힌 황제의 눈에 별안간 습기가 멎었다.
아들을 버리면 자신이 주워 가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는 조그마한 당찬 소녀의 얼굴에 누군가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고개를 든 황제의 눈에 망했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우드 데버가 보였다.
그가, 누구의 기사였던가.
“설마…….”
황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도로테아를 바라보자, 마치 답을 알려 주듯 그녀의 어깨에 앉아 있던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
소녀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그리고 황제는, 그 미소를 아주 많이 보고 겪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