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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97화 (197/242)
  • 197화

    “누나랑 사라가 늦는 것 같아요.”

    “그런 것 같구나.”

    안절부절못하는 스탠의 말에 키엘이 부드럽게 대꾸했다.

    염려는커녕 여유로운 기색으로 보급품을 재차 확인 중인 키엘과는 달리, 소년은 자신의 어린 여동생이 걱정되어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었다.

    “혹시 또 싸우고 있는 건 아니겠죠?”

    “글쎄, 그건 아닐 게다.”

    아옹다옹하며 다툴 때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진심으로 멀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른 흥미로운 사건에 휘말렸다면 모를까.

    “제, 제가 가서 보고 올까요?”

    “네가 그러고 싶다면.”

    고개를 끄덕인 키엘이 곁을 지나던 병사 몇을 붙여 주자, 스탠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들이 사라진 숲 안쪽으로 향했다.

    소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키엘의 뒤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투아 가문이 봉쇄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작위를 박탈하고, 영지를 회수하여 직할령으로 선포하시려는 모양입니다.”

    “흐음, 하기야 귀여운 손녀딸이 생기셨으니 그녀에게 적당한 땅덩이를 주어야 성국의 노친네들이 성녀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들고 튀지 않을 테지.”

    “아르투아의 계집은 어찌할까요?”

    “…….”

    그녀를 통해 들을 만한 정보들은 이미 다 손에 쥐었다.

    가문마저 제국에서 지워질 마당에 굳이 데리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근처 마을에 데려다 주거라. 정착 자금으로 적당히 쥐여 주고.”

    지켜 줄 기사도, 보호막이 되어야 할 귀족의 작위도 없는 그녀가 마을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그 결과를 감내하는 것 또한 패자의 몫 아니겠는가.”

    만일 인덕을 쌓아 두었다면, 누군가는 돈이 떨어지기 전에 그녀를 찾아 도움의 손길을 내밀 테지.

    “예.”

    짧은 인사와 함께 모습을 감추려던 그림자가 멈칫했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검을 뽑아 들고 키엘과 등을 맞댄 채 미세한 살기가 뻗어 오는 방향을 보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음…….”

    키엘이 손을 들어, 막사를 비틀거리며 달려 나오는 누군가를 향해 미소 지었다.

    꽤 오랜 시간을 마비 독에 당한 상태로 지냈으니 몸이 온전할 리 없을 텐데, 벌써 일어나다니.

    실로 괴물 같은 회복력이었다.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도 형형한 살기를 뿜어내는 날것의 눈을 마주한 키엘이 쾌활하게 인사를 건넸다.

    “우리 친애하는 7황자 전하께서 깨어나셨군요. 그리 무리해서 움직이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아직 완벽히 해독되지 않았으니까요.”

    “계집은 어디 있지?”

    인사말에 반응은커녕, 자신의 용건만 간단히 묻는 7황자의 말에 키엘이 섭섭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주변의 병사들이 수군수군 이쪽을 주목하는 것이 느껴졌다.

    흘끗, 주변을 둘러본 7황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보다시피, 7황자 전하께서 실종된 뒤에 일이 좀 있었습니다. 저희는 함락당한 요새를 재탈환하고, 로헨 왕국의 무도한 이교도들을 벌하고자 구성된 연합군을 지원하러 가는 길입니다.”

    “계집은?”

    키엘의 미소가 짙어졌다.

    “어느 계집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황자 전하께서 원하시는 게 단순한 여흥이라면, 전장으로 향하는 이곳에서는 어려울 것 같군요.”

    “쓸데없는 소리.”

    루크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상태가 좋지 않은 몸이 다시 한번 비틀거렸지만, 그는 이를 악문 채 서서 버티고 있었다.

    “혹, 황자 전하를 이곳으로 데려온 귀여운 소녀를 지칭하는 거라면…….”

    그때, 뒤에서 스탠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라가, 사라와 메릴린 누나가 납치당한 것 같아요!”

    울먹이는 소년의 외침에 키엘이 안타깝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저런, 납치당했다는군요.”

    숨이 차도록 헉헉대며 달려온 소년에게, 루크의 형형한 눈빛이 내리꽂혔다.

    *   *   *

    발레리의 폭탄 발언에 내려앉았던 적막을 깬 것은, 그녀에게 가면을 건넸던 남자였다.

    “지나치게 무모하십니다. 신분을 밝히시다니요. 심지어, 옛 이름을 알고 있던 인연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미 저를 알아봤는걸요.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어요.”

    남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메릴린에게로 향했다.

    “자중해 주십시오. 저희의 계약은…….”

    “알고 있어요. 그리고 분명히 말해 두지만, 서로 간의 계약이 유효하려면 상호간의 존중이 우선되어야 한답니다.”

    발레리의 말에 남자가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무슨 일로 급히 나를 찾았나요?”

    그녀의 물음에 그제야 학자풍의 남자가 본론을 꺼냈다.

    “키엘 스펜서 백작이 지원군을 통솔하며 근처를 지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보급 물자와 함께 총사령부 쪽으로 향하는 중이라는군요.”

    “아아, 그래요?”

    키엘의 이름이 언급된 순간, 메릴린의 몸이 움찔했다.

    그 찰나의 몸짓을 놓치지 않은 발레리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남자는 발레리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건, 어떤 얼굴을 하고 있건 신경 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사람을 보내어 그와 접촉해 볼까 합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지금이 적기라 사료됩니다.”

    “당신은 키엘 스펜서를 몰라요. 그는 당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기민한 눈치를 가진 데다 경계심도 강하죠. 섣불리 접촉했다가는 뜻대로 결과를 얻기는커녕 휘둘리게 될 거예요.”

    발레리의 만류에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번이 아니라면, 다른 기회를 얻기는 힘들 겁니다. 카메르 요새에 합류하지 못하게 된 데서 이미 계획은 틀어졌습니다.”

    “알아요, 그리엄. 내 말은, 사람을 보내어 그와 접촉할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우리 측의 사람을 보내는 것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자는 거죠.”

    부드럽게 답한 발레리가 ‘그리엄’이라 불린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조급함을 가라앉히려는 듯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그리엄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 낙담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이미 키엘 스펜서의 일행과 접촉한 상태니까요.”

    그렇게 말한 발레리가 은은한 미소와 함께 메릴린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굳히고 있던 메릴린이 짤막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리엄의 시선이 메릴린에게로 향했다.

    성큼성큼 메릴린 곁으로 다가선 발레리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고 입을 열었다.

    “아직 서로 제대로 된 소개를 하지 않았지요? 그녀의 이름은 메릴린 레어. 레어 남작 영애라고 해요.”

    “제국의 귀족이었습니까.”

    그리엄의 말에 메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엘 스펜서 백작과, 동행하고 계십니까?”

    다시 한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리엄이 몸을 일으켰다.

    발레리가 이번에는 메릴린에게 그를 소개했다.

    “자, 그럼 이쪽도 소개해야겠지요. 여기 눈앞의 남자는 그리엄. 그리엄 발렌타인. 약초를 다루는 약제사이자, 이곳 산채의 결계를 책임지고 있는 정령사예요.”

    “정……?!”

    메릴린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던 발레리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그는 로헨 왕국에서 탈출한 생존자이기도 해요.”

    도로테아는 그제야 그리엄이라는 남자에게서 느껴지던 이질적인 기운이 ‘자연의 정령’에서 기인한 것임을 깨달았다.

    목에 걸려 있는 임시 통행증에 감도는 미미한 기운 또한 아마 남자가 다루는 자연의 힘과 관련 있을 터였다.

    ‘이만한 규모의 인원들이 모여 요새를 이룰 때까지 어찌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을까 궁금했는데.’

    저 정령사가 쳐 놓은 결계 덕인 듯했다.

    ‘로헨의 생존자라.’

    줄곧 찾고 있긴 했지만, 설마 정말로 ‘정령사’의 핏줄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내가 클라이브였다면, 왕국을 집어삼키고 가장 먼저 정령사들의 씨를 말렸을 테니까.

    그래야만이 다들 무엇이 ‘진짜’ 정령사인지 모르고서 그가 만들어 낸 거짓된 힘에 열광하지 않겠는가.

    ‘훌륭하기도 하지, 발레리.’

    그녀가 준 것은 고작해야 헤일런의 이름 하나뿐이었는데.

    그리엄을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흐뭇하게 웃었다.

    반면, 반짝반짝한 소녀의 시선을 받은 그리엄은 미간을 좁혔다.

    ‘이상하게 거슬리는군.’

    저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으면 왜인지 모르겠지만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대치하듯 마주한 두 사람 간의 긴장감을 깨뜨린 것은 이번에도 발레리였다.

    “그러고 보니 이 꼬마 아가씨가 누군지 소개를 받지 못했네요.”

    자신을 흘끗, 내려다보는 메릴린의 시선에 도로테아가 생긋 웃었다.

    그러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사라. 사라 데버라고 해요.”

    치마 자락을 살짝 들어 인사를 건네는 도로테아를 본 메릴린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귀여운 미소를 얼굴에 가득 채운 소녀는 영락없이 그 나이 또래의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보였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앞에 두고 뻔뻔하게 연극하는 것 좀 봐. 또 사람을 속여 먹겠다고?’

    정말이지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는 글러 먹은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   *   *

    루크는 제 품이 불편하다는 듯 바르작대는 소년을 다시 고쳐 안았다.

    그의 인생에 다른 이를 품에 안아 든 적이라고 해 봐야, 겨우 몇 번이 전부였다.

    아득한 기억 속에서도 ‘자세가 형편없다.’며 투덜거리던 상대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것을 보면,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몹시 필사적으로, 도로테아를 찾아 나서려는 그의 옷깃을 붙들고 늘어졌다.

    “저, 저도 갈래요. 가게 해 주세요!”

    그저 떨쳐 내고 가면 그만이건만.

    벌벌 떨고 있는 작은 손을 내려다본 순간, 멈칫했다.

    의식이 깊이 잠들어 있던 순간에도, 때때로 그의 귓가를 파고들던 앳되고 걱정 가득한 목소리임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괜찮은 거냐고. 왜 이리 오래 잠을 자느냐고. 혹시 아픈 건 아니냐고.

    그리 물으며 연신 주변을 맴돌던 다정한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사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울먹이는 소년의 말에 말없이 손을 뻗어 안아 들자, 키엘은 흥미롭다는 듯 루크를 바라봤다.

    “번거롭다며 떼어 놓으실 줄 알았습니다만.”

    “…….”

    “과연, 그녀는 본인의 주장만큼 퍽 훌륭한 양치기로군요. 이리도 훌륭하게 길들여 놨으니.”

    저 유들유들한 낯짝을 걷어차 주지 못한 것은 유감스러웠지만, 칼부림을 하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아주 많았으니까.

    우선 도로테아를 찾는 것이 먼저였다.

    그녀가 실종되었다는 장소에 도착하자, 소년이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여, 여기에서 흔적이 끊겼어요.”

    멈춰 선 루크가 주변을 훑었다.

    옆으로 쓰러져 있는 거대한 고목을 제외한다면, 특별한 것은 없었다.

    “여기, 이게 사라가 들고 있던 바구니예요.”

    바닥에는 아마도 바구니에 담아 두었던 것으로 보이는 야생열매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촘촘하게 짜인 바구니를 집어 든 소년이 침울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둘이서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어요. 메릴린 누나와 사라가 화해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루크는 죄책감으로 가득한 소년의 목소리에도 위로를 건네기는커녕, 냉정한 얼굴로 쓰러진 고목을 살피기 시작했다.

    부러진 부분을 보아하니, 나무는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없이 멀쩡했다.

    속이 썩은 것이 아니라면 무언가 인위적인 힘이 가해졌다는 뜻이겠지.

    푹 파인 자국을 매만지는 루크의 뒤에서 스탠이 말을 이었다.

    “어쩌면 산적일지도 몰라요. 메릴린 누나와 사라, 단둘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노린 걸 수도 있잖아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스탠이 종알거리건 말건, 상황을 파악한 루크가 몸을 일으켰다.

    ‘정령을 써서 넘어뜨렸군.’

    그게 과연 정령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애초에 그녀의 안위가 걱정되어 찾아 나선 것은 아니었다.

    화려한 격투 기술로 중무장한 그 지랄 맞은 정령만 데리고 있어도 웬만한 무리로는 그녀들의 몸에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할 테니까.

    고작해야 약탈이나 하는 산적 따위에 당할 만한 인간들이라면 애초에 곁에 두지도 않았겠지.

    눈을 가늘게 뜬 채, 이동한 흔적을 쫓으려던 그때였다.

    조용하던 수풀이 부스럭거리나 싶더니 웬 조그만 물체가 쪼르르 달려와 울상이 된 스탠 앞에 당당하게 섰다.

    “찌-.”

    도톰한 양 볼과, 풍성한 털로 무장한 다람쥐를 본 스탠의 눈이 커졌다.

    “피피!”

    “찌이- 찌!’

    그래, 바로 내가 피피다.

    도로테아에게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러 달려온 피피가 위풍당당하게 두 팔을 뻗어 온몸을 부풀리며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사라와 함께 있었구나!”

    “찌이~ 찌.”

    반가운 듯 인사를 건넨 다람쥐가 잽싸게 소년의 발치에 흩어져 있는 야생 열매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루크는 순식간에 양 볼이 두툼해진 다람쥐를 조용히 집어 들었다.

    “어디에 있지?”

    그 빌어먹을 계집은.

    나지막한 말에 그제야 자신의 임무를 환기한 다람쥐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목소리에 가득한 살기로 보건대, 길을 잘못 가르쳐 주었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때 소년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피, 사라가 있는 곳을 알고 있는 거지?”

    대롱대롱 루크의 손에 매달려 있던 다람쥐는 스탠의 올망졸망한 눈을 본 순간 폴짝 날아올라 소년의 어깨에 안착했다.

    그러고는 자신 있게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찌이.”

    믿음직스러운 다람쥐의 몸짓에 스탠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라가 있는 곳을 아는 것 같아요! 다행이다.”

    볼을 불룩하게 채운 다람쥐를 내려다보던 루크가 다시 소년을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자신만만한 얼굴의 다람쥐를 손에 쥐고서 가리킨 방향으로 집어 던졌다.

    “안내해라.”

    짤막한 말과 함께 날아가 나무 위에 안착한 피피는, 사신의 신기(神器)이기도 한 자신을 향한 무례에 털을 잔뜩 곤두세웠다.

    그런 항의가 하찮다는 듯, 대꾸조차 없는 루크의 태도에 이를 갈던 피피가 이내 홱 돌아서서 맹렬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찌찌- 찌.”

    도로테아가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 멀어져 가던 다람쥐가 사악한 웃음을 흩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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