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숲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나는 동안, 고요한 밤의 정적이 내려앉은 막사의 안은 평화로웠다.
‘잠자리가 사납다.’는 이유로 오빠를 내쫓아낸 매정한 여동생 탓에 당분간 메릴린과 함께 잠을 청하게 된 스탠은 좀처럼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좀처럼 잠에 들지 못하는 아이를 토닥이며 재우느라 눈 밑이 그늘진 메릴린이 슬쩍 스탠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다행히도 아이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삼킨 메릴린이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막사 밖으로 나오자,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던 데인이 반색했다.
“오늘은 일찍 잠들었군요.”
“그러게요. 잠을 설치는 게 아이에게는 좋지 않으니까요.”
“영애께는 정말이지 면목이 없습니다.”
“괜찮아요. 애초에 데인 경에게 그런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답니다.”
아픈 여동생 걱정에 잠을 못 이루는 소년에게, ‘잡념을 떨치는 데는 수련이 최선’이라며 오밤중에 목검을 쥐여 준 인간 따위를 어찌 믿고.
메릴린의 쌀쌀맞은 말에 데인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 제가 어렸을 때에는 즉효였거든요.”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돌아오면 그대로 잠이 솔솔 오던 경험에 근거해서 권한 거였는데.
“됐어요. 그 방식이라면 듣고 싶지 않아요.”
메릴린의 단호한 거절에 데인이 깨갱, 하고 입을 다물었다.
“도로테…… 아니, 사라는요?”
여전히 착각 속에 빠져 있는 남자 덕에 메릴린마저 누구를 도로테아라고 칭해야 하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메릴린의 물음에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던 데인이 냉큼 답했다.
“그 소녀라면, 테아와 함께 숲에 들어갔습니다.”
“숲을요?!”
“걱정 마십시오. 아시잖습니까. 메릴린 영애께서 그 숲의 원흉을 잡은 이후로, 더 이상 기괴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마 단순히 탐험하러 갔을 겁니다.”
“무슨 헛소리예요. 둘이서 한밤중에 숲엘 들어갔다는데!”
“깊은 밤, 숲속을 탐험하는 건 원래 어린 시절 누구나 꾸는 꿈이 아닙니까.”
너나 꿔, 그 꿈.
메릴린이 뻣뻣하게 굳은 뒷목을 매만지며 한숨을 삼켰다.
평소라면 도로테아가 무슨 일을 하든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최근의 행보가 마음에 걸렸다.
‘키엘 스펜서, 그 인간도 그렇고…… ‘
자꾸만 그윽한 눈을 하고 자신을 바라본다든가, 사람들이 가득한 자리에서 쓸데없이 친근한 태도를 보인다든가 하는 그의 행동은 분명 어떤 ‘의도’를 갖고 행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계산적인 인간이 아무런 의미 없이 수고를 들일 리가 없으니까.
그런 그에게 자극을 받은 것인지 다른 이들까지 쓸데없는 경쟁 심리에 휘말려 못살게 구는 통에 요즘 도로테아 쪽을 신경 쓰기가 영 어렵던 차였다.
“정 걱정이 되신다면 제가 테아를 찾아보겠습니다. 너무 염려하지 말고 영애께서는 잠을 청하러 가시는 것이 좋겠군요. 가뜩이나 스펜서 백작에게 시달려 많이 피곤하실 터이니.”
뜻밖의 제안에 메릴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고 있었어요?”
“그가 일부러 당신에게 마음이 있는 척, 다른 이들이 구혼하게끔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이라면, 모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 모든 곳에서 둔하면서 왜 이런 부분은 또 멀쩡한데.
편견이든 눈치든 지나칠 정도로 없는 인간이라며 남몰래 가슴을 치던 세월이 얼마인데…… 친우의 사촌이 가진 뜻밖의 일면에 놀란 메릴린이 빤히 바라보자, 데인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곤란한 사정을 알고 있는데도 도움을 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
“그렇지만, 제가 도움을 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제가 끼어들어 말을 보탠다면, 그것은 영애를 ‘이득을 가져올 혼인 상대’로만 보는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게 여겨질 것 같아서요. 제 도움이, 오히려 이 자리에 선 영애를 모욕하는 일이라고 봤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메릴린이 눈을 끔뻑였다.
최근 그녀와 마주하는 수많은 기사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달콤한 목소리로 ‘여심을 자극할 수 있는’ 말들을 쏟아 냈다.
마치 먹이를 바라보는 맹수처럼 굶주리고 욕망에 가득 찬 눈을 한 주제에.
그런 자신에게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니 청하지도 않는 도움을 건네는 건 그대를 모욕하는 것 같아 자제했다.’라는 데인의 말이, 몹시 신선하게 느껴졌다.
잠시 말이 없던 메릴린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를 그리 높게 보실 필요는 없어요. 저는 도로테아 영애처럼 특별한 힘을 가진 것도 아니고, 겨우겨우 스승님의 훈련을 따라가긴 했지만 사실 발레리 영애보다도 더 둔하고 체력도 약한 편이었잖아요.”
중간에 발레리가 멀리 떠나지만 않았어도, 두 사람 사이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을 터.
메릴린이 세웠다는 큰 공조차도 도로테아의 입김이 닿아 있지 않았던가.
그런 그녀의 나직한 말에 데인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저는 결국, 가장 큰 무기는 노력이라고 봅니다. 발레리 영애가 민첩하고 날렵한 편이라거나 병법을 좀 더 쉽게 이해하는 머리를 가졌다고 해서 그녀가 지금의 메릴린 영애보다 더 뛰어나진 않습니다.”
“…….”
“그리고 테아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음에도 늘 영애를 찾는 것은, 그 애가 오롯하게 홀로 모든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만큼 영애를 신뢰하고 믿는다는 증거가 될 테지요.”
물 흐르듯 매끄러운 답에 메릴린은 내심 놀란 듯 데인을 바라봤다.
늘 반쯤 장난스러운 기색을 덧붙인 키엘과는 달리 진심이 가득 어린 데인의 말은 확실히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식히던 그 순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영애.”
“네?”
“새벽에 함께 근력 운동을 했으면 합니다. 영애는 몸에 익힌 체술을 응용하는 것에 능숙하지만, 정작 기술을 뒷받침할 근력이 부족해 전투를 장기적으로 끌고 나가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
그래, 이 남자에게 대체 내가 뭘 바랐던가.
으슥한 밤, 고즈넉한 분위기 속 메릴린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 갔다.
어느새 그녀의 머릿속에서 도로테아를 걱정하는 마음 따위는 깡그리 사라진 뒤였다.
* * *
본의 아니게 진지(陣地)를 점검하다 대화를 듣게 된 후작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음 같아서는 한숨이라도 크게 내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저 망아지 같은 손자 놈이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서 냉큼 ‘할아버지!’라며 큰 소리로 불러 댈 테지.
그런 후작의 표정을 가만히 살피던 벤이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 옆에서 에이든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멍청한 놈 같으니.”
후작도, 벤도 놀란 얼굴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에이든을 바라봤다.
설마하니 젊은 데인에게도 없는 눈치라는 것이 그에게 생긴 것인가.
어쩌면 후작 부인이 그렇게도 바라던, 에이든이 성혼하는 장면을 죽기 전에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이든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근력 운동을 하자고 권하면 안 되지. 그건 기본 중의 기본이니 알아서 하게끔 두고, 개인 훈련이 가능한 새벽 시간에는 체술에 맞는 무기를 다룰 수 있게끔 대련을 중점적으로 하자고 권했어야지.”
“…….”
잠시 피어올랐던 희망의 불꽃이 새까만 재로 뒤덮이는 것을 확인한 후작은 눈을 질끈 감으며 뒷목을 잡았다.
“황도로 보낸 전령의 복귀가 늦어지고 있다는 것을 반가워하게 될 줄이야…….”
매일같이 일상을 적어 보내고는 있지만, 오늘의 이 우연한 대화와 아들놈의 반응을 써서 보내는 일만큼은 내키지가 않았다.
서신을 읽고서 실망할 부인을 떠올리니, 더더욱 그랬다.
착잡한 얼굴을 해 보인 후작이 고개를 돌려 벤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주변에 별다른 일은 없어 보이는데, 좀 더 돌아볼 생각인 겐가?”
좀처럼 의견을 내지 않는 벤이 진지 순회를 제안한 덕에 나오긴 했지만 별다른 낌새는 없어 보였다.
후작에 말에 잠시 멈칫한 벤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리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나저나, 발레리의 막사에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더군요.”
“그 아이야 뭐 이래저래 바쁠 수밖에 없지. 망국의 생존자들은 이곳 막사를 사용할 수 없으니, 그들이 모여 있는 곳에 들른 것 아니겠나.”
망국이라고는 하나 한때 왕녀였다는 사실로 대우받을 수 있는 것은 발레리와, 그녀의 측근인 그리엄과 프리드 두 사람뿐이었다.
“진심으로 아끼는 듯 보이더군. 마음을 둘 곳이 생겨 다행이지.”
나직한 후작의 말에 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먼 곳을 바라봤다.
흔히 무소식은 희소식이라고들 많이 말하지만, 지금의 평화로운 분위기는 어딘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가득 담고 있었다.
‘부디 그저 내 불안일 뿐이었으면 좋으련만.’
폭풍 전야 같은 고요하고 평온한 밤이었다.
* * *
그 시각, 발레리는 후작의 짐작과는 다른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황도에서 연합군 사령부가 있는 본진으로 향한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아르투아 영지의 길목에.
조세핀 아르투아가 군법에 의거하여 처형되고 난 뒤, 아르투아 가문은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주마저도 저택에 연금되어 있는 터라 영지 전체의 분위기가 삭막하고 흉흉했다.
특히 치안이 좋지 않은 밤에는, 순찰을 돌아야 할 기사들조차 얼씬하지 않는 길이었다.
길 위에 가만히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듯, 멀리 지켜보고 있던 발레리의 시야에 점차 까만 점처럼 보이는 형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말을 재촉해 달려오던 전령은, 눈앞에 보이는 낯선 이들을 보고 잔뜩 경계하다 발레리가 손에 쥔 통행증을 보고 반색했다.
비틀대며 말에서 내린 그가 창백한 얼굴로 헐떡이며 물었다.
“연합군 소속입니까?”
“네, 그렇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한 발레리가 뒤에 있는 프리드를 향해 손짓했다.
“경, 이분께 물을 좀 건네 드리세요. 갈증이 심하신 것 같으니까요.”
건네진 물을 벌컥벌컥 마신 전령은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입을 열었다.
명을 받기가 무섭게 다급히 이곳까지 달려온 통에 그는 어쩌다 연합군에 여인이 속해 있는지, 그녀가 어찌 알고 길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왜 여인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지 못했다.
“당장, 당장 후작 각하를 봬야 합니다.”
“하이클레어 후작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전령이 목이 떨어져 나가라 격하게 끄덕이며 말했다.
“폐하께서 당장 회군을 명하셨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린 발레리가 의아하다는 듯 반박했다.
“아직 요새를 탈환하기는커녕, 상대가 어느 정도 규모를 갖췄는지도 온전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인데 물러서라니요. 기껏 연합군을 조직해 놓고 빈손으로 돌아가기엔…….”
“황도에 큰 재앙이 닥쳤습니다!”
남자가 발레리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말을 끊었다.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단순히 무리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더듬더듬 기억을 떠올리는 그의 얼굴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공포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그곳은 지금 지옥이요. 지옥이 따로 없소.”
입을 다문 채 남자를 지그시 바라보던 발레리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느릿하게 물었다.
“혹시 죽어야 할 사람들이 되살아난다든가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나요?”
“어, 어찌 알았소?!”
“되살아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공격적이고 이상한 행동을 하고요?”
“그렇소!”
“가축들이 갑자기 날뛰기 시작하면서, 쥐나 개와 같은 짐승들이 사람을 물기도 하나요?”
고개를 끄덕이던 전령이 마지막 물음에는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반응을 확인한 발레리가 중얼거렸다.
“아직 두 번째 재앙은 오지 않은 건가.”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여인의 말에 당황한 전령과는 달리 태연하게 남자를 바라보던 발레리가 싱긋 웃었다.
“그 말을 전하러 오신 것이라면,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저희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뭐……?”
황도에서 온 전령은 가장 늦은 편에 속했다.
아마도 마법사의 존재를 믿고 있다가, 연락망이 엉망이 되고 나서야 부랴부랴 사람을 보냈기 때문이 아닐까.
발레리의 말을 곱씹어 보던 전령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진작부터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도 어찌 회군하여 돌아오지 않은 것이요?”
“간단하지요. 황도로 돌아가, 다른 이들의 방패막이 노릇을 하기에는 이곳에 내던져진 귀한 목숨들이 아까웠기 때문이랍니다.”
물 흐르듯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전령이 눈을 부릅떴다.
“설마하니, 당신네가 꾸민 짓이요?”
황도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아비규환의 지옥 속에서 모두가 허우적대고 있을 때 여유롭게 들어와 황제를 끌어내리고 제국을 삼키려고?
전령의 말에 발레리가 풉, 하고 웃었다.
“상상력도 풍부하셔라.”
“…….”
“이깟 제국을 가져서 무엇 하게요? 괜히 골치나 아프고 쓸데없이 속만 쓰리지.”
상한 것을 삼켰다가 속이 망가지면 어쩌려고.
그녀의 말에 전령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을 절며 다시 물었다.
“그, 그렇다면…… 본인들이 꾸미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이 소식을 내가 전해 주는 것보다도, 더 빨리…….”
“간단하답니다.”
발레리가 생긋 웃으며 자신의 옆에 있는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입을 틀어막힌 채 손발이 꽁꽁 묶여 있는 사람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여기 계신 분들도 각각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참변을 알려 주셨기 때문이지요. 희한하게도 재앙은 가장 밑바닥이 아니라, 가진 것들이 넘쳐흐르는 이들을 덮쳤다지요?”
“…….”
“발버둥 치는 김에 겸사겸사 본인들의 원죄를 생각해 보면 좋으련만.”
한숨을 푹 쉰 발레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실 리는 없겠지요.”
“도대체, 무슨 짓을…… 무슨 말을…….”
“염려 마세요. 필요할 때가 되면 돌아갈 테니까요.”
그녀의 말을 끝으로 뒤에 있던 프리드가 조용히 전령을 기절시켜 마차로 질질 끌고 갔다.
마지막 전령이 마차에 실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발레리가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무표정한 얼굴로 이곳을 향해 저벅저벅 홀로 걸어오는 도로테아가 보였다.
“수고했어. 찰거머리 같은 황자를 떼어 내느라 힘들었겠다.”
“사람들은?”
“모조리 다 여기 있지. 당분간은 황도의 사정이나 다른 연합국의 사정이 후작님의 귀로 흘러들어가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거야.”
발레리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도로테아가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닫힌 마차 문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리엄을 황도로 보내도록 할 거야. 그의 절박함은 이용하기가 쉬우니까.”
마치 선전 포고라도 하는 양 나직한 통보에 발레리가 웃었다.
신경 쓰지 않는 척 담담히 말하고 있지만, 이렇게 굳이 입 밖으로 먼저 말을 건네는 것부터가 발레리의 입장을 몹시 신경 쓰는 것과 다름없었다.
“괜찮아, 테아. 내가 그들을 아끼는 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허상 위에 세워진 관계인걸.”
왕녀를 사칭하고 있음이 드러나는 순간 깨어질, 위태로운 관계에 불과했다.
발레리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내가 언제 단 한 번이라도 너를 저버린 적이 있었니?”
네 바람을 이루어 주기 위해 늘 최선을 다했잖니.
“나는 네 편이야.”
다정하고 사근사근한 발레리의 말에 도로테아는 그저 침묵으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