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으슥한 밤이었다.
어김없이 가던 길목에서 야외 취침을 하게 된 일행이 모두 잠든 시각,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키엘은 제 심복으로만 채워 둔 천막을 찾았다.
“여전히 잠들어 있나?”
“예, 죽은 듯 잠만 주무십니다.”
의원을 부르는 것은 곤란했다.
혹여 7황자의 위치가 새어 나가거나, 그의 상태가 알려지면 단순히 제국 내의 문제만이 아니게 될 수도 있으니까.
‘전장의 지배자’라 불리는 7황자의 위명은 연합군 전체를 아우르는 큰 역할을 해 왔다.
단순한 실종과, 원인을 모르는 의식불명의 상태는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
“그…… 깨어나실 거라고 보십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심복을 본 키엘이 빙긋 웃었다.
“글쎄.”
의뭉스레 한마디를 남긴 그가 천막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눈을 감고, 곤히 잠이 들어 있는 황자는 생각보다 온순한 인상을 갖고 있었다.
하기야 두 눈에서 나오는 형형한 빛이 자연스레 위압감을 형성하니, 그 외의 것들은 잘 보이지 않을 만하지.
“어미가 반반해서 그런가.”
그의 얼굴 또한 제법 봐줄 만했다.
“친애하는, 나의 조카.”
가볍게 손을 뻗어 볼을 살짝 꼬집어 보던 키엘이 천천히 목을 거머쥐었다.
그 순간 조카의 목을 쥔 키엘 스펜서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서렸다.
천천히 그 손을 죄어 숨통을 막으려던 순간이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좀 곤란한데요.”
뒤에서 불쑥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에 그가 목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느릿하게 몸을 돌리자, 기척도 없이 나타난 ‘사라’가 눈에 들어왔다.
소녀가 검은 눈을 끔뻑이며 낭랑하게 말했다.
“그래 뵈도 꽤 많은 대가를 치르며 데려온 거라, 이렇게 쉽게 보내기는 너무 아쉬워서요.”
자그마한 소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키엘이 나지막이 물었다.
“치른 그 대가에, 네 지금 몰골도 포함되는 건가?”
“아뇨, 이건 그냥…….”
도로테아가 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생긋 웃었다.
“이쪽이 훨씬 편해서요.”
조르르르 달려온 그녀가 막사 안쪽의 높은 상자 위로 걸터앉았다.
얼추 눈높이가 비슷해져 마주하게 된 키엘이 제 머리를 쓸며 입을 열었다.
“변경백이 사망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실망하셨어요?”
“딱히. 오히려 내게는 좋은 일이지. 그는 요새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머물렀어. 능력이야 확실하겠지만, 그의 ‘다스림’에 익숙해져 버린 이들은 다른 사령관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야.”
그러나 변경백이 사망한 이상, 그를 대체할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다.
키엘로서는 오히려 호재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 아이가 없다면, 훨씬 더 편해질 테고 말이야.”
“…….”
“7황자라는 날개를 잃고 난 윌리엄이 내 상대가 될 수 있을까? 그 아이는 제 주변에서 부는 피바람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버렸던 과거가 있지 않나.”
제 어미가 ‘아들을 출생한 사실’을 숨기고자 2황자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훤히 알면서도, 뻔뻔하게도 윌리엄을 입에 올리는 키엘을 가만히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턱을 괸 채 웃었다.
“글쎄요. 정말로 윌리엄이 견제조차 되지 않는 겁쟁이에 불과하다면, 굳이 루크에게 손을 댈 이유는 없죠. 그 정도의 그릇이라면 알아서 무너져 내릴 테니까요.”
그러니 수년간 폐태자를 제거하기는커녕 그 자리에 두고 기다리지 않았던가.
그가 스스로의 과오로 무너지는 꼴을 지켜보고 싶었을 테니까.
의뭉스런 웃음을 매단 도로테아와 마주한 키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녀의 말은 주효했다.
황제를 구슬려 추가 지원을 명목으로 연합군 사령 본부로 향하게 된 키엘이 출발하기 전날, 윌리엄이 그를 찾았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접점이 없던 조카를 만나게 된 키엘은 여유로운 웃음으로 그를 맞았다.
……
…
“설마 2황자님께서 누추한 이곳을 방문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만남을 원하신다면 황자궁으로 저를 부르셔도 충분했을 텐데요.”
“그랬다가는 쓸데없는 이목이 끌릴 테니까요. 최근 들어 연달아 사건이 터지면서, 그 중심에 서 있는 누구 덕분에 저를 향한 눈 또한 덩달아 많아져서요.”
윌리엄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굵직한 사건들을 연이어 터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그런 그녀가 자주 찾는 2황자.
귀족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눈과 귀를 그에게로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뜩이나 주목받고 계신 황자님께서 수고롭게 저를 찾아 주신 까닭은?”
“별것 아닙니다. 그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부탁이라 하시면…….”
“황자로서가 아닙니다. ‘조카’로서, 숙부께 드리는 청입니다.”
담담하게 꺼낸 말에 키엘은 내심 당황했다.
설마 이제껏 줄곧 도망 다니기 바쁘던 황자가 그의 ‘출생’과 관련된 말을 꺼낼 줄이야.
이제껏 자신이 어떤 행보를 걸어왔는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윌리엄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도 끝끝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조카로서의 청이라니, 황자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숙부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이름과 자격을 가지지 못하셨습니다. 돌아가신 황태후께서 어떤 마음으로 그리하셨든 간에, 그 탓으로 황가의 사람들에게 가족 간 유대를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윌리엄의 말을 듣던 키엘의 눈에 짙은 살기가 어렸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와서 이런 말을 뱉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알겠군?”
“…….”
“지금이라도 나는 네 목숨을 취하고, ‘약해 빠진 황자가 지병으로 우연히 세상을 떠난 것’으로 처리할 수 있는데 말이야.”
“현명한 분이시잖습니까. 그러지 않으실 겁니다.”
“…….”
당연한 일이지만 타인에게 자신의 행동을 예측당하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키엘은 불유쾌한 기분으로 ‘조카’를 자처하는 유약한 황자를 바라보았다.
한순간에 ‘숙부’가 뿜어내는 분위기가 변한 것을 느낀 윌리엄이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에 힘을 주었다.
“부탁이란 거, 말해 보지.”
“루크는, 그 아이는 제국에 필요한 아이입니다. 숙부님께서 훗날 원하는 자리를 갖게 되신다면 반드시 크게 쓰일 아이지요.”
“…….”
“당장 뜻이 맞지 않는다 하여 제거하거나 덜어 내야 하는 인물이 아니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7황자 전하께서는 자신에게 너그러웠던 2황자를 지지하고 있지. 설마 네가 황위에 욕심이 있는지는 몰랐는데 말이야.”
“욕심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저는 진심으로 그 아이가 살아 있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나지막한 말에 키엘은 감흥 없는 눈으로 윌리엄을 바라봤다.
메마른 입술을 축인 황자가 말을 이었다.
“저는 이미 많은 형제를 잃었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죄를 어느 정도 짐작하면서도 눈을 감았고, 살아남고자 모른 척했으니 저 또한 그 죄를 함께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만 루크는, 얽히고설켜 서로가 독을 뿜어 대던 다른 형제들과는 전혀 달랐다.
등 떠밀리듯 전장으로 쫓겨 내려갔던 아이는, 그곳에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목숨 빚을 짊어지고 돌아와 그 죗값을 정당한 이들에게 물을 만큼 올곧게 자랐다.
“그러니 제 아우가, 죄 없이 위협받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키엘이 한숨을 삼켰다.
뭘 모르는 건가, 아니면 정말 모르는 척하는 건가.
올곧고 가진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루크는 키엘에게 더욱 위협이 될 존재였다.
“내가 네 청을 들어주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나른하게 늘어지는 목소리에 눈을 내리깔았던 윌리엄이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숙부님을 곤란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숙부님의 적이 될 생각이 없고요. 그렇지만, 숙부님께서 기어이 제 아우에게 손을 뻗으신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조카님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지? 이제껏 도망치기 바빴던 황자님께서 말이야.”
“제가 계승 서열이 낮은 까닭은, 혼기가 이미 지났는데도 여전히 비를 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뭐, 그래서인지 다들 암암리에 제가 사내 구실을 할 수 없다 여기더군요.”
“…….”
“숙부님은 아시지요.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다마다.
그가 혼인을 결심하고, 고위 가문과의 결합을 택한다면 황제의 입장이 확연히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 또한.
키엘의 눈에 날이 서는 것을 확인한 윌리엄이 다시 덧붙였다.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이 조카는 아직까지, 숙부님께 감히 대적할 용기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목숨처럼 아끼는 아우에게 손을 쓴다면 그때는 상황이 달라진다는 뜻이었다.
……
…
생각지도 않은 인물에게 한 방 제대로 맞고 내려온 키엘이 잠든 루크를 보고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겁먹고 웅크리던 새끼 고양이가 감히 자신을 위협한 것도 괘씸한데, 그 사실이 제법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만큼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 또 있을까.
“이미 은인께서도 윌리엄이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님을 아시게 되신 거겠지요?”
“…….”
도로테아의 말에 키엘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뚱한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여간, 나서랄 때는 조용히 있더니. 동생을 아끼는 마음 때문인지 쓸데없이 사람의 속을 뒤집어 놨네요.”
“제대로 한 방 먹긴 했지.”
“하지만 어차피 윌리엄이 걱정하는 그런 일은 하지 않으실 거였잖아요.”
“내가?”
낭랑한 소녀의 말에 고개를 든 키엘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 버린 그에게서는 서늘하고 날카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도로테아가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방식으로, 무대 위에 올라서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
“무엇보다 제게서 등을 돌리고 싶지는 않으실 텐데요.”
여유가 가득한 목소리에 키엘이 픽, 하고 웃었다.
“여전하군. 아니, 지나칠 정도로 얄미워.”
쓸데없이 사람의 마음을 잘 읽어 낸단 말이지.
실은 그가 정말로 제 조카를 제거하는 것을 생각해 봤다는 것과,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도 있었지만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그저 마냥 낚시를 하는 것이라고 여겼더라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중간에서 만류하지 않았더라면 그게 훨씬 빠른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비록 그 길이 얼마나 많은 피를 뿌리게 될지라도.
눈앞에 황위가 아른거리는데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동하던 마음은 순식간에 식었다.
눈앞의 소녀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참으로 재밌단 말이지.”
그가 살아오면서 겪은 가장 강렬한 감정이라고 해 봤자, 어미가 태어날 때부터 ‘지워 버린’ 그의 정당한 자격과 자리를 거머쥐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그러니 오히려 오랜 시간을 몸을 낮춘 채 ‘계획’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
눈부신 황좌 외에 그 어떤 것도 키엘에게는 흥미로 다가오지 않았으니.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지.’
눈앞의 이 조그만 소녀의 일거수일투족이 황금으로 된 의자보다 수백 배는 더 유쾌했다.
계획을 수정할 생각은 없지만, 빠르게 가려다 괜스레 미움받을 필요는 없지 않나.
그래 봤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텐데.
부드럽게 웃는 키엘을 본 도로테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가볍게 말을 돌렸다.
“보아하니 우드에게 꽤 귀찮은 일을 떠넘긴 모양이던데. 이대로 총사령부에 갈 생각인가?”
“그럴 생각이니 여기 합류한 거죠.”
“지금 네 모습으로?”
“…….”
잠시 말이 없던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확신에 가득 차 있던 그녀답지 않게, 어딘가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가족들에게 말할 생각이 없는 거군?”
“…….”
좀 전의 키엘이 그랬듯, 이번에는 도로테아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키엘이 허탈하게 웃었다.
사람의 마음을 멋대로 쥐었다 펼 때는 언제고, 가족 언급 한 번에 여유가 사라지다니.
이럴 때의 도로테아는 서툰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한 번도 소중한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어, 그 애정의 대상과 어떻게 관계를 쌓아 나가야 할지 헤매고 있는 길 잃은 어린아이.
“뭐, 좋다. 오늘은 확실히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구나.”
“다행이네요.”
“그렇지만 약간의 심술은 부릴 수 있겠지.”
키엘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막사의 문을 열었다.
열린 문 너머로, 창백하게 질린 채 돌처럼 굳어 그 자리에 서 있는 메릴린이 보였다.
초점을 잃고 방황하던 눈이 천천히 도로테아를 향했다.
“이런.”
도로테아가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눈을 흘겼다.
“저는 은인에게 충고를 드렸는데, 너무하시는 거 아닌가요?”
“아끼는 사람에게는 비밀이 없어야지.”
싱긋 웃으며 말한 키엘이 도로테아의 볼을 살짝 꼬집고는 메릴린을 스쳐, 막사를 빠져나갔다.
“그럼, 두 사람이서 즐겁게 재회의 회포를 나누길.”
웃음기가 묻어나는 말만을 남기고서.
이윽고, 돌처럼 굳어 있던 메릴린이 막사 안을 가로질러 도로테아 앞에 섰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한마디를 뱉었다.
“야.”
몹시도, 아주 몹시도 많은 감정이 내포되어 있는 부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