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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212화 (212/242)

212화

루크는 그녀답지 않게 다소 시시한 결과를 손에 쥐고서, 회의장을 빠져나온 도로테아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음?”

“너답지 않게 저들에게 관대하게 굴고 있지 않나.”

첩자 하나 잡아 내지 못해 실패한 작전만 수차례에, 정찰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연합군이었다. 그런 상황에 메릴린이 거의 홀로 올리다시피 한 전과는, 지금 이상의 것을 얻어 내기에 충분했다.

그걸 빌미로 좀 더 몰아붙였으면 저들은 일언반구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들의 안일했던 시야도, 눈치 싸움에 서로 책임을 미루다 생겨난 희생자들도 있었으니 마땅히 죄를 물을 만했을 텐데.”

“…….”

“네가 그토록 인정이 차고 넘치는 줄 몰랐군.”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루크의 말을 듣고 있던 도로테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는 나를 꼭, 손에 사정도 두지 않는 각박한 인물 취급하는구나.”

“제국의 황제 앞에서조차 양보는커녕,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겁도 없이 입을 놀리던 건 누구였지?”

상대가 황족이라 해도 물러서기는커녕 끝까지 물고 늘어져, 그의 체면을 망가뜨리고 가진 것들을 뜯어내며 억지 원한을 만들어 냈다.

“본디 하이클레어 후작가는 드높은 명성에 비해 대단한 위세를 부리거나 거기에 취해 이득을 취하지도 않았지. 네가 오기 전까지는.”

명분과 신념에 기댄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손해’라는 것을, 껍데기뿐인 찬사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 바로 하이클레어 후작가였다.

다른 귀족들이 후작의 어리석은 충정을 비웃고, 그것을 반면교사(反面敎師 : 타인의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로 삼을 만큼이나.

“그러나 너는 달랐다. 황태자의 체면을 멱살 잡아 끌어내리고, 황제를 압박하여 끝끝내 황후까지도 모조리 쓸어내 버렸지. 덕분에 하이클레어 후작은 말년에 많은 정적을 맞이해야만 했다. 젊은 시절보다도 더.”

물론 그 정적들을 하나같이 짓밟아 주기는 했지만.

그 거침없는 행보가, 많은 귀족들로 하여금 반감을 갖게 만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 옳았던 것이 지금도 옳지는 않으니까. 이곳은 전장이잖니. 저들이 지금 아무리 날뛰어 봤자, 뜯어낼 것이 그리 많지 않아. 지금 명분을 휘둘러 찍어 누른다고 한들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무엇하러 힘을 쓰겠니?”

도로테아가 생글거리며 루크를 향해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저들 또한 우리 측에 관대하게 적당한 양보를 보였으니까.”

물론 저들의 양보가 추진력을 얻으려는 뒷걸음질은 아니었지만.

도로테아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분명히 합당한 명분이야 있었지만 가타부타 말없이 메릴린을 용인한 그들의 태도에는, 매우 오만한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어찌 되었건 ‘메릴린 레어’는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

‘귀족 영애’라는 존재가 사회에서 갖는 뚜렷한 한계치를 생각한 것이다.

메릴린 레어가 아무리 큰 공을 세운다고 한들, 그녀가 혼인을 하게 되면 배우자를 뒷받침하는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갖고 있는 위상 역시 종국엔 가문에 흡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그리들 여기고 있겠지.

“지나치게 몰아붙이다 괜스레 경계심을 높일 필요가 있니?”

지금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드러내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만이 저들 또한 칼날이 목 아래로 드리울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서 신나게 춤을 춰 댈 것이 아닌가.

게다가.

“어차피 이곳은 전장이야. 빠져나갈 곳도 없지.”

도로테아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목이 떨어질 때까지는 숨을 죽이고 다가가는 것이 사냥에는 더 쉽단다. 지금 당장 메릴린의 살을 깎아 먹어 가며 치열하게 다툴 만큼 저들의 목이 매력적인 것도 아니니까.”

“…….”

“저치들 기를 조금 살려 주는 것으로 메릴린이 덜 다칠 수 있으면 그 편이 낫다는 얘기란다.”

도로테아는 자신의 말에 골몰히 생각에 잠긴 루크를 바라보다, 멀리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스탠을 향해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빠!”

발랄한 부름에 그녀를 품에 안고 있던 루크가 움찔했다.

스탠은 잔뜩 걱정 어린 얼굴을 하고서 다가와 여동생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 사라. 내려와.”

자신에게 두 손을 뻗으며 건넨 소년의 말에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였다.

“어, 얼른.”

자그마하게 채근하는 목소리가 제법 진지해 보였다.

결국 루크에게 눈짓한 도로테아가 품에서 내려오자 스탠은 한결 안심한 얼굴을 하고서 그녀를 향해 속삭였다.

“다리가 아파서 걷기 힘들면 오빠한테 말해. 내가 업어 줄게.”

“응.”

“아픈 분이잖아. 매달리고 떼쓰면 못써.”

“…….”

소년의 속삭임에 루크의 시선이 작은 머리통을 향해 지그시 머물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탠은 몹시도 진지하게 어린 여동생을 향해 옳고 그름을 가르치기에 바빴다.

“이곳까지 오는 것도 얼마나 힘들게 오셨는데. 심지어 숲에 가자고 조르기까지 하면 어떻게 해? 숲에서 무서운 짐승이라도 만나게 되면 어쩌려고.”

“그렇지만…….”

“운이 나쁘면 사나운 들개를 만날 수도 있어!”

아무리 좀 약해졌다고 한들 일신의 무력이 사라진 것도 아닐진대…… 숲에 있는 포식자들이 떼로 덤벼든다 해도, 멀쩡히 살아 돌아올 자신이 있는 루크의 시선이 더욱 짙어졌다.

이쯤 되면 자신을 향한 루크의 눈빛을 눈치챌 법도 하건만, 소년의 시선은 여전히 여동생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정색과 함께 이어지는 오빠의 꾸지람에 도로테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메릴린 언니도 들어갔잖아.”

“메릴린 누나는 건강하잖아!”

“…….”

한순간에 메릴린 레어보다도 더 ‘약하고 가녀려’ 보호받아야 마땅할 존재로 전락하게 된 루크가 움찔했다.

그렇다고 해서 걱정하는 마음으로 꺼낸 아이의 말 몇 마디에 분노로 반박하는 것은 너무 볼품없는 일이기는 했다. 개차반 황자에게도 그 정도의 분별력은 있었지만…….

도로테아의 눈웃음을 본 7황자가 끝끝내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홱 몸을 돌린 스탠이 쪼르르 그의 발치로 다가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머리가 어지럽진 않으세요? 혹시 또 식은땀이 나는 거면 천에 물을 적셔 좀 닦아 드릴까요? 일단은 푹신한 이부자리에 누워서 숨을 좀 가다듬으시는 것이 좋겠어요.”

“…….”

그를 죽을 자리로 보낸 황제도, 양아버지나 다름없던 변경백도, 이런 사소한 걱정을 쏟아 낸 적은 없었다.

도로테아는 뭐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삐걱대는 황자를 보며 재밌다는 듯 눈을 빛냈다.

스탠은 더욱 적극적으로 두 팔을 걷어 붙였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게 도와 드릴게요.”

“안 돼!”

의욕으로 넘치는 소년을 제지한 것은 도로테아도, 루크도 아니었다.

저 멀리서부터 달려온 데인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이, 이분이 오, 옷을 갈아입는 것을 네가 왜 도와준단 말이냐?”

뜻밖의 다그침에 당황한 스탠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답했다.

“계속 제가 도와 드렸는걸요. 정신을 잃고 계실 때 몸을 닦아드린 것도 저고…….”

“그때는 정신을 놓고 있었지만 지금은 멀쩡하니 혼자 할 수 있을 게다. 그렇지?”

숫제 어린 동생을 달래는 듯한 어조였다.

루크는 그런 데인을 상대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데인의 갑작스런 만류에 할 일을 잃은 스탠은 몹시도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

“전하는 자주 아픈 분이란 말이에요. 밤새 끙끙거리기도 하시고, 걸핏하면 쓰러지셔서 홀로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벅찬 분이신데, 왜 자꾸 혼자 모두 해야 한다고 그러세요…….”

“그, 그, 그 전에도 이런 시중을 들었어? 함께 밤을 새고, 옷을 갈아입혔단 말이냐?!”

데인의 경악 어린 목소리에 주변인들의 시선이 몰리기 시작했다.

개가 짖나, 싶을 만큼 무시로 일관하던 루크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여차하면 오늘이야말로 저 방자한 하이클레어의 뒤통수를 후릴 심산이었다.

물론 그런 루크의 살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데인은, 고개를 돌려 마침 그곳을 지나던 행정관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이봐.”

데인은 어안이 벙벙한 행정관의 어깨를 쥐고서 사뭇 진지하게 지시했다.

“가서 되도록이면 섬세하고 요리 잘하는 여인을 고용해 주게. 돈일랑 걱정 말고. 그저 음식 솜씨 훌륭하고 손이 야무진 인물이면 좋겠군.”

“예?”

“테…… 7황자 전하를 챙길 인물이 필요하단 말일세.”

다짜고짜 건넨 말에 행정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끔씩 공을 세우겠답시고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오는 젊은 귀족들이 이런 요구를 해 온 적이 있긴 했지만, 7황자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하녀가 아니라 시종조차도 곁에 두지 않고 늘 홀로 다니곤 했는데.

“황자 전하께서 요구하신 겁니까?”

“지금 저분께는 꼭 필요하다니까!”

결국 루크가 주먹을 들어 올리려던 순간이었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도로테아가 번쩍 손을 들었다.

“제가 할게요.”

“응? 네가?”

조그마한 몸집의 소녀를 내려다본 데인이 당황한 듯 눈을 끔뻑였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도로테아가 루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황자 전하께서도 제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실 거예요.”

평소라면 진작 폭력을 행사했어야 할 성질 더러운 양이 눈살만 찌푸린 채 가만히 서 있는 까닭이야 명확했다.

막 트인 눈과 귀 탓에,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섞여 드니 정신이 사나웠겠지.

데인이 그의 눈을 두고 ‘수줍은 소녀 같다.’라던 것 또한,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기인했다.

보이는 것이 너무 많아, 보지 않으려고 초점을 흐리다 보니 눈빛에 명료함과 날카로움이 사라졌기 때문일 터.

‘그러니 후회하게 되리라 말했건만.’

너무 많은 것들을 보고 듣게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루크는 아직 채 반도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데인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는 루크에게 스탠을 붙여 가까스로 잠재워 놓은 도로테아는, 그제야 느릿한 걸음으로 발레리의 막사를 찾았다.

“어머, 사라.”

발레리가 생긋 웃으며 도로테아를 맞이했다.

“아주 대단한 모험을 하고 왔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 걸까. 아주 늠름해 보이는걸?”

어린아이처럼 취급하는 그녀의 말에 의아해하던 메릴린은 그제야 곁에 그리엄이 있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도로테아는 생글거리며 그 나이 또래의 어린 소녀처럼 발랄한 걸음으로 메릴린을 향해 다가갔다.

“황자님이 그러는데 언니가 큰 상을 받을 거래요.”

“딱히 그런 건 바라지 않는데.”

떨떠름하게 고개를 돌리던 메릴린이 제 앞에 놓인 접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냥 양질의 식사나 마음껏 했으면 좋겠네.”

여기까지 오고 나니 그녀가 이제껏 가치 있게 여겼던 값비싼 보석도, 하늘하늘한 드레스도, 사람들의 선망 어린 시선도 거추장스럽게 여겨졌다.

“역시 먹는 것이야말로 남는 것일지도…….”

제법 진지한 메릴린의 중얼거림에 발레리가 옅게 웃었다.

함께 있으면 닮아 간다더니, 어느새 도로테아의 기행뿐만 아니라 실리주의적인 사고방식마저 닮아 가는 것이 못내 흥미로운 눈치였다.

도로테아는 제게 건네진 달콤한 과일즙을 들이켜며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께서 전하라 하셨어요.”

“응?”

“미끼를 던져 놓았으니 상대가 물기 전까지 기다리면 된다고요.”

몹시도 뜬금없는 말이었다.

루크와 그런 말을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거니와, 그런 전언을 건넬 만한 인물도 아니었으니까.

의아해하는 메릴린과는 달리 눈치 빠른 발레리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때가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어요. 조만간 큰 소란이 일어날 거라고요. 손을 대지 않고도 코를 풀 수 있을 테니 너무 답답해하지 말라시던걸요.”

그제야 루크의 입을 빌려 ‘도로테아’가 건네는 말임을 깨달은 메릴린이 미간을 좁혔다.

“조만간 소란이 일어나?”

어깨를 으쓱한 도로테아가 덧붙였다.

“그냥 그렇게 전하면 아실 거라던데요.”

가만히 서서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리엄이 막사를 빠져나가자, 흘끗 눈치를 살피던 메릴린이 그제야 궁금하다는 듯 물어 왔다.

“무슨 미끼를 던져 놨다는 거예요?”

싱긋 웃은 도로테아는 아무 말 없이 남은 과일즙을 들이켜고는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일어났다.

돌아가는 그녀의 뒤로 따라 나온 발레리가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테아.”

“응?”

“혹시…….”

운을 떼고도 한동안 말을 잇지 발레리는, 도로테아의 차분한 눈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역시, 라고 해야 할까. 눈치가 빨라.

하고 싶은 말을 삼켜 낸 발레리를 보며 빙긋 웃어 보인 도로테아가 몸을 돌렸다.

그 뒤로도 꽤 한참 동안, 멀어져 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던 발레리는 어느새 막사 밖으로 나와 곁에 선 프리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분간, 테아를 좀 지켜보는 것이 좋겠어.”

“…….”

“넌 사실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크게 상관없잖아. 애초에 죄를 사면 받은 입장이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나.”

무뚝뚝한 프리드의 물음에 발레리가 고개를 들었다.

“당분간 움직이지 말라던 말이 걸려서.”

“그게 왜?”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움직여야 할 입장이거든. 테아는 원래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사람이잖아.”

상황을 지켜보고 상대가 먼저 달려드는 판을 기다리는 건, 그 애의 성향이 아니야.

“합리적인 안정성을 추구했더라면 애초에 이곳까지 내려왔을 리도 없고.”

죽음의 술사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위험까지 무릅쓰고서 말이야.

“그러니까 뭔가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돼. 여차하는 상황, 어쩌면 우리가 곤란해졌을 때 자기 자신이 나설 수 없는 이유라든가.”

대화에서 느꼈던 묘한 기류를 떠올린 발레리가 나직이 말했다.

“기회를 봐서 테아가 쓰던 그 기이한 힘, 지금도 쓸 수 있는 지 확인해 봐. 그리고, 알지?”

고개를 든 프리드의 시선이, 도로테아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길게 머물다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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