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못 들을 것이라도 들은 것처럼 연신 귀를 후비며 숲으로 성큼 성큼 들어선 메릴린은, 숲 깊숙이 들어갈수록 불안함에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오기 직전 들었던 굉음이 신경 쓰여 무작정 들어오긴 했는데……
‘설령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한들, 내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도로테아조차도 상대하기 버거워할 정도라면, 자신이 간다 하여 상황이 뒤바뀔 일은 없을 터. 도리어 인질이 되어 짐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
사방이 빽빽한 나무로 둘러싸인 숲 안쪽은 놀랄 정도로 고요했다.
마치 누군가가 인위적인 방법으로 소란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이 들게끔.
적막이 내려앉은 숲으로 들어갈수록, 메릴린의 확신은 더욱 짙어졌다.
‘분명 숲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공기가 이토록 서늘한데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 이토록 빽빽하고 울창한 숲에 생명체의 기척이 전무하다는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었다.
발치에 있던 나뭇가지가 발에 밟히며 버석 소리가 귀를 메웠다.
순간 멈칫하고 걸음을 멈춘 메릴린이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미리 좀 해결해 두라고 했잖아요…….”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모두 숲 밖으로 돌려보낸 뒤, 지금까지 어떻게든 삐걱이나마 움직이게 만들었던 ‘책임’이 들어앉았던 자리에 공포가 비집고 들어섰다.
앞장서던 리리가 고개를 갸웃하고 메릴린을 돌아봤다.
뚝, 하고 반 토막 난 나뭇가지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순간이지만, 실은 이런저런 핑계들만 머릿속에 계속 떠오르는 까닭은 명확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 모르는 척 도로테아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싶다는 것.
“나란 인간은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지.”
실은 알고 있었다.
도로테아가 자신을 골탕 먹인 적도 많지만, 언제나 마지막 선택의 조각은 메릴린 본인이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무례를 저지르고, 두려움에 사과를 하러 저택을 찾았던 날 도로테아는 이미 경고했었다.
“이제 굳이 이 저택을 찾아오실 필요는 없어요. 되도록이면 엮이지 않는 게 서로에게도 편할 테고.”
그 말에 기쁘게 달음박질쳐서 저택을 빠져나온 뒤로, 하이클레어 후작저가 있는 방향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사냥제에서 재회했을 때조차도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아 도로테아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려드는 멧돼지에게서 그녀를 구한 건 프리드였다.
그가 도로테아의 명 없이 자신을 위해 움직였을 리 없으니 사실상 그녀를 구한 건 도로테아였겠지.
데인과 우연히 마주쳐 함께 있다 습격을 받았던 날도, 도로테아는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지 않고 깍듯하고 정중한 사과를 건넸다. 합당한 보상까지 약속하면서.
그리고 메릴린은 그날의 보상으로 게르만 백작의 막내아들이던 레이몬드 게르만의 시체를 차지하고 있는 악귀를 처리해 달라는 부탁을 했더랬다.
늘 부리는 사소한 심술들로 사람의 심장을 들었다 놓지만, 그 와중에도 중요한 선택권은 메릴린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내 부탁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루어 주었고.’
이번 일만 해도 멋대로 숲에 정찰을 가겠다고 해 놓고 ‘알아서 준비해 두라.’며 엄포를 놓은 것은 메릴린 본인이 아니었던가.
문제가 생기자 숲으로 들어와 조언해 준 것 또한 도로테아였건만.
“내가 왜 영애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드는지 알 것 같아.”
그 사람은 한 번도 누군가의 앞에서 비겁하게 굴거나 회피한 적이 없었거든.
먼저 자신을 건들지 않는 이상 스스로의 지위나 힘을 믿고 누군가를 함부로 대한 적도 없고.
“나는 지금도 무서워 죽겠는데.”
차라리 황도에 가만히 앉아서 들어오는 혼담 중 아무나 잡아 시집이라도 가 버렸으면 이런 꼴은 안 봐도 되지 않나, 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할 정도로.
그 혼담들조차도 대부분이 하이클레어 후작 가문과의 연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속셈일 테지만.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린 메릴린이 주변을 맴돌던 정령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장 빠른 길로 안내해 줘, 리리.”
돌아가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잡생각이라도 덜할 수 있게끔, 최대한 빨리 가는 편이 낫겠지.
메릴린의 목소리에 깃든 단호함에 뭔가 기특하다는 눈을 하고 바라보던 리리는…… 그녀를 어깨에 번쩍 둘러멨다.
“응? ……응?!”
그러고는 미친 듯한 속도로 쌩하니 숲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잠깐만?! 빠른 길로 안내하…….”
라고 했지 이렇게 빠르게 가란 소리는 아니었어!
입술조차 떼기 힘들 만큼 빠른 속도에 메릴린이 경악하거나 말거나, 정령은 성난 들소처럼 목적지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취소! 아까 했던 생각 다 취소! 취…….’
그리고 메릴린은 정령의 어깨에 메달린 채로 지나친 속도감에 시달리다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가까스로 깨어났을 때, 그녀의 눈앞에 보인 것은 사방이 어둑한 동굴의 울퉁불퉁한 벽이었다.
* * *
벽을 더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메릴린이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 여기가 어디…….”
깊은 동굴 안쪽이라 그런지 목소리의 떨림이 배로 느껴졌다.
입을 꾹 다문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비로소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빛에 의존해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사람이 드나든 적 없는 자연적인 동굴이라 그런지, 걷기 힘들 만큼 뾰족뾰족한 바위들이 바닥에 즐비했다. 잘못 걸려 넘어졌다가는 꽤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을 것 같은 환경이었다.
머뭇거리며 고개를 든 순간, 어디선가 나는 비릿한 피 냄새에 메릴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홀린 듯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의 시야에 동굴 벽에 기댄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메릴린의 기척을 느낀 것인지, 고개를 든 상대에게서 의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메릴린, 영애?”
익숙한 목소리에 메릴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데, 데인 경?”
전보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자, 다친 옆구리를 손으로 틀어막은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데인 하이클레어가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경이 여긴 웬일로…….”
분명 데인은 남아서 본대를 지키고 있어야 하지 않나.
데인은 자신을 의아한 듯 바라보는 메릴린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설마, 숲에 몰래 들어온 건 아니죠?”
“…….”
입을 굳게 다물고 묵비권을 행사하는 데인의 모습에 메릴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차게 갖춰 입은 보호구부터, 발치에 놓인 잘 벼려진 검까지.
누가 봐도 만반의 전투 준비를 갖추고서 숲에 들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메릴린이 두 손으로 매섭게 철없는 기사의 등을 내리쳤다.
“도대체 정신이 있어요, 없어요?”
“으윽.”
“사람이 들어오지 말라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죠. 여길 왜 들어오고 그래요?”
“혹시라도 일이 생기면 합류할 생각이었습니다. 별일 없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면야 그저 병영을 이탈한 죄만 지면 그만이지만, 일이 생기면 잃어야 하는 이들이 수십이니까요.”
“여기 대체 뭐가 있는 줄 알고 겁도 없이……!”
한숨을 삼킨 메릴린이 옆구리를 틀어막고 있는 데인의 손을 뗐다.
진득한 피가 흘러나오는 자리의 상처는 몹시도 괴상했다.
마치, 무언가에 물어뜯기기라도 한 듯 떨어져 나간 살점이 빠른 속도로 괴사되어 가는 중이었다.
‘물어뜯겨?’
설마설마하는 얼굴로 상처를 살피던 메릴린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혹시,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는 짐승을 만났어요?”
“어찌 아셨습니까?”
놀란 듯한 데인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메릴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금 물었다.
“그 괴수가 혹시, 도로테아 영애의 목소리도 흉내 내던가요?”
데인은 어딘가 불안한 기색을 담고 있는 메릴린의 두 눈을 바라보다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들은 목소리는 남자의 것이었습니다. 테아 녀석의 목소리였더라면 아마 이 정도 상처만으로 끝나지 않았겠지요.”
이성을 잃고서 덤벼들었을 테니.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 목소리의 주인 또한 희생자 중 한 사람이었을 테니.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나요?”
“그랬을 수도, 아니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영애도 알다시피 제가 무엇이든 진득하게 기억하는 성미가 되지 못하는 터라 확신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멋쩍은 듯 내뱉은 말에 메릴린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순간, 데인의 품 안에서 반쯤 타 버린 부적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낯익은 문양을 본 메릴린은 반쯤 날아간 문양의 원래의 형태를 기억해 보려 애썼다.
분명 제인에게 특훈을 받을 때 본 적 있는 문양인데.
“아니, 어제 외우셨던 문양인데 왜 이걸 모르세요?”
“낮에 워낙 힘든 훈련들을 많이 하다 보니까…….”
“잘 외운 부적 하나가 호시탐탐 몸을 노리는 악귀를 쫓는 거라고요! 또 빙의되고 싶지 않으시다면서요!”
“그야 그렇지만…….”
“자, 집중하세요. 사특한 기운을 막는 벽사부(僻邪符)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고요?”
엄하게 자신을 질책하던 제인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그제야 반쯤 타 버린 부적의 쓰임새를 알 것 같았다.
음의 기운을 지닌 존재를 밀어내는 ‘불침부(不侵符)’.
아마도 그 괴물의 입에서 이만한 상처만 입고 빠져나온 것도, 저 부적 덕분이 아니었을까.
물끄러미 타 버린 부적을 바라보던 메릴린이 나지막이 말했다.
“홀린 것도 아니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뻔히 보이는 함정에 걸어 들어가면 어떻게 해요?”
“혹여 살아 있으면 뱃속을 갈라서라도 꺼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데인의 어이없는 말에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그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 있겠어요.”
“기합으로요.”
얼씨구, 그놈의 기합.
진지한 데인의 말에 다시 한번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삼킨 메릴린이 품을 몇 번 뒤적이더니, 지혈용 천을 꺼내어 옆구리를 지그시 눌렀다.
“으윽.”
“좀 참아요. 그러게 누가 오지랖 넓게 나서래요?”
“그 괴물, 마주하셨습니까?”
“그래요. 만났죠. 게다가 사람을 흉내 내어 일행들을 꾀는 바람에, 결국은 희생자를 만들고 겨우겨우 숲을 빠져나오는 것까지가 할 수 있는 전부였어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데인의 말에 메릴린이 울적한 얼굴을 하더니 무릎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아무것도 못 했어요. 사람이 눈앞에서 끌려가는데, 다른 사람들 챙겨 나오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다행은 무슨.”
“애초에 정찰이 목적이었고, 상대와 맞닥뜨리고도 최소한의 희생으로 모두를 살렸으니 훌륭한 지휘관인 셈입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휘하의 병사들을 수십씩 잃은 저는 검을 들 자격이 없겠지요.”
그러고 보니 몇 번의 작전이 실패했다고 했었지.
파벌들의 견제로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치러졌던 전투에서 희생자가 제법 나왔었다고.
이곳에 내려와 보게 된 데인과 에이든이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대하는 통에, 이곳이 전장이라는 사실조차도 잊고 있었다.
“그나저나 영애께서는 절 찾으러 오셨습니까?”
“아, 그건…….”
생각해 보니 데인은 도로테아가 다른 모습을 하고서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뜻밖의 날카로운 질문에 정곡을 찔린 메릴린이 우물쭈물했다.
“제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오신 게 아니라면, 혹 다른 이유가 있는 겁니까?”
재차 물음을 던지고서 메릴린의 반응을 살피던 데인이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린 채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이곳에 테아가 있습니까?”
“……!”
“살릴 수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살려 숲 밖으로 내보냈고, 제가 들어왔다는 사실은 알지도 못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영애가 희생자까지 나왔던 괴물이 있는 숲에 다시 들어왔다면 이유는 하나뿐이겠지요. 두려움조차 이겨 낼 만큼 구해야 할 사람이 이곳에 있다는 것.”
메릴린이 당황한 기색으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설마하니 ‘그’ 데인이 이렇게까지 빠르게 추론해 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데인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영애는, 테아의 하나뿐인 진정한 친우가 아니십니까.”
“그 망할 놈의 진정한 친…….”
이 와중에도 진정하고 유일한 친구 어쩌고는 잃지 못하는 데인을 보니 머리가 절로 지끈거렸다.
반박할 힘도 없던 메릴린이 입술을 깨물자, 데인이 말을 이었다.
“사실 조금은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은 느끼고 있었습니다.”
“느…… 끼셨다고요?”
“제 주변을 맴도는 그 애의 흔적을요. 제가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라고는 하나, 그래도 녀석과는 저택에서 몇 년을 함께 부대끼며 살아온 가족이 아닙니까.”
“놀라지 않으셨어요?”
도로테아가 가진 힘으로 벌이는 괴상천외한 일들 모두, 평범한 이들은 결코 예상하지 못할 만큼 범위가 넓었다.
가뜩이나 이매망량 따위의 헛된 것을 믿지 않는 데인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혼란스러울 법했다.
그러니 도로테아도 가족들에게만큼은 솔직해질 수 없었던 걸 테고.
“몇 번, 제게 말하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린 저를 불러두고는 옆에서 이매망량이니, 죽은 자의 넋이니. 그런 이야기를 입에 담았던 기억이 납니다.”
“…….”
“그때마다 제가 잠이 들어 끝까지 듣지는 못했지만요.”
“잠이 드셨다고요?”
“직접 보이지도 않는 것을 알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현실의 상대와도 겨루기 버거운 삶인데. 게다가 알아듣지 못할 말이라 너무 졸리더군요. 나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거라면서요. 그럼 뭐 하러 알아야 합니까?”
그러고 보니 도로테아도 지나가듯 가볍게 몇 번 이야기한 적 있었다.
데인은 양(陽)의 기운이 강해 한기를 가진 것들이 쉽사리 접근하지 못한다고.
“그, 그래도 모처럼 숨기고 있던 비밀을 용기 내서 말하려고 한 건데 듣다가 잠드는 건 좀…….”
“애초에 귀 기울여 듣는다고 한들 저는 그 애를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데인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족이니 이해 못 해도 사랑은 합니다. 그 녀석이 나쁜 길로 가면 때려 죽여서라도 옳은 길로 인도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냥 두는 거죠.”
“…….”
“그래서 메릴린 영애가, 녀석의 곁에 있어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난 그 녀석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겪고 있는 고통이나 아픔을 알아줄 수 없으니까.”
그래서 늘 ‘진정한 친우’니 ‘운명’이니 하는 말들을 입에 담아 사람의 복장을 뒤집었던 걸까.
나름대로는 친척 여동생을 아끼는 오빠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깨닫자 메릴린의 마음 한편이 숙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