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사라, 데버. 데버라.”
발레리가 익숙한 성을 입으로 되뇌었다.
늘 그래 왔듯, 그녀의 곁에 선 채 존재감을 죽이고 있던 프리드가 무심한 눈을 들어 본인을 ‘사라 데버’라 소개한 도로테아를 바라봤다.
“분명 들어 본 적이 있는 성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네요.”
그녀의 의뭉스러운 대꾸에 도로테아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발레리는 얼굴을 가려 줄 가면이 없어도 속내를 숨기는 데에 능한 사람이었다.
정말 ‘데버’란 성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해 주는 것인지 구분하기란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생긋 웃어 보인 도로테아가 낮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며, 메릴린을 향해 다가서는 그리엄을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곤란한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취급하더니.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에는 알 수 없는 갈망이 서려 있었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메릴린이 불편한 듯 몸을 들썩였다.
이윽고 그녀 앞에 선 그리엄이 나직이 물었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건 왜 물으시는 거죠?”
“그분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아니, 만나 뵈어야 합니다.”
메릴린이 떨떠름한 얼굴로 그리엄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짧게 숨을 들이쉰 그가 허리를 굽혔다.
“영애에게 무례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인지라,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대응한 것을 부디 용서해 주시길.”
“……아니, 그러니까…….”
좀 전까지는 사람을 거의 투명 인간 취급하더니만, 이번에는 지나칠 정도로 깍듯한 사과라니.
메릴린이 질린 얼굴을 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여기에서 보신 것들 모두가 극비에 부쳐져야 하는 일인지라, 저로서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메릴린이 어떻게 반응하건 말건 여전히 진지한 그리엄의 말에 메릴린이 흘끗 발레리를 바라봤다.
그녀 또한 좀 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로헨 왕국의, 마지막 왕녀라고요? 그건 분명…….”
메릴린의 머릿속으로 잔뜩 긴장해 있던 어린 소녀가 떠올랐다.
사도의 눈앞에서 눈부신 신성력을 뿜어내던 성녀.
그녀야말로 로헨 왕국의 생존자가 아니었던가.
발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녀의 이름을 빌렸어요. 우리로서는 로헨 왕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또 살아남은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했거든요.”
메릴린이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있는 도로테아를 노려봤다.
“그래서 가면을 쓰고 있었던 거군요. 당신이 왕녀가 아니라는 사실이 들통나서는 안 되니까.”
그러나 진짜 왕녀는 지금, 성녀로서 7황자에게 ‘입적’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던가.
메릴린이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도대체 어쩌려고 그래요? 자칫하다가는 정말 다들…….”
진실이 밝혀졌을 때, 모두를 기만했다는 이유로 불어오게 될 역풍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도 발레리는 웃기만 했다.
“괜찮아요. 그 애에게는 빚을 졌으니, 내 나름대로 그 빚을 갚는 방식을 선택했을 뿐이에요.”
“…….”
“그리고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기도 해요.”
“원…… 했다구요?”
고개를 끄덕인 발레리가 작은 창 아래로, 분주히 목책을 정비하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저 이름을 이용해, 생존자들을 모아 로헨 왕국의 상황을 다른 국가에 알려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생각이었어요. 테아도 제게 ‘희생하라.’라고 말하지 않았고, 그저 그 이름을 사용해도 된다고만 했었으니까.”
“…….”
그리엄이 알 수 없는 눈으로, 잔잔한 미소와 함께 창 아래를 내려다보는 발레리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저들은 제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들이었답니다. 겨우 찾은 희망을, ‘왕녀’라는 구심점에 기꺼이 모여들어 목숨을 내어 놓은 이들을 두고 가고 싶지 않아졌어요.”
“발레리, 당신은 진짜 왕녀가 아니잖아요. 들키는 순간 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당신의 등 뒤에다 칼을 꽂을 거라고요.”
“이미 죽은 목숨이잖아요.”
애초에, 이미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 찾아낸 ‘목표’였다.
창가에 기댄 발레리가 말을 이었다.
“제국에서 발레리 제르망이라는 사람은 이미 죽었어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이별했고요.”
지긋지긋하게 끔찍했던 가문의 굴레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동안 걸어왔던 길을 잃어버린 그녀의 삶은 텅 비어 있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좀처럼 방향을 잡지 못하고 흘러가다 그저 빚을 갚고자 시작한 일에서 뜻밖의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저들의 희망이 부디 언젠가는 실현되었으면 해요. 그리고 나는 할 수 있는 한, 거기에 힘을 보태고 싶어졌거든요.”
“그럴 수 있을 거예요.”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아이인 척 딴청을 피우고 있던 도로테아가 불쑥 답했다.
“언니는 예쁘고 똑똑하니까,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생글거리며 건넨 말에 발레리가 천천히 몸을 굽히고는 도로테아와 눈을 맞췄다.
“고마워라.”
나직한 말과 함께 소녀를 안아 주는 손길은 몹시도 다정했다.
‘이쯤 되면 정말로 알고서 하는 말인지 모르고서 하는 말인지.’
아예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도로테아를 오로지 감만으로 알아내기란 힘든 일이다.
게다가 그녀는 어린 소녀의 흉내를 썩 잘 내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메릴린은 살아오면서 발레리만큼 똑똑한 인물을 본 적이 드물었다.
그녀만이 늘 한발 앞서 도로테아의 의도를 이해하고, 그녀가 머릿속으로 그리는 그림을 완성하는 데 손을 거들곤 했으니까.
고개를 돌린 메릴린이 그리엄을 향해 물었다.
“그럼 경께서 도로테아 영애를 찾는 까닭은 어린 왕녀 전하 때문인가요? 언젠가는 진짜 왕녀가 필요하게 될 테니까?”
“물론 그것도 있겠지만, 현재 왕녀 전하께서는 움직일 수 없는 입장임을 저 또한 이해하고 있습니다. 왕녀 전하를 황실에 입적시킨 것도, 그분의 안위를 생각해 내린 조치였다는 것도.”
“그렇다면 왜…….”
그리엄이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분이 제국에서 손꼽히는 정령사이기 때문입니다.”
메릴린은 발레리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는 도로테아를 흘끗, 바라보며 난감한 듯 말을 이었다.
“도로테아 영애가 손꼽히는 정령사인 것은 맞지만…….”
그리엄이 참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미 들으신 바 있겠지만, 로헨 왕국은 ‘거짓된 자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대정령사라 불리던 그자, 현자의 탑을 등에 업고서 왕국을 집어삼킨 그자는 죽은 이들의 혼을 이용하는 악마의 힘으로 사람들을 현혹해 왔습니다.”
그 순간 메릴린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일었다.
“죽은 자의 혼을 이용한다고요?”
도로테아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도 그리엄은 메릴린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 말을 이어 나갔다.
“본디 정령사는 자연의 기운에서 만들어진 성스러운 신의 피조물과 계약을 맺는 이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자는 자연의 기운이 아닌, 인간의 혼을 가지고서 자연의 기운을 덮어씌워 그것을 정령이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이용해 정령사들을…… 말 그대로 생산했습니다.”
“…….”
“사이한 힘을 다루는 존재들. 저희는 그자들을 ‘죽음의 술사’라 부릅니다.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힘을 사용하는 자들이지요.”
발레리의 말간 눈이, 도로테아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 깔린 옅은 미소가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도로테아는 눈을 내리깐 채 그리엄의 말을 가만히 경청했다.
“인간에게는 감히 허락되지도 않은 힘입니다. 그자들만큼 불길하고 끔찍한 존재가 있을까요.”
죽은 자의 혼에 자연의 기운을 덧씌워 만들어 낸 정령.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이 도로테아의 힘을 터부시하고 불길하게 여길 만한 요소는 충분했다.
명재신의 힘을 이용하던 이들조차, 그녀를 꺼림칙하게 여겼으니.
“이제 로헨 왕국에는 제대로 된 정령사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자들의 마수가 제국에까지 뻗쳐 오기 전에 저는 그분, 도로테아 영애와 손을 잡고자 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진짜’ 정령사들을 구해야 하니까요.”
“…….”
침묵하고 있는 메릴린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 순간 메릴린의 차분한 목소리가 그리엄을 향해 나지막이 물음을 던졌다.
“대정령사가 다루는 힘이 진짜 정령사와는 다르다는 거, 확실해요?”
“그렇습니다.”
“그의 능력은 정령이 아니라 죽은 인간의 혼을 다루는 능력이라는 거죠?”
“예.”
확신에 찬 답을 건넨 순간이었다.
존재감을 감춘 채 벽에 가만히 기대어 있던 프리드가 문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시선을 보낸 곳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알 수 없는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토도도도도도.
이윽고 조그마한 생명체가 복도를 가로질러 도로테아의 품으로 폴짝 날아들었다.
“피피?”
이곳에 오려 몹시 서둘렀는지 탐스럽게 윤기가 흐르던 다람쥐의 털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헥헥거리던 조그마한 생명체가 탈진한 듯 도로테아의 손에 축 늘어지는 것과 동시에, 멀리서 굵직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아악!”
“침입자다!”
“막아!”
“문을 닫아라!”
누군가가 강제로 이곳으로 진입하려는 듯, 폭음이 이어졌다.
미간을 좁힌 그리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통행증이 없이는 이곳을 찾을 수 없었을 텐데. 결계를 뚫은 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던 그가 손에 푸른 기운을 일렁이며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기다려요.”
발레리가 그리엄을 만류했다.
“술사들일 수도 있습니다. 서둘러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술사가 아닌 것 같아요. 그자들이 이곳을 발견했다면, 오히려 최대한 은밀하게 접근하지 않았을까요?”
그 말에 무언가 짚이는 구석이 떠오른 메릴린이 황급히 창가로 다가와 아래를 내려다봤다.
“……!”
무서울 정도의 기세로 사람들을 밀어내며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한 인영을 발견한 그녀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는 인물입니까?”
그리엄의 물음에 답을 하려던 찰나, 옆에 있던 발레리가 들고 있던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와 동시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아래층의 문이 열렸다.
성큼성큼,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공포심을 자극했다.
곧장 위로 올라온 루크는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이 좁은 공간 안에 있는 이들 가운데 가장 조그마한 소녀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대체 당신은 누구…….”
얼굴을 구긴 그리엄의 물음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성큼성큼 도로테아 앞에 선 루크가 시선을 내렸다.
“…….”
“…….”
소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루크 역시 입을 꾹 다물고 소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닮은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육신의 나이조차도 달랐다.
그렇지만 눈앞의 소녀는 분명히,
“도로테…….”
꾹 닫혀 있던 루크의 입에서 도로테아의 이름이 호명되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눈을 끔뻑이던 루크가 천천히 옆으로 기울어졌다.
쿠웅-!
그의 뒤에는 메릴린이 손날을 세운 채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평소의 루크라면 아무리 불시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하나, 그녀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을 테지만 그의 몸은 아직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심지어 피피의 방해 공작으로 숲을 이곳저곳 뱅뱅 돌면서 체력을 소모한 탓에 더욱 피로가 쌓였을 것이다.
결국 메릴린이 날린 회심의 일격에 그대로 바닥에 풀썩, 쓰러진 루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발레리가 뒤늦게 입을 가렸다.
형식적이나마 놀란 듯한 외마디를 내뱉으면서.
“어머나, 저런.”
헉헉대며 뒤늦게 달려온 스탠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루크를 보고 놀라 쪼르르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괘, 괜찮으세요?!”
소년의 걱정 어린 물음에 메릴린이 대신 답해 주었다.
“그는 괜찮아. 발…… 아니, 헤일런. 7황자 전하를 눕힐 만한 장소를 마련해 주세요.”
입에 익지 않은 이름을 억지로 고쳐 부른 메릴린의 부탁에 발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을 쓴 프리드가 다가와 한때 제 주인이었던 남자를 번쩍 품에 안아들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제야 구석에 서 있던 도로테아를 발견한 스탠이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제 여동생에게로 다가갔다.
“사라, 걱정했잖아. 괜찮아?”
“응.”
“그분이랑 나랑, 네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엄청 찾아 헤맸어.”
“그랬구나. 메릴린 언니가 아는 사람이 근처에 살고 있었더라. 그래서 잠시 만나러 온 거였어.”
“미리 연락은 해 줬어야지.”
요리조리 소녀의 행색을 살피고서, 별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안심한 스탠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루크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그런데 도대체 왜 쓰러지신 걸까?”
스탠의 중얼거림에 메릴린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다정하게 답해 주었다.
“너무 빨리 달려오다 보니, 호흡이 조절되지 않아서 숨이 차 쓰러지신 거란다. 몸이 아직 좋지 않으셔.”
있는 힘껏 뒷목을 가격한 사람이 할 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를 때려서 기절시켰다는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구나. 몸이 좋지 않은데 나까지 안고 오시느라 힘들었겠다.”
메릴린이 침울한 얼굴의 소년을 달래는 사이,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로 반쯤 넋이 나간 그리엄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좀 전의 그분이, 제국의 7황자 전하이십니까?”
전장의 악귀이자 전신(戰神)의 화신이라 불리는 그분이요?
메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7황자 전하께서는 사정이 있어, 저희와 함께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제국에서도 극비에 해당하는 사항이니 당분간 이곳 산채 사람들에게도 함구해 주세요.”
“예.”
그리엄은 7황자를 손으로 가격하여 단번에 쓰러뜨린 여인에게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메릴린은 그런 그의 시선을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우선은, 키엘 백작님께 사람을 보내야겠군요. 그분께 서신을 보내 간략하게나마 상황을 설명하겠습니다.”
좀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딘가 어수룩해 보이던 귀족 영애에 불과했건만.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명령을 내리는 메릴린의 말에 그리엄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던 메릴린이 ‘사라’를 흘끗 바라보다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음…… 유감스럽네요, 그리엄.”
“예?”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는.”
숨을 고른 그녀가 눈을 내리깐 채 한 점의 표정 변화도 없이 말했다.
“비공식적으로 실종되어 있는 상태랍니다. 정확히는 그녀 스스로 사정이 있어 모습을 감췄다고 봐야겠지요.”
“그런…….”
“그녀가 어디 있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아는 이가 없어요.”
그 말을 끝으로 메릴린이 입을 다물자 그리엄의 얼굴에 망연자실한 기색이 떠올랐다.
도로테아는 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던 얼굴을 바라봤지만, 이번만큼은 메릴린의 생각을 읽어 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