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도로테아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우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허락도 없이 몰래 여관을 빠져나간 남매를 보고 짤막한 한숨을 쉬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어디를 다녀온 것인지,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닌 것인지 질문을 퍼부어 댔을 텐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관으로 돌아온 남매를 대하는 이들의 태도 또한 그 전과는 달랐다.
필립이야 늘 웬만하면 그녀에게 져 주는 편이었다고는 하나, 늘 매정하던 콜린마저 어딘가 태도가 누그러져 있었다.
“이상하지, 오빠?”
“응?”
“우리가 잘못했는데, 아무도 혼을 내지 않잖아.”
“그, 그렇긴 해.”
도로테아의 말에 스탠이 흠칫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이야기라도 오고 간 걸까?”
도로테아의 시선이 방 한구석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루크에게로 향했다.
황자는 남매의 대화를 듣지 못한 것처럼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때마침 우드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곳에서 조금 더 머물러야겠구나.”
스탠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마차를 몰던 말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서, 다른 이들과 상의해 본 끝에 반나절 정도 쉬어 가기로 했단다.”
“말이요? 아픈 거예요?”
“글쎄.”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아마 반나절이면 괜찮아 질 게야.”
“그렇지 않으면요? 그럼 새 말을 구해야 하나요?”
“그렇겠지.”
우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스탠의 얼굴이 짐짓 심각해졌다.
소년의 머리 위로 손을 얹은 우드가 담담하게 덧붙였다.
“우리가 이곳에 좀 더 머무르길 원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말들은 괜찮을 테니 그렇게 걱정하지 말거라.”
괴상한 짓을 많이 하는 것은 사실이나, 쓸데없이 희생양을 만드는 인물은 아니니.
우드의 눈이 모른 척 루크 옆에서 뒹굴거리는 소녀에게로 향했다.
“방 안에 있는 것이 지루하다면 이따 나와 함께 외출이라도 하자꾸나.”
“그래도 되나요?”
“그래, 마침…….”
우드가 손에 쥐고 있는 조잡한 전단지를 스탠의 손에 쥐여 주었다.
“유랑 극단이 이곳에 와 있는 모양이야.”
잠든 척 줄곧 눈을 감고 있던 루크가 소년의 손에 쥐어진 전단지를 흘끔, 바라봤다.
“다 함께 가는 것이 좋겠어요. 그럼 더 재미있을 거예요.”
생글거리는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황자가 말없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 * *
극단이 왔다는 소식에 활기를 잃었던 거리에도 모처럼 사람들이 북적였다.
오랜만에 보게 된 유흥 거리에 다들 말은 하지 않아도 들뜬 기색이 엿보였다.
비록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며 살아간다고는 하나, 그들이라고 해서 즐기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듣기로는 황도에서도 유명한 극단이었다던데.”
“귀족들마저 박수를 칠 정도였다며.”
“정말로 공연이 모두 무료요?”
공터에 모여든 이들 가운데 몇몇이 미심쩍은 듯 물어 왔다.
레번은 쓰라린 가슴을 다독이며 애써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공짜입니다. 물론 공연을 보시고 감명을 받으실 경우, 품에 든 동전 몇 푼 던져 주신다면야 몹시 기쁘겠지만…….”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그는, 우드의 손을 잡고서 생글거리며 공터 한쪽에 자리 잡은 소녀를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동전 몇 푼? 받는다는 거요, 아니라는 거요?”
“모두 무료입니다. 저희는 사사로운 물욕에 사로잡혀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정색하고 답변한 레번이 눈물을 훔치며 무대 뒤쪽으로 사라지자, 이윽고 무대의 막이 올랐다.
들뜬 사람들 가운데 자리하고 있던 그리엄은 제 옆에 앉아 시종일관 생글거리는 소녀를 불편한 기색으로 내려다봤다.
“재미있을 거예요. 다들 연기력이 아주 훌륭하거든요.”
확신으로 가득 찬 아이의 말은, 꼭 직접 공연을 본 적이라도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막이 오르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내용은 황도에서 선보였던 극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죽음의 술사의 탄생과 그들의 만행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제국을 뒤덮은 재앙을 성녀의 기도로 물리쳤다는 사실까지.
처음에만 하더라도 심드렁하니 구경하던 그리엄은 점차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 연극이 몹시 기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의 술사들의 시작과 그들이 저지른 만행까지…… 어찌도 이렇듯 상세하게 재현할 수 있었던 거지?’
술사들의 존재가 드러났던 것조차 성국이 큰 타격을 입고, 교황이 칩거를 선언하면서부터였다. 심지어 술사들에게 점령당한 로헨 왕국의 생존자들조차 이제야 겨우 증언을 시작하게 되었건만.
이해할 수 없는 일에 그리엄의 미간이 주름졌다.
무대 위에서는 연극이 이어지고 있었다.
“재앙이 걷혔다고 하여, 제국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통받는 이들의 신음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으나 제국의 귀족들은 기쁨의 축배를 들기 바빴습니다.”
어느 귀족 집안의 모습이 비쳤다.
당연하다는 듯 싱그러운 과일들이 넘쳐흐르는 접시를 앞에 두고, 다들 도박에 열중해 있었다.
카드놀이, 주사위놀이, 제비뽑기. 종류도 다양했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테이블보 위로 판돈이 쏟아졌다.
싸구려 술마저도 아끼느라 몇 모금씩 목을 축이는 것에 그치는 빈민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넘쳐흐르는 와인을 아까워하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입맛에 맞지 않으면 고깃덩어리를 통째로 내다 버렸다.
“연이은 재앙과 전쟁으로 아랫사람들의 생활은 더욱 고되어 졌어도, 가진 자들의 씀씀이는 무엇 하나 줄어드는 것이 없었습니다.”
“더 많은 것들을 손에 쥐기 위해 다른 이들을 더욱 쥐어짰을 뿐.”
우드는 쥐죽은 듯 조용한 주변을 바라보다, 도로테아를 내려다보았다.
저들이 황도를 떠나 이곳에 와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는 당황했지만, 어찌하여 몸을 피하게 만들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지나치게 위험한 내용을 담았군.’
제국을 찾아온 재앙은 근원이 해결되지 않는 한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 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으니까.
파격적이기까지 한 극의 후반부는 명확하게 자격이 없는 귀족들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흘끗, 주변을 둘러보자 좀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가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열을 올려 가며 극의 내용에 동조하지 않았다.
몇몇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고, 누군가는 불편한 기색으로 자리를 피하기에 바빴다.
‘발버둥 쳐 봤자 결국 더 큰 손해와 희생을 입게 된다는 걸 모를 리 없으니까.’
특히 영주의 뜻을 거역했다가는 본인뿐만 아니라 일가친척 전원이 죽을 자리로 내몰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도로테아는 주변의 반응에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옅은 미소를 띤 채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하는 단원들을 지켜볼 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한숨을 삼킨 우드가 고개를 돌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귀족들을 겨냥하고 있는 극의 내용에 놀란 그리엄이 얼굴을 구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괜찮소?”
“이런 걸…… 이런 게, 제국에서는 흔한 겁니까?”
“글쎄, 모르겠소. 나도 오랜만에 보는 극이라.”
흔할 리가 있나.
끝난 무대 위, 떠나는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레번의 얼굴이 유독 어두웠다.
한창 황도에서 잘나갔을 때는 극이 마무리될 즈음 관객들이 즐겁게 감상했다며 입장료와는 별개로 동전이나 쥐고 있던 부채 등의 물건을 던지곤 했지만, 오늘의 무대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로테아는 품속을 뒤져 금화 하나를 휙, 하고 던졌다.
입술을 삐죽이던 레번이 재빠르게 그것을 주워 제 품에 감추며 사라졌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필립의 물음에 콜린이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대부분이 빠져나가 텅 빈 공터에 마지막까지 남아 무대를 관람하던 이들마저 일어서자, 흘끗 밖을 살펴보던 단원 중 하나가 뒤에서 훌쩍이고 있는 레번을 위로했다.
“다들 갔어요.”
“무대 위에…… 꽃은커녕 동전 하나도 없지?”
“그렇죠, 뭐.”
“아가씨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이런 극을 사람들이 좋아할 리 없을 텐데.”
비교적 어린 축에 속하는 단원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꺼낸 말에 다들 내심 동의하는 눈치였지만, 딱히 하기 싫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만 울어요.”
들썩이는 레번의 등을 찰싹, 두드린 단원의 말에 레번이 울먹였다.
“우리는 이제 뭘 먹고 사냐고. 숨겨 둔 비상금까지 싹 다 가져갔단 말이다.”
그때, 마지막으로 공터를 정리하고 돌아온 미네가 발랄한 걸음으로 레번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여러 번 접혀 구겨진 쪽지 한 장이었다.
수고했어. 이건 앞으로 매번 공연할 때마다, 네가 얻게 될 수고비야.
배시시 웃는 얼굴로 미네가 내민 금화를 받아 든 레번이 멍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공연 한 번에 금화 하나…….”
단원들이 많으니, 먹고 자는 데 쓰이는 돈도 적지 않았고 무대 준비에 드는 돈도 적지 않았다.
금화 한 개면, 딱 먹고살 만큼의 대가를 보장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단장.”
누군가 조심스레 그의 어깨를 흔들자, 레번이 메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물었다.
“저기, 하루에 몇 번 공연을 올려야 한다, 라고 정해 놓은 것은 없었지?”
만일 공연을 올리는 만큼 그에 따라 보상을 주는 거라면…….
레번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하루에 목이 상하지 않을 만큼 최대치로 공연을 하고,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서 또 하다 보면 생각보다 돈을 모으는 것도 어렵지 않을지도.”
레번의 말에 그를 위로하려 모였던 단원들이 슬쩍 고개를 저었다.
“충분한 여비가 모이고 나면 이깟 제국을 떠나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나자.”
“…….”
당신 그러려다 잡혀서 실패한 거잖아.
애초에 저 금화도 빼앗긴 돈 아니냐고.
그나마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는 단원 하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의욕이 생겼으니 당분간은 열심히 하겠네.”
머리가 나쁜 게 흠이긴 하지만, 돈에 눈이 뒤집히는 것만 빼면 그럭저럭 괜찮은 인간이니까.
흐흐, 웃고 있는 레번을 뒤로하고 단원들이 남아 있는 무대의 소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관객들의 기분을 찜찜하게 만든 공연이 끝나고, 인적이 모두 사라진 늦은 밤이었다.
사람이라고는 그림자초자 보이지 않는 거리에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척비척 걷는 여인은 늘 그래 왔듯 무언가를 꽁꽁 싸맨 뭉치를 몹시 소중한 듯 품에 안고 있었다.
그녀는 좀 전까지 사람들이 공연을 관람하던 공터를 지나, 폐점한 상점들이 즐비한 번화가를 가로질러 그 끝에 있는 화려한 저택 앞에 몸을 웅크렸다.
“한 푼만 주세요. 한 푼만.”
힘없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답하는 이들은 없었다.
지칠 대로 지친 육신을 끌고 다니는 것이 못내 고단했던 탓일까.
여인은 그 자리에 가만히 웅크린 채 고개를 들어, 차가운 쇠창살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사뿐한 걸음으로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잠들 시간이에요.”
어린 소녀는 눈을 끔뻑이는 여인에게 친절한 목소리로 일러 주었다.
“오늘 밤이 지나면 더 이상 춥지도, 배가 고프거나 아프지도 않을 거예요. 더는 괴롭고 슬피 울 필요도 없어요. 줄곧 그리워하던 이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
여인은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어떻게든 들어 올리려 애쓰며 입술을 달싹였다.
소녀는 제대로 된 신음 소리 하나 내지 못할 만큼 기력이 다한 여인을 향해 손을 뻗어 토닥였다.
“행여 길을 잃지 않게끔, 먼저 떠난 당신의 아이가 마중을 나와 있을 테니 염려 말아요.”
다정하게 토닥이는 손길에 여인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뻣뻣하게 굳어 가는, 자그마한 육신을 위로하던 소녀를 향해 누군가가 터벅터벅 다가 왔다.
도로테아는 어느새 그녀의 앞에 와 있는 노인을 보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라파예트는 익숙지 않은 조각칼을 잡느라 너덜너덜 해진 손으로 여인의 몸 위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도로테아는 싸늘히 식어 가는 여인을 응시하는 깊은 눈을 마주하다 입을 뗐다.
“형벌이 꽤 고단했나 보군요. 경의 얼굴에 주름이 늘었으니.”
갑작스런 부름에도 망설임 없이 이곳까지 달려온 노인은, 쓸데없는 겉치레들을 덧붙이고 싶지 않은 듯 곧장 본론을 꺼냈다.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경께서 이 여인의 가족이 되어 주셨으면 해요.”
“…….”
노인의 눈이 담요로 덮인 여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잠에 든 듯 평온한 기색으로 눈을 감고 있기는 했으나, 생기 한 점 비치지 않는 창백한 얼굴은 분명 죽은 자의 것이 분명했다.
죽은 이의 가족이 되어 달라니.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요구는 기이하고 좀처럼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 영지에서는 말이에요. 가족이 시신을 처리할 값을 내야만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 줘요.”
“그렇습니까.”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에도 돈이 붙다니.
영지의 민심을 알 만했다.
도로테아의 손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받아 든 라파예트가 나직이 물었다.
“그것이면 됩니까?”
“장례를 치르는 동안 이곳에 머무르면서, 이곳 영지민들의 삶을 지켜봐 주세요.”
라파예트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쇠창살 너머 웅장한 저택과, 한산하고 초라한 거리를 둘러보다 입을 꾹 다물었다.
소녀가 내리는 형벌은 늘 그렇듯 잔혹하고 가차 없었다.
이 영지의 참상에 그의 몫이 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라파예트의 주름진 얼굴에 서린 회한을 물끄러미 바라본 도로테아가 덧붙였다.
“나는 이 영지의 사람들이 말을 할 수 있기를 원해요. 스스로가 어떤 부당한 대우를 겪었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되짚어 보면서.”
“…….”
“이곳에서 저들의 말이 시작되길 바라요.”
“제게 그럴 힘이 있다 믿으십니까?”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생각의 방향을 틀 수 있게끔 만들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이제껏 가진 자들이 저들을 다루기 편하게끔 주절거린 말들이 옳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할 뿐.”
어깨를 으쓱한 소녀가 그를 지나치려다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더 꺼내어 얹어 주었다.
“솜씨 좋은 용병을 고용했으면 해요. 요새에서 데려와도 괜찮고요.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극단이 있는데, 그들을 좀 보호해 주었으면 해서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주머니 안을 들여다본 라파예트가 불쑥 물었다.
“하이클레어 가문은 도대체 언제부터 이 모든 일들을 계획했던 겁니까?”
“네?”
단 한 번도, 그녀는 스스로의 입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제 와 모를 수는 없었다.
그를 손안에서 가지고 놀 수 있을 만큼의 여유로운 태도와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특출한 능력까지.
“하이클레어 후작이 부족한 지원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군자금을 모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
그녀의 지원이 아니었더라면 변경은 진작 무너졌을 터.
루크가 낯선 소녀를 제 호적에 올리는 일을 선뜻 허락했던 것도, 결국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
라파예트의 물음에 도로테아가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할아버님께서는 그리 욕심이 많은 분이 아니시죠. 가문의 다른 이들도 제 주머니를 채우는 일에는 그리 해박하지 못하고요.”
“…….”
“저 또한 금전적인 욕심이 대단하지는 않답니다.”
생긋 웃어 보인 도로테아가 덧붙였다.
“그저, 필요할 때마다 돈을 가진 이가 가져가 달라고 제 앞에서 시위를 하더군요.”
이런 것을 하늘에게 선택받았다고 하던가요.
싱긋, 웃어 보인 도로테아는 그 답을 끝으로 사뿐사뿐 라파예트를 지나쳐, 일행들이 기다리는 여관으로 향했다.
그녀가 자리를 뜨고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물끄러미 여인을 내려다보던 라파예트는, 이윽고 긴 한숨과 함께 여인의 시신을 품에 안고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 * *
분명 괜찮아지리라 장담한 우드의 말대로 시름시름 앓던 말들은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거짓말처럼 멀쩡해졌다.
그리엄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들의 상태를 관찰했다.
정령은 그 누구보다 거짓된 것에 민감하다.
꾀병을 부린 것이라면 알아챘어야 할 텐데.
“거의 다 죽어 가다 밤사이 멀쩡해지다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그와는 달리, 다른 일행들은 그러려니 하는 얼굴이었다.
우드는 밤새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곤히 잠든 소녀를 안은 채 마차에 올라탔다.
소녀의 축 늘어진 겉옷 자락이 마차의 문에 낀 것을 발견한 필립이 살짝 잡아당긴 순간이었다.
겉옷 안쪽에서 절그럭 소리와 함께 눈부신 금화 하나가 마차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오늘따라 유독 무겁게 여겨지던 도로테아를 내려다보던 우드가 겉옷을 벗겨 뒤집었다.
“…….”
불룩한 양옆 주머니와 그 아래 작은 주머니, 소매의 솔깃 속까지.
도대체 어디서 난 것인지 모를 돈과 땅문서로 가득했다.
실시간으로 창백해져 가는 우드의 안색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리엄은 문득, 여관의 주인이 해 준 말이 떠올랐다.
“내가 보기엔 아이는 충분히 사랑받고 있소. 그 소년과 마찬가지로.”
“그렇지만…….”
“보시오. 말은 거칠게 하고 있지만 아이가 입고 있는 옷은 일행이 두르고 있는 것 중 가장 따뜻하고 훌륭한 털옷이잖소. 게다가 식사 때마다 아이에게 건네는 몫은 가장 부드럽고 소화하기 좋은 것이라오.”
“…….”
“내 경험상 저런 경우는 딱 한 가지요.”
“무슨 경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애가 아주 지랄 맞게 희한한 경우. 큰 사고를 치기 전에 어떻게든 기를 눌러 놓으려는 게지.”
두 눈을 질끈 감은 우드가 소녀를 흔들어 깨우며 추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돈 어디서 난 거냐? 응?”
“몰라. 필요할 때가 되니까 나타나던데.”
“대체 누구의 주머니를 털어 온 게야!”
대화 소리는 조그마했지만,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다.
슬쩍 고개를 들자, 그리엄을 제외한 모두가 눈을 감고 자는 척 부녀의 대화를 넘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끝에, 그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젊은 아버지의 고군분투를 모르는 척하기로 결심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그의 귀에 남자의 절규 어린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잠시나마 널 가엽게 여긴 내가 병신이지……!”
“너무 열 내면서 살지 마. 화병 나.”
“닥쳐!”
스탠은 제 발치에 데구르르 굴러든 금화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까르르 웃고 있는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무대 위에서 열심히 공연을 펼치던 이들 모두, 귀신의 집에 숨어 있던 이들이 분명했다.
무대 위의 목소리가 여전히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인간은 진작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에 신의 이름을 가져다 붙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금화를 내려다보던 소년의 눈이 한순간 묘한 빛을 띠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찰나의 순간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