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도로테아는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는 루크를 향해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듯 다정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그저 신기하고 재밌는 능력처럼 여겨질 수도 있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
“오래 열어 둘수록 생자(生者)와 사자(死者)를 나누는 경계가 희미해질 거야. 정확히 말하면…… 네 ‘눈’이 그렇게 보게 된다는 건데, 기실 그 둘 사이를 나누는 경계는 엄청 명확한 거잖아?”
일반적으로는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볼 수 있게 되는 것 자체가 그 ‘경계’를 넘어서는 일.
다만 한 번 넘어서는 게 어렵지, 몇 번 넘다 보면 익숙해지는 게 또 사람인지라.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눈이 열린 당사자에게는 그 ‘경계’가 흐릿해지다 못해 어느 순간 투명할 정도로 옅어지는 것이다.
“그 단계까지 가면 스스로가 주변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인 것처럼 느껴질 거야. 네가 보는 것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답답하게 여겨질 테고, 그런 게 한 번 두 번 쌓이다 보면 내가 명확하게 다른 존재라는 걸 여실히 느끼게 되겠지.”
실은 나 또한 그저 살아 있는 인간일 뿐인데.
“살아 있는 감각이 무뎌질 거야.”
아주 천천히,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도로테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루크가 나직이 물었다.
“너는 어째서 눈을 닫지 않았지? 분명 너의 그 별난 잡기술이라면 네 눈을 가릴 수 있는 방법도 있지 않나.”
“내게는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능력을 탐할 때를 제외하고는 늘 갇혀 있었던 그녀가 유일하게 세상을 볼 수 있는 순간이, 그 능력을 활용할 때뿐이었으니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만 던져 대는 도로테아를 보는 루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은 약간 불편한 수준이라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그 눈은 결코 유용하지만은 않아. 특히나 다룰 줄도 모르는 너에게는.”
가만히 루크를 들여다보던 도로테아가 말을 살짝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인간의 죽음이 얼마나 다양한지, 죽은 자의 미련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아?”
“죽음이라면 나도 충분히…….”
“아니, 넌 그저 죽는 순간만을 목격한 것뿐. 그 순간 뿜어져 나오는 미련과, 끔찍한 고통과…… 터무니없는 욕망까지, 죽음의 깊숙한 이면을 들여다본 적은 없지. 아직은.”
망자를 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살아 있을 적에는 인간의 거죽을 둘러쓰고 있기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
혼에 깊숙이 새겨진 뒤틀리고 부정적인 감정들까지 모조리 다 엿보게 될 터.
“네가 가장 사랑하던 자가 결코 들키고 싶지 않았을 치부까지도.”
“…….”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닫아. 아직은 네가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을 구분할 수 있을 때.”
선심 쓰듯 일러 주는 도로테아의 두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루크가 불쑥 물었다.
“그리 혼자가 되고 싶나?”
“뭐?”
도로테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루크는 드물게 표정에 균열이 간 소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그 누구보다 네 울타리 안의 사람들을 아끼면서도, 정작 너와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 줄 이들은 없길 바라는 것 같기에. 너 스스로는 이해받지 못해도 상관없는 건가?”
“…….”
“어차피 같은 곳을 바라봐도, 서로의 이해관계는 바뀌기 마련이다. 나와 내 대부의 결말이 그랬듯이.”
변경백을 짤막하게 들먹인 루크가 도로테아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격의 없는 손길에 도로테아가 순간 대응하지 못한 채 눈을 깜빡였다.
“네가 말하듯, 이 또한 운명이겠지. 자연스레 열리게 된 눈이라면 이대로 두어라. 그에 따른 불편도 내가 감수하마.”
“…….”
그러고는 도로테아를 번쩍 안아 들고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품에 안긴 도로테아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고통스럽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망자들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그들의 괴로운 기억과 미련, 고통들이 고스란히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을 테니까.
‘겁을 주려고 일부러 과하게 손을 쓴 감도 없지 않아 있었는데.’
겁이 없는 줄은 알았지만 설마하니 그들의 목소리에 시달리고도 눈을 유지하겠다는 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순간이지만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던 그의 말.
이해받지 못해도 상관없냐는 그 질문에 놀라 어영부영 넘어가 버렸다.
그 누구도 해 본 적 없던, 스스로도 던져 본 적 없던 질문이라.
도로테아는 말없이 숲을 헤쳐 나가는 루크의 목덜미를 두 팔로 꼭 끌어안은 채 머리를 기댔다.
‘결국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던 약속은 고스란히 남았네.’
그의 눈을 잠시 빌려 코니움을 처리했을 때의 빚을 이참에 없애고 싶었건만.
곤란해라.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던 도로테아가 별안간 고개를 들어 하늘 위를 응시했다.
다시 의무를 행하기 시작한 사신 무리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을 본 후, 루크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갈 곳이 있는데, 함께 갈래?”
“…….”
“나와 너처럼 망자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들을 만나러 갈 생각인데.”
도로테아의 말에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선 루크가 무뚝뚝하게 제안에 답했다.
“길을 안내해라.”
“음, 이번에는 조금 다른 길을 갈 거야.”
“……?”
“되도록 빠르게 다녀와야 하니까, 사람의 발로 다녀오기에는 거리가 좀 멀거든.”
‘지금의 나’는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루크가 침묵하는 사이, 도로테아의 부름을 받은 리리가 신이 난 듯 까르르 웃으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도로테아를 안고 있는 루크를 두 손으로 번쩍 올려 든 채 허공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
루크의 서늘한 눈이 품에 안긴 도로테아를 지그시 응시했다.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 그래도 리리에게 악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걸.”
“어딜 가는 거지?”
“사람의 혼에 악의를 심어 이용하거나, 숨이 끊어진 육신에 혼을 불어넣는 잔재주를 가지고 있는 자가 있어.”
자신의 눈에 보이는 망자의 세계로, 살아 있는 자들을 모조리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어리석은 인간이.
“그리하여, 이 세계의 진정한 신이 되고자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갈 거야.”
* * *
로헨의 왕궁은 놀라울 정도로 고요했다.
이제껏 세계 각국을 들쑤시고, 제국을 뒤흔들었던 사건들의 진원지라고는 믿을 수 없으리만치.
그 고요한 왕궁을 거닐던 클라이브가 멈춰 섰다.
“거슬리는구나.”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어조였지만 그의 뒤를 따르고 있던 시종은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던 클라이브가 나직이 명했다.
“가서, 아나이데를 불러 오너라.”
“예.”
뜬금없는 지시에도 불구하고 반문 하나 없이 명을 이행코자 돌아서는 시종의 두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걸음은 보이는 사람 못지않게 유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급한 걸음소리가 복도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스승님.”
로헨 왕의 초상화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클라이브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소란 떨지 말거라. 네 걸음걸이가 지나치게 번잡스러워, 내 귀를 불편하게 만드는구나.”
평온하지만 어딘가 서늘하고 차가운 기운을 머금은 눈과 마주한 아나이데가 고개를 조아린 채 당혹스런 목소리로 보고했다.
“보관해 두었던 정령석이 빛을 잃어 갑니다. 먼 곳으로 나가 있는 다른 동료들과의 연락도 끊어졌습니다.”
클라이브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손에 끼고 있는 반지를 매만졌다.
아무런 말도 없는 스승의 반응에 어딘지 불안해진 아나이데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 그리고 창고에 있던 ‘용병들’ 또한 움직임이 멎었습니다.”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멈칫하는가 싶더니 클라이브의 입으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애석하군. 꽤 공들인 아이들이었는데.”
자신의 혼 외에 다른 혼을 받아들이는 육신은 그리 흔치 않건만.
클라이브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온화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너희들의 노력과 수고가 모조리 수포로 돌아가 버리게 생겼구나.”
“저, 저희는 그것을 수고라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스승님께서 저희에게 보내어 주신 정령을 잃었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클라이브는 감히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가던 아나이데를 잠시 지켜보다,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쥐고서 수그린 고개를 위로 올렸다.
“아나이데.”
“예, 예.”
“사람들을 끌어모으거라.”
“사람들이라면…….”
“아직 이 성내에 숨이 붙어 있는 자들. 지하 감옥에 있는 자들도 좋고, 민가에 남아 있는 자들도 좋다. 모조리 다 끌어모아 한데에 가두거라.”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던 아나이데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녀의 스승은 짤막한 지시를 내렸을 뿐 그 무엇도 알려 주지 않았지만, 명이 떨어졌으니 지체 없이 이행해야만 했다.
다시 홀로 남은 클라이브의 뒤로 기척 없이 나타난 시종이 입을 열었다.
- 내 그러니, 생전의 이름들을 모두 꽁꽁 감추라 하지 않았더냐.
초점 없던 시종의 눈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본 클라이브가 차분하게 답했다.
“명계가 우리의 비밀을 눈치챘다면, 그건 네가 담당해야 할 몫이라고 본다만.”
- 혼에서 앗아 간 진명(眞名)이 담긴 명부를 빼돌릴 수는 없어. 아무리 나라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는 법이다.
“대체품이야 다시 만들면 그만이지만 일이 반복된다면 곤란하다.”
- 명계로의 길을 터 주는 것도 슬슬 한계다. 명계 전체가 눈을 번뜩이며 우리를 찾고 있어.
“…….”
- 어차피 당분간은 여기에 신경 쓸 여력은 없을 거다. 명계의 주인이 내린 명의 여파가 카르마가 되어 당분간은 사신들의 눈을 돌릴 터이니. 나 또한 당분간 연락이 닿지 않을 테고.
일방적인 통보가 끝나자 흰자위 한 점 없이 온통 새까맣던 시종의 눈에서 어둠이 걷혔다.
그와 동시에 시종은 힘없이 허물어진 채 가쁜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무능력한 것.”
명계의 주인이 한마디 했다고 발발 떨 거면 애초에 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어차피 쓸 수 있는 대체품들은 넘쳐 났다.
성가시긴 해도,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먼 곳에 심어 두었던 그의 눈과 귀 또한 당분간 빼앗기게 생겼다는 정도일까.
“참으로 성가신 계집이 아니냐.”
클라이브가 손에 박힌 초록빛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알렉세이?”
내 가엾고도 사랑스러운 제자야.
그의 말을 이해라도 한 듯, 반지에 박힌 보석이 영롱한 빛을 내며 일렁였다.
“아무래도 네 누이는 결국, 그 성가신 계집의 발목 하나 잡지 못한 게로구나.”
클라이브는 답이 없는 제자를 향해 다정한 물음을 건네며 아나이데가 마련해 둔 산 제물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이름으로 혼을 묶어 둘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택하면 되었다.
“가장 끔찍한 죽음을 선사하자꾸나.”
견딜 수 없을 만큼의 고통과 절망, 끔찍한 분노 속에서 천천히 죽음을 맞이하도록. 그리하여 영혼에 새겨진 그 한(恨) 탓에 명계로도 가지 못하고 이 땅에 묶이게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이들을 향해 나아가던 클라이브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명을 가장 열심히 수행하는, 어리석고도 귀여운 제자가 추하게 바닥을 구르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스, 스승님…….”
엉금엉금 기어 와 손을 뻗는 제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클라이브는 그 손을 잡아 주는 대신, 고개를 돌려 조그마한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과 머리카락. 이질적인 외모.
“이 모습으로는 처음 뵙겠군요.”
생긋 웃는 얼굴로 태연히 인사를 건네는 소녀의 모습에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간, 강녕하셨나요?”
도로테아가 예의 바르게 물었다.
아무 말 없이 바르작거리는 제자를 향해 손을 뻗은 클라이브가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공포에 질려 있던 아나이데가 이내 꺽꺽거리기 시작했다.
도로테아는 자신의 인사에도 답을 하지 않는 클라이브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주 멀쩡히 잘 계셨던 것 같아 다행이에요.”
너무 쉽게 끝내 버리기에는 내 기분이 몹시 상해서.
그저 조용히, 평화롭게 살고자 한 자신의 두 번째 생을 들쑤신 자에게 화풀이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 * *
그 무렵, 메릴린은 몹시 곤란한 얼굴로 루크의 막사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막사의 주인과 그가 데려간 어린 소녀가 아직까지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돌아올 겁니다.”
키엘이 부드럽게 그녀를 달래자, 메릴린이 얼굴을 찡그린 채 답했다.
“무사하기야 하겠죠. 그렇지만 계속 이상했단 말이에요. 평소랑은 조금 달랐어요.”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늘 곁에 있었기에 느끼게 되는 위화감이라는 것이 있었다.
“내게 친절하더라고요. 날 놀리는 낙으로 사는 사람이! 심지어 고맙다는 말도 하던데요?”
“자주 듣지 않습니까?”
“보통은 말이죠. 극한의 공포 속에 놓인 뒤에 듣는 소리거든요. 예를 들자면 다른 이의 혼이 내 몸속에 들어온다든가. 달리는 마차에 갇혀서 악귀에게 쫓긴다든가 하는 일이요.”
“…….”
“고작해야, 스탠을 돌보는 일로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못했어요!”
두 뺨을 감싼 메릴린의 말에 키엘의 얼굴이 묘해졌다.
하기야, 그 정도 경험쯤은 갖고 있어야 곱게 자랐어야 할 귀족 영애가 군에 자원하겠다는 소리를 할 수 있겠지.
확실히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의 애정이란 참으로 무겁고 짙은 것임을 다시 한번 납득하는 순간이었다.
“주군.”
도로테아 곁에 붙여 두었던 그림자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여유롭던 키엘의 얼굴에 웃음기가 걷혔다.
“그 아이는?”
“…….”
드물게도 잠시 답을 망설인 그림자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가셨습니다.”
“어딜요?”
메릴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그림자는 나지막이 제가 들은 말을 건넸다.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는 자를, 벌하려 가실 예정이라고.”
“내가 널 그 애에게 붙였을 때는 만일의 경우에 함께하란 뜻이었다만.”
주인의 질책에 그림자가 그 자리에 고개를 숙이고 부복했다.
지시를 어겼으니 변명할 수는 없지만, 상황은 설명해야만 했다.
“정령께서 7황자 전하를 번쩍 안아 들고 밤하늘을 날아가실 때…… 저는 그냥 두고 가셨습니다.”
메릴린이 멍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어…… 음, 그건…… 어쩔 수 없으셨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