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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239화 (238/242)
  • 239화

    “오늘따라 햇살이 참 따사롭군요. 이른 아침부터 참으로 수고가 많아요.”

    소심하고 수줍은 성격 탓에 먼저 말을 거는 일이 없던 황녀가, 심지어는 정중한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을 때 주방장은 당황한 나머지 들고 있던 파이를 떨어뜨렸다.

    역사를 가르치던 교사는, 이미 오래전 사장된 야사들을 줄줄 읊는 황녀의 지식에 기함했으며, 그녀의 시중을 들던 시녀들은 옷을 갈아입는 내내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황녀의 행동에 의아해했다.

    결과적으로, 황궁의 사용인들 사이에 ‘황녀가 별난 행동을 한다.’는 소문이 도는 데에는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계셔 달라 부탁드렸잖아요. 티 나지 않게요.”

    파비안의 다급한 속삭임에 버나드는 허허, 웃으며 수백 번도 더 건넨 사과를 또다시 건넸다.

    “그것 참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다 보면, 새로운 것을 접하거나 배우는 기회가 없다 보니 신이 났었나 봅니다. 허허.”

    느긋한 버나드의 말에 파비안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 말씀하시지 말라니까요. 그리 웃지도 마시고요.”

    “음,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멋쩍은 듯 이마를 긁적이며 건네는 사과에 파비안이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나마 예법 선생이 저인 것만은 다행이네요.”

    “다음 일정은요?”

    줄곧 별말 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도로테아의 물음에 파비안이 답했다.

    “황녀님께서는 늘 폐하와 오찬을 함께하시죠. 아무래도 오늘은 무리일 듯싶지만요. 감기 기운이 있으시니 궁에서 따로 식사를 하겠다고 말씀을 드리면 이해하실 거예요.”

    “아뇨.”

    그 순간이었다.

    줄곧 싱글벙글한 얼굴로 마치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듯, 느긋하고 여유롭게 굴던 버나드의 목소리에 단호함이 깃들었다.

    “네?”

    파비안의 의아한 되물음에 버나드가 싱긋 웃었다.

    “폐하와의 오찬이라니, 좀처럼 오지 않는 기회가 아닙니까. 궁의 녹을 먹는 자로서 생에 다시 오지 않을 무한한 영광이지요. 그러니 식사 정도는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지만…….”

    파비안은 흘끗 아무 말 없는 도로테아를 바라봤다.

    소녀는 여전히 딱히 해 줄 말이 없다는 듯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잠시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겼던 파비안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식사만 한다면요. 폐하께서도 워낙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니, 어차피 그리 긴 시간 함께하시진 못할 테고요.”

    설마하니 그 짧은 시간에 무슨 대단한 일이 벌어지진 않을 테니까.

    찜찜한 속을 달래며 고개를 끄덕이자, 버나드는 만족한 듯했다.

    도로테아는 제 것도 아닌 몸에 들어앉아 의뭉스레 시간을 보내는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지금쯤, 자신을 데리러 온 우드가 황궁의 정문을 통과했을 터였다.

    *   *   *

    오찬 장소로 향하는 동안에도 파비안은 버나드에게 최선을 다해 그가 유의해야 할 사항들을 일러 주었다.

    “황녀님께서는 그리 식사를 오래 즐기시는 편이 아니고, 주로 소화하기 쉽고 담백한 음식들을 좋아하세요. 쓰고 향이 강한 것들을 좋아하지 않으시고요.”

    “네.”

    “혹시 폐하께서 모르는 일을 물으시거든, 그냥 수줍은 척 입을 꾹 닫으시면 돼요. 제가 곁에서 대신 답을 할 테니까요.”

    “……식사 내내 함께하실 예정인가요, 파비안 영애?”

    “그럼요. 그러니 염려하실 것 없으세요. 웬만한 상황은 모두 제가 수습할 수 있으니까요.”

    제법 믿음직스런 말이었지만 버나드는 어쩐지 그녀의 말에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황녀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시종장의 그런 태도를 눈치채지 못한 파비안은, 긴장한 스스로를 다잡으며 만찬장의 문을 열었다.

    “어서 오너라. 늦었구나.”

    인자한 황제의 목소리에 버나드가 방긋 웃으며 그의 곁으로 향했다.

    평소와는 달리 여유가 흘러넘치는 소녀의 태도에 황제의 얼굴이 의아함이 서렸다.

    당연한 듯 그녀를 따라 들어온 파비안을 힐끗, 올려다본 버나드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강녕하셨나요, 폐하?”

    뜻밖의 인사에 황제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어제도 보지 않았더냐? 하루 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으려고.”

    “벼, 별궁에서! 어마어마한 소리가 들리다 보니 놀라신 탓에 걱정되어 안부를 물으시는 겁니다!”

    파비안의 재빠른 변명에 황제의 얼굴에 흐뭇함이 서렸다.

    그의 양손녀는 비록, 지나치게 수줍음을 많이 타는 데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성녀로 발현된 만큼 타인을 생각하는 이타심이 넘치는 아이였다.

    “오냐, 나는 괜찮단다.”

    파비안이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 순간 얌전히 있겠다던 버나드의 입이 다시 열렸다.

    “오늘 만찬은, 부디 폐하와 둘이서 하고 싶어요.”

    “응? 그리하고 있잖느냐?”

    윌리엄이라면 항의성 방문을 한 신관을 상대 중일 테고, 루크는 연금되어 있으니.

    버나드가 빙긋 웃으며 만찬장 양옆으로 늘어선 사용인들을 훑으며 말했다.

    “폐하와 비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요.”

    그렇게 속삭이는 아이의 목소리가 자못 짓궂게 들렸다.

    평소와는 다른 태도를 보이는 소녀의 말에 황제가 눈을 끔뻑이자,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파비안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 아니 될 말씀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만찬장에 시중을 들어 줄 사용인들 없이 어찌 단 두 분이서…….”

    “허허. 나와 단둘이 식사를 하고 싶다?”

    “네.”

    수줍게 웃어 보이는 황녀의 모습을 한 버나드를 보던 파비안이 경악했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린 소녀의 흉내를 제대로 내지 못하던 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천진난만한 소녀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연기했어?! 연기한 거야?’

    그녀의 방심을 끌어내기 위해서?

    경악한 파비안이 무어라 대응하기도 전에,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황제가 손을 들어 발언을 차단했다.

    “그만. 아이가 나와 둘이서 식사를 하고 싶다 하니, 모두 잠시 물러가 있지.”

    “하나, 폐하.”

    아무리 그래도 만찬장에 황제를 홀로 둘 수 없는 근위대장의 망설임에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문 밖에서 대기하게. 이곳에는 어차피 다른 출입구도 없지 않나.”

    입을 뻐끔거리던 파비안은 이 이상 소리 높여 반대해 봤자, 자신만 이상한 인간 취급당하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만찬장을 떠나는 사용인들의 틈에 섞여 밖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느긋하게 상황을 관망하고 있을 도로테아를 찾았다.

    ‘도로테아 영애, 큰일 났다고요!’

    아무래도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우리 황녀님의 몸을 차지할 생각인 것 같아요!

    *   *   *

    “네가 먼저 독대를 청할 줄은 몰랐구나.”

    황제의 온화한 목소리에 미지근하게 데워진 수프를 떠먹던 버나드가 싱긋 웃었다.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자리가 있기를 소망했으니까요.”

    “음, 그래. 우리 황녀가 무슨 말을 하고팠을꼬?”

    버나드는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황제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이런 얼굴도 보일 줄 아는 분이셨던가.’

    먼발치에서나마 버나드가 보았던 그의 얼굴은 늘, 바늘 하나 들어갈 틈조차 보이지 않는 냉랭한 얼음장 같았는데.

    본인의 자식에게는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던, 무조건적인 애정의 시선. 그것을 핏줄도 아닌 이 어린 소녀에게는 차고 넘칠 정도로 건네어 주고 있었다.

    ‘세월에 유해지신 건가. 아니면 자식들에게만 지나치게 강경하셨던 건가.’

    어느 쪽이든 간에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언젠가 한 번은 살아 숨쉴 적에 저런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아들을 자랑스러워 마지않는 황제의 얼굴을.

    “7황자 전하의 궁을 지키시다 돌아가신 시종장님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폐하.”

    멈칫했던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랜 기간 궁에 충실했던 인물이었지. 나는 그 충심을 높이 사 그의 가문에 친히 추도문을 보내고, 훈장도 추서했단다.”

    “그분의 가문에는 잘된 일이네요. 명예를 드높였으니, 다른 귀족들이 부러워하겠지요.”

    차분하게 답한 버나드가 느릿하게 물었다.

    “다만 이로써 7황자 전하께서는 마지막 사람마저 잃으신 거네요. 지금 그분은 그 궁에, 마지막까지 곁을 지키던 시종장마저도 잃고 홀로 계시는 거겠죠?”

    “……사용인들을 내보낸 것은 그 아이의 선택이었지만, 그래. 먼 곳에서 돌아온 마당에 명색이 황자의 궁을 그리 두어서는 안 되겠지.”

    황제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신경 쓰였더냐? 그래도 네 아버지라서?”

    “외로우실 테니까요. 의외로 외로움을 아주 많이 타시는 분이시라서.”

    “괜찮을 게다. 그 녀석이라면. 알아서 잘 커 왔으니.”

    버나드는 아직 한참 남은 음식 접시를 슥 밀어낸 채 나직하게 말했다.

    “그 어느 아이도, 알아서 잘 크지는 않아요. 폐하.”

    “…….”

    “하나뿐인 자식이 궁에서 의지할 마지막 사람마저 잃었다는데 어째서 폐하의 대답은 보러 가겠다가 아니라 궁을 관리할 사용인들을 보내겠다, 는 걸까요?”

    어린 황녀의 말은 명백하게 힐난의 뜻을 담고 있었다.

    주저 없는 곧은 눈을 마주한 황제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여전히 폐하께서는 그분께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시군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황녀의 말에 황제의 미간이 좁아졌다.

    생각해 보니 황녀는 지금처럼 대화를 이끌 만큼 붙임성이 좋은 아이가 아니었다.

    그런 아이가 먼저 독대를 청한 것부터가 이미 평소답지 않은 일이었건만.

    그제야 자신을 바라보는 차분한 시선에서 이질감을 느낀 황제가 경계하듯 물었다.

    “너, 정녕 힐데가 맞느냐?”

    버나드는 차분히 스푼을 내려놓고 예의 바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제게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폐하. 자초지종을 설명드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만큼의 여유는 허락되지 않을 듯싶습니다.”

    그러니 다급한 마음에 제대로 된 예조차 갖추지 않고, 가장 중요한 말부터 먼저 늘어놓는 것을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를 바랄 뿐이지요.

    버나드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을 보고 있는 황제에게 입을 열었다.

    “이미 오래전 드렸어야 할 말을, 이제야 올리는 것을 부디 용서해 주시기를.”

    “용서라니.”

    “폐하, 7황자 전하께는 죄가 없습니다.”

    짤막한 말에 황제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설마하니 무겁고 거창하게 말을 꺼낸 까닭이 제 아비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었나?

    “무슨 말을 하는 게야. 루크는 어제 별궁을 날리고, 성국의 사도를…….”

    “그리고 7황자 전하의 생모이신, 엘로이즈 님께도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녀가 결코 알아서는 안 될 이름을 입에 올린 순간,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그가 포크를 떨어뜨리자, 요란한 소리가 만찬장을 메웠다.

    소란을 들은 사용인 중 하나가 문을 두드리자, 황제의 성난 목소리가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다들 내가 명을 내리기 전까지는 들어오지 말라!”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놀란 듯 바깥이 숙연해졌다.

    버나드는 황제가 좀 더 진정되길 기다렸다 다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늘, 7황자 전하를 곁에서 멀리하셨습니다. 장성한 형제들로 하여금 그분을 견제하지 않게 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으셨겠으나, 그보다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그분을 거부하셨기 때문일 겁니다.”

    “그만.”

    “폐하에게는 그분의 존재가 수치스러우셨을 테니까요.”

    “그만하라!”

    황제가 벌게진 눈으로 버나드를 노려봤다.

    이를 부득, 가는 소리가 적막한 만찬장을 울렸다.

    줄곧 외면하고 꾹꾹 담아 두기만 했던 이름을 듣자 숨이 막혀 왔다.

    어린 황녀의 모습을 한 버나드는 평온한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늙은 황제를 바라봤다.

    “지금 네가 얼마나 지독한 신성 모독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게냐? 그녀는…….”

    “폐하께서는 정말로 본인이 마녀의 미약에 홀려, 그분에게 끌리신 것이라 여기십니까?”

    “뭐라?”

    “그분은 다정한 분이셨습니다. 다정하고, 상냥하고, 더없이 애정이 충만한 분이셨지요.”

    황제의 얼굴이 고통스레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그만하라는 말이 나올 듯 벌어진 입을 보며 버나드가 말을 이었다.

    “그 당시 폐하께서는 지칠 대로 지치신 상황이었습니다.”

    “…….”

    “끝도 없이 서로를 견제하는 자식들. 마음을 주고받을 가족이 아니라, 정치적 협력자인 동시에 정적이기도 한 궁의 여인들. 폐하께 쏟아지는 무수한 책임과 넘치는 골칫거리들.”

    신분이 부족하면 어떤가.

    마음을 붙일 데 하나 없는 외로운 자리에서 유일한 위안이 되어 주었던 인물인데.

    욕심이 과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점이 황제가 그녀에게 이끌린 이유였을 터.

    “5황자 전하께서는, 당시 그분을 몹시 싫어하셨지요. 저는 이해합니다. 어린 연치에 아버지의 애정다운 애정을 받는 여인이 싫을 수 있지요. 하물며, 생모도 아니었으니까요.”

    버나드가 이미 죽은 5황자마저 언급하자, 황제가 눈을 질끈 감고 반박했다.

    “설령 당시의 고발이 5황자의 질투와 시샘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 죄가 없었다는 건 아니다. 이단이었단 말이다. 그녀의 처소에서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교리가 적힌 기도문들이 나왔고, 지니고 있던 물건들 또한……!”

    “그 정도는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성국에서 온 이단심문관이 직접 그녀를 마녀로 지목했네!”

    황제가 버럭, 소리를 높였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두 눈을 가린 채 탄식했다.

    “그리고 그녀가 죽던 날 밤, 피로 쓰인 저주의 문구 그대로 5황자가 죽었어.”

    황제도 인간인 만큼 손가락을 깨물어 더 아픈 손가락이 있었을지는 모르나, 자식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토록 참담한 형태로, 온몸이 꺾인 채 죽은 5황자를 두고 자신이 품은 여인이 마녀가 아니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 엘로이즈의 죄를 기록하지 않는 조건으로 성국의 얼토당토않은 조건까지 수락해야 했지. 그래야 7황자, 그 아이는 연좌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거기다 더해 혹여나 화를 입을까 궁에서 멀리 떨어트려 놨다.”

    끊임없이 자신에 대한 의심과 자책이 그를 뒤흔들었다.

    그 누구보다도 더 강건하고 명료해야만 하는 그가 정말 마녀에 홀렸다면.

    일개 사술에 홀려 그 여인의 아이를 낳은 것이라면.

    “살아 돌아올 수 없으리라 여겨지는 전장에서도 번번이 살아 돌아와, 인간 같지 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를 미워하지 않으려 애썼단 말일세.”

    “인간이기를 가르치지 않으셨는데, 어찌 인간의 눈을 하시겠습니까. 전하께서 가장 먼저 배우신 것은 살아남는 방법뿐이었습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전장에 머무르며 상대의 목숨을 앗아 자신의 생명을 근근이 이어 가는 삶을 살아왔는데 어떻게 다른 형제들과 같은, 인간의 눈을 할 수가 있나.

    사람으로 기르지 않았는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겠지.

    침묵하던 황제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와서 이런 해묵은 이야기를, 더 이상 그 어떤 이에게서도 나와서는 안 될 이야기를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때 당시의 심판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확신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으신지요, 폐하.”

    “……?!”

    “줄곧 의심해 왔던 사실이 있습니다. 명확한 증거도 없이 이단 재판의 평결을 뒤집을 수 없음을 알기에 입을 다물었지만, 어쩌면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릅니다.”

    버나드의 말에 황제가 경악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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