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제기랄, 기분이 더러워 못 있겠군!”
막사를 뛰쳐나오는 에이든을 본 벤이 담담하게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져 있는 것을 보아하니, 이번에도 협상은 결렬된 모양이었다.
“이래도 안 된다, 저래도 안 된다! 말만 하다 다 죽어 나자빠지고 나서야 움직일 모양이오.”
침을 퉤, 하고 뱉는 에이든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했다.
벤이 쓴웃음과 함께 멀리서 피로한 얼굴을 쓸어내리는 노(老)후작을 바라보았다.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아 대치한 지 벌써 5일째였다.
연합군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각국에서 모여든 이들은 어떻게든 손해를 보지 않고 이득만 추구하며 눈을 벌겋게 뜨고 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아둔한 이들 같으니라고!”
잔뜩 흥분한 채 콧김을 뿜어내는 에이든을 진정시키려 손을 뻗었던 벤은, 뒤에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에 멈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보나마나지. 제대로 된 정찰은 하지도 않고 돌아올 것이 뻔해.”
벌써 삼 일째였다.
제국과 성국, 가장 굳건하다 여겼던 국가가 큰 타격을 입는 것을 본 주변의 약소국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연합군에 합류했지만, 막상 그다음이 문제였다.
그들 입장에서 보자면, 그리 많지 않은 병력을 연합군에 투자했다가 잃기라도 했다간 손해가 극심해진다.
되도록이면 선봉에 서는 대신, 안전한 후방에서 보조나 지원만 하고 싶을 테지.
그러나 연합군이라는 명칭으로 뭉친 이상, 어느 정도의 손해는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선봉에 서는 것이 싫다면, 적어도 지형도는 내어 놓아야 할 것 아니야! 군사 기밀이라 줄 수 없다니!”
눈앞의 상황조차 감당할 수 없어 서로 손을 잡아 놓고, 벌써부터 이 소모적인 전쟁이 끝난 뒷일 생각이라니.
연이어 선봉에 선 탓에 휘하의 병사들을 가장 많이 잃은 에이든 입장에서는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저들은 상대의 저력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제국과 성국, 그리고 이미 먹힌 지 오래인 로헨 왕국이다.
다른 약소국가들은 피해 사실조차 제대로 집계하지 못했거나, 혹은 아직 손이 뻗지 않은 상황이라 다급함이 덜한 것이 눈에 보였다.
에이든이 침울한 얼굴로 제 수염을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얼른 일을 끝내고 테아에게 돌아가야 하거늘. 너무 오래 전장에 나와 있으니 돌아갔을 때 아이가 나를 잊으면 어찌하오.”
에이든의 눈에는 도로테아가 얼마나 자랐건 간에 여전히 어린아이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벤의 얼굴에도 오랜만에 웃음이 맴돌았다.
“테아의 기억력이 그리 나쁘지 않으니,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다만 그가 걱정되는 쪽은 다른 부분이었다.
테아는 잘 있습니다.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번쯤은 서신을 쓸 만도 할 텐데, 필립이 보내는 ‘가족 소식’에 매번 덧붙이듯 쓰인 안부는 늘 특별한 게 없이 비슷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비만큼 딸을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도로테아의 성정상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그저 ‘잘 있기’만 할 리 없다는 것을 아는 벤은, 늘 희소식만 존재하는 필립의 서신에 오히려 불안을 느꼈다.
이쯤이면 분명 큰 일이 터져야 할 텐데.
혹은 이쯤이면 아이가 사고를 칠 때도 되었는데.
멀쩡히 잘 있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불안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은 오늘따라 유독 짙은 안개가 끼어 우중충했다.
그때였다.
“키엘 스펜서 백작이 이끄는 추가 원정군이 막, 합류했습니다!”
숨이 차도록 달려와 전한 전령의 말에 에이든이 눈을 크게 떴다.
“뭐? 그 자식이?”
“후작께서 각 군의 지휘관급 인사들을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소식과…….”
전령이 머뭇거리자, 에이든이 짜증스레 그를 재촉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실종되었던 7황자 전하께서 함께 오셨습니다.”
“……?!”
굳은 얼굴의 에이든이 성큼성큼, 전령을 지나쳐 회의를 주재하는 장소로 향했다.
벤 또한 뜻밖의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낸 루크의 존재에 놀란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전령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로헨 왕국의 생존자라 주장하는 한 무리가 함께 와 있습니다.”
로헨 왕국의 생존자.
벤이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이든이 향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제국을 상징하는 깃발 옆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자신을 발견한 듯한 키엘이 고개를 숙여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바로 인사에 화답하던 벤은, 그의 옆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인물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에이든이 우렁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메릴린! 네가 어찌 여기 왔느냐!”
메릴린이라는 이름에 놀란 데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키엘 스펜서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창백한 안색의 호리호리한 귀족 영애를 향해 다가간 에이든이 감격한 기색으로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장하다. 그래, 너처럼 훌륭한 능력을 갖춘 아이가 나서야 국가가 바로 서는 것이다!”
벤은 이곳까지 내려온 딸아이의 절친한 친구를 바라보다, 문득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설마, 아니겠지.”
도로테아는 분명 그와 손가락을 걸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황도에서 떠나지 않겠노라고. 위험한 일에 말없이 뛰어들지 않겠노라고.
딸아이 일이라면 촉각이 곤두서는 벤이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따로 이야기를 좀 나눠 봐야겠군.’
도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지, 그것부터 물어야 했다.
딸 가진 아비로서 위험한 전장에 참여한 메릴린을 염려하는 마음 또한 거짓이 아니었으니.
* * *
도로테아는 잔뜩 긴장한 메릴린의 곁에 서서 흘끗, 주변의 사람들을 살폈다.
가면을 쓴 왕녀의 존재는 그렇다 치고, 어린아이에 불과한 자신과 메릴린에게 내리꽂히는 시선이 매섭기 짝이 없었다.
병력 배치도만 보아도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뻔히 보였다.
빡빡한 근무 탓에 보초들의 얼굴은 창백하고 핼쑥하며 그늘져 있는데, 기사들의 시중을 드는 종자들은 하나같이 포동포동하니 살이 쪄 있었다.
저들은 적어도 먹고 마시고, 충분한 수면을 취했을 테니까.
전장에 나와서조차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서 시중을 받으며 지내는 이들의 꼬락서니가 우스웠다.
“여인이라니. 여인이 이곳을 오다니.”
“이왕 온 김에 위로나 잔뜩 해 주고 가면 좋겠구려!”
“모르지. 이곳에 있는 멋진 기사님과의 설레는 로맨스를 기대했을지도.”
불편함에 투덜거리는 이가 있는 반면, 또 누군가는 빈정대며 비웃기 바빴다.
와르르 터지는 웃음에도 의연하게 선 메릴린이 긴장된 걸음으로 후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도로테아는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할아버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소녀의 존재를 눈치챈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린아이가 어찌 이곳까지 오게 된 게냐. 좀 전에 보니 비슷한 또래의 소년도 보이던데.”
움찔한 메릴린이 변명에 가까운 말을 늘어놓으려 머리를 굴리는 순간이었다. 후작에게로 쪼르르 달려간 도로테아가 당연하다는 듯 두 팔을 벌려 그를 향해 뻗었다.
당황한 후작이 저도 모르게 달려드는 아이를 품에 안아 들자, 소녀는 당연하다는 듯 하얗게 샌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저랑 오빠는 7황자 전하와 함께 왔어요.”
“7황자라.”
“어떤 언니가, 황자 전하와 결혼하고 싶다면서 잠 오는 약을 타서 저희랑 같이 마차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던 도중에 메릴린 언니가 구해 준 거예요.”
조잘대는 목소리에 후작의 눈이 메릴린에게로 향했다.
“보고라면 이미 받았다. 폐하께서는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 정리하겠다고 하셨으니, 아직까지는 함구하는 것이 좋을 게야.”
“네.”
긴장해 있던 메릴린이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은 굳은 얼굴로 품에 안긴 도로테아를 둥개둥개 흔들며 말을 이었다.
“여기 오기 전이었다면 나는 너를 말렸을 게다. 네 능력이 부족하거나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이곳은 너처럼 순수하고 맑은 이가 오기에는 너무 더럽고 진득한 곳이라 그렇다.”
“…….”
“그러나 이미 너는 이곳에 와 있으니 굳이 지나간 일에 말을 얹지 않으마. 이제부터는 메릴린 너를 철저하게 공적으로 대우하겠다. 잠시 뒤 군사 회의가 있을 예정이니 생존자 무리를 데리고 참석하거라.”
“네, 후작님.”
짤막한 답을 건넨 메릴린은, 귀족가 영애가 흔히 하는 사교 인사 대신 에이든에게 배운 군례를 올리는 것으로 예를 갖췄다.
담담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홱, 몸을 돌린 후작에게 메릴린이 말했다.
“아이는 내려 주셔야죠.”
그녀의 말에 그 자리에 우뚝 섰던 후작이 느릿하게 몸을 굽혀 아이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는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다,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어 자그마한 손에 쥐여 주었다.
아마도 배급 시간에 받은 것으로 보이는 빵 한 조각이었다.
딱딱하고 푸석푸석한 빵은, 매일같이 식탁에 오르던 따끈따끈한 빵과 다르게 그리 맛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만큼은 귀하디귀한 식량이었다.
빵을 손에 쥔 도로테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좀처럼 먹지 않는 것이 낯선 이에게 경계심 때문이라고 여긴 듯, 후작이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너를 보니 내 손녀딸이 생각나 그런다.”
물끄러미 손에 쥐어진 것을 내려 보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들었다.
도로테아로 지낼 때조차 몇 번 들어 보지 못한, 다정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무 걱정할 것 없다. 비록 위험한 지역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네가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게끔 노력하마. 일이 모두 끝나고 나면, 네 아비라는 이와 함께 황도로 오너라. 그때는 내 손녀딸을 소개해 주마.”
“손녀딸이요?”
줄곧 어딘가 지치고 메말라 보이던 후작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서렸다.
“그래, 네게는 언니가 되겠구나. 지금쯤 우리가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신전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을 테지.”
아련한 목소리에 메릴린이 멈칫했다.
“신전에서, 기도를요?”
“몰랐더냐. 그 아이가 자처하여 들어갔다더구나. 100일 기도를 올리며 우리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겠다던가.”
메릴린이 흘끗,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말똥말똥한 눈을 뜨고 있는 도로테아를 내려다봤다.
100일 기도 좋아하시네.
가만히 후작에게 제 머리를 내어 주고 있던 도로테아가 불쑥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지금이라도 집에 돌아가면 손녀딸을 볼 수 있지 않나요?”
내가 그토록 당신에게 소중하다면 그래도 되는 게 아닐까.
좀처럼 휘어지는 법을 모르는 당신은 분명 전장에서 또 상처를 입을 텐데.
덧없이 사라져 간 수많은 이들의 목숨에 책임감을 느낄 테고, 죽음을 앞둔 아내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것에 가슴 아파 할 테고, 기다리는 이들에게 힘겨운 시간을 보내게 만든 것을 또 슬퍼할 테지.
도로테아의 말에 후작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곳을 지키는 것이 내가 소중한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 끔찍한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게끔, 더러운 욕망에 휘둘리는 이들이 그 애를 건드리지 못하게끔.”
그의 말을 들으며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꾀죄죄하고 깡마른 몸으로 처음 후작저에 다다랐을 때, 어린 그녀를 두고 피를 토하듯 뱉어 냈던 진심 어린 말들이.
“우리가 네 가족이다!”
철옹성처럼 굳어 있던 얼굴 위로 흘러넘치던 회한의 눈물을 마주했던 그날, 도로테아는 이 어리석은 노인의 가족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소녀는 빵조각을 손에 쥔 채 후작에게 손짓했다.
이윽고 그녀는 까치발을 들어 자신에게로 몸을 기울여 준 후작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걱정 마세요. 무사히 손녀 따님에게 갈 수 있도록 해 드릴게요.”
아무쪼록 당신이 다치지 않고 모두가 기다리는 저택으로 갈 수 있게끔.
도로테아의 말에 후작은 아무런 말없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참 동안이나 쓰다듬었다.
* * *
후작을 필두로, 자리한 지휘관들은 저마다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후발 부대’의 대표로 참석한 키엘과 메릴린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신경전이 오고가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 누군가 참지 못하고 헛기침했다.
가장 먼저 입을 뗀 인물은 양가죽으로 만든 근사한 코트를 두른 블루밍 백작이었다.
그는 정적이 감도는 회의장을 둘러보다 뺨을 실룩이며 거만하게 말을 꺼냈다.
“폐하께서 보내 주신 추가 원정군이라니, 노고를 알아주시는 것 같아 몹시 기쁘구려. 그래서 데려온 이들의 규모는 어느 정도 되오? 보급품과 식량은?”
“구체적인 자료는 행정권을 가진 사무장에게 넘겼으니 후에 확인해 보면 될 듯합니다.”
키엘이 싱긋 웃으면서 그의 시비를 유연하게 넘겼다.
그의 말에 옆에 있던 또 다른 꼬장꼬장한 귀족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좀 전에 분명 로헨 왕국의 생존자들과 함께 왔다 들었는데. 어찌 왕녀는 이곳에 들지 않은 거요?”
날카로운 물음에 답한 것은 메릴린이었다.
“현재 로헨 왕국의 왕녀는 제게 모든 권한을 일임한 상태입니다. 오랜 객지 생활로 건강이 좋지 못하여 당분간 회의에는 참석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런!”
“대신, 여기 있는 그리엄 발렌타인 남작이 그녀를 대신해 생존자들이 겪은 일을 증언해 줄 예정입니다.”
두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블루밍 백작 대신 또 다른 인물이 옆에서 빈정거리듯 말을 꺼냈다.
“도대체 생존자라는 것은 무엇을 보고 말하는 게요? 내 듣기로는 차림새가 산적과 별반 다를 바도 없다던데.”
그 순간이었다.
가볍게 손을 든 그리엄의 뒤로 뿜어져 나온 바람이 막사 안을 헤집으며 존재감을 뽐내고서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의 곁에 자리한 투명한 형태의 초록빛 새를 바라보는 이들이 말을 잃었다.
메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그는 로헨 왕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정령사예요. 그는 로헨을 점령한 술사들이 어떤 끔찍한 행위들을 자행했는지, 또 앞으로 어떤 일들을 벌일 수 있는지 증언할 예정입니다. 추가로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저 ‘산적’ 무리들은 적어도 두 달여 간의 집중적인 군사 훈련을 받았고, 그들을 훈련시킨 이들 또한 왕국에서 이름을 떨치던 기사들이에요.”
술렁이던 막사의 분위기가 일순간 돌변했다.
이들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황제가 아직 삼키지 않은’ 완벽한 형태의 사병 무리였다.
심지어 정령사에 기사들까지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신분이 확실하다면 로헨 왕가의 마지막 핏줄인 왕녀까지.
탐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왕국의 비극은 참으로 안타깝게 되었소.”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오?”
“분명 몸을 의탁하긴 해야 할 터인데. 왕녀라 함은, 험한 전장에 있기에 참으로 귀한 몸이 아니오.”
너도 나도 던지는 영혼 없는 위로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그리엄은 발레리의 지시대로 짤막한 한마디를 던졌다.
“저희는 왕녀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듯, 메릴린 레어 남작 영애의 뜻에 따라 움직일 예정입니다.”
“허!”
기가 막힌다는 듯 외마디를 뱉어 낸 귀족 중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군사 지휘권도 없는 귀족 영애의 뜻에 따르겠다니. 그 무슨 헛소리요!”
“지휘권이 없다니 그 무슨 섭한 말씀이신지.”
은은한 웃음과 함께 가만히 듣고 있던 키엘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폐하의 명을 받고 온 것은 아니나, 자원하여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파견 가능한 신분이니까요.”
“그 무슨 헛소리요! 귀족 영애가 이곳에 자원한들 무엇을 할 수 있다고!”
“그래 봤자 일개 자원병에게 지휘권을 내주는 사람은 없소!”
너도 나도 목청을 자랑이라도 하듯 소리 높여 반박하자, 키엘은 웃는 얼굴로 메릴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들었습니까, 메릴린? 저들은 당신을 인정하지 않겠다는군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메릴린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떠들어 대는 이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황도에서 출발하기 전 관련 자료를 검토해 본 바 이미 세 차례의 소모전이 있었고, 그중 한 번은 잘못된 판단 탓에 병사를 수백이나 잃으셨다 들었습니다.”
“크흠.”
불편한 기침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메릴린이 숨을 고르고 한마디, 한마디 뱉어 냈다.
“저를 정찰대로 파견해 주세요. 직접 나가 공을 세우겠습니다. 저를 증명해 보이죠.”
“……!”
씩씩하다 못해 광오한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벤이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손을 들어 그를 막아 세운 후작의 몸짓에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리엄은 말없이 7황자의 몫으로 배정되어 있는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단번에 그의 목을 내려치던 메릴린의 솜씨와, 커다란 나무를 손날로 일격에 베어 버렸다던 맥의 횡설수설한 증언과 함께 발레리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리 걱정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메릴린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 주기만 해요.”
메릴린을 겪을수록,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에게 가졌던 기대감이 더욱 그를 고조시켰다.
그의 유일한 희망이자 동경의 대상.
죽음의 술사가 조국에 드리운 그늘을 걷어 내고자 홀로 고군분투해 왔던 그리엄에게는 도로테아가 필요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