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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238화 (237/242)
  • 238화

    “저기, 사라.”

    스탠은 기분이 저조한 여동생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그리엄과 함께 외출을 할 때만 하더라도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돌아온 후에는 식사조차도 하는 둥 마는 둥 거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까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잖아. 달콤한 케이크라도 한 조각 먹는 건 어떨까?”

    조심스런 권유에 도로테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허기라면 충분히 달랬어. 걱정하지 마.”

    “그렇지만…….”

    걱정스레 여동생을 바라보던 소년이 말꼬리를 흐렸다.

    소년의 걱정을 모른 척하던 도로테아는 고개를 들고 불쑥,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오빠는 믿었던 상대가 자신을 속였다면 어떨 것 같아?”

    믿었던 상대가, 나를 속여?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한참을 고민하던 스탠이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슬프겠지. 상처받을 테고.”

    “그럼, 상대가 날 속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무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해?”

    한층 발전된 질문에 스탠이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어린 소년을 고뇌에 잠기게 만든 도로테아는, 정작 평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스탠이 풀 죽은 얼굴로 답했다.

    “잘 모르겠어.”

    딱히 답을 듣고 싶어 던진 질문이 아니라는 듯, 벽에 기댄 그녀가 중얼거렸다.

    “알면서도 모른 척 속아 주고 싶을 만큼, 진실이 너무 가혹해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냥 나를 모른 척하는 것이 당신의 최선이었나.

    “사라,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스탠이 답답한 듯 여동생을 향해 물었다.

    소녀는, 불안한 듯 흔들리는 오빠의 눈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바로 그때,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열렸다.

    창을 넘어 들어온 서늘한 바람에 소년의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도로테아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창문을 열고 들어선 불청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서서히 불쾌감이 서렸다.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미리 줄 수는 없어도, 들어오기 전에 창을 두드리는 정도의 예의 정도는 지켜 줄 수 없어?”

    최소한 나는 곧 갈 테니 상 차려 놓으라는 말 정도는 전달해 둔다고.

    어두운 그림자 아래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인영을 본 스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 황자 전하.”

    놀란 스탠과 달리, 도로테아는 팔짱을 낀 채 그를 훑어 내렸다.

    궁에 얌전히 틀어박혀서 현실 도피나 하고 있어야 할 겁쟁이가 여긴 웬일이래.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이곳까지 온 것을 보면, 무언가 제법 큰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아니나다를까, 도로테아 앞으로 다가온 루크가 말했다.

    “궁으로 가 줘야겠다.”

    “미안하지만 그럴 기분 아니야. 다른 날 다시 찾아와.”

    도로테아가 불퉁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루크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네가 그럴 기분이든 아니든, 너는 나와 가야 해.”

    나직한 말은 부탁이라기보다는 협박에 가까웠지만, 소녀는 겁을 먹기는커녕 짜증스레 황자를 향해 쏘아붙였다.

    “글쎄, 네가 날 여기서 데려갈 수는 있고? 내가 가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리면,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이 저택의 담을 넘는 것조차 어려워. 아니, 더한 벌을 받겠지. 죄를 짓고 연금된 상태에서 이곳을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차라리 황제 앞에 가서 죽여 주십사 비는 것이 더 낫지 않겠어?”

    “…….”

    “입 다물고 얌전히 돌아가 잠이나 자라는 뜻이야.”

    여동생의 매운 빈정거림에 스탠이 숨을 들이 삼켰다.

    아무리 함께 지내며 친해졌다 해도 황자 전하께 너라니.

    울상이 된 소년이 소심하게 옷을 잡아당기자, 도로테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잠시 말없이 서 있던 루크가 이내 입을 열었다.

    “네가 필요해.”

    “유감이네. 나는 네가 필요하지 않아. 넌 이제 가진 것이 없는데, 무엇으로 날 사려고?”

    이제까지의 거래에는 늘 상응하는 대가가 주어졌다.

    자신의 호적마저도 내준 루크가, 이제는 무엇을 내어 줄 수 있을까.

    어색하게 주먹을 폈다 쥐었다 반복하던 황자가 툭 내뱉었다.

    “도움을 청할 사람이 너뿐이야.”

    나직한 말에 도로테아가 슬쩍 고개를 들어 황자를 훑었다.

    늘 사납기 짝이 없던, 괘씸한 가축이라고는 하나 막상 꼬리를 내린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죽을 자리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면서도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해 본 적 없었을 남자였다. 그런 그가 밤중에 이곳까지 와서 굽힐 때에는 정말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겠지.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이 스르르 아래로 내려갔다.

    도로테아의 눈에서 미약한 짜증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루크는, 혹시 소녀의 마음이 바뀔 새라 재빠르게 움직였다.

    “어, 어?”

    조그마한 소녀를 달랑 들어 올려 옆구리에 낀 그가 어버버 하고 있는 스탠에게 나직이 말했다.

    “잠시 빌려 가지.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창문을 넘어간 황자가 소리없이 후작가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두 눈 멀쩡히 뜨고서 여동생이 납치되는 것을 본 스탠이 그 자리에 굳었다.

    뒤늦게 인기척을 감지한 우드는 확인차 방에 들렀다, 망연한 얼굴로 소리 없이 눈물을 글썽이는 아들을 발견했다.

    “황자 전하께서 사라를 납치해 가셨어요…….”

    우드는 황자가 아이를 납치해 갔다는 소식에 어이가 없어 열린 창문을 바라봤다.

    ‘저택의 담을 넘어 애를 데려갔다고? 이 밤중에? 후작가의 경비도 뚫고?’

    어이가 없으려니.

    기가 막힌 얼굴로 아이의 등을 두드리던 우드는, 훌쩍이던 스탠을 조심스레 떼어 놓고는 찬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을 닫았다.

    행여 황자가 돌아와도 같은 창문을 이용하지 못하게 잠궈 버린 그는, 이윽고 커튼을 닫아 안이 보이지 않게끔 꼼꼼히 가렸다.

    “아, 아빠?”

    소년은 자신을 번쩍 들어 침대에 눕히는 우드의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좀 전에 사라가 납치되었다고 말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창문을 닫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기까지 하고 있었다.

    토닥토닥.

    두드려 주는 손길에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스탠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사라는요? 사라를 데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

    “내일 아침에 가는 것이 좋겠다. 한밤중에 남의 거처를 방문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란다. 원래 누군가를 만나려거든 꼭 사전에 약속을 정하거나 미리 방문을 알리고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상식이란다. 물론, 해가 뜬 시간에 해야 하는 거고.”

    조곤조곤, 다정한 목소리로 아들에게 타인의 집에 방문했을 때의 예절을 가르친 우드가 평온한 얼굴로 아이의 눈을 감겼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괜찮다. 성질이 더럽고 상식이 부족하긴 하지만 네 동생에게 해가 될 만한 인물은 아니야.”

    오히려 어느 쪽이냐면 늘 도로테아에게 휘말리는 쪽이지.

    “네 동생도 그래. 정말 싫으면 반항했을 게다.

    조용히 잡혀 간 것을 보면…….

    ‘납치라기보다는 합의성 야반도주에 더 가깝지 않을까.’

    우드는 여전히 불안한 듯 어쩔 줄 모르는 아들을 토닥이며 연신 다정하게 중얼거렸다.

    “큰일이구나. 자고로 아이의 성장은 주변의 환경과 직결된다던데.”

    하필이면 보고 배워서는 안 될 인간들을 곁에 두고 있으니.

    ‘조만간 교류할 만한 적절한 친구를 마련해 주어야겠어.’

    아버지의 고민은 깊어져 갔다.

    물론 침입을 허용한 후작가의 사병들을 어떻게 갈궈야 할까, 라는 고민도 있었지만.

    *   *   *

    팔짱을 낀 도로테아는 다소곳한 자세로 차를 마시는 힐데, 아니, 버나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래서?”

    냉랭한 목소리에 파비안이 움찔했다.

    “여기 있는 아이는 어쩌다 이 꼴이 됐지?”

    “그, 그게…….”

    “내가 파비안, 당신에게 이 아이를 맡긴 것은 오늘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끔 만들란 뜻이었는데.”

    입술을 달싹이던 파비안이 이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입을 꾹 닫았다.

    도로테아는 루크가 있는 방향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조곤조곤 짚어 주었다.

    “가뜩이나 음기가 가득한 궁에 제 발로 찾아가서, 거기에 머물던 지박령의 진명(眞名)을 열심히 불러 댔다니. 훌륭하네.”

    “어떻게 되돌리지?”

    “간단하지. 강제로 꺼내면 그만이야. 단.”

    “…….”

    “그릇에 들러붙은 잡귀가 온전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루크의 눈이 도로테아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녀는 그의 따가운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이의 의식이 너무 숨어 버렸다가는 골치 아파질 테니 그 전에 정리하는 것이 낫겠어.”

    그녀의 말에 파비안이 조심스레 루크를 살폈다.

    황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착 가라앉은 눈으로 도로테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 누군가가 차를 홀짝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소녀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늙은 시종장이 그 주인공이었다.

    도로테아가 지칭한 ‘잡귀’가 그라는 사실을 못 알아들었을 리도 없을 텐데.

    새로운 삶이 열릴 길로 가지 못할 만큼 미련을 한가득 안고 있었던 것에 비해, 의외로 온화하고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온전하지 않다면, 어찌 된다는 거지?”

    “최악의 경우 소멸 정도일까?”

    짤막한 말에 루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이미 한 차례 ‘소멸’의 순간을 본 적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소멸 직전 흐릿하고 애달픈 혼의 마지막 흔적을 보았었지.

    그 어떤 삶의 흔적도, 내생의 기약도, 아주 작은 조각조차 이 세계 어디에도 남지 않는 완전한 소멸.

    루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껏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감추고 있던 힐데의 입이 열렸다.

    정확하게는, 버나드의 입이.

    “일이 이렇게 되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늙어서 쓸데없는 미련과 고집이 남아 모두를 곤란하게 만들었군요.”

    인형 같은 소녀의 모습을 하고 노인의 말투로 말을 꺼내니, 영락없는 애늙은이로 보였다.

    버나드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한숨을 쉬었다.

    “다음 생이라든가, 하는 이야기들은 생소하지만 죽어서도 궁에 머물렀고 산 자의 몸에 이렇게 들어오기까지 했으니 새삼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군요.”

    “소멸되면 그 무엇도 의미가 없을걸.”

    “어쩔 수 없지요. 그렇다고 해서 어린 황녀님을 곤란하게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빙긋 웃어 보인 버나드가 눈을 감았다.

    도로테아는, 미련이 가득 남아 이곳에 있었으면서도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웃고 있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멸하지 않게끔 떼어 내는 방법은 없나?”

    “글쎄, 저자의 미련이 사라지면 알아서 육신에서 벗어날 테지.”

    “미련…….”

    흘끔흘끔 눈치를 보고 있던 파비안이 조심스럽게 버나드를 향해 물었다.

    “남은 미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고개를 갸웃, 거리고 생각에 잠겼던 버나드가 앳된 목소리로 진지하게 하나하나 지난 삶을 손에 꼽아 가며 되짚었다.

    “글쎄요. 이 나이를 먹고 나니, 오래전 사랑했던 이의 얼굴조차도 가물가물합니다. 애틋한 감정들도 이제는 오래된 추억이 되어 그저 예쁜 사진첩처럼 남아 있을 뿐이지요. 자식들은 장성하여 자신의 삶을 살고 있고…….”

    버나드의 눈이 루크에게로 향했다.

    “다만, 황자님이 마음에 걸렸으니 그것이 제 유일한 미련이지요.”

    “…….”

    “텅 빈 궁에 홀로 머무시는 것도, 여전히 곁에 사람을 두지 않으시는 것도, 서툴러 어린 황녀님을 아끼시면서도 밀어내시기만 하는 것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네 바람을 이야기하라는 뜻이야.”

    팔짱을 낀 채 건넨 도로테아의 말에 버나드가 머쓱한 웃음을 단 채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이면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아가씨와 가정을 이루셨으면 좋겠습니다. 황녀님과도 솔직한 대화를 나누며 정말 부녀 사이처럼 오순도순, 잘 지내셨으면 하고요. 폐하와의 사이에도 더 이상의 오해와 언쟁은 없었으면 하지요. 행복해서,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게 살다 어느 날 고통 없이 삶을 떠나시길…….”

    “잠깐만요.”

    훈훈한 버나드의 말을 듣고 있던 파비안이 아찔한 얼굴로 말을 끊었다.

    “그건 그러니까…….”

    믿을 수 없이 더듬거리며 말을 꺼낸 그녀가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황자님께서 만수무강,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을 보고 싶으시다는 거죠? 황자님이 돌아가실 때까지요?”

    그럼 설마, 그때까지 우리 황녀님의 육신에 머물러 계시겠다는 뜻인가요?

    경악에 물든 그녀의 물음에 도로테아가 루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는데?”

    “…….”

    난감한 얼굴로 웃고 있는 시종장, 그러니까 힐데의 얼굴을 한 시종장을 보던 루크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   *   *

    날이 밝아 오자, 파비안은 퀭한 눈으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창문을 바라보다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조심스레 물었다.

    “황녀님?”

    “황녀님이 아니라, 송구할 따름입니다.”

    버나드의 정중한 말에 그녀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도로테아는 그런 파비안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날이 밝는다고 해서 빠져나갈 망령이었으면, 애초에 문제가 될 리도 없죠.”

    “알아요. 그래도 혹시나 했죠.”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린 그녀가 흘끗, 루크를 보고 입을 열었다.

    “이대로 이곳에 머물 수는 없어요. 이제 곧 황녀님의 일과가 시작될 거고, 폐하께서도 식사자리에 함께하실 테니까요. 애초에 연금된 궁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곤란한 일이어서요.”

    “일단은 돌아가서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도록.”

    “저, 분하고요?”

    파비안의 말에 버나드가 빙그레 웃으며 팔뚝을 걷었다.

    “이래 봬도 소싯적에 머리가 좋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습니다.”

    “그게 언제죠?”

    “한 오십 년 전이었던가, 육십 년 전이었던가. 시간이 지나니 영 기억이 가물가물하군요.”

    강산이 바뀌고 제국의 연호가 바뀔 만큼의 세월이었다.

    그 소싯적에 배우던 것들은 이미 사장된 지 오래일 텐데.

    파비안이 불안한 얼굴로 버나드를 바라보자, 루크가 나직이 말했다.

    “최대한 입을 다물고 튀지 않게 행동하고 있도록. 적어도 수가 생길 때까지는. 꼬투리 잡힐 일이 없어야 하니까.”

    “예, 그리하겠습니다.”

    대화를 듣고 있던 도로테아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우드 데버가 오는 대로 돌아가. 홀로 돌아갈 수 있을 테지만, 귀찮다고 할 것 아니냐.”

    “어머나, 돌아가도 돼?”

    의아하다는 듯 과장된 목소리로 묻는 말에 잠시 침묵하던 루크가 짤막하게 답했다.

    “무엇에 그리 뿔이 난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 당장 해결해 줄 생각이 없지 않나.”

    도로테아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담담하게 대꾸한 루크는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다는 듯 다른 방으로 향했다.

    홀로 남은 도로테아가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제법 눈치가 좋아졌네.”

    성질머리는 여전하지만, 어젯밤 매달리던 것을 보아하니 숙이는 법도 어느 정도 알게 된 것 같고.

    나름대로 성장했다고 보아야 할까?

    픽, 웃던 도로테아가 이내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다른 쪽이었다.

    “그래서, 우리 시종장님이 황자님께 들키고 싶지 않은 미련이라는 것이 대체 뭘까?”

    그의 말마따나 이토록 삭막한 궁에 홀로 남아 있어야 할 만큼, 강하게 남겨 둔 미련이.

    그녀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황궁의 정원을 내려다보며, 황궁 주변을 득시글거리는 잡귀들을 훑었다.

    “어지간히도 버리기 힘든 것이었나 보지.”

    부디 여기 이 잡귀들처럼 미련에 머무르다, 인간이었던 기억조차 잊어버리지는 말아야 할 텐데.

    *   *   *

    불안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하룻밤 사이 확 달라진 황녀는, 황궁에서 일하는 이들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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