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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216화 (216/242)
  • 216화

    두런두런 들려오던 막사 안의 말소리가 어느 순간 뚝 그쳤다.

    졸지에 제 막사에서 쫓겨난 셈이 된 루크는 문가에 가만히 기대 선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라도 잔뜩 낀 것일까.

    오늘따라 유독 어둑한 것이, 하늘을 밝히던 별의 수가 적었다.

    그때 무언가 희끄무레한 것이 불쑥 나타나 그의 시야를 가렸다.

    도로테아의 정령이었다.

    “숲에서는 코빼기도 내비치질 않더니.”

    그림자가 삽질에 여념이 없을 때만 해도 간간이 주변을 맴돌던 정령은 의식이 시작되고부터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다.

    “왜 저 녀석이 위험할 때 나서지 않았지?”

    설마하니 대신 저주를 받을 후작 부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인가.

    루크의 물음에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생글거리던 정령이 별안간 빙그르르 돌더니 이내 그의 어깨에 안착했다.

    서늘한 감촉과 동시에, 불쾌할 정도로 귀를 가득 메우던 소리들이 옅어졌다.

    “넌 도대체 뭐지?”

    도로테아가 말하기를 태초부터 자연의 기운을 타고나지는 않았으나, 자연스레 그 기운을 입고 물의 기운을 띠게 된 ‘만들어진 정령’이라고 했다.

    한때 인간이었을지도 모르나 이제는 자신의 이름조차 잊고 정령이 된 존재라고.

    “정말로 기억을 잃었나?”

    하는 행동에 모습만 보아도, 영락없는 어린아이 같긴 했지만…….

    가끔 내비치는 의뭉스러운 얼굴을 보자면 그저 어린아이를 흉내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정령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때, 잠잠하던 막사 안에서 누군가의 고성이 터졌다.

    - 말도 안 되는 소리!

    곧바로 막사를 걷고 들어간 루크의 눈에 담담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도로테아와, 그녀의 옆에서 씨근거리고 있는 창백한 낯빛의 낯선 존재가 들어왔다.

    루크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가 선수 치듯 입을 열었다.

    “인사 나눌래? 너는 기억 못 하겠지만 이쪽과 넌 구면이거든. 네가 변경백에게 잡혀가 꼼짝도 못 하고 있을 적에, 네 위치를 내게 알려 준 은인이야.”

    “…….”

    도로테아에게 고정되었던 시선을 찬찬히 옆으로 돌린 루크가 창백한 안색의 존재를 훑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가 손에 쥐고 있는 날카로운 낫이었다.

    시퍼런 예기를 머금은 낫은 언뜻 보기에도 도로테아가 코니움을 징치할 때 휘두르던 것과 그 형태가 비슷했다.

    시커먼 후드 아래로 비치지 않는 그림자.

    사람이라기에는 느껴지지 않는 기척.

    그 누구도 몰랐던 변경백의 죽음을 가장 먼저 알아낼 수 있는 자.

    답은 하나뿐이었다.

    망자의 넋을 명계로 인도하는 사신.

    그 존재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들인 루크가 나지막이 물었다.

    “네 눈, 다시 볼 수 있게 된 건가?”

    적어도 일주일은 보이지 않을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그녀를 필사적으로 감싸고 있던 후작 부인의 령(靈)이 보이지 않았다.

    설명을 요구하고자 입을 열기도 전에 사신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신께서 아끼고 품는다 하여 네가 정말 무엇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망자를 거두는 일을 잠시 멈춰 달라니. 무슨 혼란이 생기게 될지 알고나 하는 말이더냐!

    기가 막힌 듯한 힐난에도 도로테아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이제 그쪽 사정에 휘둘리는 것이 지겨워졌거든.”

    그렇게 말한 그녀가 새하얀 종이를 꺼내 와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서신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사신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 설사 내 부주의로 맹세를 깨뜨리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건 내 권한 밖의 일이야.

    “그럼 어쩔 수 없죠.”

    잠시 펜을 멈춘 도로테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서 열심히 조잘거리던 사신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 뭐,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게야?

    “맹세를 깨트렸음에도 권한 밖이라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러니 제가 직접 할 수밖에요. 다행히도 제게는 쓸 만한 권속들이 있고, 그들을 시켜 명부를 빼돌리게끔 만드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요.”

    마치 무엇이 문제냐는 듯 태연히 답하는 말 속에서는 그 어떤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루크는, 그 구태의연한 얼굴과 착 가라앉은 눈에 은은한 광기가 서려 있음을 눈치챘다.

    소녀는 지금 머리끝까지 분노하고 있었다.

    - 제기랄, 넌 부정을 뒤집어쓴 상황에서 금기(禁忌)를 범하기까지 하였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참으로 재미있네요. 원해서 타고난 힘도, 원해서 온 것도 아닐진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으면 응당 책임을 지라는 둥 어쩌고 하면서 의무를 부여할 땐 언제고, 혼란이 올 만한 일은 조심해 달라니.”

    - …….

    “내게 힘을 주었다면 그 힘을 허락한 셈이죠.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힘을 돌려줬죠?”

    서명을 휘갈겨 서신을 마무리한 도로테아가 봉투에 넣고 봉하며 덧붙였다.

    “명계의 주인에게 고하세요. 자칫하면 세계의 균형추가 망가지고 혼돈이 오리라는, 그런 우유부단함 때문에 이름조차 잃고 오랜 세월 타인의 손에 부림을 당한 망자들. 그 망자들 또한 당신의 자식이라고.”

    - 큰 소란이 일어날 게야. 죽어도 죽지 못한 이들이 숨 멎은 육신을 움직이며 돌아다닐 것이고, 사람들은 공포에 잠겨 제정신을 유지하기도 힘들겠지.

    “이미 소란은 일어났어요. 모른 척 덮으려 했을 뿐이지.”

    도로테아는 제 머리카락을 높이 묶어 올리며 사신을 향해 일갈했다.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를 안정시켜 왔잖아요. 이제껏.”

    그 대상이 그녀일 적에는 그저 조금 참으면 그만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가족들이 평온해지고 언젠가는 일상이 돌아올 터이니, 그 또한 나쁘지 않으리라고.

    그녀의 작은 상처에도 마음이 아파 차마 떠나지 못하고 온몸으로 살(煞)을 막아 준 후작 부인이 아니었더라면 계속 그리했을지도.

    “나는 그 무엇보다도 책임을 져야 하는 자들이, 가장 마지막 차례가 되어서야 비로소 위협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이 몹시 화가 나요.”

    그저 탁상공론이나 할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들이.

    가진 것 중 그 무엇도 내어 놓기 싫어하면서 가장 바닥에 있는 이들을 쥐어짜 스스로의 빈 곳간을 채우는 이들이.

    “그러니 내가 힘쓰는 만큼, 저들도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야겠어요.”

    나 또한 내 할머님의 아주 소중하고도 소중한 아이니까.

    내 작은 상처조차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희생할 만큼 나 또한 소중한 자식이니까.

    그런 희생에서 태어날 대가는, 이제껏 방관하며 일을 키우고 사태를 미뤄 온 자들에게서 받을 생각이었다.

    *   *   *

    후작 부인의 장례는 몹시도 평온하고 고요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생전 고인의 성향을 고려하여 조촐하지는 않으나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성대하지도 않은, 경건한 분위기의 장례식이었다.

    윌리엄은 장장 3일간 이어진 추모 분위기 속, 가장 마지막 날 저택을 방문했다.

    관을 지키며 다른 귀족들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는 가문의 장남을 대신해, 그를 맞이한 것은 필립이었다.

    “황자 전하께서 이리 직접 걸음 하시어 할머님의 영면을 애도해 주셨음을 알면 테아도 좋아했을 겁니다.”

    담담한 말에 윌리엄은 품에 지니고 있던 것을 꺼내어 내밀었다.

    “폐하께서 직접 부인께 내리는 애도의 추도문입니다. 부디, 평온히 떠나셨기를 바랍니다.”

    제국의 황제가 친히 추도문을 작성하는 일도 드문데, 심지어 황자에게 전령 역할을 맡겼다.

    매우 이례적인 일에 귀족들의 이목이 쏠렸다.

    수군거림이 이어지는 것을 느낀 필립이 흘끗, 주변을 살피더니 예의를 차려 윌리엄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윌리엄 또한 의도를 알기에 그저 말없이 뒤를 따랐다.

    “정원이 많이 바뀌었군요.”

    값비싸고 희귀한 꽃들로 가득하던, 화려한 정원은 온데간데없었다.

    소박한 들꽃들과 계절에 맞는 몇몇 정원목들이 적절히 어우러진 정원을 둘러보며 건넨 윌리엄의 말에 필립이 나지막이 대꾸했다.

    “이쪽이야말로 할머님의 취향이었습니다. 그때의 정원은 뭐랄까…… 딱 보여 주기 식의, 한순간의 허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본디 자연스레 찾아오는 계절을 벗어나, 함께할 수 없는 색색의 꽃들을 모조리 모아 두고서 두서없이 가득 늘어놓았던 정원.

    그 어디에도 조화로움은 없는 그 정원은 허영으로 가득 찬 귀족들에게는 극찬을 받았다.

    아끼던 가족을 막 잃은 사람치고는 평온하게 느껴지는 필립의 말에 잠시 멈칫했던 윌리엄이 조심스레 물었다.

    “테아는, 소식을 알고 있습니까?”

    “그 누구보다 먼저 알았을 겁니다. 애초에 할머님의 죽음을 예견한 것도 그 아이였으니까요.”

    이미 올해 초, 오랜 기간 동안 후작가를 지켜 온 안주인은 모든 준비를 끝내 놓았다.

    자신이 묻히게 될 자리와, 영원한 잠에 빠질 관, 남은 이들을 위로하고자 새로이 그린 초상화까지.

    “그래서였군요. 다들 제 예상보다 담담해 보이셨던 까닭은. 다행, 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윌리엄을 빤히 바라보던 필립이 흐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저 견디고 있는 것뿐입니다. 저토록 많은 이들이,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구경거리 삼고자 이곳에 발을 들였음을 아니까요.”

    부드럽고 나긋한 말투임에도 내용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도 저들은 애도의 꽃을 쥐고서 할아버지가 어찌 반응할지, 할머님의 유언이 무엇이었을지, 남긴 재산을 누가 가장 많이 차지하게 되었을지 따위를 속살거리고 있을 겁니다.”

    함락된 요새 내의 사정이 어떤지, 연합군이 얼마나 오합지졸인지, 후작이 어떤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는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저들에게는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일조차도 먼 나라의 상관없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몇백 골드의 가치를 호가하는 다이아몬드 왕관 따위가 훨씬 더 흥미로운 이야기일 테지.

    눈을 깜빡이는 윌리엄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관두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필립의 얼굴에 서서히 웃음이 걷혔다.

    “황자 전하.”

    조금 전의 어투와는 다른, 나직한 부름.

    윌리엄은 상대의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에 다음 말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저는 전하가 꽤 마음에 듭니다. 그 삭막한 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동안, 지니고 있던 다정함과 올곧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만 보더라도 그저 비겁하기만 한 인물은 아니라는 의미니까요.”

    몹시도 뜬금없는 칭찬에 윌리엄이 눈을 끔뻑였다.

    “테아 또한 그런 당신의 면을 높게 쳤겠지요.”

    “…….”

    “이제까지는 그 장점에 기대어 가장 중요한 결정을 미루어 오셨을 테지만, 지금부터는 아닐 겁니다.”

    필립의 의미심장한 말에 윌리엄이 움찔했다.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원래 무게와 책임이 뒤따르는 일이니 쉬운 것은 아닙니다만. 마냥 미루기만 한다면 당신이 가진 그 어떤 좋은 점들도 결국 개화되지 못한 채 버려질 겁니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아무래도 테아의 움직임이 갑작스레 달라진 듯해서요. 이제는 전하께 주어진 유예의 시간이 없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

    “아시겠지만 테아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진정으로 그 어떤 자리도, 욕망도 없다고 하신다면 재어 보고 있던 무게의 추를 거두어들이는 데 한 치의 망설임이 없을 테지요.”

    그의 목에 드리웠던 검은 진작 거두어졌고,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이들 또한 어느 순간 모습을 감췄다.

    이대로 영영 죽은 것처럼 납작 엎드려,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 또한 윌리엄의 선택일 뿐일 터.

    한 대 맞은 듯 멍한 얼굴을 한 황자를 남겨 둔 채 필립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다이애나와 함께 장례 준비를 도맡으며 내내 무리를 하던 코제트가 앓아누운 탓에 콜린 또한 그녀 곁을 지키고 있던 차였다.

    “아버지.”

    아들의 부름에 아내 곁에 앉아 있던 콜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문가에 선 필립은 손에 쥐고 있던 하얀색 백합을 매만지다, 조용히 물었다.

    “테아에게서 무언가 소식이나 연락을 받은 것이 있었나요?”

    “아니.”

    “…….”

    어딘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띠는 필립을 본 콜린의 미간이 좁아졌다.

    “무슨 일이지?”

    “생각해 보니, 테아에겐 처음이겠다 싶어서요.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본 경험이.”

    누군가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적도 있고, 모르는 이든 아는 이든 가릴 것 없이 많은 죽음을 봐 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 ‘울타리’ 안의 인물을 떠나보낸 적이 있었던가.

    도로테아의 울타리가 얼마나 좁고 깊은지, 그 마음의 무게를 필립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무래도 제가 직접 테아에게 가 봐야겠어요. 지금 택한 방식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제까지의 그 애답지 않게 느껴져서요.”

    필립의 뜬금없는 말에 콜린이 설명하라는 듯 강렬한 시선을 보내자, 아들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품에 있던 전단지를 내밀었다.

    그녀가 만든 극단의, 새로운 극을 올릴 것이라는 홍보글이 실려 있었다.

    죽음의 술사 : 버림받은 신의 조각을 얻은 자들

    굵직한 글씨로 쓰인 제목을 읽은 콜린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어느새 잠에서 깬 코제트가 남편을 부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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