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힐데를 바라보던 스탠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의아할 정도로 놀라는 오빠의 반응에도 도로테아는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고서 감겨 있던 부적을 천천히 풀어냈다.
매끈한 피부 위로, 묘한 문양 같은 것이 떠올랐다.
희미하고 흐릿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품에서 꺼낸 재를 물 잔에 넣어 잿물을 만든 그녀는, 잠시 그 물에 담갔던 손을 꺼내어 기묘한 문양 위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째서 그들이 로헨 왕국을 거점으로 삼게 되었는지 까닭을 몰랐는데 나중에서야 알겠던걸.”
로헨 왕국은 험한 산이 많아, 인간의 손에 개척되지 않은 토지가 많았다.
산맥 사이사이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완벽한 음택(陰宅), 흔히 말하는 명당이 갖추어졌으니, 자연스레 정기를 탄 인간도 많이 나올 수밖에.
왕국에서 정령사가 많이 배출된 것은 그 까닭일 터였다.
“특히나 그 동네 왕족 혈통이 별나긴 해서 말이야.”
천천히 손을 떼자, 흐릿했던 문양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스탠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지만 영문 모를 행동을 하고 있는 여동생을 만류하려 들지 않았다.
도로테아는 등 뒤에 있는 오빠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대를 걸러 몇 번은, 다른 이들보다 쉽게 ‘열리는’ 육신을 타고난 왕족이 나오는 모양이야.”
열리는 육신이라는 것은, 그것만 놓고 보자면 그리 특별하고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릇도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그 용도가 달라지지 않던가.
타고난 그릇이 강건하여 무엇이든 담을 수 있을 만큼 유연하다고 한들, 평생을 평범한 인간으로 생을 마치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그러나 같은 재능과 같은 힘을 담아도 쉽사리 깨지는 인간이 있는 반면, 타고난 육신은 그 재능을 온전하게 펼칠 수 있는 기초가 되어 줄 수는 있는 것이다.
“나는 딱히 그 무능한 국왕이 그걸 알고서 이 아이를 빼돌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이 소녀가 유년 시절 받았던 멸시와 방치를 생각해 보면.
아무도 그녀의 존재를 쉽사리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지워진’ 존재였기에 오히려 살아남아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일 테지.
“무슨 짓을, 당한 거야?”
“그치는 이 그릇에 좀 더 훌륭한 것을 담고자 했어. 태어나기를 아주 강건한 그릇으로 태어났는데, 왜 이런 어리고 평범한 인간을 담아야 할까, 라고 생각했겠지.”
“…….”
“그러니 육신에 있던 혼을 빼앗고, 이 안에 새로운 신을 불러들이려 한 거야.”
힐데의 가냘픈 몸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부적으로 가려 놓았던 먹잇감이 모습을 드러내자, 삿된 것들이 스멀스멀 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스탠은 마치 나뭇가지가 창을 두드리듯, 아무것도 없는 창이 흔들리는 것을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살아남은 기사는, 하나뿐인 왕녀를 데리고 도망쳐 내게로 왔어. 이미 반쯤 먹힌 아이를 살려 달라면서 말이야.”
사라로서 말을 하는 건지, 도로테아로서 말을 하는 건지.
뒤죽박죽 섞인 말에도 스탠은 의문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그저, 몸을 들썩이는 힐데를 바라보다 외면하기를 반복했을 뿐.
“나를 찾아왔을 때 혼과 육신의 연결은 이미 헐거워져 있었어. 애써 다시 끼워 맞췄다고 해서, 완벽하게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지는 않으니까.”
“지금은?”
“응?”
들썩이는 몸을 지전으로 쓸어내리는 도로테아를 향해 스탠이 나직하게 물었다.
“지금은, 어떤데?”
“그 어떤 신명도 들지 않았지만, 그 어떤 신명이라도 깃들 수 있는 그릇이 되었지.”
그것이 조상신이든, 산신이든, 혹은 이름조차 없는 잡신이든 간에.
몸에 깃들어 있는 탁기를 떨쳐 낸 도로테아가 다시 낙인 위로 손을 뻗었다.
마치 불나방처럼 몰려드는 새까만 잡귀들은, 눈 먼 장님처럼 육신을 향해 달려들었다가 결계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새로운 부적을 어깨에 감아 준 소녀가 천천히 손을 떼자, 들썩이던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다 됐어, 오빠.”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는 스탠을 돌아본 도로테아가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테이블에 남아 있는 왕녀 몫의 타르트를 손으로 집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오물거리며 열심히 단 것을 섭취하던 도로테아는 여전히 한 구석에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스탠을 보다 입을 열었다.
“가엽다고 생각해?”
앞으로도 이렇게 그릇을 노리는 삿된 것들에게 시달려야 할 테니까?
숨을 참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마신 스탠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본인의 잘못이 아니잖아. 그런데도 모든 것이 망가졌는걸.”
“어쩔 수 없지.”
도로테아가 가볍게 답했다.
“억울하다고 해서 무엇을 원망해? 육신을 이렇게 멋대로 사용하려고 한 자들? 그들을 잡아 벌하면 잠시간은 속 시원할 수 있겠지. 물론 죄를 지었으니 응당 마땅한 벌을 받게끔 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겠지만.”
“…….”
“살아야 하잖아. 이 어린 소녀는 아직 생의 반의, 반의, 그 반도 살지 못했는걸.”
아픈 과거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스스로가 이 육신을 갖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니까.
“그자들을 벌하는 것은 내가 해.”
그것이 내가 이 아이에게 이름을 빌려 사용하는, 진정한 대가가 될 테니까.
“그러니 지금은 그저…… 본인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좀 더 생각했으면 해.”
누군가에게 조건 없는 애정을 받고, 주고, 모든 살아 있는 감정들을 느낄 수 있게.
곤히 잠든 아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준 도로테아가 스탠을 보고 싱긋 웃었다.
“오빠, 화났구나?”
“…….”
“오빠는 좋은 사람이니까. 쟤한테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싫은 거지? 나도 그래.”
도로테아는 식어 미지근해진 차를 입에 털어 넣고서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오빠. 좀 이상하지 않아?”
스탠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도로테아를 향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그녀를 괴롭힌 나쁜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방법을 알려 준 사람 말이야.”
“…….”
“왜 자신이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걸까?”
도로테아의 물음에 스탠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눈도 맞추지 못한 채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창백한 오빠를 바라보다 덧붙였다.
“그저 신물을 주워 힘을 취한 거라면, 선택을 받았다고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는 거잖아.”
그렇지 않아?
“…….”
자신에게 던져진 물음에 스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침묵이 내려앉은 방의 정적을 깬 것은, 창 밖에서 들려오는 묘한 굉음 때문이었다.
“어머나.”
흘끗, 창밖을 살핀 도로테아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역시 파비안에게는 조금 힘겨운 일이었으려나?”
앞뒤 안 가리고 날뛰는 망나니를 묶어 두는 일은.
한숨을 푹 쉰 도로테아가 가볍게 폴짝 뛰어 문고리를 잡았다.
“황녀 전하께서 일어나시거든, 너무 당황하지 않게끔 달래 드려. 그저 곤하게 주무신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이야.”
“…….”
“그럼, 다녀올게!”
아무래도 우리 철없는 사도님에게, 나쁜 아이는 맴매를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드려야 할 것 같거든.
* * *
파비안은 교황을 대리해 제국에 온 칙사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린 프란체스코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칙사를 호위하던 성기사들은 이미 바닥에 널브러진 지 오래였다. 그들 또한 신력을 쓸 수 있는 뛰어난 인재들이지만, 성흔을 가진 사도에 비할 바는 못 되었으니까.
‘교황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어.’
그렇기에 일부러 면전 앞에서 대놓고 떠들었다.
교황이 성녀를 데려갈 생각으로 칙사를 보냈다고, 그로 인해 성녀께서 불안해하고 기도를 올릴 때마다 괴로워하신다고.
지위나 권위, 체면 따위로 누를 수 없는 프란체스코의 발목을 잡으려면 성녀를 들먹이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미친놈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막무가내일 줄이야.’
파랗게 질린 칙사의 입에서 꺽꺽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만큼 숨통을 조이고 있는 거겠지.
‘진심이야? 교황의 대리인을 이렇게 죽여 버릴 생각이라고?’
제국과 성국 사이에 전면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제아무리 사도라고는 해도, 이런 짓을 했다가는……
“아무리 그래도 이곳은 제국의 영토인데, 우리 사도님께서는 빌붙어 사는 식객 주제에 아주 제대로 날뛰고 계시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에 파비안이 반색하고 뒤를 돌았다.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저벅저벅 걸어 파비안 옆에 선 도로테아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교황의 칙사를 짓이기고 있는 사도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나이를 저만큼 먹었으면 이제 슬슬 철이 들 법도 한데.”
“영애, 죄송해요. 제가…….”
도로테아는 낭패라는 듯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며 사과를 건네는 파비안을 향해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영애는 이미 훌륭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덕분에 해야 할 일을 수월하게 마무리하고 왔으니까요.
그렇게 다정한 말로 다독인 도로테아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애초에 말이 통하지 않는 작자를 붙들어 달라고 했던 내가 과했던 거죠.”
조금쯤은 그 성질머리를 죽인 줄 알았더니.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사도는 무엇인가에 크게 자극이라도 받았는지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었다.
“여기서부턴 내가 정리할게요. 파비안, 당신은 가서 루크를 데려와요. 내가 불렀다고 하면 알 거예요.”
“네, 네!”
고개를 끄덕인 파비안이 재빠르게 루크를 찾아 사라졌다.
도로테아는 조용히 숨을 죽인 채, 살기로 남자의 목을 조이는 사도에게로 다가섰다.
“그리 막무가내로 굴면 못써.”
“…….”
그 순간이었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뜯어말려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칙사를 향해 달려들었던 사도가 반응을 보였다.
도로테아 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이다.
그와 마주한 새까만 눈이 활처럼 휘었다.
소녀는 아직도 멱살을 움켜쥐고 있는 프란체스코의 손등을 찰싹, 맵게 내리쳤다.
“정작 당신이 죽이고자 하는 자는 이곳에 없는데. 그자를 대신해 엉뚱한 목숨을 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마치 오래전부터 알아 왔던 사이인 것처럼 친숙하게 말을 붙여 오는 낯선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프란체스코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윽고, 그가 멱살을 움켜쥐던 손에 힘을 뺐다.
“커억, 헉. 헉.”
겨우 풀려난 칙사가 넋 나간 얼굴로 기침하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죽음의 강에 반쯤 발을 담궜다 돌아온 충격이 컸던지, 달싹이는 입술 새로 한마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그 꼴을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던 프란체스코가 입을 열었다.
“상관없지. 이자 또한 내게는 죽어 없어져야 마땅할, 버러지에 불과하니.”
눈에 담긴 살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네가 모시는 분이 위험해진다 하더라도?”
그녀의 말에 프란체스코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모시는 분이라. 내가 대체 누구를 모시고 있다는 거지?”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묻는 말에 도로테아가 눈을 내리깔았다.
오로지 신만을 모시며, 신을 위해 모든 삶을 바치는 광신도다운 답이었다.
“그래, 그렇구나.”
그는 어린 성녀를 모시고자 기꺼이 제국에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신의 힘’이 발현되는 순간을 또 한 번 더 목도하고 싶었던 것뿐.
‘그 사실을 딱히 모르지만은 않았지만…….’
어쩌면 이곳에 머무르면서 조금이나마 상식이라는 것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도로테아가 힐끗,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칙사를 내려다보고 짤막한 한숨을 쉬었다.
“저자가 네 무엇을 그리 자극했지?”
이대로 사고를 치면 제국에 남아 있는 일조차 요원할 텐데.
얌전히 기다렸던 시간들조차 모두 포기할 만큼, 신의 종을 자처하는 저 어리석은 작자를 죽여야 할 만한 대단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프란체스코는 엉금엉금 기어서,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려 바르작거리는 칙사를 마치 재미있는 구경거리처럼 바라보다 발을 들어 그의 등을 짓이겼다.
“으아아아-!”
끔찍한 고통에 발버둥 치는 칙사의 몸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뼈라도 몇 대 나간 게 아닐까.
“신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조차 없는 자들 따위가.”
“…….”
“신의 이름을 아주 사소한 곳까지 걸어 대니, 그 얼마나 불충한 일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재미 삼아 벌레를 짓이기듯, 사람을 짓이기고 있는 프란체스코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스몄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도로테아가 손을 뻗었다.
“그래, 뭐. 거슬리긴 하지. 신의 이름을 대고서 제 잇속을 채우느라 정신없는 아귀 떼를 보고 있자면 말이야.”
입만 열었다 하면 신을 들먹이면서, 실은 그 누구보다 신을 더럽히는 자들.
이교도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던가.
신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누가 만들어 낸 것인가.
신은, 정말로 저들을 종으로 삼아 사람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척 그 지위와 권위를 드높이라 했던가.
“실은 모두가 그저 인간의 일일 뿐이지.”
도로테아의 손이 프란체스코의 몸을 지그시 밀어냈다.
당연하다는 듯 밀려난 프란체스코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힌 사도를 바라보던 그녀가 흘끗, 칙사를 내려다봤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이미 고통을 이기지 못해 기절한 칙사를 옆으로 옮겼다.
“그래서 말인데. 너 또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오늘은 좀 깨달았으면 해서.”
천지 분간 못 하고 까부는 것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어린 시절뿐이잖니.
그 누구도 감히 네게 제대로 된 교육을 하지 못했다면, 나라도 해야겠지.
조그마한 소녀를 응시하던 프란체스코가 무언가를 알아챈 듯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소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좀 맞자.”
매를 드는 것이 양육에 큰 도움이 안 된다지만, 넌 좀 맞아야겠어.
품에서 접선을 꺼내 든 도로테아가 낭랑한 목소리로 영신군가(迎神君歌)를 읊었다.
구하구하(龜何龜何) 거북아 거북아
수기현야(首其現也) 머리를 내어 놓아라
약불현야(若不現也) 내어 놓지 않으면,
번작이끽야(燔灼而喫也) 내 너를 구워 먹으리
소녀가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펼치는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제 분에 못 이겨 날뛰는 망나니를 향해 날아들었다.
“……?!”
꽈아아아앙!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의 칙사가 머무르던 별궁은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