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그 시각, 자신보다 어린 오라비와 함께 한가로이 잠에 빠져 있던 도로테아가 눈을 떴다.
늘 깨고도 한동안 이부자리에 누워 뒹구는 것을 좋아하던 소녀가 눈뜨기 무섭게 곧바로 상체를 일으키자, 곁에서 서신을 쓰고 있던 발레리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눈을 가늘게 뜨고 막사 밖을 응시하던 도로테아가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모자란 철부지가 숲에 들어갔어.”
“철부지? 누구?”
의아한 듯 되묻던 발레리가 이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테아 앞에 섰을 때 모자라 보이지 않을 인간이 몇이나 있겠냐마는, 철부지 같은 다정하고 친근한 수식어가 붙는 이들은 몇 없었다.
“메릴린이 걱정되어서 그랬을까?”
“아마도.”
무뚝뚝한 말과 함께 소녀가 품에서 반쯤 타다 남은 부적을 꺼냈다.
“잿물에 적셔서 땅에 묻어 줘. 효험이 다한 부적이긴 하지만, 수많은 이들의 피가 흐른 땅 위에 있다 보면 자칫 부정을 타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으니까.”
“응, 근데 들어가 보게? 변수가 없는 한 위험한 일은 없을 거라며. 메릴린이 아니면 어차피 ‘그 존재’를 찾을 수 없게끔 결계를 만들어 놓았다고 하지 않았어?”
입을 틀어막아 꽁꽁 묶어서 마무리만 하면 되도록.
겉옷을 걸친 도로테아가 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쓸데없는 목숨이 날아가지 않게끔 숲에 접근할 수 없도록 교란하는 진(陳)을 설치해 두었는데도 내 허락 없이 누군가 숲으로 들어섰어. 그건 결계가 어그러졌다는 증거야.”
누군가가 그녀의 진(陳)을 파훼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힘들여 결계를 뚫고서 들어간 이유가 그저 숲에서 놀고자 하는 까닭은 아니었겠지.
주섬주섬 나서는 도로테아를 바라보던 발레리가 짤막하게 물었다.
“같이 갈까?”
“아니, 그보다 너는 이곳에서 다른 것을 살펴봐.”
도로테아의 나직한 당부에 발레리가 고개를 들었다.
소녀는 가라앉은 눈으로, 누워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오라비의 몸에 곱게 담요를 덮어 주며 말을 이었다.
“어제부터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숲에 끌어들이고 있는 것 같아. 내 눈을 피해 결계를 파훼한 것까지는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저들이 숲 안으로 진입하던 때에 맞춰 일을 시작했다는 건 다른 의미지.”
“이곳에 소식을 전하는 첩자가 존재한다는 거구나.”
“외부의 변수에는 대응하면 그뿐이지만, 내부에서 시작된 변수는 어디로 흘러갈 지 걷잡을 수 없는 법이니까.”
당장의 욕심에 눈이 멀었거나, 본인의 목숨 보전에 정신이 팔려 다른 이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인간들은 어디든 존재하는 법이다.
전투에 앞서 가장 무서운 것은 외부가 아닌 내부의 적이다.
가능한 한 빠르게 잡아내는 것이 옳았다.
도로테아의 말을 알아들은 발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부를 마친 뒤 곧장 막사에서 빠져나온 도로테아는 곧바로 숲으로 향하는 대신 7황자가 머무는 막사로 향했다.
그의 더러운 성질머리가 익히 알려진 덕일까.
막사 주변에는 개미 새끼 하나 얼쩡거리는 일이 없었다.
덕분에 자그마한 몸집의 소녀가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서 막사 안에 들어가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두운 막사 안쪽으로, 자신의 두 눈 위로 하얀 천을 두른 채 누워 있는 루크가 보였다.
자박 자박.
걸음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미동 없이 누워 있는 이를 향해 도로테아가 입을 뗐다.
“일어나.”
“……적어도 내일까지는 금식, 금언, 금면 하라지 않았던가?”
‘영안’을 잠재우고 싶으면 그리해야 한다고 본인이 말했던 것 같은데.
루크의 말에 도로테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눈을 가린 천을 풀고자 손을 뻗은 루크를 만류하며 덧붙였다.
“네 말이 맞아. 이미 트인 영안을 잠재우려면 그렇게 해야겠지.”
그렇게 말하고서 잠시 멀거니 앉아, 아무 말 없이 뜸을 들이는 도로테아의 침묵에서 무언가를 읽어 낸 황자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무슨 일이 생긴 거로군.”
“맞아.”
담담하게 인정한 도로테아의 말에 루크가 다시 물었다.
“내가 필요하나?”
“필요로 한다면, 함께 가 주려고?”
난감한 일이었다.
서로가 원하는 것을 갖고 거래를 해 본 적은 있었지만, 상대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없는데 그녀는 필요로 하는 상황을 맞닥뜨린 적은 드물었다.
심지어 지금 그녀가 원하는 것은…….
“누워 있는 것도 지긋지긋할 때가 됐지.”
“지금 일어나면 부정 탈걸. 잠자리가 며칠 더 사나울 거야.”
“그런가.”
“허(虛)한 것을 보는 눈을 다시 되돌리려면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그녀의 말에 망설임 없이 천을 풀어낸 루크가 형형한 눈으로 도로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상관없어.”
지나칠 정도로 광오한 태도의 절반쯤은 허세인 줄 알았다.
사내들이라면 원래 그 정도의 허세는 부리는 법이니까.
도로테아는 눈앞에 일렁이는 두 눈을 마주하고서야 단지 그 뿐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거구나.”
믿고 따르던 등에게 배반당했고, 평생의 목표라고 여겼던 것이 어그러졌다.
그 탓에 텅 빈 속은 피를 나눈 형제들도, 근간을 내준 아버지도 채우지 못했다.
잘못되어 헛것이 좀 보인들 뭐 어쩌랴.
삶의 이정표를 잃은 그에게는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이해는 하지만 어리석어.”
그는 아직도 죽은 자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의 의미를 몰랐다.
때로는 인간의 생 그 이상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피곤하게 만드는 일인지, 죽은 뒤의 폐허를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깊은 그림자를 제 속에 드리우는지.
“네가 거두겠다고 했으니 네가 결정해라. 내가 필요하다면 손을 뻗어서 나를 사용해. 나를 책임지기 싫거든, 이대로 다시 눈을 감겨 돌려보내면 그만이다.”
고달파질 앞날을 생각하여 잠시 주저하였더니 이제는 되레 협박을 해 왔다.
책임을 지든가, 아니면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라고.
도로테아는 그의 속에 들어앉은 깊은 절망을 엿보았다.
양이 되라는 건 어디까지나 밝은 볕 아래서의 이야기였다. 그림자의 세계로 발을 들이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함께 있어도 고독할 세계에 굳이 들어올 까닭이 무엇인가.
그로 인해 지게 될 업보는 어찌한단 말인가.
그를 빤히 바라보던 도로테아의 얼굴에 이내 미소가 번졌다.
“……왜 웃고 있지?”
“우스워서 웃지.”
“무엇이 그리 우스운가.”
“처지가 바뀌었잖니.”
처음 만났을 때, 너는 아버지이자 스승인 변경백과 전장에서 함께 구른 전우들의 희망과 기대를 짊어지고 있었지.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내키지 않아도 나와 거래를 하고 응당의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가.
그때의 나는 내가 머물 곳의 안정성과 내 몸뚱이 하나의 편함이 더 중했기에 겁 없이 너와 거래를 할 수 있었고.
“그때 잃을 것이 많았던 것은 너. 잃을 만큼 소중한 것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나.”
“…….”
그리고 지금 소중한 것들을 쌓아 올린 모든 마음들을 잃은 것은 너.
네가 잃을 동안 곁에 있는 것들이 너무 소중해져,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것은 나.
“내가 천천히 마음을 배우고 받아들여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 너는 인간에게 절망하여 마음을 닫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는 것이 조금 우습잖니.”
수백, 수천의 죽음 앞에서도 꺾이지 않던 전장의 신이 마음을 잃을 만큼, 그토록 상처받았구나.
도로테아의 말에 마주하던 눈을 피해 고개를 살짝 옆으로 튼 루크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래서 내가 필요하다는 건가, 아니라는 건가.”
“필요하지. 필요하단다. 그래, 좋아. 애초에 일을 맡게 된 것도 내 본의가 아니니, 훗날 정 귀찮으면 네게 진 빚은 신에게 갚으라 하면 될 일이지.”
본인들이 저지른 일의 뒷수습을 시키며 이 몸뚱어리에 처박아 놓고는, 정작 본인들은 신계에서 무거운 엉덩이를 뗄 생각도 없는 게으른 존재들에게.
말을 마친 도로테아가 형형한 눈을 하고 있는 루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가자. 서둘러야 해.”
숲에 묶어 둔 존재가 풀렸다면 메릴린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 * *
루크의 품에 안겨 막사 밖으로 나오자 다양한 시선들이 쏠렸다.
다들 궁금증으로 몸이 달아 있을 지경일 테니 이해가 갔다.
7황자의 부상이 어느 정도인지, 그가 언제부터 회의에 참석할 생각인지.
어느 파벌에 속하려 드는지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오기는커녕 루크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조용히 아래로 내리까는 눈은 아마 그의 성질머리를 익히 들어 알기 때문이리라.
‘확실히 이건 좀 편하네.’
어딜 가든 간에 어디로 걸음 하느냐고 묻는 이들은커녕 홍해가 갈라지듯 양옆으로 쫙 갈라서서 그의 길을 터 주었다.
역시 착하게 사는 것보다는 성질 더럽고 고약하게 사는 것이 훨씬 이득인 게 틀림없었다.
“어딜 가십니까?”
그 순간, 주저하는 이들의 시선을 뚫고서 누군가가 말을 붙여 왔다.
익숙한 목소리에 도로테아는 고개를 들다 말고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루크는 제 앞으로 다가온 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도 성치 않으신데 좀 더 막사에서 쉬지 그러십니까.”
벤의 다정하고도 배려 섞인 말에 황자가 입을 떼기도 전에 도로테아가 불쑥 말했다.
“황자 전하께서 저랑 놀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어요. 저기 예쁜 돌멩이를 주우러 갈 거예요.”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영롱한 목소리에 벤이 절로 웃음 지었다.
귀여운 아이였다.
오밀조밀한 외모나 독특한 분위기가 눈길을 끌어, 언제 한번 말을 걸어 보고자 했는데 희한하게도 늘 마주할 일이 드물었다.
어디를 그리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지.
소녀의 오빠인 스탠은 곧잘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곤 하더니.
“아직 부상이 채 낫지 않은 분이니, 너무 무리하시게 만들지만 말거라.”
머리를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에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사근사근하고 붙임성 있게 굴어 제법 빠르게 이곳 군영에 녹아든 소녀는 유독 벤과는 데면데면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락사락, 머리카락을 스치는 손길이 다정하다.
익숙한 손길에 조급했던 마음이 조금씩 이성을 찾았다.
“예쁘기도 하지.”
벤이 말을 섞고 싶어 한다는 것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어린 딸아이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것이 떠오르는 건지, 자신의 아버지는 유독 어린 소녀들에게 약했으니까.
그렇다 하여 그에게 편히 귀여움 받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많았다.
슬쩍 고개를 숙이자 머리 위로 서운한 기색이 스며들었지만 모른 척했다.
“그럼.”
그녀의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루크가 짤막한 인사와 함께 벤에게서 멀어졌다.
한마디 놀릴 법도 하건만, 뜻밖에도 황자는 숲 초입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 * *
“역시, 누군가가 진(陳)을 망가뜨렸구나.”
마치 강한 불이라도 닿은 듯 새까맣게 그을린 돌을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흘끗 숲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시 품 안에 있던 비슷한 형태의 돌을 꺼내어 배열하기 시작했다.
“굳이 결계를 세우지 않아도, 겁 많은 것들은 근처에 얼씬조차 하지 않을 거다.”
“겁 많은 것들이야 잃은들 아쉬운 마음 있을까. 다만 우리 집 작은 철부지가 이미 군영 따위는 개나 주라며 뛰어들었으니, 큰 철부지 또한 가능성이 있는 터라.”
아직까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는 듯하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그의 부재를 의아해하는 이들이 늘어날 터였다.
결국 단신으로 숲에 뛰어든 것이 발각되면 물어뜯기 좋아하는 이들은 트집 잡을 거리가 생겨 희희낙락할 테고, 에이든은 질세라 조카를 잡겠다며 숲으로 뛰어들겠지.
어쩌면 간이 팅팅 부은 하이클레어 가문의 다른 기사들도.
그건 결코 도로테아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정성들여 돌을 쌓고 난 그녀가 다시금 두 팔을 벌렸다.
루크는 당당히 제게 안아 들 것을 요구하는 뻔뻔한 낯짝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는 변함없이 참으로 무도하군.”
“아니, 내가 볼 필요 없는 것들을 ‘보지 않을’ 기회를 주겠다 했는데도 너는 마다했잖니. 아무래도 좋다며 기회를 걷어찬 건 너란다.”
“그것이 내 품을 요구할 만한 이유가 되던가?”
“그럼, 되고말고.”
생긋 웃은 도로테아가 조그마한 손으로 제 가슴을 두드렸다.
“원래 이 바닥은 나이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먼저 발을 들인 쪽이 선배인 법이란다. 그리고 나와 너의 차이는 하늘과 땅에 가까우니 마땅히 나를 섬겨야지.”
“…….”
“뭐 하니, 안아 들지 않고. 얼른 들어가야 하는데.”
채근하는 자그마한 소녀를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던 루크가 손을 뻗었다.
늘 그렇듯 저 입에서 흘러나오는 궤변 따위에 마음을 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는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으니 그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면 소일거리 삼아 해도 괜찮겠지, 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제는 더 이상, 머리 아프게 제국의 안위를 생각하니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니 스러져 갈 목숨들을 헤아리니 하는 일 따위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내게 그리하라 가르친 이가 먼저 사람의 도리를 어겼으니 내가 무엇 하러 그것을 지킬까.’
귀 기울여 들었던 그의 수많은 가르침들.
든든한 등을 바라보며 함께 누볐던 전장에서의 수많은 추억들도 모두 한 줌의 재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의 길 위에 있던 이정표는 허상처럼 사라져, 더는 방향을 알 수 없이 가라앉았다.
그러니 이것은 근질거리는 몸을 달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소일거리다.
아무런 뜻도 담은 것 없이, 그저 하라는 대로 따르는 의미 없는 행보였다.
그렇게 다짐하며 도로테아를 품에 안은 루크가 숲 안쪽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