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메릴린은 얼떨떨하게 제 품에 안긴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소녀는 신기할 정도로 새까만 머리카락에 눈을 가진, 어딘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상해.’
분명 서로 처음 보는 사이임이 틀림없는데.
소녀의 눈을 마주한 순간, 친숙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마치 이 낯선 소녀와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것처럼 몹시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언니?”
자신을 부르는 가냘픈 목소리에 흠칫한 메릴린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사, 살려 달라니?”
그 순간이었다.
재빠르게 마차 안으로 들어간 키엘이 로브 차림의 여인을 끄집어냈다.
요란하게 나동그라진 여인이 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지자, 잘 관리된 윤기 나는 머리카락과 도자기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얼굴이 드러났다.
“흉기를 압수하고, 손발을 결박하도록.”
키엘의 말에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발버둥 치는 조세핀을 향해 달려들었다.
잘 벼려진 날선 단도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감히 저희 가문을 무엇으로 보고! 타 영지에서 이유도 없이 귀족 가문의 영애를 억류하다니, 이 무슨 행패란 말입니까! 제 부친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조세핀의 새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 그녀에게서 눈을 뗀 키엘이 메릴린의 품에서 바들바들 떠는 척하고 있는 도로테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키엘은 어린 소녀를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뗐다.
“아무래도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구나.”
어깨를 다독이는 메릴린의 다정한 손길에 용기를 얻은 듯,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와 오빠는 카메르 영지에서 왔어요. 저희 아버지께서는 요새의 관리 행정을 맡고 계시는 분인데, 며칠 전 저희 요새에 손님이 한 분 찾아오셨어요.”
도로테아는 어딘가 알 수 없는 눈으로 자기를 가만히 관찰하는 키엘을 보며 연극을 이어 나갔다.
“그분은 몹시 지쳐 보이셨고, 아버지가 방으로 안내하자마자 잠이 드셨죠. 아버지 말에 따르자면 고생을 너무 심하게 해서 탈진한 거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바쁜 분이시고, 손님을 돌볼 만한 상황이 아니라서 저와 오빠가 번갈아 가며 돌보고 있었어요. 물도 먹여 드리고, 옷도 갈아입혀 드리고, 또 젖은 천으로 몸을 닦아 드리기도 하고요.”
모두 스탠이 한 일이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여동생과 공을 나누는 것에 그리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터였다.
“그러다…….”
도로테아의 시선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조세핀에게로 향했다.
오만하게 ‘아이’의 목 아래에 날붙이를 들이밀며 협박을 일삼던 귀족 영애 따위는 온데간데없었다. 머리채를 반쯤 잡힌 채 팔과 다리가 결박된 여인은 악에 받친 눈을 하고 노려볼 뿐.
도로테아가 슬쩍 메릴린의 품에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저 여인에게 재갈을 물려라.”
그리 말하는 키엘의 목소리에는 아주 미미한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이미 도로테아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살살 살피며 입을 열고 있음을 눈치챈 것 같았다.
‘하여간 쓸데없이 감만 좋아서는.’
다독이는 손에 겨우겨우 용기를 낸 듯 고개를 든 도로테아가 말을 이어 나갔다.
“저녁에 처음 보는 얼굴의 시녀가 방에 와서 따뜻한 코코아를 줬어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평소 자기 전에 단것을 먹는 것만큼은 절대 허락하지 않으시거든요.”
“그래서?”
“마시는 시늉만 했는데, 저랑 달리 진짜 코코아를 마신 오빠가 잠이 들더니 깨지를 않는 거예요.”
흘끗, 마차 안을 살핀 키엘이 바닥에 누워 곤히 잠든 소년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방에 들어와 오빠와 ‘손님’을 데려가려 하기에, 안 된다고 나섰다가…….”
메릴린의 얼굴에 동정의 빛이 어렸다.
무서워 바들바들 떠는 소녀가 못내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손님이라…….”
나른한 목소리로 되뇐 키엘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 덮어 둔 담요를 홱, 벗겼다.
“……?!”
알 수 없는 침묵이 이어지자, 도로테아를 토닥이며 마차 안을 들여다본 메릴린이 그대로 굳었다.
“7, 7황자 전하……!”
“골치 아프게 됐군. 하필이면 사령부로 향하는 길에 실종된 7황자의 등장이라니.”
키엘의 시선이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도로테아에게 길게 머물렀다.
이윽고 고개를 뗀 그가 정찰병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주변을 정찰하는 인원을 두 배로 늘려라. 그리고 카메르 요새로 서신을 보내, 아르투아 영지에서 왔다는 영애가 누군지 자세한 신상 정보를 요구하도록.”
“예!”
“이곳에서 본 것은 함구하라. 적어도 상황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7황자 전하의 행방을 알려서는 안 돼.”
“예!”
정찰병의 힘찬 답변에 메릴린이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아, 아이들의 행방도 알려 줘야죠. 아버지가 그곳의 행정관으로 있다잖아요.”
그녀의 덧붙임에 도로테아를 흘끗 바라본 키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야겠군요. 아버지 입장에서는 이만저만 걱정이 아닐 테니.”
마치 무언가 알아채기라도 한 듯 의미심장한 미소에 도로테아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메릴린은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소녀를 향해 이름을 물었다.
“네 이름은 뭐니, 아가?”
“사라요. 그리고 오빠 이름은 스탠이에요.”
“그래, 사라. 많이 놀랐을 테니 네 오빠와 함께 우리 일행이 있는 마차로 옮기는 게 좋겠어.”
“네, 언니.”
고분고분한 소녀의 답에 메릴린이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키엘이 슬쩍 뒤로 물러나 기척을 숨기고 있던 그림자를 불러냈다.
“카메르 요새로 전령을 보낼 때 함께 들어가라. 그 안에서 저 아이들의 아버지가 누군지, 현재 요새 상황은 어떤지 소상히 알아보도록.”
“예.”
그림자는 언제나 그렇듯 짤막한 답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 * *
연이어진 강행군 아래, 어린 소년과 소녀의 등장은 잔뜩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싹싹한 성격의 소녀는 자신의 고사리손으로 사람들을 돕고 싶다며 부대 이곳저곳을 다니며 자잘한 심부름을 도맡았다.
고작해야 조그마한 물건을 옮기거나 혹은 주변을 정리하는 일들에 불과했지만, 다들 두고 온 어린 자식이 생각나는지 몰래 감춰 두었던 간식이나 용돈을 쥐여 주곤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씩씩해서 다행이에요. 스탠은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어 있었으니 상황을 몰랐다고 치지만, 저 아이는 깨어 있는 채로 납치당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겪었잖아요.”
메릴린이 흐뭇하다는 듯,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는 도로테아를 보며 말했다.
키엘은 말없이 그녀의 시선을 쫓아 소녀를 보다, 이내 다시 메릴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눈길에 메릴린이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키엘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메릴린을 향해 말했다.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가, 영애를 아끼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 말입니다.”
“네?”
하이클레어, 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메릴린이 얼굴을 구겼다.
“아껴요? 후작 영애가 그러던가요? 절 아낀다고?”
하기사, 말은 늘 번지르르하게 했었지.
“모든 것은 다 영애를 위한 일이에요.”
“알다시피, 내가 영애를 참 좋아하거든요.”
“영애가 나의 친구가 되어 줬으면 좋겠어요.”
연애 소설 따위에서나 볼 법한 ‘작업 멘트’를 일상적으로 날려 댈 때는 언제고, 훌쩍 사라져서는 제대로 된 소식 한 통 안 보내는 인간이.
‘생각해 보면 살살 꼬드겨서 옆에 둘 때나 잘해 줬지, 요즘은 허구한 날 사람을 불러다 일에나 써먹고.’
한술 더 떠서 지금은 연락조차 없이 사람을 방치하고 있지 않은가.
“글쎄, 저는 모르겠네요. 그런 사람.”
쌀쌀맞은 메릴린의 말에 키엘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실종된 후작 영애를 찾으러 온 것이 아니었습니까?”
“원래는 찾아서 한 대 때려 줄까 생각했는데요.”
그 특기인 박투술로?
키엘이 흥미진진한 기색으로 메릴린을 바라보자, 그녀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그 영애랑 몇 년을 함께해 보고 나니, 이제야 알 것 같아요. 감정을 쏟는 쪽이 무조건 손해더라고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요.”
그냥 안 엮여야 하는 사람이에요.
단호한 메릴린의 말에 키엘이 장난스레 물었다.
“그럼 지금 당장 눈앞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별로 그리 반갑지는 않겠군요?”
그 순간 메릴린의 눈에 의심과 경계가 서렸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샅샅이 훑어본 그녀가 미심쩍다는 듯 키엘을 향해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세요?”
“아니. 영애의 말을 듣다 보니, 설령 도로테아 영애가 이곳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리 반가워하지 않을 것 같기에.”
“당연하죠.”
턱을 치켜 든 메릴린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도로테아와 떨어져 있는 사이, 그녀는 나름의 자신감을 되찾은 상태였다.
심지어 행군하는 내내 경력 있는 군인들 또한 그녀에게 말하지 않던가. 기초가 잘 닦여 있는 데다, 무엇을 하든 야무져서 손댈 곳이 없다고.
귀족 영애라고 말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독립적이고 영민하며 대담한 영애라고 말이다.
“저는 저로서 여기 있는 거예요. 이 길을 선택한 건 저고, 우연히 마주친다면 모를까, 후작 영애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지는 않을…… 사라!”
말을 하던 메릴린이 제게로 달려오는 어린 소녀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사랑스러운 웃음을 매단 채 ‘언니’의 품에 안긴 소녀가 환하게 웃었다.
“메릴린 언니, 근처에 예쁜 야생화 군락지가 있었어요. 꽃이 너무 예뻐서 구경하다 언니에게도 보여 주려고요.”
메릴린은 감격한 얼굴로 작게 엮은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소녀의 순수함에 그동안 도로테아와 함께하면서 겪은 수많은 권모술수, 인간의 더러운 본성 따위에 찌들어 있었던 영혼까지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고마워. 너무 예쁘구나. 어디서 가져왔다고?”
“저기요.”
“마음은 고맙지만, 이 주변은 위험하니까 혼자 다니면 곤란해. 알고 있지?”
“그럼요. 오빠랑 같이 다녀왔는걸요.”
손을 잡고 조잘거리며 다정하게 사라지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키엘은 감금해 둔 조세핀 아르투아의 말을 떠올렸다.
“그 계집애가 먼저 권한 거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 아버지를 피해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더군! 오빠라는 소년을 재운 것도 바로 그 계집이라고!”
“왜지?”
“내가 어찌 알아! 그 아빠라는 작자가 귀찮았나 보지.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제 딸이랍시고 여기저기 써먹으려는 못난 인간이 세상에 어디 한둘인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던 조세핀의 말이 귀에 선했다.
물론, 이미 반쯤 미쳐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가진 여자의 말을 다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되레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는 조세핀의 말이기에 믿음이 가기도 했다.
‘게다가 알 수 없는 묘한 친숙함이 있단 말이지.’
생각해 보니 딱 저 나이 즈음이었던가.
어린 도로테아를 처음 마주했던 것이.
당돌하게도 서슴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선 소녀는 제게 넙죽 엎드려서는 술 한 잔을 달라 청했었지.
그때 엎드렸던 아이의 손목은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처럼 앙상했다.
왜소하고 작은 몸집에,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팔다리.
그런 중에도 놀랄 정도로 살아 반짝이던 눈동자.
그 눈을 보다 홀린 듯 저도 모르게 아이의 청에 응해 주었다.
‘왜일까. 그때의 그 도로테아 하이클레어가 생각나는 건.’
외형으로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 소녀인데도 말이지.
커다란 나무에 기댄 채 생각에 잠긴 키엘의 뒤로 누군가 스윽, 존재감을 드러냈다.
“주군.”
“음.”
그의 지시로 카메르 요새에 들렀던 그림자였다.
꼬박 하루 만에 돌아온 그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키엘에게 전했다.
안이 비쳐 보일 만큼 아주 얇은 종이였다.
몇 번을 꾹꾹 접은 종이를 부스럭거리며 펼치자, 갈겨 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여기까지요. 그 애는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기왕 하는 거 스탠이나 좀 챙겨 주시구려.
귀찮음과 분노, 그리고 신경질 그 사이.
글씨에 고스란히 서려 있는 감정에 키엘이 고개를 옆으로 갸웃 기울였다.
“이게 전부인가?”
“네, 두 아이의 아버지가 전해 주라 한 것은 이게 끝입니다.”
그답지 않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림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요새의 행정 관리자. 저 아이들의 아버지는 주군도 아는 인물입니다.”
“누구?”
“우드 데버.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그 호위 말입니다.”
“……!”
키엘의 눈이 커졌다.
이내 멀리서 메릴린과 시시덕대는 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키엘을 향해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우드가 요새 내에서 관리자가 된 까닭, 현재 요새의 상황과 폐하께 드릴 보고 사항까지.
천천히 전후 사정을 듣고 난 키엘아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의 머릿속에 터무니없는 가설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다른 이라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치부하고 말겠지만, 그것이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라면 달랐다.
우리 아가씨의 ‘능력’은 나 같은 범인(凡人 : 평범한 인물) 따위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니까.
속으로 읊조린 그가 드물게 계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그림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눈치였다.
그제야 그림자의 시선이, 어린 소녀에게로 향한 것을 보고 키엘이 쿡, 하고 나지막이 웃었다.
“가정을 꾸려 아이를 갖고 싶나?”
“……아닙니다. 그자가 언제 저런 아이들을 거두었나 좀 당황스러운 탓에.”
“그러게 말이야. 대체 우드 경에게 언제 저렇게 싹싹하고 귀여운 아이들이 생겼으려나.”
기껏 ‘아버지가’ 아이들의 신변을 내게 맡겨 주었으니, 나 또한 최상의 대접을 해야겠군.
안 그래?
키엘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