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아무튼 친애하는 메릴린 덕에 앞으로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네.”
여기 와서 눈에 띄는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건만.
한숨을 옅게 내쉰 도로테아가 프리드의 가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품에 안긴 소녀를 향해, 뭔가 말을 건네려던 프리드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인기척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자신이 있는 쪽을 향해 다가오는 그리엄이 보였다.
할 말이 있다는 듯 굳은 얼굴을 하고서 기사 앞에 선 정령사는, 품에 안겨 잠이 든 듯 보이는 소녀를 보고서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 아이는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프리드는 못마땅한 기색이 서린 그리엄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그를 빤히 바라봤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 뱉고 가라는 듯한 태도였다.
그리엄은 새삼스럽다는 듯 프리드를 훑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기사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던가.
아이를 품에 안은 기사의 자세는 몹시도 안정적이었고, 한 술 더 떠 잠든 아이를 배려라도 하듯 온몸에서 뿜어내던 살기와 위압감을 갈무리한 채였다.
이 자그마한 소녀가 대체 뭐라고.
눈을 감은 도로테아를 석연찮게 바라보던 그리엄이 미간을 좁힌 채 입을 열었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아이가 참…….”
입을 열기 전에 알맞은 단어가 뭔지 고심하던 정령사가 이윽고 한 단어를 뱉어 냈다.
“경박하군요. 낯선 이에게도 덥석덥석 안기는 것을 보니.”
“…….”
전생과 현생을 포함해 생애 처음 받아 보는 ‘경박’이라는 수식어에 도로테아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였지만, 둔한 그리엄은 눈치채지 못했다.
마땅히 보호 본능을 느껴야 할 소녀를 이토록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건 아마도 도로테아에게서 풍기는 ‘죽은 자의 향기’를 무의식중에 맡은 것이 아닐까.
자연의 기운을 운용하는 정령사에게 혼술사란 ‘자연스럽지 못한’ 존재일 테니까.
그리엄의 못마땅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계집아이의 정체가 뭐길래 다들 그토록 싸고도는 겁니까.”
프리드는 대답 대신 눈을 내리깔았다.
침묵하는 기사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그리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까지 왔으니 슬슬 후작 영애와 접촉해야 할 겁니다.”
“준비되면 말하겠다고 했을 텐데.”
늘 그렇듯 냉랭하기 짝이 없는 기사의 말에 발끈한 듯 그리엄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도대체 그 준비는 언제 되는 겁니까? 당신들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왕국의 기사들과 살아남은 국민들은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준비가 될 때까지.”
영혼 없이 되풀이하는 답에 그리엄이 이를 악물었다.
무도한 자들에게 국가를 잃었고, 터전을 넘겨주었으며, 소중한 이들까지 잃고서 이곳까지 왔다.
옛 왕국의 위엄을 되찾고 저들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결의 끝에 왕녀의 이름까지 넘겼건만, 이들은 도통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메릴린 레어가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의 가장 신실한 벗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그녀의 휘하로 들어간다니, 애초에 이런 계획은 없었습니다. 동맹을 요구했던 후작 영애는 어째서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
모른 척 눈을 감고 있던 도로테아가 가늘게 실눈을 뜨고 그리엄을 확인했다.
붉어진 얼굴 가득 담긴 초조함을 보아하니,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이 일에 모든 것을 다 걸었을 텐데.
그 높은 자존심에 가짜 왕녀를 세우기까지 하며 도로테아와의 접촉을 원했다.
자칫하면 모두가 자멸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위험성까지 감수할 만큼 절박했던 거다.
‘그렇다 한들 우리가 그의 요구를 고스란히 들어줄 필요는 없지만.’
정령사의 힘이라는 것이 궁금하고 또 사장되는 것만큼은 원치 않는 마음에 발레리의 뜻대로 살리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한편으로는 곤란한 것도 사실이었다.
성배 앞에서 이단으로 몰렸던 것이 불과 몇 개월 전의 일이다.
정령사가 ‘죽음의 술사’에 대해 증언하고, 저들이 다루는 힘과 도로테아가 다루는 힘이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고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그녀와 그녀의 소중한 이들은 파멸하겠지.
“시답잖게 어린 계집과 놀아 줄 시간에 후작 영애의 답신이라도 주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그 순간 옅은 살기가 흉흉하게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도로테아는 프리드가 그리엄을 향해 경고성 살기를 보냈음을 깨닫고 슬쩍 눈을 떴다.
아둔한 정령사는 순간적으로 제게 쏟아진 기사의 살기에 당황한 듯, 그녀가 깨어 있다는 사실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다.
“프리드, 그만.”
그 순간, 기사를 향해 지시를 내린 부드러운 목소리는 도로테아의 것이 아니었다.
사뿐사뿐, 우아하게 걸어온 발레리가 곁에 서자, 정령사는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눈을 피했다.
고작해야 대역일 뿐인데.
어째서 진짜 왕녀 앞에라도 선 듯 스스로가 작아지는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급한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최선의 준비를 하고 시작해야죠. 힘겹게 여기까지 왔잖아요.”
“그렇지만…….”
발레리가 빙긋 웃으며 능숙하게 그리엄을 달랬다.
“이곳에는 테아의 가족들이 있어요. 그녀가 그 어느 인간들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죠. 당신들의 합류를 허락했으니, 우리 또한 그녀가 보호할 무리 중 하나가 된 거예요.”
차츰 그리엄의 이성이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발레리가 축객령을 내렸다.
“불안해할 이들이 많으니, 그들을 다독여 주세요. 그리엄의 말이라면 먹힐 테니까.”
이윽고 그리엄이 멀리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발레리가 도로테아의 볼을 손으로 콕, 하고 찔렀다.
부스스 눈을 뜬 도로테아가 가면을 쓴 발레리와 눈을 맞췄다.
빙그레, 웃은 벗은 도로테아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황자가 곧 깨어날 것 같아. 스탠이 안절부절못하고 널 찾더라.”
“아아, 그렇구나.”
프리드의 품에 안긴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7황자가 지나치게 조용하다 했지.
“부상이 심했나. 생각보다 의식을 차리는 게 늦네.”
“아냐, 중간에 한 번 깨긴 했어.”
“그래?”
고개를 끄덕인 발레리가 도로테아의 볼을 주물거리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황궁에서 보낸 신관 중에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작자가 있더라구. 대단한 신성력을 가진 것은 아니어서 회복 주문으로도 의식을 깨우는 것이 고작이긴 했지만.”
“신관이라. 생각을 못 했네.”
“걱정 마. 신관은 알아서 처리했으니까. 아마 두 번 다시 입을 함부로 놀리는 일은 없을 거야.”
뒷일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했다는 발레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도로테아가 의아한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깨어나자마자 말썽부터 부릴 줄 알았더니. 그래도 흘러가는 상황을 고려했나 봐. 여태껏 잠잠히 자는 척하고 있었던 걸 보면.”
“아아, 아냐.”
발레리가 생긋 웃으며 고백했다.
“내가 약을 먹여서 다시 기절시켰어.”
“…….”
“그러니까 지금쯤은…… 아마 더 화가 나 있지 않을까?”
어깨를 으쓱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고민에 잠겼다.
그 더러운 성질머리를 달래 주려면 보통 일로는 어려울 텐데.
안 그래도 메릴린에게 맞아 기절한 일로 앙심을 품고 있을 텐데, 발레리에게 강제로 약까지 먹여지고는 또 잠을 자야 했으니…….
“그 약 더 있어?”
조그마하게 묻는 도로테아의 말에 프리드가 나지막이 충고했다.
“교양 있는 레이디는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지 않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상대는 마구 날뛰는 성질 사납고 튼튼한 양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복잡한 상황인데 일만 늘어날 게 뻔하니까.
한숨을 삼킨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루크에게로 가자.”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프리드가 품에 안고 있던 도로테아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발레리와 제 신분을 감안해 보았을 때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은 위험하다 사료됩니다. 막사로 돌아가 대기하겠습니다.”
“후후. 안녕.”
당연하다는 듯 본인들의 거처로 돌아가는 두 사람을 멀거니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제 저런 약은 짓을 배우게 된 걸까. 나는 주인으로서 몹시 본보기가 될 만한, 바람직한 인간상을 보여 왔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들어 유독 다들 제게 박해진 것만 같은 느낌은, 착각일까.
소녀는 억울한 듯 중얼거리며 터덜터덜, 난폭한 양이 날뛰고 있을 막사로 향했다.
* * *
“사라! 이것 봐! 황자 전하께서 깨어나셨어!”
환희에 가득 찬 소년의 말에 도로테아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잠에서 깨어난 양은 두 눈을 생생하게 뜨고서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메릴린의 일도, 발레리의 일도 나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니 내 잘못이 아니라고 얘기해 볼까?’
나는 그냥 친구를 잘못 둔 죄밖에 없다고?
물론 그런 변명으로 빠져나가기에는 아무래도 좀 늦은 것 같아 보이긴 했다.
결국 도로테아는 늘 그렇듯,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걸 하기로 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황자님.”
능청스런 도로테아의 말에 7황자의 눈에 이글거리는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난폭한 양이 그녀를 향해 거친 말을 뱉어 내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계속 아프셔서 걱정했는데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스탠의 해맑은 덧붙임에 일순간이지만 루크가 멈칫했다.
흉폭하기 짝이 없던 기운을 머금었던 짐승은 제 이마에 겁도 없이 손을 올리는 작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제 열도 내렸나 봐요!”
환하게 웃는 스탠을 바라보는 짐승의 사나운 기운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것을 느낀 도로테아는 눈을 깜빡이며 눈앞의 상황을 관찰하다, 재빨리 스탠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갑작스런 여동생의 어리광에 스탠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응? 왜?”
“그- 으냥. 오빠랑 계속 떨어져 있었잖아. 같이 있을 시간이 생겨서 좋아.”
그러니까 떨어지지 말자.
드물게도 먼저 제 곁에 와 있는 여동생의 애정 표현에 소년은 몹시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는 자신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소년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소녀를 가당찮은 얼굴로 훑었다.
‘저 머저리 같은 계집이.’
고작해야 어린아이 뒤에 숨었다고 해서 제가 손에 사정을 두리라 믿는 건가.
눈에 거슬리는 아이 따위야 그냥 치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몸을 일으키던 루크가 갑작스런 두통에 멈칫하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지끈거리는 머리의 통증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데다, 어지러움까지 더해졌다. 여러모로 정상이 아닌 몸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상태가 더 엉망이었다.
도로테아를 만나면 적어도 멱살을 쥐고 바닥에 패대기쳐 줄 용의가 있었던 7황자는, 결국 징벌의 시간을 다소나마 미루기로 결정했다.
그보다는 지금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여기는 어디지?”
“연합군 사령부요. 아시겠지만 히사르 요새가 함락되고, 국경이 뚫리게 되면서 이래저래 곤란해진 사람들이 많잖아요. 제국뿐만 아니라 신전과 여러 국가들이 모두 일정 병력을 보내어 로헨과 대치 중이에요.”
루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단번에 모든 상황을 파악한 황자가 한마디를 뱉어 냈다.
“개판이겠군.”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도로테아의 말에 7황자가 코웃음 쳤다.
귀족들의 생리라면 이골이 나도록 겪었다.
더군다나 최전선까지 밀려든 이들의 생각이나 행동이야 늘 거기서 거기였다.
공을 세워 거한 기회를 잡으려는 탐욕주의자나, 정치 싸움에서도 이기지 못해 열등감을 득시글하게 끌어안고서 이곳까지 밀려든 몰락 귀족이거나.
그도 아니라면 로헨의 생존자처럼 삶이 절박한 작자들이겠지.
무엇 하나 전투에는 도움이 되는 요소가 없었다.
이 오합지졸을 이끌어야 하는, 가여운 인간은 또 누구일까.
입가에 비웃음을 매단 루크가 알 수 없는 꼬락서니를 하고 이곳에 와 있는 도로테아를 보다 나직이 물었다.
“총사령관은 하이클레어 후작인가?”
“네.”
하기야,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자신의 영역 밖으로 나오는 것을 귀찮아하던 계집이 이곳까지 올 턱이 있나.
그리고 아마 그것이 황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머리가 희끗희끗하니 곧 저세상으로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라 해도 하이클레어는 하이클레어니까.
도로테아의 말을 듣던 황자가 벌떡 일어나 옆에 걸쳐져 있던 겉옷을 집어 들자, 놀란 스탠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 그렇게 움직이면 안 돼요. 의원님이 몇 달은 요양하셔야 한다고 했어요.”
쓸데없이 자신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소년을 흘끔 본 루크가 그리 거칠지 않은 손길로, 자신을 만류하는 자그마한 손을 밀어냈다.
그러고는 막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자가 갑작스럽게 막사 밖으로 얼굴을 내밀자, 아직 잠을 청하지 않고 있던 병사들 중 그를 발견한 이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 황자님.”
곧장 후작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려던 루크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막사들 사이에 있는 공터를 바라보며 병사를 향해 물었다.
“저건 뭐지?”
“예?”
황자의 물음에 일순 긴장했던 병사가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낮에 사람이 죽었던 자리로군요. 깔끔하게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남았습니까요?”
“사람이 죽은 자리라고?”
루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가 다시 한번 입을 열어 우연히 근처를 지나고 있던 가여운 보초를 다그치려는 순간이었다.
“아저씨, 황자님께서 아프셔서 자꾸 헛것이 보여서 그래요. 모른 척하시고 지나가시면 돼요.”
어느새 그의 곁으로 온 도로테아의 태연한 말에 보초는 머쓱한 얼굴로 재빠르게 걸음을 돌렸다.
헐레벌떡 멀어지는 보초를 보다, 다시 제 옆에 있는 도로테아를 내려다본 루크가 으르렁댔다.
“무슨 짓…….”
“뭐가 보이는데?”
“뭐?”
좀 전까지의 능청스러움은 어딜 가고, 갑작스레 물음을 던지는 소녀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는 얼굴로 그녀가 다시 한번 물었다.
“저기서, 뭐가 보이느냐고 물었어.”
“…….”
루크는 다시 한번 고개를 들어, ‘사람이 죽은 자리’라던 장소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희무끄레한 형체는 마치 늪에 빠진 듯 버둥버둥, 그 자리에 묶여 있었다.
정확하게 ‘그것’을 바라보는 루크를 확인한 도로테아가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러고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을 하고서 나지막이 말했다.
“너, 영안(靈眼)이 트였구나.”
아버지와도 같았던 변경백은, 마지막까지도 그에게 무거운 선물을 남기고 떠났다.
도로테아는 어리둥절한 기색을 띠는 양을 보다, 조용히 고개를 들어 자신의 죽음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짐승의 령(靈)을 바라보았다.
반쪽짜리 사람은 친구가 수습했지만, 그 사람을 숲 밖까지 끌고 온 말의 죽음은 누구도 애도하지 않았다.
죽음의 예(例)를 받지 못했으니, 죽음을 실감할 수도 없을 밖에.
연신 늪에서 빠져나오려는 듯 발버둥치는 희끄무레한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발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