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막사 안으로 들어선 도로테아를 향해 힐끗, 시선을 준 루크가 일순 미간을 좁혔다.
“쓸데없는 것이 붙었군.”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난 말에 도로테아가 입을 열었다.
“쓸데없다니. 도움을 주려고 온 분인데.”
“되도록이면 조용히 처리하겠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우리 둘만으로는 버거운 일도 있어. 누군가가 거들어 준다면 고마운 일이잖아.”
조곤조곤 한마디도 지지 않고 답하는 도로테아와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여긴 걸까.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돌린 루크가 으르렁대듯 말을 내뱉었다.
“키엘 스펜서가 기르는 개 따위를.”
“무례하게 굴지 마. 친절하게 굴어야지.”
그림자는 본인보다 덩치가 수배는 더 큰 사나운 남자를 타이르는 조그마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키엘 스펜서가 기르는 개라.
딱히 틀린 말이 아니니, 기분이 상할 것도 없었다.
다만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있자니 생소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짜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라고는 하나 얼굴에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7황자라니.
그리고 그런 7황자를 다정히 타이르는 어린 소녀라.
“애초에 사람을 짐승에 빗대어 빈정대다니. 그건 몹쓸 짓이잖니.”
“…….”
훈육을 받고 있는 ‘개’는 누가 봐도 저쪽이 아닌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그림자의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도로테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자신과 루크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향해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신경 쓸 것 없어요. 아직 마음에 응어리가 풀리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 지금 한창 세상이 미울 시기거든요.”
마치 비뚤어진 아들의 말버릇을 사과하는 어머니와 같은 어투였다.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나직하게 대꾸한 그림자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부디 말을 낮춰 주십시오. 또한, 저는 그저 영애 곁에 머무르며 경호를 할 뿐입니다. 굳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말을 거실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을 곁에 두고도 사람 취급도 하지 말라니.
어둠 속에 숨어 말을 건네는 그림자를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빤히 보이는 사람을 어찌 못 본 척 할 수 있나요? 이제부터 제 일을 있는 힘껏 도와주실 분인데요.”
“……?”
그림자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리자, 도로테아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안위를 지켜 주실 분이라면, 제 안전을 도모하고자 행하는 ‘자잘한 몇 가지’ 일들도 충분히 도와주실 수 있는 거잖아요?”
“…….”
“곁에 이토록 훌륭한 인력이 있는데 그저 못 본 척 두는 건 낭비라고 봐요.”
그러니까 지금, 자신을 사람 취급하겠다는 이유가…….
상대가 설마하니 했던 검은 속내를 드러낸 순간 그림자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처음 제안했을 때만 하더라도 도움을 받지 않겠다며 정중히 마다하던 소녀는, 막상 그를 곁에 두기로 결정하자마자 입맛을 다시며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받을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두 눈에 가득 들어찬 욕심을 읽어 낸 그림자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새삼스럽지만 그의 주인이 어째서 이 자그마한 소녀를 그토록 애정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분은 기본적으로 자기애가 몹시도 충만한 분이시지.’
그러니 본인과 닮은 구석이 차고 넘치는 소녀를, 어찌 귀애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느새 그에게 바짝 다가선 도로테아는 앞서 던진 물음의 답 따윈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 새로운 물음을 던졌다.
“혹시, 간담은 좀 튼튼하신가요?”
몹시도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가 답을 하기도 전에 소녀의 기괴한 말이 이어졌다.
“예를 들자면,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 묻어 두었던 사람의 머리를 꺼낸다든가 하는 일도 가능하신가 해서요.”
사람의 머리를 묻어 두었다니, 누구의 머리를? 언제? 어디에?
그보다 묻어 둔 것을 굳이 꺼내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단 한 번도 내려진 명을 거부하거나, 의문을 품어 본 적 없던 그림자의 머릿속이 처음으로 복잡해졌다.
“혹시 사후 세계를 믿으시나요? 믿는다면 어느 정도로 믿고 계신가요?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는 잘 적응하시는 편인지도 궁금하고요.”
질문의 난이도는 갈수록 더 기괴해져만 갔다.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림자는 조용히 어둠 속에 몸을 숨겨 빛을 가렸다.
꾸물꾸물 사라지는 이를 보던 도로테아가 싱긋 웃었다.
뒤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루크는, 어느새 얼굴 가득 드러내고 있던 불편한 기색을 어느 정도 해소한 상태였다.
생각해 보니 곁에 심부름꾼 하나 정도를 두는 것도 딱히 나쁜 일만은 아닌 듯했다.
그게 키엘 스펜서의 개라 하더라도.
아니, 키엘 스펜서의 개이기 때문에 더더욱.
* * *
깊은 밤, 배고픈 짐승들이 울부짖는 숲속에 사람의 숨소리가 섞여들었다.
점차 가빠지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도로테아는, 제 앞에서 몇십 분째 삽질 중인 그림자를 향해 나직이 물었다.
“많이 힘드세요?”
“…….”
그 순간 말없이 땅을 파헤치던 그림자가 잠시 멈칫하더니 쥐고 있던 삽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계속해서 이어진 단순 노동은, 격한 칼부림보다도 더한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
도로테아는 행동으로 반쯤은 답을 보여 준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품에서 노란 종이를 꺼냈다.
“미리 만들어 두었던 체력강화부(體力強化符)예요. 태워서 잿물을 먹으면 단숨에…….”
팔랑이는 부적 위에 가득 새겨진 붉은 문양을 바라보던 그림자가 조용히 삽을 들었다.
나무에 기댄 채 가만히 지켜보던 루크가 입을 뗐다.
“네 정령은 어쩌고? 보이지 않는 것이 그것과의 소통에도 영향을 미치나?”
“보는 눈을 잃었다고 한들 권속과의 연결까지 끊어지진 않는단다.”
도로테아가 옅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영롱한 별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흙이 묻는 게 싫은 것 같더라.”
반투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리리가 까르르 웃으며 주변을 맴돌았다.
사람들의 넋을 제물 삼아 힘을 얻은 이가 묻힌 땅이다.
머리를 잘라 묻었으니, 숨이 끊어졌어도 그 넋은 이 땅에 묶여 있을 터.
부정하고 탁한 기운으로 가득한 토양을 건드리고 싶지 않은 것은 자연의 기운을 머금은 정령의 본능과도 같았다.
그때였다.
삽을 쥐고서 거침없이 땅을 파 내려가던 남자의 손이 멈췄다.
“이겁니까.”
검푸른색 천에 쌓인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심스레 그것을 꺼내 들자, 퀴퀴한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도로테아는 얼룩진 천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셨어요. 저 넙적한 바위 위에 내려놓으시면 돼요.”
그림자가 축축한 천으로 쌓인 덩어리를 내려놓자, 도로테아는 그 앞에 곡식 세 줌과 풀잎으로 얼기설기 엮어 앙증맞아 보이는 신을 내려놓았다.
내려놓은 것들을 나름대로 단정하게 정리한 그녀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친 후 고개를 들고서 밤하늘을 향해 창(唱)을 시작했다.
“하늘은 자시 방향으로 열리고
땅은 축시 방향으로 열리고
사람은 인시 방향으로 열리니
이 하늘에 금이 생겨나 대명천지(大明天地) 밝은 날이 되오라.
부디 명계의 문지기께서는 개문(開門)하여 죄인을 받잡으러 오시옵소서.”
선명한 목소리가 한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놀랍게도 진작 숨이 끊어진 천 안의 덩어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봉인된 넋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몇 번을 부들부들 떨리던 그것은, 도로테아의 마지막 ‘청’을 끝으로 움직임이 멎었다.
새까만 어둠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반투명한 형태를 가진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고동빛의 거대한 노를 거머쥔 노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도로테아를 발견하고 다가섰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그녀를 관찰하던 노인의 눈이 커졌다.
- 신의 사랑을 받는 아이야, 어쩌다가 눈이 멀었느냐?
“…….”
- 네게서 아주 지독한 혈향(血香)이 나는구나.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열려 있던 눈이 닫혀?
얼굴을 잔뜩 찡그린 노인의 말에도 줄곧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도로테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뒤에 대기 중이던 루크를 불렀다.
“기다리던 손님께서 오셨다면, 말을 좀 전해 주지 않으련?”
“…….”
“명부에 올랐으나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한 넋들을 해방할 수 있는 길을 알고 있으니, 부디 힘을 빌려주십사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하던 노인은 먼발치에 떨어져 있던 루크를 보기가 무섭게 곧바로 상황을 파악해 냈다.
- 죽음의 지척까지 다가왔던 아이로군. 사신을 접하다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구나.
노인은 홀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납득했다.
도로테아는 여전히 노인이 있는 방향을 알지 못해 엉뚱한 곳을 응시한 채로 말을 이었다.
“제게 잠시지만 명부를 건드릴 수 있는 ‘권한’이 필요해요.”
도로테아의 말에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이 얼굴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 타고난 육신의 강건함을 지나치게 믿는구나. 설령 지하의 그분께서 네게 힘을 빌려주신다 한들 네가 그 힘을 어찌 달랠 수 있다고 그것을 청하느냐.
툴툴거리고는 있으나, 소녀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뿍 담긴 노인의 말을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듣고 난 루크가 ‘약간’의 축약을 거쳐 뜻을 전달했다.
“눈 먼 장님 주제에 신의 힘을 빌려 쓰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고 말하는군.”
- ……?!
도로테아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지 않는다 하여 상대의 죄가 사하여지는 것이 아니고, 들리지 않는다 하여 망자의 울음이 멸하는 것이 아닌걸. 무너진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명왕(冥王)의 힘이 필요하다고 전해 드리려무나.”
- 여기저기서 듣기는 했으나, 참으로 겁이 없는 아이로고. 그것은 일개 인간이 쓰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힘이다. 자칫하면 크게 다칠 게야.
“너 따위가 쓰라고 있는 힘이 아니라는군.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날뛰지 말라고.”
- 아니, 좋은 말 놔두고 어찌 그리 못된 말들을 뱉어 내! 참으로 못난 주둥이로고!
망자의 혼이 명계로 넘어갈 수 있게끔 인도하는 뱃사공, 카론이 노여운 목소리로 외치며 볼품없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런 푸대접은 명계의 신인 하데스에게도 받아 본 적이 없었건만.
이제야 막 눈이 트인, 새파랗게 어린 인간 따위가 그의 말을 저토록 곡해하다니.
억울하여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물론 명계의 뱃사공이 아니라 명계의 신이 와도 공손해질 생각이 없는 루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서 못 들은 척 입을 다물었다.
루크가 말을 어떻게 전달하든 간에, 뜻만 통한다면 그다지 상관없는 도로테아가 말을 이었다.
“본디 망자의 넋을 해칠 생각은 없었으나, 술사에게 금제(禁制)가 새겨져 있더군요. 혼에 새긴 주술이니 해주하려고 들다가는 되레 산산이 부서져 단서조차도 흩어질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그제야 천 뭉치를 자세히 들여다본 카론이 미간을 찡그렸다.
- 그렇구나. 지독한 금제(禁制)로다. 게다가 해주하는 순간 저주를 되받게끔 역주술이 걸려 있어.
“역주술이 걸려 있다는데. 해주하려는 순간, 네게 여파가 미칠 거라고.”
루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마저도 이미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보이지 않을 뿐이지, 이제까지의 경험이 모조리 날아가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저는 지금부터 금제를 해주할 생각이에요.”
태연한 목소리에 카론이 눈을 크게 떴다.
“금제와 함께 걸려 있는 지독한 살(煞)이 저를 덮치는 순간, 아주 짧게나마 혼에 새겨진 희생자들의 진명(眞名)을 알 수 있을 테죠.”
- 그건 지나치게 위험하다, 아이야. 앞서 희생된 이들의 넋으로 저들은 이미 힘을 불릴 대로 불렸어. 아무리 너라 해도 멀쩡할 리 없나니. 신께서는 네가 가진 힘을 온전히 쓸 수 있는 육신을 부여한 것이지, 새로운 힘을 내린 것이 아니다.
도로테아는 루크의 눈이 제게로 고정되는 것을 보며 카론의 말을 짐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이곳으로 보내면서 몹시도 인자하고 다정한 눈을 하고 내려다보던 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이란 무릇 그런 존재지.
늘 세계의 법칙이니 규율이니 하는 것들을 들먹이며 ‘힘’을 갖고도 움직이는 일 없이, 늘 방관하고 애석해하는 것에서 그치는 자들.
그 무거운 엉덩짝을 들게 만들려면 이 정도의 판을 벌여야 했다.
설마하니 명부에서 사라진 이들의 진명을 모조리 알고도 일을 미루는 사신은 없으리라.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도로테아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썩이던 푸른 천이 벗겨지고 나자 코니움의 두 눈이 번뜩 뜨였다.
핏발 선 눈앞으로 손을 뻗은 도로테아가 나직이 명했다.
“뱉어 내. 네가 억지로 죽음으로 몰아넣어 취한 넋들의 진명(眞名).”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 역시 인간에 불과했던 걸까.
마지막 순간에 맞닥트린 태생적인 공포, 죽는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도로테아를 담은 두 눈에는 분노보다도 절망이 더 깊게 서려 있었다.
이윽고 굳게 닫혀 있던 입이 쩍 벌어지고 끔찍한 비명 소리가 숲을 가득 메웠다.
그와 동시에 새까만 살(煞)이 그녀의 주변을 옥죄듯 좁혀 가며 소녀의 자그마한 육신을 향해 쏟아져 내리던 순간이었다.
묵묵히 대가를 기다리고 있던 도로테아의 몸 위로 새하얀 달빛이 쏟아지는가 싶더니 새까만 원념으로 이루어진 살(煞)을 밀어냈다.
빛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도로테아의 몸을 끌어안듯 감쌌다.
- 테아, 내 아가.
부드럽고 다정한, 나직한 목소리가 도로테아를 불렀다.
사랑스럽고 예뻐 견딜 수가 없다는 듯.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기뻐, 아이를 품에 안고 있자면 세상 그 어떤 고통도 견뎌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루크는 그 희끄무레한 빛의 형상을 한 이의 얼굴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하이클레어 후작 부인은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연신 도로테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이고, 품에 안아 달랬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저주는 물러간 것이 아니었다.
잠시 밀려났던 어둠은,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기어 올라와 뱀처럼 새하얀 빛을 휘어 감기 시작했다.
도로테아는 아무런 통증도 없는 몸을 내려다보다, 눈을 부릅뜨고 있는 코니움과 마주했다.
금제를 해주하는 일은 성공했다.
그렇다면 대가를 감당하고 있는 것은 누구일까.
- 테아.
희미하게나마 바람에 실려 든 목소리가 소녀의 귓가에 닿기도 전에 흩어졌다.
오로지 루크의 눈에만 보였다.
손녀를 감싸고 있는 노부인의 혼이 너덜너덜 찢겨 나가는 광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