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주근깨가 촘촘히 박힌 소녀를 마주한 그리엄의 얼굴이 굳었다.
기도원에 머무는 여인들의 차림새가 화려할 리 없다는 것쯤이야 알지만, 그것을 감안해 봐도 이 평범한 소녀가 후작 영애일 리 없었다.
“나는 후작 영애를 뵈러 왔다고, 분명 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만.”
“저는 영애 곁에서 시중을 드는 제인이라 합니다.”
꼿꼿이 고개를 든 제인이 다소곳한 목소리로 답했다.
오랜 교육의 결실일까, 치기 어린 하녀의 모습은 어디 가고 귀족 가문의 사용인다운 기품까지 느껴졌다.
“영애는, 언제 만날 수 있소?”
“송구하지만 아가씨께서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금하고 계십니다. 기도를 올리는 동안은 그리하기로 신께 맹세를 드렸으니까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천연덕스레 말을 지어 내는 제인의 말에 그리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로테아는 자신 앞에서 자연스레 ‘도로테아’를 언급하는 제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부스럭대던 제인이 품에서 서신 한 통을 꺼냈다.
어젯밤, 도로테아가 필립을 통해 미리 전달해 두었던 서신이었다.
“대신 이것을 경께 남기셨습니다.”
분노 어린 눈으로 제인을 노려보던 그리엄이 거칠게 서신을 낚아챘다.
도로테아는 서신을 훑어 내리는 그리엄의 시선이 의아함에서 놀라움, 그리고 천천히 경악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힐끗 거리며 지켜보았다.
“이게, 사실인가?”
“저는 서신의 내용은 모릅니다만, 설마하니 아가씨께서 허튼 소리를 하실까요. 그분은 절실한 마음으로 자신을 찾는 이의 매달림에 장난으로 답할 만큼 가벼운 분은 아니시랍니다.”
턱을 치켜든 제인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서려 있었다.
그리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서신의 내용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눈치였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혹, 주드라는 자를 아는가? 오래전 도로테아 영애에게 도움을 받았다던데.”
“어머, 그럼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제인이 친절히 답해 주었다.
“콜린 경의 저택에 의탁하고 계시는 분을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요? 그가 데려온 어린 따님이 지금은 황궁의 귀한 분이 되셨는걸요.”
“……!”
“지금도 만나뵐 수 있을 거예요. 콜린 경의 저택으로 간다면.”
그리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제인이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콜린 경께서는 저택에 손님을 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원하신다면 제가 아가씨의 허락을 얻어 소개장을 써 드리겠습니다. 경에게 도움을 드리라고요.”
“고맙군.”
어찌나 정신이 없었던지 데려온 아이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홀로 성큼성큼 옆방으로 가 버린 그리엄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 제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가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깍듯한 경어에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였다.
제인은 다정한 얼굴을 하고 그녀에게 다과상을 밀어 주었다.
“잘 드시지 않아 걱정했어요, 아가씨.”
이건 좀 놀라운데.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과자를 하나 집어 든 검은 머리칼의 작은 아이는 한 입 작게 베어 물며 제인을 관찰했다.
자신의 어린 하녀는 본디 헌신적이고 귀엽긴 했지만, 딱히 보는 눈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아가씨를 한두 해 보는 것도 아닌걸요. 일을 꾸밀 때면 꼭 직접 나서시잖아요. 어떤 형태로든 와 계실 줄 알았어요. 설마하니 그런 모습을 하고 계실 줄은 몰랐지만.”
시침을 뚝 떼고 모른 척할 수도 있었다.
어차피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렇지만 도로테아는 사실을 부정하는 대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졸지에 이리 답답한 기도원에 가둬 두어 미안하게 되었어. 다들 널 귀찮게했을 텐데.”
“괜찮아요. 한적하고 할 일도 없어 좋은걸요. 아가씨를 위해 기도드리는 것도 좋고요.”
“……그래, 이곳에 있으면 그래도 안전할 테니까.”
바깥에 어떤 풍파가 있든 간에.
이 작은 기도원은 비교적 고요하고 잔잔하게, 태풍을 견디어 낼 테니.
“그저 제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억해 주시고, 가끔 들러 주시면 좋겠어요.”
“글쎄, 이 모습으로는 곤란하지 않을까 싶은데.”
대외적으로 우드의 양녀라는 신분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접점도 없는 제인을 보려면 한밤중에 기도원에 숨어들어야 했다.
물론 그랬다가는 이 충성스런 하녀는 밤마다 기도원을 쓸고 닦고, 멋들어진 다과상까지 준비해 주인을 기다릴 테지.
매일 밤 잠을 설쳐 가면서.
“그렇지만 그 모습을 하고 다른 분들은 잘만 만나셨잖아요. 심지어 아까 아가씨인 것도 밝히지 않고 그냥 돌아가시려고 하셨으면서.”
입을 삐죽이는 제인에게 도로테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지 않니. 괜찮아. 너만 모르는 것도 아닌걸.”
“그래도 주인님께서도 알고 계시는 일을…….”
“주인님이 알고 계시다니?”
“모른 척하지 마시라니까요. 저도 다 알아요.”
의기양양한 얼굴로 답한 제인이 커다란 상자를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
“아가씨께 안부를 묻는 서신들이요. 매월, 매주마다 이렇게 잔뜩 오는걸요. 잠시 황도와 연합군의 소식이 끊겼을 때를 제외하면, 꾸준히 오고 있어요.”
저택의 식구들이야 진작 도로테아의 가출을 알았으니 보냈을 리 없고.
나머지는 대개 연합군에 합류했던 에이든과 후작, 데인, 벤의 것인가.
서신을 훑어보던 도로테아의 손이 멈칫했다.
“밖에 큰 혼란이 있을 때 잠시 서신이 끊기긴 했었죠. 그래도 후작 각하와 에이든 경께서 꼬박꼬박 보내는 서신을, 데인 도련님과 벤 주인님만 보내지 않는 건 이상하잖아요.”
아가씨가 여기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면요.
“설마하니 주인님께서 꼬박꼬박 보내던 서신을 잊으셨을 리도 없고요.”
제인의 말에 서신들을 뒤적이던 도로테아의 손이 멈칫했다.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일렁이던 새까만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도로테아는 목구멍을 넘어 튀어나오려던 말을 고집스레 꾹꾹 누르며 한숨을 삼켰다.
자신을 향해 다정히 배웅하던 에이든 뒤로 외면하던 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를 모른 척 지나치던 벤이.
* * *
아무리 황제의 명으로 연금당했다고는 하나, 7황자의 궁은 놀라울 정도로 적막했다.
궁을 관리해야 할 필수 인력마저 모조리 정리해 자금을 확보하고, 그 자금을 죄다 병사들에게 뿌렸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원이야 미관의 이유를 들어 가끔 윌리엄이 정리해 준 듯했지만, 그도 차마 궁 안까지 손을 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먼지로 뒤덮인 복도를 걷는 루크의 뒤로, 희끗희끗한 머리를 가진 노인이 허리를 굽혔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궁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제 책임입니다.”
“분명 떠나라 했을 텐데. 어째서 이곳에 남아 있었지?”
시종장이 천천히 허리를 펴고 온화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긴 황자 전하의 집입니다. 돌아오실 때 반길 사람 하나 없으면 되겠습니까.”
“봉록도 받지 못했을 텐데.”
“퇴직금이라며 두둑이 챙겨 주셨잖습니까. 그것으로도 평생을 놀고먹을 수 있습니다.”
느릿하게 걷던 루크가 어느 초상화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반쯤 잘려 나간 여인의 초상화는, 그의 어머니가 아닌 유모의 것이었다.
오래전 그녀의 배반을 눈치챘을 무렵 그녀를 ‘처리’하면서 이마저도 망가뜨려 버렸지.
그때. 전장에서 돌아온 황자가 별안간 유모를 끌어내어 목을 치자, 궁에 있던 사용인들 모두가 공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사람의 목숨을 개만도 못하게 여기는, 살육에 미쳐 버린 황자.
그날의 일 이후로, 궁을 자주 비우는 황자를 무시했던 사용인들 대부분은 루크 곁에만 가도 벌벌 떨고 어쩌다 실수라도 하면 납작 엎드려 빌곤 했다.
그 때문에 루크가 황궁의 유지비를 줄이고자 궁을 떠나라 명했을 때, 그 누구도 망설이지 않았건만.
“남아 있어 봤자 네게 좋은 일 같은 건 없을 거다. 난 궁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아.”
어차피 좋은 기억도 없는 장소였다. 머물러야 할 이유도 없고.
황자라는 신분조차도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윌리엄이 황위를 물려받고 나면 아예 황도에서 내보내 달라고 청할 참이었다.
두 번 다시 이곳으로 오지 않아도 되게끔.
그 무엇도 남기지 않을 요량이었건만.
이 늙은이는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황폐한 궁에 남기를 자청했나.
빙긋 웃은 시종장이 황자에게 답을 주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셔도 사람 일이라는 것이 참 모를 일이잖습니까. 혹여 돌아오셨을 때 머무를 거처가 없어 남의 궁에 신세를 지게 된다면, 황자 전하를 모셨던 저로서는 참으로 참담한 일이지요.”
“…….”
“단 한 번이라도, 들르게 되실 일이 있으면 반겨 주는 이가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필요 없다니까.”
“안 그래도 삭막한 궁을 데우는 것이 고작 늙은이라 탐탁지 않으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어여쁜 아이들을 모조리 겁주어 쫓아내셨으니까요. 기왕 타고나신 헌헌한 외양을 어찌 그리 낭비하시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헛소리.”
늙고 나니 오만 잔소리를 하는군.
싱글거리는 시종장의 말에 코웃음을 친 순간이었다.
뒤늦게 연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궁을 찾은 윌리엄이 루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루크.”
진지한 얼굴로 다가온 윌리엄은, 자신에게 공손히 예를 표하고 있던 시종장을 그대로 통과했다.
마치 공기라도 되는 양.
그 순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던 시종장의 모습이 옅어졌다.
“…….”
윌리엄은 동생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뒤쪽을 노려보자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먼지가 잔뜩 쌓인 통로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루크?”
허공을 노려보던 루크가,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을 뗐다.
“누군가, 이 궁을 지키고 있었나?
“응?”
“예전에 전장으로 나가기 전…… 모두 내보냈는데 묘하게 사람 손을 탄 것 같아서.”
짤막한 물음에 윌리엄이 기억을 더듬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서슬 퍼런 명에 궁을 나갔던 시종장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었지. 말년에 갈 곳도 없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으니 궁을 지키는 일이라도 하겠다고.”
“지금은?”
루크의 나직한 물음에 윌리엄이 망설였다.
그나마 동생이 제일 오래 얼굴을 봤던 사람일 것이다. 숨이 다할 때까지는 궁을 지키다 가고 싶다던 그의 말에 폐하께서도 내심 흐뭇해하셨었지.
‘그의 죽음을, 알려야 하나?’
이미 잃은 사람들이 산더미 같을 텐데.
머뭇거리는 윌리엄의 반응을 본 루크가 질문을 바꿨다.
“궁에서 죽었나?”
죽음을 확신하는 어투에 윌리엄은 차마 거짓말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궁으로 돌아올 때부터 이미 건강한 상태는 아니었어. 늙고 허약해진 몸에, 독한 열병이 겹치면서 손쓸 틈도 없이 숨을 거둔 거라…….”
“장례는?”
“폐하가 그의 헌신을 높이 사신 덕에 제법 예를 갖춰 치러졌지. 가문에 치하도 내리셨고.”
루크의 눈이 쓴웃음을 짓고 있는 시종장을 향했다.
그제야 대화를 나누는 내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나치게 창백한 낯빛이라든가, 투명한 손끝이라든가.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이라든가.
말없이 생각에 잠긴 루크를 보던 윌리엄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만족한 삶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아마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그랬더라면 여기에 남아 아무도 없는 궁을 빙빙 맴돌고 있지는 않겠지.
오가는 이 하나 없는 이 궁에 줄곧 홀로 있었던가.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자신을 기다리며.
“만일 내가 죽어 돌아오지 못했더라면.”
이 어리석은 노인은 이 궁에 매인 채 돌아오지도 않을 황자를 한없이 기다렸을 것이다.
궁의 주인이 바뀌고, 황실의 계보가 바뀌고, 언젠가는 제국이 지는 날이 올 때까지.
“루크?”
잠시 숨을 멈춘 듯 그 자리에 있던 루크가 몸을 돌렸다.
“돌아가.”
저벅저벅 걸어 방으로 향한 황자는 문을 닫았다.
한참을 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던 윌리엄이 돌아선 후에도, 닫힌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 * *
인기척 하나 없는 서늘한 궁을 찾은 것은 조그마한 소녀와 그녀를 보필하는 귀족 영애였다.
파비안은 먼지 쌓인 궁의 내벽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아무리 벌을 받고 연금되어 있는 상태라고는 하나, 명색이 제국의 황자가 머무르고 있는 궁이 아니던가.
이토록 엉망인 관리 상태라니.
‘폐하께서 뒤늦게 본 막내아들을 천덕꾸러기 취급한다는 사실이야, 모르는 이가 없긴 했지만.’
심지어 사교계에서도 루크는 늘 비웃음거리였다.
그가 전장에서 어떤 공을 세우고, 무위를 떨쳤든 간에 그는 황제의 눈밖에 난 자식이었으니까.
‘기껏 황궁에 머물던 무렵에도 연회나 무도회 같은 곳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고.’
검을 휘두르는 법만 배우느라 예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거라고, 그리 말하며 깔깔거렸었지.
그녀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곳에 모여 황자를 비웃는 자들이 누리는 평화가, 그의 검에서 나온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로.
“정말 여기 그분이 계시는 걸까?”
“아마 그럴 거예요. 건물 입구에 폐하께서 보낸 기사들이 있었으니까요.”
성녀를 앞세워 들어온 궁은 적막 그 자체였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는 내내, 황녀는 겁먹은 듯 파비안 옆에 찰싹 달라붙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돌아가자는 말은 끝내 하지 않으시네.’
내심 7황자와 마주하는 일이 껄끄러웠던 파비안이 한숨을 삼켰다.
이 조그마한 황녀는 겁이 많은 동시에 고집이 강했다.
“궁이 너무 춥고 어두운 걸. 이곳에 계시면 감기 걸리실 것 같은데…….”
걱정스런 힐데의 말에 파비안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전하께서는 건강하신 분이니 아마 괜찮을 거예요.”
두런두런 말을 나누며 복도를 거닐던 그때였다.
끼이이-.
굳게 닫혀 있던 복도의 문이 열리고, 무표정한 얼굴의 황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제법 조잘거리던 어린 황녀는 그 자리에서 굳어 꿈쩍도 하지 못했다.
파비안이 서둘러 예를 갖췄다.
“전하를 뵙습니다. 힐데 님께서, 전하가 돌아오셨음을 알게 되었음에도 미리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신다 하여…….”
“한밤중에, 앞을 지키던 기사들조차 제치고?”
“…….”
“어리석은 짓을 했군. 어린아이의 변덕에 휘둘리라고 너를 붙여 놓은 것이 아니다. 오늘과 같은 무모한 짓을 하지 못하게끔 하라는 뜻이지.”
루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냉랭한 말에 힐데가 움찔거렸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아이라도, 환영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조그마한 손을 잡고 있던 파비안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송구합니다. 그러나…….”
“귀하디귀한 성녀가 나와 어울리는 꼴을 폐하께서 좋아하실 것 같나?”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그의 말에 파비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힐데를 달랬다.
“우선 궁으로 돌아가셔서 폐하의 허가가 떨어진 다음 뵙는 것이 좋겠어요. 아무래도 전하께서는 폐하의 명을 어기신 것이 걱정되시는 모양입니다.”
아직, 한마디도 채 하지 못했는데.
힐데가 고개를 축 늘어뜨린 그 순간이었다.
방으로 돌아가려던 루크가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기도를 통해 기적을 일으켰다고 하던데.”
조그마한 머리통이 반짝 위로 들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서늘한 눈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네게 성력이 있는 건가?”
데굴데굴 눈을 굴리던 힐데는 파비안이 미처 만류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그 힘을 먼저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양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었으니까.
이름을, 그녀가 불릴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이니까.
프란체스코가 그 이름은 아주 훌륭하고 대단한 것이라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했으니까.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힐데를 본 루크가 나직이 말했다.
“그럼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나?”
“전하, 그게 대체 무슨…….”
미간을 좁힌 파비안이 황자를 향해 다시금 질문을 던지려고 했지만, 루크의 말이 빨랐다.
“버나드 피셔. 그 늙은이가 부디 평온한 잠에 들 수 있게끔 기도해 준다면 좋겠군.”
처음 듣는 이름에 힐데가 나직이 되뇌었다.
“버나드 피셔, 버나드, 버나드…….”
그 순간이었다.
황궁을 배회하던 늙은 시종장의 혼이 ‘그릇’의 부름에 끌리듯 응답해 버린 것은.
희끄무레한 영체는 손쓸 틈도 없이 힐데가르트의 몸을 향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