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술사 도로테아-217화 (217/242)
  • 217화

    코제트는 장례를 치르기가 무섭게 연극을 관람하자는 남편의 제의가 몹시 뜬금없다고 여기면서도, 순순히 승낙했다.

    모두가 익히 짐작하고 있었으며, 오랜 준비를 거쳐 순리처럼 받아들인 죽음이었다고 해서 서글픔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담담하게 상황을 정리한 그녀의 마음 한편에도 숨길 수 없는 허전함이 존재했다.

    후작 부인은 그런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저택을 지탱해 주는 뿌리였으니까.

    그렇기에 기분 전환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생각은 했었으나.

    “설마하니 먼저 외출을 하자고 권할 줄은 몰랐지만요.”

    흘끗 부인을 바라본 콜린이 눈을 내리깔더니 나직이 말했다.

    “좀 더 그럴듯하게 입고 나가도 상관없소.”

    이미 장례는 끝난 상황에서 극장에서까지 애도를 보여 줄 까닭은 없었다.

    수수한 차림새에 감색 숄을 두른 코제트가 웃었다.

    “치장해 봤자 거추장할 뿐이에요. 딱히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 나가는 자리도 아닌걸요.”

    무뚝뚝한 남편은 그렇다면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테아가 고대 신화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최근에 올렸던 극이 약혼녀의 친구를 사랑하고만 어느 청년의 고뇌와 그로 인해 이어지는 두 가문의 파국으로 치닫는 자극적인 통속극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코제트의 속삭임에 말없이 무대에 시선을 고정한 콜린의 얼굴에는 묘한 그늘이 서려 있었다.

    막이 오르고, 이윽고 극이 시작되었다.

    “태초에 이 땅의 혼란을 바로잡고자 내려왔던 신들이 모두 떠날 적, 홀로 남겨진 어린 신이 하나 있었습니다.”

    레번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 극은 이제까지 무대 위에 올랐던 이야기들과는 달랐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인공에게 집중되어 있는 서사보다는 생소한 고대의 신화를 집중 조명하고 있었다.

    그 탓에 평소처럼 연극을 관람하러 왔던 관객들 사이에서는 수군거림이 일었지만, 들어 본 적 없는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는지 조금씩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버림받아 홀로 이 땅에 남겨진 신은 오랜 시간에 걸쳐 스스로를 잃어 갔답니다.”

    이미 세계를 떠난 신들에게 버림받고, 사람들에게 잊힌 가여운 신은 조각조각 나뉘어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바로 그때, 신의 조각을 주워 망자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인간들이 있었지요. 그들은 스스로가 신에게 선택받았다고 여겼습니다.”

    망자들의 넋을 부릴 수 있게 된 이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떨치고, 그 힘의 위대함을 다른 인간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의 질서를 다시 세우기로 했지요.”

    죽음과 생의 경계가 옅어지게끔.

    그리하여 죽음을 다루는 이들이 세계의 질서를 다시 세울 수 있게끔.

    “이변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오고 있었습니다. 다들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뿐.”

    황도에서 사람들 입에 이따금 오르내리던 괴담들이 생생하게 무대 위에 펼쳐졌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늘 물이 가득한 웅덩이부터, 때 아닌 계절에 피어나던 붉은색 수국,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는 도플갱어와 같은 존재들.

    “이건…….”

    극을 보고 있던 코제트가 무대에서 눈을 떼고 걱정스레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렇잖아도, 얼굴에 불쾌한 기색을 가득 담은 몇몇 귀족들이 자리를 뜨는 것이 보였다.

    지불한 돈이 아까웠던 탓인지, 이 기괴한 극의 결말을 알고 싶은 탓인지 마지못해 자리에 남아 있는 이들도 그리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지는 않았다.

    “도대체 무슨 극이 이렇죠?”

    “끔찍하기도 하지.”

    “이런 극을 보려고 돈을 낸 것은 아닌데요.”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듣고 있던 코제트가 극이 시작될 때부터 눈에 띄게 굳어 있던 콜린을 향해 속삭였다.

    “여보.”

    그녀의 부름에도 콜린은 무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닦아 가며 나레이션을 이어 가는 레번이 눈에 들어왔다.

    그 누구보다 관객들의 반응에 민감한 레번이 이런 불쾌한 극을 만들어 올렸을 리는 없으니, 아마도 도로테아의 입김이 들어갔으리라.

    도대체 왜?

    무슨 의도로?

    그녀처럼 영민한 인물이 사람들의 차가운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을 텐데.

    무대를 노려보는 콜린의 눈이 흉흉한 것을 본 코제트가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잡았다.

    아주 잠시였지만 아내에게 고개를 돌린 콜린이 말없이, 손을 맞잡아 주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레번의 목소리가 극장에 울려 퍼졌다.

    “바로 목 아래까지 위협이 차오르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그저 눈앞의 자그마한 것들에 매달린 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사소한 것들에 목숨을 걸었고, 내가 아닌 자의 불행을 디딤돌 삼아 더욱 욕심에 박차를 가했으며, 자신보다 못한 이들을 짓밟아 스스로의 배를 채우느라 급급했기에.

    “이윽고, 첫 번째 재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어디선가 소름이 끼치도록 기괴한 울음소리가 극장을 뒤흔들었다.

    “죽음을 맞이해야 할 이들이, 죽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병들어 몸이 썩어 들어가는 와중에도 숨이 끊어지지 않는 사람.

    목이 꺾인 끔찍한 사고에서도 숨이 멎지 않고 살아남아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

    사형대에 올라 목이 날아갔음에도 죽지 못하는 범죄자.

    끔찍한 광경에 그나마 자리에 남아 있던 이들도 진저리를 치고서 일어났다.

    줄곧 무대를 노려보던 콜린 또한, 자리를 박찬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여보?”

    목소리에 담긴 불안함을 읽어 낸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차분히 가라앉은 눈이 코제트를 향했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지.”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코제트를 이끈 그가 덧붙였다.

    “봐야 할 것은 다 본 것 같으니까.”

    잊히고 사라져야 할 ‘신’을, 그들의 치부를 낱낱이 극에 올리다니.

    이 무슨 오만함인가.

    필립의 말이 옳았다.

    도로테아는 폭주하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코제트를 에스코트하여 저택으로 향하는 그의 머릿속에 후작 부인을 마중 나왔던 옛 동료가 떠올랐다.

    망자의 넋을 무사히 강 건너로 데려가 주겠다며 호언장담을 하더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무래도 그를 불러 물어볼 것이 많을 것 같았다.

    급히 극장을 빠져나가는 그의 뒤로, 레번의 말이 이어졌다.

    “연이어 더욱 끔찍하고 잔혹한 일들이, 이제껏 모든 문제들을 아랫사람들에게로 미루어 왔던 이들에게로 쏟아졌습니다. 권리만 누리고자 하고 책임조차 지지 않았던 이들을 향한 ‘천벌’은 이제야 막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   *   *

    어두운 밤, 곤히 잠들어야 할 도로테아의 몸이 들썩였다.

    막사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붙이고 있던 루크가 눈을 떴다.

    “잠을 청하고 싶다면 오늘밤은 나와 함께 있지 않는 것이 좋아.”

    “…….”

    “차라리 데인에게 신세를 지는 것은 어때? 그도 싫다면 스펜서 백작을 겁박해 자리를 강탈할 수도 있지 않을까?”

    “헛소리.”

    “진심인데. 어지간히 잠귀가 어둡지 않은 이상, 밤새도록 잠을 설치게 될 걸?”

    옅은 미소와 함께 던진 의미심장한 말은 이런 의미였던가.

    하기야, 적어도 일주일 이상을 기다려야 원래의 ‘눈’을 되찾을 수 있다던 그녀가 다시 사신을 보고 대화까지 나눌 수 있게 된 것부터가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루크는 부정을 뒤집어쓴 상황에서 금기(禁忌)를 범하기까지 했다던 사신의 말을 떠올렸다.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던 사신의 경고에도, 그녀는 담담한 기색이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데 이 정도 대가라면 싸게 치렀다고 봐야지.”

    그저, 그렇게 읊조리며 술잔 가득 따랐던 술을 바닥에 흘려보냈을 뿐이다.

    루크는 가라앉은 눈으로, 이부자리에 누워서 바르르 떠는 자그마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촛불에 의지해 미미하게 비친 소녀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심상찮아 보였다.

    이마에 맺혔다 흘러내린 식은땀이 주변 이부자리를 축축하게 적셨다. 안색은 파리했고, 벙긋벙긋 벌어지는 입술 새로 가쁜 숨이 새어 나왔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는 몰라도 차라리 흔들어 깨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을 만큼, 자그마한 몸은 필사적으로 고통을 참아 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독하게 신음 한 번 뱉질 않는군.’

    마치 이런 고통에 익숙하기라도 한 것처럼.

    꽤 오랜 시간, 아무 말 없이 도로테아를 바라보기만 하던 루크가 손을 뻗었다.

    이마 위로 손을 얹자, 불덩이처럼 뜨거운 체온이 닿은 살결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곁에 있는 것이야 네 자유니 말리지 않을 테지만, 의원이나 신관은 부르지 않길 바라.”

    “…….”

    “어차피 아무런 소용도 없을 거야. 오히려 괜한 소란만 일으키게 될걸. 그들은 본인의 힘이 통하지 않는 존재를 마냥 그렇구나, 납득하고 넘기지 않을 테니까.”

    도로테아가 다시 한번 몸을 뒤척이며 가쁜 숨을 토해 내자, 이마에서 손을 떼고서 노려보던 루크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   *   *

    “아이가, 자는 내내 식은땀을 흘린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악몽을 꾸는 건지 안색이 좋지 못하다.”

    다짜고짜 찾아온 황자 덕분에 잠에서 깬 벤이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신관을 부르시지요.”

    “소용이 없다더군.”

    하기야, 꿈자리가 사나운 일로 신관을 불러 축복을 종용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긴 했다.

    다만 어째서 황자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을 불러내는 지 그 연유를 알 수 없어 당황했을 뿐이지.

    ‘그 아이와 나는 별달리 접점도 없음을 모르셨던가.’

    게다가 어린 소녀라면 차라리 여성인 메릴린을 부르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에게 딸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일지도. 이 황자에게 그런 섬세함까지 있었던가 싶긴 했지만.

    머뭇거리던 것도 잠시, 얇은 외투를 걸친 벤이 루크의 뒤를 따랐다.

    막사를 걷고 불을 밝히자 식은땀으로 푹 절여진 어린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로 다가가 상태를 확인한 벤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고개를 들어 물었다.

    “이런, 얼마나 오래 이러고 있었던 겁니까?”

    “글쎄, 적어도 서너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하다못해 땀이라도 닦아 주지 그러셨습니까.”

    벤의 타박에 루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설마하니 아픈 소녀를 이렇게까지 방치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벤이 한숨을 쉬었다.

    “천에 찬물을 적셔 가져다주시겠습니까.”

    “……내게 하는 말인가?”

    “기왕이면 창고에 들러 아래에 깔 만한 두꺼운 모포도 가져다주십시오.”

    자연스레 명을 내린 벤이 엄한 얼굴로 루크를 바라봤다.

    이것이 아비의 박력인가.

    잠시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 자리에 서 있던 루크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서둘러 주시지요.”

    짤막한 덧붙임에 잠시 멈칫했던 황자가 빠르게 막사에서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벤은 곁에 있던 물로 아이의 메마른 입술을 조금이나마 축여 주며 주변을 살폈다.

    막사 안은 독한 술 냄새로 진동했다.

    “아이가 이 지경이 되도록 바라보며 술만 드셨단 말인가.”

    육아하고는 거리가 먼 황자라지만 어찌 이렇게까지 아픈 소녀를 방치할 수 있나.

    꾹 다물린 벤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연이어 새어 나왔다.

    그때, 뒤척이던 도로테아의 눈이 가늘게나마 뜨였다.

    흐릿하게 초점이 없는 눈동자가 이곳저곳을 헤매다 벤을 향해 고정되었다.

    새까만 눈동자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깼니?”

    몹시도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 게, 아파서 끙끙 앓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이 그리 친분이 깊지도 않은 낯선 중년의 남자라면 어린아이로서는 겁을 먹을 것이 뻔해 보였기 때문이다.

    “황자 전하께서는 너를 위해 새로운 모포를 가지러 가셨단다. 곧 돌아오실 게야.”

    그의 말을 이해한 덕인지, 아니면 그저 눈앞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안심한 것인지 소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껏 마주칠 때마다 늘 슬쩍 피하거나 낯을 가리듯 누군가의 뒤로 숨어드는 모습만 봐 왔던 벤으로서는 처음 마주하는 친근한 미소였다.

    마치 오래도록 알아 온 사람을 보는 듯, 내비치는 미소에 잠시 멈칫했던 벤이 엉망으로 뻗친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다정한 손길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던 소녀가 거칠고 커다란 손에 뺨을 비볐다.

    오죽하면 별다른 친분도 없는 제게 이토록 친근하게 굴까.

    벤이 안쓰럽다는 듯 물었다.

    “나쁜 꿈을 꾼 모양이로구나.”

    “네.”

    “무슨 꿈이었기에?”

    “제가 한 나쁜 선택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꿈이요.”

    “나쁜 선택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늘고 희미한 목소리가 그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사랑받고 싶어서 다른 사람인 척 흉내 내어 보신 적 있으세요?”

    몹시도 뜬금없는 말에 벤이 눈을 끔뻑거렸다.

    “글쎄다.”

    “저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다른 사람이 되려고 엄청 노력했어요.”

    평범하고 귀여운 손녀가 되고 싶었다.

    가진 힘을 감추고, 훨씬 빠르게 갈 수 있는 길도 한참을 에둘러 다다랐다.

    차의 아리고 쓴맛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후작 부인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거워 몇 번이고 주전자가 비도록 마신 적도 있었다.

    “온전한 저로는 사랑받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스스로를 감췄어요.”

    그녀를 낳고 기른 친부모조차도 사랑해 주지 않았던 명재신의 괴물 같은 능력.

    그 힘에 기대어 부와 명예, 지위를 누리면서도 그 힘을 불쾌히 여기고 두려워했던 가족들.

    친혈육조차도 그럴진대, 실상을 알게 된 이곳의 가족들은 어떠할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온전히 다 내보일 수가 없었다.

    범상치 않게 여겨지는 힘도, 다른 이들이 ‘용인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치만 보였더랬다.

    “그런데 그분은 일부러 숨기고 감춰 둔 제 모습을 다 보고도스스로를 내던져 절 구해 주셨어요.”

    산산이 부서져 땅으로, 바람으로, 강물로 녹아든 그녀의 혼이 다시금 윤회의 고리 안에 들어가기까지는 억겁의 시간이 지나도 모자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가 있었지. 내가 누군지 알고도.”

    처음에는 분명 벤을 향해 건네던 말이 점차 혼잣말로 바뀌었다.

    소녀의 두서없는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벤이 그녀의 축축이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힘없이 눈을 깜빡거리던 도로테아가 이어 중얼거렸다.

    “수많은 죽음들을 마주하고 의연했으니, 이번에도 그러리라 자신했어요. 마음이 아프긴 해도 그뿐이리라 생각했는데…….”

    잠시 뜸을 들이듯 말을 잇지 못하던 도로테아가 툭, 하고 내뱉었다.

    “잃는 것이 무서워요.”

    “…….”

    “잃어버리고 남은 빈자리의 허전함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다른 이들을 향해 분노하고, 탓하고, 나와 같은 고통을 겪기를 바라게 돼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쉽게 여겼다.

    흉내를 내다 보면 그것이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랑하는 이를 잃는 고통을 겪으며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무섭고 두려워요.”

    감정을 깨우쳐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일이.

    “나쁜 아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늘 제 좋은 점을 찾아주시니, 그것만 보여 드려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 아무래도 나쁜 아이가 될 것 같아요.

    갑갑하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내리누르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잠꼬대처럼 웅얼거리는 말을 가만히 듣던 벤의 뒤로 모포를 챙겨 온 루크가 다가섰다.

    “수고하셨습니다.”

    모포를 받아 든 벤이 땀으로 젖은 잠자리를 정리해 주고는 아이를 눕히며 다정히 토닥였다.

    또 아이가 몸살이라도 날까 싶어 팔도 모포 안으로 넣어 주려던 그때, 벤의 눈이 굽어진 엄지로 향했다.

    그의 딸이 깊이 잠들 때면 보이곤 하는, 벤에게는 몹시 익숙한 잠버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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