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우드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방금 들은 말을 되새겨 보았다.
이 세계에서 뭘 지우겠다고?
자그마한 소녀 시절부터 지켜보면서 남다르다는 생각은 해 왔지만, 하다 하다 이제는 신까지?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도로테아는 대답 대신, 자신을 경악스럽게 바라보는 우드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간만에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원 없이 힘을 드러낸 덕일까.
답답하던 속이 그나마 좀 후련해진 느낌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지?”
도로테아의 물음에 콜린이 침묵했다.
“…….”
일부러 콜린의 눈과 귀를 가려 두었기에 누군가의 조력이 없었다면 절대 여기까지 찾아올 수 없었을 터.
지금의 콜린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었다.
‘뭐, 봉인된 힘을 건드린다면 어느 정도까지는 명계의 존재와 소통할 수 있겠지만.’
창백해질 대로 창백해진 얼굴로 보건대, 가려 둔 눈과 귀를 열 시도조차 안 한 것으로 보이고.
궁금증이 일어 건넨 물음에 콜린이 입을 열었다.
“네가 이렇게 뵈는 것 없이 날뛴 까닭은 후작 부인의 죽음을 접했기 때문인가?”
“후, 후작 부인이 돌아가셨다고?”
우드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도로테아는 그리 능숙하지는 않지만 말을 돌리려 드는 전직 사신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어버버 하던 우드의 눈이 그녀를 담고 있었다.
‘연기는 서투르지만 머리는 좋단 말이지.’
누구를 자극해야 대화의 방향을 틀어 버릴 수 있는지, 꽤 잘 파악하고 있는 걸 보면.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우드를 밀어내고 좀 더 추궁해도 상관이야 없겠지만…….
‘누가 알려 주었든 간에 바뀌는 건 없으니까.’
이 정도는 눈감아 줄까.
기껏 그녀를 말려 보겠다고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이곳까지 달려와 주었으니.
기특하지 않은가.
“내 지시도 없이 멋대로 움직인 것은 괘씸하지만, 넘어가 줄게.”
도로테아는 자신의 말에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우드를 향해 다정하게 덧붙였다.
“이만 돌아가자.”
“어, 어디로…….”
“내가 왔던 곳으로.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이라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가지 않으면 곤란해.”
입술을 달싹이던 우드가 이내 콜린을 힐끗 바라보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돌아가는 것은 좋다만, 아무래도 저쪽은 휴식이 필요할 듯싶은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로테아가 창백한 얼굴을 한 콜린의 앞에 섰다.
안 그래도 늘 병약해 보이던 남자의 얼굴에 유독 병색이 짙었다.
“괜한 짓을 할까 싶어 네 눈과 귀를 가려 둔 것은 사실이나, 네 안위를 위해 혼력을 쓰는 것까지 금하지는 않았어.”
“…….”
“일일이 일러 주어야 하는 어린아이도 아닐진대 적당히 알아서 스스로를 챙겼어야지.”
마치 어른이 아이를 꾸짖듯 건네는 잔소리에 콜린이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이성을 잃었다는 이유로 명계와 등을 돌릴 뻔한 것이 누군데 감히 자신을 위하는 척 잔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냉랭한 시선을 마주한 도로테아가 희미한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네게 공창(空唱 : 떠돌이 잡귀들을 불러, 그로부터 혼력을 얻는 일)을 허하마.”
맞닿은 손끝으로 익숙하지만 낯선 기운이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억지로 차지하고 들어앉은 육신의 연결 고리는 늘 위태롭게 삐걱거렸다.
봉(封)해 두었다고는 하나 본디 명계의 존재를 인간의 육신에 매어 둔다는 것이 그리 녹록할 리 없었다.
받아들이는 혼력의 절반이 육신과의 연결을 공고히 하는데 쓰이니, 늘 생기가 모자랄밖에.
도로테아는 드물게 혈색이 돌기 시작한 콜린을 잡아끌었다.
“너도 꽤 사람다워졌어.”
미련한 구석이 생겼잖니.
“자, 걸음을 떼렴.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으니 더는 놀고 있을 시간이 없단다.”
늘 산더미 같은 일을 만드는 장본인의 말에, 멀거니 자리에 섰던 콜린이 슬쩍 뒤를 돌아보고는 이내 터벅터벅 소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의 뒤에서 리리가 싱긋 웃으며 장난스레 주변 나뭇가지들을 뒤흔들며 장난치고 있었다.
* * *
필립 하이클레어가 말을 타고서 홀연히 병영에 나타나자, 후작은 몹시 놀란 기색으로 손자를 맞이했다.
“네가 이곳에는 웬일이냐, 필립?”
“할아버님. 숙부님.”
미미한 웃음과 함께 필립이 인사를 건네자, 후작이 답하기도 전에 에이든이 앞으로 튀어나와 물음을 던졌다.
“테아는? 테아는 잘 있느냐?”
“…….”
“두고 올 때에도 마음에 걸렸다. 그 조그맣고 어린아이가, 우리의 승전을 기원한다며 신전에서 기도를 올리다 쓰러진 것은 아니냐? 입맛이 없어 깨작거리다가 배앓이를 하지는 않았고? 그 아이는 내가 잡아다 주는 멧돼지의 연한 살코기를 몹시도 좋아했건만. 황도에는 나 이상 가는 사냥꾼이 없잖으냐!”
정작 아이의 아버지인 벤은 침착한 얼굴로 한걸음 뒤에 물러서 있건만, 막내 삼촌이라는 작자는 아이의 안위가 걱정되어 말을 뱉다 말고 울먹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육중한 덩치로 코를 훌쩍이던 남자가 잠긴 목소리로 덧붙였다.
“게다가 친우인 메릴린마저 조국의 명예를 드높이고자 전장에 왔으니 홀로 얼마나 외롭겠느냐!”
곁에 선 벤이 에이든을 달래듯 등을 토닥여 주었다.
코를 흥, 하고 푸는 소리에 머리를 짚고 있던 후작이 필립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행여 테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 테지?”
필립이 빙긋 웃었다.
“그럼요. 적어도 제가 떠나올 때까지는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어요.”
“……?”
묘한 답이었다.
마치, 그간 같이 있지 않았던 것 같은 뉘앙스이지 않은가.
의아함에 후작이 재차 물음을 던지려던 찰나였다.
에이든을 달래고 있던 벤이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테아에게 별일이 없다면 네가 이곳까지 걸음 한 이유는 따로 있겠구나. 전령을 통해서는 전할 수 없는 소식이라든가.”
딸의 안부를 캐묻기는커녕 아주 자연스럽게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 버린 벤의 말에 필립이 멈칫했으나, 무언가 입을 열기도 전에 후작의 물음이 이어졌다.
“그래,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느냐? 가문에 특별한 변고라도…….”
얼굴에 웃음기를 지워 낸 필립이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할머님께서 남기신 것입니다. 직접 전해 드렸으면 해서.”
후작가의 안주인은 전장에 나가 있는 남편이 받게 될 충격을 걱정해 최대한 늦게 알리길 원했으나, 장례까지 치른 마당에 언제까지고 쉬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황도에서는 회군을 요청하는 전령을 여러 차례 보낸 상태.
보아하니 도로테아가 중간에서 손을 쓴 것 같지만, 막아 두는 것에도 한계는 있을 테니, 후작의 귀에 부인의 죽음이 들어가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필립의 담담한 얼굴에서 못 다한 말을 읽어 낸 후작이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할 말이 많겠구나. 들어오너라.”
이런 상황에 굳이 구경거리를 제공할 필요는 없다고 느낀 후작은 굳어 버린 아들과 손자, 사위를 데리고 막사 안으로 사라졌다.
“무슨 일인데 필립 영식이 직접 온 거요?”
“황도에서 뭔가 소식이 온 듯한데, 왜 본인들만 듣는 건지…….”
“기다려 봅시다. 밤이 늦었으니, 아침이 밝으면 우리에게도 알리지 않겠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불만 어린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지만 저 막사 안으로 쳐들어갈 만한 담력을 지닌 이들은 없었고, 결국 자기들끼리 몇 마디 나눈 다음 뿔뿔이 흩어지는 수순만이 남았다.
팔짱을 낀 채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관전하던 키엘이 홀로 남아 있는 메릴린을 향해 다가갔다.
하이클레어 가문을 제 집 드나들 듯했으니, 후작 부인의 용태를 몰랐을 리 없었다.
느껴지는 분위기만으로도 이미 상황을 짐작한 듯한 메릴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요.”
“메릴린 영애.”
“이상했다구요. 어딘가 넋을 놓은 사람처럼 굴었던 게 설마하니 이런 이유일 거라고는. 평소에는 그렇게 솔직한 사람이 대체 왜 이럴 때는…….”
메릴린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던 키엘이 답했다.
“실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머리로는 사실임을 알지만, 입 밖으로 내어서 인정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 이니까요.”
적어도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은 모른 척할 수 있으니까.
우스개 농담을 던지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호도하는 것으로 직시해야 할 사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말이 끊기자, 고요한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얼마나 오랜 시간 그곳에 멀거니 서 있었을까.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조그마한 소녀가 막사 사이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도…… 아니, 사라!”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를 뻔했던 메릴린이 재빠르게 소녀에게로 향했다.
“대체 어딜 갔던 거예요?”
얼굴을 닿을 만큼 가까이 들이댄 메릴린이 코를 킁킁댔다.
“뭘 하다 왔길래 몸에서 탄내가 나요?”
슬쩍, 탄 소매 끝을 가린 도로테아가 생긋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언니.”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태연한 말투에 메릴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필립 경이 왔어요.”
“아.”
어쩐지 분위기가 묘하게 어수선하다 싶더니.
도로테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슬슬 가문에서도 누군가 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지.
도로테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머뭇거리는 메릴린을 바라보다 그저 싱긋 웃었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안 괜찮으니 계속 이상하게 굴었던 거잖아요.”
옆에서 도로테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키엘이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반쯤 타들어 간 소매를 유심히 살피던 그가 나직이 물었다.
“어딜 다녀오는 길이지?”
“…….”
마주하고 있던 도로테아의 눈동자가 슬쩍 오른쪽으로 향했다.
키엘의 목소리가 한층 나지막해졌다.
“믿고 놓아두었더니, 기껏 고기방패로라도 쓰라고 붙여 준 황자를 내팽개치고 위험한 짓을 일삼고 다니는 건…….”
낮은 목소리에서는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곤란한데, 이 아가씨야.”
잡혀 있는 손목을 조심스레 빼 낸 도로테아는 대답을 기다리는 키엘의 웃음기 없는 얼굴을 살피다 조용히 물었다.
“반쯤은 미수에 그쳤다고 하면 정상 참작해 주시나요?”
냉랭하던 키엘의 얼굴에 옅은 웃음기가 맴돌았지만, 그럼에도 그에게서 풍기는 흉흉한 분위기는 한층 더해졌다.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있던 메릴린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죠?”
도로테아는, 의아한 얼굴로 저 멀리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이들을 보는 메릴린을 향해 물었다.
“우리 귀여운 오빠는 지금 자고 있나요?”
아빠가 왔다는 소식을 알려 주면 좋아할 것 같은데.
* * *
후작 부인의 부고를 전해 들은 막사 안은 적막으로 가득했다.
에이든은 멍한 얼굴로, 담담하게 서신을 읽어 내려가고 있는 후작을 바라보았다.
“데인에게는 아침에 일어나거든 내가 말하마. 굳이 잘 자고 있는 아이를 지금 깨워 소식을 전할 필요는 없으니.”
차라리 밝은 낮에 듣는 것이 슬픔을 삭이는 데에는 더 도움이 될지 몰랐다.
“아버지.”
“괜찮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어. 모두가 다 준비하고 있지 않았더냐.”
이리될 줄 몰랐던 것도 아니지만, 막상 소식을 전해 들으니 씁쓸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고개를 든 후작이 어느새 성큼 자라난 손자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오느라 수고했다. 험한 길이었을 텐데, 홀로 올 줄이야. 너도 다 컸구나.”
자신을 향한 공치사에 필립이 별것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으려던 순간이었다.
별안간 막사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후작이 재빠르게 문을 걷어 내고 밖을 확인하자, 환하게 웃는 얼굴로 커다란 덩치의 남자에게 안겨 있는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장정의 얼굴에 후작이 의아한 듯 그를 살폈다.
자기를 보자마자 환한 얼굴로 달려온 스탠을 안아 준 우드가 멋쩍은 얼굴로 후작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습니까.”
“자네가 어찌 여기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을 꺼내던 후작은, 우드의 옆에 존재감 없이 서 있던 호리호리한 남자를 보고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콜린? 콜린이 아니냐?”
아버지의 이름에 필립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 콜린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아버지에게 막 다가가려는 필립이었으나, 에이든이 한발 빨랐다.
“장하오!”
“놔라.”
조카를 제치고 쏜살같이 달려 나간 에이든은 둘째 형을 꼭 끌어안았다.
“드디어 형님도 전장의 용사가 되기로 마음먹었구료. 그래, 형님도 하이클레어 가문의 남자. 언젠가는 그 귀찮은 서류 더미에 질릴 날이 올 것 같았소!”
막내 동생에게 둥개둥개 하늘로 떠올려진 콜린의 얼굴이 한층 냉랭해졌다.
“놔.”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우드는 놀란 듯 이쪽을 바라보는 후작에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콜린 경께서는 위험한 지역으로 홀로 떠나는 아드님이 걱정되었던 모양입니다. 쫓아 이곳까지 오시다가 우연히 저를 만나서…….”
“그러나 저러나 아빠라니. 자네에게 언제부터 아이가 있었나?”
우드의 이마에 식은땀이 비질비질 샘솟았다.
“그게, 그러니까…….”
“스탠의 아버지가 자네라면, 사라 또한 자네의 딸이겠군?”
후작의 물음에 우드가 돌처럼 쩌엉, 그 자리에 굳었다.
그의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도로테아가 생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우리 아빠예요.”
그와 동시에 우드는 후작 곁에서 담담한 얼굴로 서 있던 벤과 눈이 마주쳤다.
소녀의 진짜 아빠가 지긋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로테아가 아무 말 없는 ‘아빠’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찌르자, 우드가 자포자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아직 채 파악하지 못했지만, 후작은 이 상황에서 가장 상식적인 말을 건넸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축하하네.”
“…….”
벤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마당에, 차마 감사하다는 말만큼은 나오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