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그 무렵, 모진 고문을 받느라 몰골이 엉망이 된 첩자의 숨통을 친히 끊어 준 후작은 자신이 막사로 초대한 이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여인이 쓰고 있던 가면을 벗자, 그 아래 숨겨져 있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처음부터 그녀의 정체를 짐작한 듯 후작이 덤덤한 얼굴로 찻주전자를 들어 빈 찻잔을 채웠다.
“미리 알려 주어 고맙다. 어느 전장이나 세작은 있기 마련이지만, 희생 없이 잡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
잡초 하나 솎아내자고 주변의 풀을 모두 뜯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확신이 있지 않는 이상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군영 내에 배신자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병사들의 사기는 꺾이는 법이었다.
“별말씀을요. 메릴린을 위험한 함정에 빠뜨린 작자인걸요. 알고 있는 사실조차도 익명에 기대어 후작님께 모두 떠넘겨 버렸으니 저야말로 송구할 따름이에요.”
“…….”
“진작부터 제가 누군지 알고 계셨군요.”
발레리가 생긋 웃으며 말하자, 후작이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명색이 무인이 아니냐. 체격이며 목소리, 무엇 하나 다른 것이 없는데 가면 하나 덮어쓴다고 어찌 모를 수가 있어. 오래전부터 후작저를 밥 먹듯 드나들던 손녀딸의 친구를 못 알아볼 정도라면, 검을 들고 전장에 나와 있겠느냐. 진작 관 짜서 드러누웠겠지.”
노(老)후작의 신랄한 말에 발레리의 웃음이 짙어졌다.
“테아는 네가 여기 있는 것을 알고 있느냐?”
발레리가 미소만 짓고 있자, 미간을 좁힌 후작은 그녀를 보는 대신 고개를 돌려 허공을 응시한 채 말을 이었다.
“너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아이다. 내가 너를 고해바치지 않는다 한들, 이곳에 머무르는 것은 지나치게 위험해.”
“…….”
“나는 내 손녀딸이 생각 외로 냉정하고 매정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자신의 사람들도 아닌 저들을 품으려 너를 움직였을 리가 없어. 로헨 왕국의 생존자들이라니. 네가 어찌 저들의 수장이 될 수가 있단 말이냐.”
“어쩌다 보니 그리되어 버렸어요. 뜻한 바도 아니었고, 하려고 작정한 일도 아니었죠.”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정보 수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뿐더러, 거기다 더해 ‘죽음의 술사’와 관련된 증언을 얻고자 움직인 것에 불과했다.
왕녀의 이름 또한 오래 사용하지 않고 버릴 생각이었고.
“그렇지만 계획이라는 것에는 늘 변수가 따르죠. 이번에는 제 마음이 변수였어요.”
“…….”
잘못한 것도 없이 하루아침에 나라를 잃고 근간을 빼앗긴 이들의 간절함과 고통은 발레리를 움직이게끔 만들었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거든요.”
어리석게도 타인의 욕심에 휘둘린 누이에게 엮여 가문과 가족, 창창하던 미래까지 모두 빼앗긴 젊고 아름다운 기사를.
“어린 시절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할 줄도 몰랐고요.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니까요.”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을지라도, 무언가 시도해 볼 수 있다면 그리하고 싶었다.
평생을 그저 ‘숨이 붙어 있는’ 것에 만족하기에는, 남은 날들이 너무 길었다.
“이번 원정에 참여하지 않으면, 저들은 설 곳이 없어요. 아주 적은 공이라도 세워야만 생색내듯 척박한 땅일랑 던져 주는 시늉이라도 하겠죠. 먹음직스런 인재들이 탐나서라도.”
설령 대단한 도움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동정과 적선에 불과할지라도.
“작은 조약돌도 모으고 모으다 보면 언젠가는 강을 메울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것을 디딤 삼아 살아남을 희망을 가질 수 있게끔.
웃고 있는 발레리를 편치 않은 기색으로 바라보던 후작이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일이 잘못되어 황궁으로 흘러 들어가거나, 문제가 될 기미가 보인다면 나는 너를 모른 척할 게다.”
단호하게 선을 긋는 말에 발레리는 서운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흘끗 바라보던 후작이 덧붙였다.
“공식적으로는. 이래 보여도 제국의 지휘관이자, 연합군을 아우르는 총사령관의 직책을 맡고 있으니까.”
“…….”
“그렇지만 오랜만에 만난 손녀딸의 친구에게, 할아비가 되어 마냥 매정하게 굴고 싶지는 않으니 훗날 도움이 필요하거든 몰래 부탁하거라. 손이 닿는 데까지 도와주마.”
결국 몰래 눈감아 주겠다는 말과 진배없는 귀띔에 발레리가 복잡한 기색이 물든 얼굴로 남은 차를 입에 머금었다.
“정치적인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그동안 잘 지냈느냐? 생각보다는 여윈 듯한데.”
“그럼요, 잘 지냈습니다.”
“네 가문 사람들이 궁금하지는 않고?”
후작의 말에 발레리가 멈칫했다.
“필립이, 살아남은 방계의 자식들을 틈틈이 챙기고 있단다. 한번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
“늙어 보니 마음이라는 게 그렇더구나. 잘못 심긴 풀은 솎아 내야 옳지만, 그렇다고 땅을 다 파헤치면 황폐해진 자리에 무엇이 남는단 말이냐. 근본은 두어야 공허해진 마음도 회복할 수 있는 법이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녀딸에게 해 주듯, 다정하고 따뜻한 충고에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발레리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저는 후작님의 강직하고 바른 면모를 존경해요.”
흔들림 없이 앞을 바라볼 수 있는, 무모할 정도의 확신과 곧은 신념은 눈이 부실 지경이죠.
“그렇기에 동시에 염려가 되기도 하고요.”
지나치게 곧고 바르다 보면 휘어지지 못하고 꺾이기 마련이라.
그토록 아끼는 손녀딸이 가진 유별난 힘과, 그 힘에 담긴 위험성을 모두 세세하게 알았을 때 당신이 얼마나 괴로워하게 될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그러니 조금이라도 생각이 유연해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물끄러미 후작을 바라보던 발레리가 물었다.
“혹시, 사후 세계를 믿어 본 적 있으세요?”
“으응?”
“이미 죽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머무르며 지켜 준다는 그런 이야기들이요. 특히 동화를 보면 물건에 깃들어 수호해 주는 영혼들이 많잖아요. 에고 소드나 에고 펜던트같이.”
몹시 뜬금없이 ‘사후 세계’를 언급한 발레리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귀신 들린 저택, 저주받은 숲, 초대 황제의 목소리가 들리는 황궁 등등, 그와 관련된 여러 괴담들을 늘어놓았다.
한참 동안이나 손녀딸의 친구가 말하는 일명 ‘사후 세계’이야기를 듣던 후작은, 그녀가 가문을 잃은 상실감에 이러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기 시작했다.
‘허어, 그토록 잃은 사람들이 그리웠는고…….’
* * *
옆구리의 상처가 생각보다 중한 탓일까.
좀처럼 피가 멎질 않는 상황에서, 데인은 담담하게 몸을 일으켰다.
메릴린이 기겁을 하고 그의 어깨를 눌러 내리 앉혔다.
“자꾸 움직이려 들지 말아요. 가뜩이나 지혈도 잘 되지 않는걸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움직이기 힘들어질 겁니다.”
“이러다 밖에 나가서 다른 괴수라도 조우하면요? 우리 둘 다 죽은 목숨이에요.”
동굴 밖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듣고서 알았다.
이곳은 괴수가 머무르던 계곡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 틀림없었다.
‘분명 붙들려 있던 그놈 뒤에 자그마한 동굴 입구가 있던 걸 봤던 것 같아.’
숲에 있는 괴이한 존재가 그것 하나뿐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피가 멎는 방법을 좀 생각해 봐야겠어요.”
단순히 짐승에게 물린다고 해서 이런 상처가 생기지는 않는다.
심지어 살점이 뜯겨져 나간 부위를 중심으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시커먼 괴사는, 누가 보더라도 짐승에게 물린 상처와는 거리가 멀었다.
“제가 부적에 대해 좀 더 잘 알았더라면 좋을 텐데. 무병부적(無病符籍)은 쓸 줄 몰라서.”
차라리 리리에게 들어왔을 때처럼 둘러업고 숲 밖으로 이동시켜 달라고 해야 할까.
그 속도라면 상처가 더 크게 벌어질 지도 모르는데.
입술을 잘근 깨문 그녀가 고개를 들고 정령을 향해 무언가를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상처가 아픈지 신음하던 데인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빛이 새어 드는 방향을 향해 얼굴을 굳혔다.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당황한 메릴린이 그가 응시하는 방향으로 귀를 기울였다.
과연, 멀리서 희미하지만 사람의 발소리로 여겨지는 것이 들려왔다.
스르르륵- 텅.
무언가가 질질 끌려오다 부딪혀서 나는 소리와 함께.
그때였다.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빙빙 돌던 정령이, 마치 반가운 손님이라도 맞이하듯 신이 나 쏜살같이 동굴 저편을 향해 날아갔다.
“테아? 도로테아 영애인가요?”
정령의 반응에 화색이 깃든 메릴린이 고개를 쭉 내밀자, 이윽고 멀리서 다가오는 누군가의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의문스러운 소리의 정체 또한 알 수 있었다.
도로테아를 품에 안은 루크가 비어 있는 손으로 죽은 괴수의 거죽을 질질 끌고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단한 거죽은 땅에 질질 끌려도 상하지 않았지만, 울퉁불퉁한 바닥에 끌려 퉁퉁 여기저기 부딪치고 있었다.
털북숭이의 짐승을 본 메릴린은 사람이 먹히던 광경이 떠올랐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벽에 기대어 있던 데인이 나직이 웃었다.
“너였구나. 진작부터 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네가 아닌 것이 더 이상하지.”
루크의 품에 안겨 있던 도로테아가 데인의 중얼거림을 듣고서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설마하니 눈치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입에서 짐작하고 있었다는 말이 나올 줄은 그녀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메릴린이 준 천으로 옆구리를 꾹 누르고 있던 데인이 몸을 일으켰다.
“으으-.”
신음 소리와 함께 얼굴을 왈칵 구겼지만, 그는 이곳까지 자신을 찾으러 온 ‘가족’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느릿하게 다가가 루크의 앞에 선 데인이 고개를 들어 피식 웃었다.
“그래, 어쩐지 다르다 느꼈어. 네가 아니면 그럴 리 없잖아.”
도로테아의 두 눈에 호기심이 가득 어렸다.
정말로 나를 알아봤나?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다른 목소리를 내는 나를?
“모습이 바뀌면 뭘 하냐. 갓난아기처럼 하루 종일 먹고 자는 것을 제일 즐기는 본성이 달라지질 않았는데. 스스로 걷는 것조차 귀찮아서 다른 이들의 품에 안겨 다닐 정도로 게으르면서도, 흥밋거리만 있으면 들소처럼 덤벼드는 구석까지.”
한마디 한마디 애정 섞인 말을 들으며 메릴린은 마음 한편으로 밀려드는 감동에 슬쩍 미소 지었다.
이윽고 데인이 손을 뻗어 루크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
“짜식, 모습을 바꿔도 7황자 흉내를 내냐. 내가 설마 7황자가 평소에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까 봐.”
그 7황자께서는 한쪽 손에 영수의 시체를, 다른 한쪽 손으로는 도로테아를 안고 있다가 당한 기습적인 손길에 대응하지 못하고 묵묵히 서 있었다.
메릴린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아니, 편견이 없는데도 정도가 있지. 눈앞에 애가 있는데 왜 하필 그쪽이야?!’
물론 7황자가 요 며칠 먹고 자는 데에 열중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몸이 어떻게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라고 생각을 하냐고!
데인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말을 이어 나갔다.
“진짜 7황자는 이렇게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있진 않아. 그 자식의 모든 것이 다 싫지만, 그나마 마음에 드는 것이 잘 벼려진 흉흉한 눈깔뿐인데.”
“…….”
“지금은 봐라.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것이 영…….”
“…….”
“딱 열여섯 수줍은 소녀의 눈…… 크헉!”
한마디만 더 건넸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메릴린은 미친 듯이 달려가 데인의 목을 후려갈겼다.
평소라면 그녀의 손길에 손쉽게 당해 줄 리 없을 데인도, 피를 한 웅덩이나 흘린 상황에서조차 멀쩡할 수는 없었던지 이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그, 일단은 부상자라서요.”
“…….”
“심정은 이해하지만 나가서 좀 낫고 나면 패세요.”
맞을 짓을 했다는 것에는 동의하나, 지금은 때려서는 안 된다는 메릴린의 간절한 말에 루크가 말없이 돌아섰다.
“저놈은 네가 들고 오도록.”
그때 루크의 품에 안겨 있던 도로테아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메릴린에게 건넸다.
“지혈이 되지 않는 것은 상처 부위에 부정한 탁기(濁氣)가 스몄기 때문이에요. 그걸 상처 부위에 붙이면 피는 멎을 테니까, 치료는 나가서 하죠.”
주춤거리면서 부적을 받아 든 메릴린이 뜯겨 나간 옆구리에 붙이고는 조용히 뒤를 따랐다.
동굴을 빠져나오자, 끔찍한 괴수의 시체가 더욱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털 안쪽으로 보이는 시커먼 입안에는 아무것도 비치는 것이 없었다.
‘소화가 되어 버린 걸까.’
그 입 속으로 사라져 버린 누군가를 떠올린 메릴린이 우울한 얼굴로 데인을 품에 안고서 말없이 루크의 뒤를 따랐다.
* * *
숲 어귀에 다다르자,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흘끗 뒤를 바라보던 루크가 말없이 속도를 높이는가 싶더니, 초조한 얼굴로 메릴린을 기다리고 있던 이들 앞에 질질 끌고 온 괴수의 사체를 내려다 놓았다.
“이, 이, 이건……!”
이미 한차례 폭사되었던 사체는 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 털북숭이 짐승과 마주한 적 있던 이들은, 이 끔찍한 짐승의 사체에서도 느껴지는 흉흉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런, 황자 전하께서 숲에 들어가셨었습니까?”
묵묵부답으로 가만히 서 있는 루크를 대신해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도로테아가 답했다.
“황자 전하가, 숲에 예쁜 꽃들이 있다면서, 저한테 가자고 하셨어요! 저는 안 된다고 했는데 꼭 꺾고 싶은 꽃이 있다고 하셔서요!”
냉큼 답하는 도로테아의 말에 키엘이 두 눈을 감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셨군요. 꽃을 꺾으러 다녀오신 김에 저 괴수도 때려잡으신 모양입니다.”
루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얼굴이 붉어진 에이든이 콧김을 뿜어내며 다가왔다.
“황자는 꽃을 따러도 들어갈 수 있는 숲을, 왜 나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거요?”
“숲에 출입하는 이들이 없게끔 하라는 후작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데인 놈이 무사한지만 보고 나온다니까! 그놈의 자식 틀림없이 저길 들어갔을…….”
“그놈이라면 곧 나올 거다.”
성이 잔뜩 난 에이든의 말에 루크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렀다.
“데인 경이다!”
“뭐?”
에이든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불과 조금 전에 달려드는 맹수들을 한 방에 때려잡으며 정찰대를 무사 귀환시킨 메릴린은…… 또다시 저 끔찍한 숲에서 누군가를 구출해 왔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은, 피투성이인 채로 의식이 가물가물한 데인 하이클레어였다.
귀족 영애 따위가 뭘 할 수 있냐며 못마땅하게 여기던 이들조차도 입을 다물게끔 만들기에 차고 넘치는 활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