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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213화 (213/242)

213화

“미안하다.”

데인이 몹시 침울한 목소리로 사과하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아무래도 널 위해 시녀를 구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

“네 진정한 본모습이 무엇이든 간에, 지금의 너는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지휘관이니까. 너에게만 특혜를 줄 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바란 적도 없는 특혜를, 제멋대로 주겠다고 설치다 꺾인 것뿐이었다.

루크는 데인의 비장한 말을 무시한 채 검날을 닦는 일에 열중했다.

자리에 앉아 가만히 검을 닦고만 있는 루크를 보는 데인의 눈에는 측은함이 서렸다.

“아직도 말해 줄 생각은 없는 거냐? 어쩌다 그 모습으로 여기 있게 된 건지?”

“…….”

“뭐, 어차피 말해 준들 내가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우리는 그래도 가족이잖냐.”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건네는 말에도 루크의 얼굴에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이틀 내내 주변을 얼쩡거리며 종알대는 헛소리에 일일이 신경 써 봤자 본인만 손해라는 사실을 이미 충분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기뻐해라. 조금 있으면 추가로 보급 물자가 들어올 거야.”

날카로운 검끝을 매만지던 루크의 손이 멈칫했다.

이윽고 고개를 든 루크가 데인을 향해 물었다.

“보급 물자라면, 계획이 변경될 예정인가?”

데인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제국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의 동향도 심상치 않아. 내부적으로 자잘한 재난과 사고들이 끊이지 않는단 말이지. 폐하께서는 균형추가 더 무너지기 전에 빠르게 요새를 탈환하기를 원하고 계셔.”

“추가 보급이라면, 물자가 오는 대로 작전에 들어가겠군.”

사뭇 진지한 표정의 데인이 루크의 어깨 위로 손을 턱, 하고 올려놓았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선봉에 설 일은 없을 거다.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헛소리.”

“괜찮아. 어차피 대외적으로 너는 부상 치료 중이니까. 아직 자리보전 중이라고 보고하니, 폐하께서도 참전하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고 해.”

“누구 마음대로.”

“내가 지켜 주마.”

루크는 새파란 예기를 뿜어내는 검신을 어루만지며, 과연 잘 벼려진 검이 저 망할 애새끼의 목을 내리쳐 숨통을 끊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를 계산해 보았다.

“너는 인정하려 들지 않겠지만, 그래도 내가 오빠니까.”

목이 아니라 입부터 찢어 놓아야 할까.

아니, 일단 뒷목을 치는 게 더 빠를지도.

“한 번쯤은 그래도 귀엽게 오빠, 라고 불러 줄 법도 한데 말이야. 고집이 센 건지, 쑥스러움이 많은 건지.”

멋대로 중얼거리며 픽, 웃는 데인의 뒤로 누군가가 불쑥 그를 불렀다.

“오빠.”

묘한 웃음기가 섞여 든 부름에 데인이 고개를 돌리자,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아주 귀여운 여자아이가 생글거리고 있었다.

“메릴린 언니가 할 말이 있으시대요.”

소녀의 말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데인은 저 멀리, 막사 근처에 몸을 숨긴 채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메릴린을 보고 일어섰다.

“아무튼 당분간 여기 있어. 알겠지? 쓸데없이 일 벌이지 마라. 내가 어떻게든 수습해 볼 테니까.”

제법 진지하게 오빠 노릇을 하려는 듯 루크에게 신신당부를 하던 데인이 자리를 뜨자,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도로테아가 그의 곁에 앉아 생긋 웃었다.

“많이 아파?”

“……이 빌어먹을 두통은 언제쯤 사라지는 거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적응해야지.”

노래하듯 흥얼거리는 도로테아의 말에 루크가 미간을 좁혔다.

흉흉한 살기를 정면으로 접하고도 주눅 한 번 들지 않은 소녀는 태연한 얼굴로 그를 달랬다.

“그러니 내가 말했잖니. 네게 선택권을 주겠다고. 눈을 닫지 않으면 꽤 곤란해질 거라는 말도 했었고.”

“도움을 청한 것은 너였다.”

“도움을 주겠다고 선택한 것은 너고.”

짧은 침묵 끝에 고개를 돌린 루크가 나직이 물었다.

“넌 이제까지 늘 이런 시끄럽고 번잡함 속에서 지내 온 건가?”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지나치게 많은 세상.

수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마치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오히려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보기가, 평소의 배로 힘들었다.

분노를 유발하는 데인의 헛소리에도 곧바로 대응하지 못한 것 또한 그 까닭이었다.

좀처럼 대화에 집중할 수 없으니, 한 박자 느리게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루크의 말 속에 스며든 짜증을 읽은 도로테아가 다정하게 대꾸했다.

“조절하는 법을 배우면 나아진단다.”

“어떻게?”

“많이 활용하면서 감을 익혀야지.”

당연하다는 듯한 도로테아의 답에 루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니까 이 계집이 하는 말은 이 능력을 최대한 많이 사용하면서 조절하는 법을 익히라는 건데.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깨닫지 못했지만, 그녀가 하는 말의 의미는 명백했다.

“날더러 네 눈이 되라는 거군.”

“너를 위해서야.”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할 것이지.

그를 담는 새까맣게 번들거리는 눈은 먹잇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시선 그 자체였다.

마침 필요한 인간을, 적절한 핑계로 무자비하게 착취할 수 있게 된 것을 몹시도 기뻐하는 주인의 눈이 그러할까.

“됐어. 차라리 아픈 대로 사는 게 낫겠군.”

곧 죽어도 너를 위해 무료 봉사를 하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는 루크의 말에 도로테아가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네가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어.”

“…….”

루크는 조금은 뜻밖이라는 듯, 자신의 옷을 부여잡고 선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절대 아쉬운 소리 따위는 하지 않던 계집이었다.

미심쩍은 듯 내려다보는 시선을 받은 도로테아가 옅게 웃었다.

코니움에게는 스승님께 버림받은 셈이라는 둥, 언제든 사용할 물건에 불과한 취급을 받은 거라는 둥 입을 털었지만 페른 입장에서도 그녀만 한 인물을 희생시키는 건 꽤 속이 쓰렸으리라.

그러니 훌륭한 제물을 바친 만큼의 성과를 원할 것이다.

‘그 성급하기 짝이 없는 작자들이라면 곧장 내 상태를 확인하려 들겠지.’

그 전에, 먼저 선수를 치는 것이 중요했다.

*   *   *

키엘 스펜서는 며칠간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다가, 별안간 뜬금없이 막사로 찾아들어 맹랑한 부탁을 건네는 조그마한 소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날더러 뭘 해 달라고?”

“메릴린에게 구혼해 주세요.”

“…….”

마치 마주치면 건네는 인사인 양 흘러나온 자연스러운 어조에, 자신이 들은 말을 되새겨보던 그가 이내 찰랑이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구혼이라. 내가? 메릴린 영애에게 말이냐?”

“네.”

키엘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도로테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부탁은 늘 이런 식이었다.

뜬금없고도 하찮아서 해 주지 못할 만큼 어렵지 않지만, 지나고 보면 그 조그마한 부탁 하나가 만들어 낸 인연들이 결국은 그의 등까지 떠밀 수 있는 거대한 폭풍이 되어 돌아온다.

그 형체가 분명해지기 전까지는 부탁의 의도마저 밝히기 쉽지 않았다.

“해 준다면 못 할 것도 없다만. 내게는 손해가 아니냐.”

소녀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어떤 손해요?”

“글쎄, 평판?”

느물거리며 변명을 가져다 대는 키엘을 보던 도로테아가 미소 지었다.

비록 가는 길의 방향을 틀긴 했지만 타고난 성품이란 바꿀 수 없었다.

처음 술잔을 내려 주었던 도움을 제외하면, 그는 늘 사소한 부탁에도 손에 쥘 수 있는 이득을 따지고 들었다.

무엇 하나라도 쥐여 주지 않는다면 쉽게 움직이고 싶지 않다는 속내를 뻔뻔하게 드러내는 남자를 향해 그녀가 눈을 활처럼 가느다랗게 휘었다.

“저는 오히려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는데요.”

“도움이라?”

“백작님께서 작위를 넘겨받은 지, 벌써 수년이 지났어요. 그동안 가신들은 물론이고 주변 영지의 어여쁜 딸을 가진 귀족들마저 백작님께 혼담을 권했지만 오랫동안 홀로 계셨지요.”

물론 그간 곁에 여인을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꽤 다양한 매력을 갖춘 여인들이 늘 그의 곁을 가볍게 머무르고는 스쳐 지나갔다.

오랜 기간 함께하거나, 공식 석상에서 소개할 만큼 깊이 교류했던 여인이 없었을 뿐이지.

이유야 분명했다.

키엘 스펜서는 태어나자마자 복잡한 사정에 의해 어미의 손에서 멀어졌고, 태어나자마자 남의 손에 맡겨진 아이는 철저하게 통제된 환경에서 자라났다.

부모의 사랑도, 형제의 정도, 깊이 교류하던 친우들까지도.

모두가 다 잘 짜인 연극 무대 위의 배역들이었다.

멋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그저 모든 일상에 위화감과 이질감을 느끼는 자신이 이상한 것이라 여겼지만, 본인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고부터는 분노와 배신감이 그를 뒤흔들었겠지.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었다.

거짓 세상에서, 다들 그를 끊임없이 기만하며 그것을 행복이라 믿게끔 만들었다.

단지 그의 존재가 제국의 안정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이름을, 지위를, 어미를, 쥐어야 할 모든 것을 잃고서.

“백작님이 원하는 것이 정말로 그 외롭고 높은 자리라면, 정치적인 입지를 다져 줄 여인과 후사는 반드시 필요해요. 그렇지만 이제껏 미루고 또 미뤄 오셨죠.”

그에게는 가장 시급하면서도 원치 않는 숙제일 터.

좀 전까지만 해도 흥미롭다는 듯 싱글거리고 있던 키엘이 다소 가라앉은 눈으로 도로테아를 응시했다.

“그러니 그 숙제를, 네가 해결해 주겠다?”

“숙제는 은인의 몫이에요. 그 누구도 해결해 드릴 수 없지 않을까요?”

친애하는 어머니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만들었던 오답 노트도 마다하셨던 분이, 다른 사람이 풀어 놓은 답지를 두고 기쁘게 품을 리 있나.

“다만 그 시기를 늦추는 것은 가능하겠지요.”

톡톡. 생각에 잠긴 키엘의 손가락이 일정한 속도로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구혼이라는 건 역시, 다른 이들에게 보여 주려는 요량이어서 그런 것일 테고.”

“네.”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게끔 말이지?”

“비록 귀족들 대부분은 이곳까지 내려오는 것을 원치 않지만, 간혹 헛바람이 든 자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집안 사정으로 전장에 내몰린 자라면, 조건 좋은 배우자야말로 훌륭한 탈출구가 될 테고.

공을 세워 명예를 좇는 자라면 다른 이들에게 기꺼이 내보일 만한 여인을 응당 탐낼 테니.

“흥미가 당기는 조건이군.”

“물론 그러실 테죠.”

“그러나 거절이다.”

설마하니 단칼에 제의를 거절당하리라 생각지 못한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였다.

소녀의 얼굴에 이는 미세한 표정 변화를 확인한 키엘이 여유가 넘치는 얼굴로 몸을 뒤로 기댔다.

“어젯밤, 내 훌륭한 수하가 주변을 얼쩡거리는 수상한 인물을 발견했다. 아마도 내부의 동정을 살피려던 것이겠지.”

“…….”

“이제껏 사람을 보내지 않던 이들이 들킬 것까지 감안하고서 이쪽의 상황을 살핀다는 것은 무언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뜻일 테고.”

도로테아가 한숨을 삼켰다.

이래서 지나치게 눈치가 빠른 인간과는 상종하고 싶지가 않은 건데.

부탁을 요구하면 잔소리를 퍼부으면서도 들어주는 호구 같은 사촌이 그리워지는 밤이었다.

“내가 영애에게 구혼을 하면, 당연히 시선이라는 시선은 모조리 그리로 쏠리겠지. 자극받은 구혼자들이 많아진다면 더더욱 메릴린 영애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일이 없을 테고.”

자연스레 데인과 에이든 또한 그를 견제하고자 으르렁거리기에 바쁠 터였다.

“비록 시끄러워질지는 모르나, 적어도 메릴린 영애의 안전은 보장될 것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무엇을, 원하시나요?”

밀당을 할 만한 여유도 없거니와, 키엘과 협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었다.

그의 수완을 생각해 본다면 차라리 단도직입적으로 ‘거래’를 하는 편이 극한의 이득을 얻고자 판을 짜는 것보다 훨씬 나으리라.

도로테아의 말에 키엘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존재감 없이 그늘 속에 가려져 있던 그림자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데려가거라.”

“…….”

“내가 네 사람들을 지켜 주는 조건이다.”

몹시도 뜻밖의 조건에 도로테아의 눈이 커지자, 키엘이 싱긋 웃었다.

“위험한 일에 뛰어들 것이 자명하나, 그런 너를 말릴 수 없다면 최소한의 안전은 확보해야지.”

물끄러미 키엘과 눈을 마주하고 있던 도로테아는, 처음으로 그의 시선을 피해 먼저 눈을 내리깔고서 나지막이 말했다.

“은인께서는 제게 너무 무르세요.”

“그러게 말이다.”

웃음기 섞인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이를 데려간다 한들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테지만, 억지스러운 부탁을 건네는 것은 이쪽이었다.

인사를 건네고 천천히 막사를 나가는 도로테아를 바라보던 키엘이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끝끝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찌할 생각이었지?”

뒤를 돌아본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였다.

그녀의 반응에서 답을 읽어 낸 키엘이 유쾌하게 웃었다.

이 뿔난 망아지 같은 녀석.

“어찌 나를 협박하려 했느냐?”

자그마한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서렸다.

솔직하게 말해도 좋은지, 머릿속으로 상황을 재어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짙은 미소를 띤 얼굴을 본 도로테아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별것 아닙니다. 레번에게 서신을 쓸까 했습니다.”

“레번…… 분명, 네 아래에서 극장을 운영하던 자였던가?”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으로 만들면, 백작께서도 미루어 둔 숙제를 해야만 하실 테니까요.”

“…….”

그러니까 다음 극의 주인공을 자신으로 만들어 평판을 망쳐 놓겠다?

말을 던져 놓고는 슬쩍 눈치를 보다 막사 밖으로 총총 걸어 사라지는 도로테아를 지켜보던 키엘이 쿡쿡, 웃기 시작했다.

죽은 이들을 수족처럼 부리고, 산 사람의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을 만큼 영악한 아이가 하는 협박치고는 지나치게 귀여운 데가 있지 않은가.

그녀의 능력이라면, 그보다는 훨씬 더 그를 곤란하게끔 몰아세울 방법도 있을 텐데.

제 딴에는 나름대로 발톱을 세우지 않고서 할퀴려 든 셈인가.

“큰일인걸.”

자꾸 이렇게 대가 없는 도움을 건네면, 버릇이 나빠질 텐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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