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부정한 피가 그녀를 뒤덮자, 좀 전까지만 해도 빛으로 가득했던 눈앞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였다.
이윽고 지독한 악취가 그 뒤를 따랐다.
검붉은 피를 뒤집어 쓴 도로테아는 연신 눈을 깜빡였다.
코니움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피비린내로 진동하는 주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좀 전까지만 해도 느껴지던 인기척이 모두 사라진 것은, 단순히 감각을 잃었기 때문만은 아닐 테지.
아마도 이 자리에 살아남은 이들이 고작 셋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타고난 운명에서 벗어나 타락한 짐승의 거죽이 바닥에 축 늘어진 채 검붉은 피를 꿀렁꿀렁 쏟아 냈다.
암전되었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왔지만 도로테아는 제 눈에 무언가 ‘이상’이 생겼음을 눈치챘다.
‘눈이…….’
늘 지나칠 정도로 ‘많은 것들’이 보이던 눈앞이 쾌청하고 텅 비어 있었다.
허공을 떠도는 넋의 조각들은 물론이요,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호시탐탐 힘을 얻을 기회를 노리던 악귀 따위나 땅에 박힌 채 애처롭게 울어 대던 지박령 같은 것들.
도로테아가 손을 들어, 두 눈꺼풀 위에 흩뿌려진 검은 피를 닦아 내며 덤덤하게 말했다.
“내 문(門)을 닫았구나.”
갓난아이 때부터 신을 받은 육신의 눈은 한순간도 닫혀 있었던 적이 없었다.
도로테아는 놀라울 정도로 깨끗한 눈앞의 풍경을 생경한 눈으로 바라봤다.
처음으로 자신의 가족들과 같은 평범한 눈으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경이로웠다.
여러 생명을 태워 가며 만들어 낸 저주라고는 하나, 이 조잡한 봉안으로는 그리 오랜 시간을 닫아 둘 수는 없을 테니 고작해야 일주일가량이 한계일 테지만…….
어찌되었건 부정을 심하게 탔으니 당분간 꿈자리가 사나울 각오는 물론이고, 사이한 존재들로부터 위협받을 일도 많아질 테지만.
앞으로 겪게 될 성가신 일들을 헤아려 본 도로테아가 담담하게 인정했다.
“그렇구나. 네가 생각 외로 준비를 많이 하긴 했어.”
설마하니 겁 많은 코니움이 스스로의 안위까지 위태롭게 만들며 그녀를 몰아붙이리라 미처 생각지 못한 도로테아의 오판이었다.
다만, 이토록 강한 저주를 퍼부었으니 코니움에게 남아 있는 기력 또한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서 상황이 그리 절망적으로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상대가 원하는 바는 분명하지.’
동귀어진(同歸於盡).
얼마 남지 않은 명줄마저 이 자리에서 다한다 하더라도, 너를 반드시 끌고 가고 말겠노라고.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토록 미움을 살 만한 행동을 했던가 스스로를 돌이켜 봐도 자신의 어떤 점이 그녀를 그토록 절망케 했는지.
직접 기른 짐승이니 모르긴 몰라도 꽤 오랜 정이 들었을 테고,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이들 또한 여러 해 보고 지내며 함께해 온 동료들이었을 텐데.
거기에 본인의 생명까지 태울 만큼, 그렇게 짙은 원한을 살 까닭이 내게 있었던가.
“그저 열심히 살아내는 것이 내 이번 생의 목표였을 뿐인데.”
다들 왜 자신을 그토록 물고 늘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이만하면 그럭저럭 무난하고 선하게 잘 살아오지 않았나?”
뺨에 손을 가져다 대고 한숨을 푹 쉬어 대는 도로테아의 말을 들은 코니움의 얼굴에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스쳤다.
“원래도 뻔뻔한 인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이지…….”
읊조리던 코니움은 문득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조그마한 소녀를 훑었다.
분명 자신이 많은 것들을 희생하여 퍼부은 저주는 성공했다.
좀 전까지만 하더라도 조그마한 몸에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던 힘이 더 이상 이쪽을 짓누르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그랬다.
‘그런데 어떻게 저토록 여유로울 수가 있냔 말이야.’
가졌던 세계의 반쪽을 잃어버리고, 그 힘조차 온전하게 휘두르지 못하게 된 셈인데.
마치 이런 날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신기하다는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새로운 시야에 적응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코니움은 자신의 품속을 뒤져 상위 술법이 새겨진 스크롤을 꺼냈다.
“비록 잃은 것이 많았어도 다행히 너 하나를 데려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겠지. 7황자의 무용이 아무리 대단해도 스승님께서 직접 준비해 주신 술법에서 눈먼 술사를 지켜 낼 수는 없을 테니까.”
비웃음이 서린 말을 뱉어 낸 코니움이, 이제껏 가만히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고 있던 루크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애초에 지킬 생각이 있었더라면 진작 나서지 않았을까?”
도로테아는 코니움의 비웃음에도 아무런 대꾸 없이 침묵을 지켰다.
실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황자는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든가, 그 탓에 그녀를 안고 숲을 헤쳐 이곳까지 오는 것이 고작이었다든가 하는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다른 것이었다.
“어찌하여 죽은 짐승의 입에서 우리 집 작은 철부지의 목소리가 튀어나왔지?”
“그 입에 뒈졌나 보지.”
키득대는 답변에 도로테아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그랬더라면 내가 모를 수는 없어.”
그녀가 저주로 ‘눈’을 잃기 전에 이미 저 마수는 데인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어딘가에 살아 숨 쉬는 것은 분명하나, 서로 맞닥뜨린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단순히 맞닥뜨린 것만으로는 ‘목소리’를 삼킬 수 없었을 텐데?
이미 죽어 버린 짐승의 배를 가른들 일의 전말을 알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궁금하다면 직접 알아보지 그래? 설령 목숨이 붙어 있다 한들 지금쯤 피를 질질 흘려 가며 숲 어귀를 기어가고 있을 텐데. 그토록 애정이 넘친다니, 적어도 숨이 끊어지는 순간은 지켜봐 줘야 하지 않겠어?”
“…….”
코니움의 빈정거림을 들은 도로테아의 새까만 눈에 선득한 기운이 아렸다.
“루크.”
가만히 뒤에 기대어 서 있던 황자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인지, 명확하게는 알 수 없었으나, 도로테아를 휘감고 있는 새까만 어둠조차도 모를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네 눈을 좀 빌려야 할 것 같은데.”
“…….”
“내키지 않는다면 우리 거래를 할까?”
침묵하던 황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무슨 거래.”
“글쎄, 무엇이든 간에 내가 크게 밑지지 않는 선에서 바라는 것을 하나 들어주는 것은?”
“…….”
자그마한 소녀를 시큰둥하니 바라보던 루크가 맞은편에서 노려보고 있는 코니움을 훑었다.
그제야 어렴풋하게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군. 그러게 그냥 죽여 버렸으면 좋았지 않은가.”
그때 어째서 고이 스승에게로 다시 돌려보냈나.
“약속된 것은 지켜야 하거든. 입에서 튀어나온 언약은 모두 신의 뜻에 대고 건네는 맹세인지라, 나와 같이 신의 힘을 빌려 쓰는 자들은 거짓을 담아서는 안 돼.”
부정을 탄 자의 손을 스치는 수단도, 그를 통해 완성한 결과 또한 모두 어그러지기 마련이니.
그리고 조금쯤은 가엾게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잘못된 스승을 만나 살업을 쌓는 길로 들어선 그녀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어느 쪽이든 오늘은 마무리를 지어야겠네.”
마음을 정했는지 성큼성큼 걸어 나온 루크가 도로테아를 안아 들자, 코니움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뭘 하자는…….”
“좀 아플 거야.”
도로테아의 두 손이 루크의 눈을 가렸다.
작디작은 손이 닿자마자 이를 악문 황자의 목에 핏대가 선연히 선 것을 보아하니, 눈을 뽑아내는 듯한 고통을 이겨 내는 것은 역시 여간한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주춤거리는 코니움을 바라본 도로테아가 생긋 웃었다.
“어쩐지 덤비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서 입을 놀린다 했더니.”
이미 사령(死靈)에게 네 다리를 빼앗겨,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게로구나.
상황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없던 코니움이 얼굴을 굳혔다.
“그래, 이렇게까지 열렬히 나를 상대하고자 하니 원하는 대로 가까이 가 주는 것이 도리겠지.”
도로테아의 두 손으로 눈이 가려진 루크가 홀린 듯 코니움이 있는 방향으로 한 걸음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데인이 있는 곳을 말하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하렴. 나 또한 네 육신보다는 혼백에 묻는 것이 훨씬 편한 일일 테니.”
품속에서 튀어나온 신기가 날카로운 날을 자랑하는 거대한 낫이 되어 소녀의 손에 감겼다.
겁에 질린 코니움이 지체 없이 스크롤을 찢었지만, 도로테아의 손에 들린 낫이 금기를 범한 이들에게 날아드는 게 조금 더 빨랐다.
* * *
귓가를 맴돌던 상냥한 바람은, 숲을 빠져나오는 것과 동시에 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사라졌다.
아마도 숲에 남은 도로테아에게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등 뒤로 들렸던 요란한 소리에 찜찜함을 감추지 못한 메릴린이 불길한 분위기를 풍기는 숲 안쪽을 바라보았다.
“메릴린, 영애.”
쭈뼛쭈뼛 다가온 것은,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정찰대의 일원 중 하나였다.
출발할 적만 하더라도 저 두 눈에 담긴 것은 가소로움이었다.
고작해야 귀족 영애가 무엇을 배웠으면 얼마나 배워서 훈련받은 장병들을 통솔하겠다며 호기롭게 나섰을까.
보나마나 도망쳐 버릴 테니 그 꼴이나 봐 줄 테다, 하고 벼르는 기색이 역력하던 얼굴에는 이제 약간의 경외심마저 깃들어 있었다.
쉽사리 말조차 붙이지 못하고 어려운 듯 망설이는 이의 뒤로 그리엄이 차례도 지키지 않고서 불쑥 말을 꺼냈다.
“숲에는 요사한 기운이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부자연스러운 무언가가, 저희를 계속해서 끌어당기고 제자리걸음을 하게 만들었지요.”
“…….”
“어찌 빠져나오는 방법을 아셨습니까?”
메릴린이 눈을 끔뻑이자 그리엄이 재차 물음을 던졌다.
“어찌 짐승이 튀어나오는 방향을 그토록 절묘하게 한발 앞서 알아채고서 검을 휘두를 수 있으셨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그래, 뭐.
수상해 보일 법이야 하지.
그리엄의 물음에는 묘한 기대감이 묻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줄곧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자신과 같은 정령사라 여겨지는 그녀에게 집착하던 그리엄이니 무슨 답을 듣고 싶은지도 뻔했다.
필시 그녀가 주변에 머물면서 도움을 주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싶을 테지.
잠시 고민하던 메릴린은 평소에 보고 배운 것을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글쎄,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길이 보여 걸었고, 짐승의 기척을 느껴 검을 휘둘렀던지라.”
원한다면 내 배를 째 보라며 뻔뻔하게 모든 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기로.
제법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메릴린의 말에 얼굴을 찌푸린 그리엄이 재차 추궁을 이어 나가려던 그때였다.
“다들 무사하셨군요!”
말을 타고 헐레벌떡 달려온 전령이 숲 어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일행을 향해 말을 건넸다.
그의 얼굴에 가득 서린 안도의 빛에 메릴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었다.
“무슨 일이죠?”
힐끗, 주변을 살핀 전령의 얼굴에 의외라는 기색이 감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행 중 그 누구도 메릴린이 자연스럽게 ‘통솔자’이자 ‘대표’로 나서는 것을 고까워하거나 불쾌해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재빠르게 정신을 차린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메릴린의 물음에 답했다.
“아아, 아무래도 숲에 매복이 있었던 것 같다는 투서가 들어왔습니다. 후작께서도 평소 짐작하시던 바가 있어 투서를 참조하시어 간자로 의심되는 자들을 추궁했는데, 실제로 정찰대의 행적을 외부로 흘린 이들이 있음을 알게 되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무리의 병사들이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도 함정에 빠졌을 정찰대를 구하고자 부랴부랴 구출을 위한 부대를 조직해 출발시킨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무사했군요, 영애.”
선두에 서서 이들을 통솔하며 달려온 키엘 스펜서의 차분한 안부 인사에 메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사령부에는 별고 없고요?”
“숲에서 뛰쳐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짐승들이 좀 날뛰긴 했습니다만,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지나치게 흥분한 기색을 봤을 때 내부에서도 일이 벌어졌으리라 여겨 서둘러 오는 길인데, 다행히도 다들 무사했군요.”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메릴린은 자신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열렬히 바라보고 있는 그리엄의 시선을 피해 키엘의 팔을 붙들고 끌어당겼다.
그녀의 손길에 질질 끌려 간 키엘은 으슥하게 그늘진 자리에서 겨우 풀려 난 손목을 매만졌다.
“생각보다 박력 넘치는 태도였습니다, 메릴린 영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요.”
“그것도 중요해야 할 텐데.”
지금 저 수많은 눈초리가 우리를 진득하게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아가씨는 모르는 건가.
아무리 이곳까지 내려왔다지만 메릴린은 결혼 적령기의 귀족 영애였고, 키엘은 적령기를 훌쩍 넘었음에도 미혼인 젊은 백작이었다.
“아무래도 다시 숲 안으로 들어가 봐야겠어요.”
다짜고짜 꺼낸 말에 키엘이 멈칫하고서 얼굴에 웃음기를 지운 채 메릴린을 훑었다.
진지한 얼굴을 마주한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숲에 일이 터졌다면 필시 단순한 문제가 아닐 겁니다. 특히 그녀의 일이라면 영애가 간다 하여 큰 도움이 되지 않을 확률이 더 높기도 하고.”
차라리 밖에서 머무르는 편이, 도로테아의 움직임을 덜 제약하는 방법일 수도 있었다.
키엘의 에두른 만류에 메릴린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그래요. 그리고 큰 도움은 못 되어도 짐이 될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도로테아 영애가 그랬거든요. 나는 실체가 없는 허(虛)를 상대하기에 더없이 좋은 육신을 타고났다고요. 실제로도 숲에서 다른 이들을 현혹한 목소리에 저는 영향을 받지 않았었고.”
그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로군.
키엘의 눈에 놀란 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본 메릴린이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빡세게 훈련을 하고 넋이 나간 채로 돌아올 때마다 내미는 음식들의 정체가 뭔지 물어봤어야 했는데.”
진짜 눈앞이 팽글팽글 돌도록 육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나서 주어지는 음식이니, 의심하거나 유래를 알아볼 틈이나 있었을까.
미친 듯이 섭취하기에 바빴지.
옛일을 떠올리던 메릴린의 얼굴에 별안간 공포가 서렸다.
“대체 뭐였을까요, 그 미끌미끌한 건? 그 단단하지만 쫀득한 건? 쓰지만 살캉살캉한 건?”
“…….”
키엘에게 묻는다고 한들, 본 적도 없는 음식에 대해 답해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본인의 체구보다 더 큰 짐승들을 반으로 쩍 갈라내던 용맹한 귀족 영애가 울상이 되어 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음, 위로를 해 줘야 하나?
짐짓 고민 중이던 키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금세 마음을 다잡고 차분해진 메릴린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제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여겨지면, 신호탄을 쏘든 알아서 빠져나오든 할게요. 영애의 정령이 제 곁에 있으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여러모로 생각을 해 본 듯한 메릴린의 말에 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이기 편하게끔 산발이 된 머리를 대충 빗어 한데 묶어 올리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키엘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영애와 같이 있는 동안은 머릿속이 꽤 맑아지는 기분이 드는군요.”
지독하게도 오랜 시간 그를 괴롭혀 왔던 두통이 느껴지지 않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함께 잠을 청해 본 적은 없지만, 어쩌면…….
별생각 없이 옷차림을 추스르던 메릴린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키엘을 보고 물었다.
“왜 그러세요?”
“생각해 보니 영애가 제법 훌륭한 신붓감처럼 느껴져서.”
이것저것 헤아려 보니 탐나는 구석이 많은 여인이었다.
도로테아라면 분명 메릴린이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친구를 편들어 줄 것이고, 메릴린과 평생을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레 자신에게도 이득이 될 만한 것이 많을 것 같은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을 보아하니, 말에 품은 저의를 짐작도 못한 눈치였다.
“혹시 나와 혼인할 생각…….”
“미쳤어요?!”
그의 제안이 끝나기도 전에 귀가 아플 정도로 빽, 소리를 지른 메릴린이 흉흉한 눈을 하고 그를 노려봤다.
“차라리 입에 사약을 들이부으라 하지 그러세요!”
“…….”
생각 외로 격한 반응에 키엘이 머쓱한 듯 뺨을 긁적였다.
“내가 이래 뵈도, 아주 흉물은 아닌데.”
“백작님, 저는요. 콜린 님처럼 그렇게 상냥하게 거절할 자신이 없어요.”
우두둑.
있는 힘껏 주먹을 거머쥔 메릴린의 말에 키엘이 침묵했다.
상냥하게 거절하지 않으면 어떻게 거절하려고?
슬쩍 주먹을 보다 위쪽으로 올린 시선에 잡힌 메릴린은 진심으로 질색하고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가벼운 계산속으로 던져 본 말에 불과했으나, 메릴린의 반응을 마주한 키엘의 마음속에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영애도 알다시피, 나는 사실 황…….”
“그러니까요! 그 핏줄이 어디 가겠어요?! 그 포악함이 어디 가겠냐고요!”
“…….”
조금 전보다 한층 격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마치 끔찍한 소리를 들은 듯 몸을 부르르 떤 메릴린이 망설임 없이 뒤로 돌아섰다.
“안 그래도 긴장돼 죽겠는데 인생 조지는 농담이나 하고 있어. 누가 도로테아 영애와 친구 아니랄까 봐.”
인생 조지는 농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진지하게 본인의 입지를 생각해 보던 키엘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묘한 안타까운 시선에 나직이 말했다.
“눈 돌려.”
그의 곁에 은신한 채 경호 중이었던 그림자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주인의 체면을 지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