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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221화 (221/242)
  • 221화

    그 무렵 황도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집집마다 숨이 멎어야 할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몸부림을 막아서는 요란한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처음만 하더라도 체면을 생각해 쉬쉬하던 귀족들은, 이내 자신의 저택에서 일어난 괴이한 사건이 본인들에게만 벌어진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살아있는 시체’들은 꽁꽁 묶인 채 상자 안에 갇혔다.

    살아 있을 때에 누리던 그 어떤 호사와 명예도 주어지지 않은 채로.

    아무리 고상한 척하는 귀족들이라고 할지라도 저 끔찍한 존재를 살아 있는 사람 취급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 연극, 연극대로잖아요!”

    혹자는 겁에 질려 중얼거렸지만 대개는 ‘신벌’이라던 연극의 내용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 그것을 믿는 순간 스스로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되는 꼴이니까.

    지배 계급에게 그보다 더 치욕스러운 일이 있을까.

    그렇게 시작된 혼란은 자연스레 제국 전체의 문제로 이어졌다.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괴상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대중들은 불안과 공포에 빠졌다.

    자연스레 기본적인 의식주에 속하는 것들의 가격이 가장 먼저 오르기 시작했다.

    각 지역을 활발히 교류하던 상단들도 멀리 교역을 나서는 것을 꺼리기 시작하면서 고립된 지역들도 심심찮게 생겨났다.

    여유가 없는 귀족들은 고용하는 사용인들의 임금을 낮추려 들었으며, 동시에 거둬야 할 세금은 높였다.

    굶주릴 대로 굶주린 민중은 폭발 직전이었다.

    “술집에 모여든 이들이 저녁마다 불평불만을 쏟아 낸답니다.”

    연극의 자극적인 내용들은 그들을 선동하기에 알맞았다.

    복잡하고 어려운 경제 사정이나 윗사람들의 곤란함 따위는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도, 이해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이제야 불만이 쏟아지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생각해 보면 큰 재앙이 있을 때마다 가장 손해를 본 것은 우리가 아닌가!”

    “제국에 득이 되는 일들은 늘 본인들의 영광이고, 문제가 생기면 우리에게 희생을 떠넘겼지!”

    “지금도 그래. 신벌이 누구에게 내렸겠나? 잘못을 누가 더 많이 저질렀겠냐는 말이야!”

    악다구니를 쓰는 이들이 한둘이어야 지하 감옥에 처넣고 선동죄로 처벌을 할 수 있지. 이미 과반수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직전인데 무조건적으로 힘으로 누르기에는 전력이 부족했다.

    가장 믿음직한 병력이 변경에 가 있는 상황이니.

    행여 섣불리 민중을 자극했다 괜한 불씨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제국의 상층부였다.

    “우선은 하이클레어 후작을 다시 황도로 불러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이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 겁니다.”

    제국의 문제가 타국에 흘러 들어가게 된다는 손해까지 감수해 가며 전령을 보내 회군을 명했지만, 후작이 당도하기 전에 두 번째 재앙이 제국을 덮쳤다.

    “흐으으…… 사, 살려 줘.”

    앞선 첫 번째 재앙이 ‘죽어야 할 이들이 죽지 않아’ 생기는 공포였다면, 두 번째는 멀쩡하고 건강한 이들을 괴롭히는 알 수 없는 광증이었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초점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이들이 늘기 시작했다.

    밤이면 밤마다 잠든 이들의 꿈에 찾아와 괴롭혀 대는 존재들.

    누군가의 꿈에는 매몰차게 외면했던 사생아가, 또 다른 이의 꿈에는 화풀이 삼아 괴롭혔던 사용인이, 또는 욕심에 억지를 부려 강탈한 토지의 원래 주인이 방문했다.

    까맣게 잊어버렸던 자신의 ‘죄악’과 매일같이 마주하고 시달린 이들은 이윽고,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신벌이야……!”

    “연극에서 말한 그대로잖아. 이대로라면 세 번째 재앙이 들이닥칠 거야.”

    모두가 흥분하고 불안해했다.

    그들을 달래야 할 황제는 진작 보낸 전령마저 소식이 끊겼다는 보고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극단원들은 여전히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나?”

    “전부가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습니다. 진작 황도를 떠날 준비를 마치고서 연극을 올린 것으로 사료됩니다.”

    “하이클레어 가문에서는 일절 아는 것이 없다며 딱 잡아떼고 있으니…….”

    이 시점에 하이클레어 가문을 들쑤시는 것도 악수 중 악수였다. 안주인이 세상을 떠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이 사달을 수습할 사람들 또한 하이클레어뿐이니까.

    다들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연신 한숨을 내쉬던 황제가 멀리서 들려오는 기괴한 울음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황궁이라 하여 끔찍한 재앙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도대체 왜…….’

    정말 이것이 신벌이라면, 인간은 대체 어찌 대응해야 한단 말인가.

    눈을 질끈 감은 채 아무런 말이 없는 황제의 눈치를 살피던 몇몇 대신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혹여, 연극에서처럼 성녀께 기도를 올려 봐 주십사 청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조심스레 꺼낸 말에 옆에 있던 원로 귀족 중 하나가 버럭 반박했다.

    “지금 그 요망한 연극 따위를 따라 해 보자는 말이요?”

    “달리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목소리를 흐리는 이의 얼굴에도 확신은 없었다.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침묵하고 있는 황제의 앞에서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혹자는 혹세무민하는 연극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또 다른 쪽에서는 무엇이든 시도해 더 큰 피해와 혼란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자가 조금 더 우세한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 극에서는 선량하고 훌륭한 귀족들까지 싸잡아서 모조리 무능력하고 탐욕스러운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 않소! 마치 이 재앙이 우리 탓인 것처럼!”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정말 만의 하나라도 성녀가 기도를 올려 제국의 혼란을 잠재우게 된다면, 그 연극의 기저에 깔린 끔찍한 가정들을 모두가 진실로 받아들이게 될 테니까.

    “손쉽게 선동되는 어리석은 작자들이 헛바람이라도 들면 어찌 책임질 게요?”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스스로가 이 재앙을 불러온 원인으로 지목받고 싶지는 않으리라.

    쿠웅!

    그때, 줄곧 눈을 감고 있던 황제가 팔걸이를 거세게 내리쳤다.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고래고래 제 주장을 늘어놓던 이들이 겁먹은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가서 성녀를 모셔 오라.”

    “폐, 폐하!”

    경악에 가까운 부름에도 황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리고 착한 소녀를 정쟁 한가운데로 몰아넣는 짓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건만.

    일찍이 이러한 혼란이 올까 싶어 그는 수많은 불의에 눈을 감아 왔다.

    병약한 아들이 독에 당했을 때는 황권이 흔들릴까 싶어 사실을 덮었고, 채 성인이 되지 않은 아들을 전장으로 내몰았으며, 친우의 가슴에 못을 박아 가면서까지 안정을 추구해 왔었다.

    ‘……만일 이 모든 것이 도로테아 그 아이의 안배라면.’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그 전의 것들이 모두 ‘죄를 지은 자에게 합당한 처벌을’ 가하는 형태였다면, 지금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 재앙이 쏟아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문제를 앞에 둔 황제는 자신 또한 그 나름의 답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름진 미간을 매만지던 그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윌리엄도 불러오게. 그 아이와 대화를 좀 해야겠어.”

    *   *   *

    다급한 발걸음으로 성녀가 머무르는 별궁을 찾은 기사는 맞은편 복도에서 걸어오는 여인을 알아보고 반색했다.

    검은 드레스에 얼굴 위로 베일을 늘어뜨린 여인에게서 기품이 느껴졌다.

    기사, 로안은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녀가 걸어오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온 여인이 그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간 잘 지내셨나요, 로안 경.”

    넋을 놓고 있던 로안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비안 양.”

    가문이 사라졌으니 귀족 위라고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비공식적으로나마 성녀의 시중을 들고 있으니 존중하는 의미에서 ‘양’을 붙이고 있긴 하지만, 파비안은 여전히 죄인 신분이었다.

    “성녀님을 뵈러 오셨나요?”

    “폐하께서 모셔 오라 명하셨습니다.”

    잠시 말이 없던 파비안은 이내 몸을 돌렸다.

    로안은 아무런 말없이 걷기 시작하는 그녀의 뒤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선객이 있었던 것인지 좁은 문틈으로 두런두런 말소리와 까르르르, 해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흘러나오던 소리가 뚝 그쳤다.

    “로안 경께서 오셨습니다. 폐하께서 성녀님을 찾으십니다.”

    문이 열리자 그 안에는 인형처럼 곱게 차려입은 성녀, 힐데가르트가 발간 볼을 하고서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흘끗 주변을 살펴본 로안의 얼굴에 묘한 빛이 스쳤다.

    분명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렸는데.

    묘하게도 이 공간 안에 다른 이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두런두런 들려오던 말소리는 전부 성녀가 홀로 중얼거리던 거였단 말인가.

    “폐하께서 저를 부르고 계신가요?”

    천진난만한 목소리에 로안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제게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의 얼굴에는 특유의 때 묻지 않은 순진함이 그득 담겨 있었다. 어느 정도 상황을 아는 로안으로서는 착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성녀를 모셔 오라.’라는 황제의 명을 받고 온 만큼, 애써 웃으며 공손히 답했다.

    “예, 꼭 모셔 오라고 하명하셨습니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파비안이 기사의 얼굴을 기민하게 살폈다.

    황제는 늘그막에 생긴 양손녀를 꽤 예뻐했지만, 최근 수일째 함께 식사는커녕 얼굴조차 마주하지 못할 만큼 제국 내의 이상 현상들을 수습하느라 바빴다.

    그런 그가 이렇게 다짜고짜 힐데가르트를 부르다니, 분명 좋은 이유는 아닐 것이 뻔했다.

    기사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착잡함도 아마 그런 까닭이었겠지.

    로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사가 흘끗 제 눈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파비안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두 손을 포갠 채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어차피 결정은 그녀가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손님이 오셨군요.”

    부드럽지만 어딘가 서늘한 기운이 서린 목소리에 로안이 움찔했다.

    눈을 끔뻑이고 있던 힐데가 반색하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리.”

    “…….”

    언제 봐도 저 프란체스코를 ‘프리’라는 말도 안 되는 애칭으로 부르는 성녀의 천진난만함이 놀라울 따름이다.

    한때 신의 이름으로 손에 피가 마르지 않을 만큼 살육을 저지르고 다녔던 ‘사도’는 마치 어린아이를 돌보는 보모처럼 다정한 얼굴로 성녀를 마주했다.

    “폐하께서 제게 부탁할 일이 있으시대요.”

    “아하.”

    나직한 감탄사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 프란체스코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마치 예고된 방문이었음을 아는 사람처럼.

    “드디어 힐데 님을 찾으셨군요. 어리석은 사람들이란 눈앞의 정답을 두고도 한참을 돌아가고는 하지요.”

    에두른 비난에 로안이 내심 발끈했다.

    황제는 어린 성녀를 되도록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기에 망설였던 것뿐이었다.

    “아무런 염려도 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프란체스코가 소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모든 것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질 테니까요. 신의 뜻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하십니다.”

    그의 말속에 녹아든 광기에 가까운 확신에 로안이 불편한 듯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그랬지만 신을 향한 사도의 무모하고 일방적인 경외는 곁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몹시 이질적이고 기괴한 느낌을 자아냈다.

    ‘신 앞에서는 교황조차도 미물이라 여기는 자이니.’

    한숨을 삼킨 로안은 온순한 얼굴을 한 성녀를 황제에게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기사의 뒤를 따르는 성녀와 그녀의 시중을 드는 파비안, 그리고 마지막으로 응접실을 나오던 프란체스코가 가늘게 눈을 뜨고서 아무도 없는 방을 흘끔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닫힌 문 뒤로 무언가가 토도도도 방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소리가 들렸지만 모른 척했다.

    이제 곧 성녀의 기도에 따라 기적이 이 제국에 내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을 믿지 못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흘리던 어리석고 미개한 인간들도 하나같이 경외에 차 무릎을 꿇겠지.

    무엇보다도 본인이 신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양 고개를 뻣뻣하게 드는 교황이나, 그런 교황을 신의 분신처럼 취급하는 어리석은 주교들의 성가신 입을 닥치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그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아아, 실로 기쁘지 않을 수 없구나.

    아름다운 얼굴에 서린 은은한 미소와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바라본 파비안은 침묵을 유지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살아오면서 만난 인간들 중에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는 X라이가 딱 둘 있었다.

    웃을 때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드는 인물과, 웃을 때면 또 시작이구나 싶어 한숨을 삼키게 만드는 인물.

    프란체스코는 그중 후자에 속했다.

    창백하기만 하던 얼굴에 웬일로 혈색이 도는 것을 보아하니 무언가 일이 생기긴 할 모양이었다.

    “하아.”

    황홀한 듯 뱉어 내는 숨소리에 파비안이 조용히 귀를 틀어막았다.

    *   *   *

    온통 희뿌옇게 가린 시야와 귓속을 가득 채운 날카롭고 높은 비명은 루크에게 약간의 잡념도 허락하지 않았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꽉 들어찬’ 방해 공작이 그를 죄였다.

    마치 사냥감을 뒤덮은 그물이 그러할까.

    사방이 촘촘하게 짜인 방해 속에서 발버둥조차 치지 못할 만큼 무기력했다.

    그 순간, 어지럽게 만드는 잡음을 뚫고 들어오는 선명한 누군가의 목소리.

    “생각보다 얌전히 있었네?”

    “…….”

    흐릿하게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안개가 천천히 걷히기 시작했다.

    도로테아는 싱글거리며 그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놀랍군.”

    “응? 뭐가?”

    “내 앞에 목을 들이미는 것이 놀랍다고. 그 조그만 목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리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하는 건가?”

    “많이 화났구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주억거리며 건넨 다정한 목소리에 그가 답하려는 찰나, 기척 하나 없던 뒤에서 답이 들려왔다.

    -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분노하는 거다. 내내 숨 한 번 돌리지 못하고 일만 해도 죽어나는 상황에서 무려 하루 반나절이나 ‘일을 멈추라’니. 이미 밖은 네 그 말도 안 되는 요구 탓에 혼란이 극에 달했다. 명계의 주인께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실 만큼!

    “하루 반나절이나 쉰 거네, 내 덕분에. 오랜만의 휴식에 감격해서 우셨을 거야.”

    - 이, 이런 무뢰배 같은 계집!

    억울함에 가슴을 텅텅 치는 사신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크는 화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숨이 붙어 있지도 않은 존재마저 화병으로 가슴을 쥐어뜯게 만드는 것이 저 계집이었다.

    분노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는 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 이제 당신도 밀린 일을 하러 가야지. 내 귀여운 아이가 지금쯤 기도를 올리고 있을 테니, 신의 사자로서 그 간절한 기도에 응해 주어야 하지 않겠니?”

    사신은 살기를 가득 담아 도로테아를 노려보는가 싶더니 이내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다.

    그의 주변에 어른거리던 희뿌연 것들 또한 함께 거두어 갔는지, ‘눈’을 개방하고 거의 처음으로 깨끗한 주변이 시야에 들어왔다.

    “닫아 줄까?”

    도로테아가 가볍게 물었다.

    구태의연하게 무엇을, 하고 물을 까닭은 없었다.

    그녀가 닫고자 하는 것은 아마도 하나뿐일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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