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콜린의 눈이 한때 같은 일에 몸담았던 옛 동료를 바라보았다.
한낱 인간 따위에게 묶여 명을 듣고 있는 사신을 두고, 명계에서 이런저런 소리가 돌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아주 가끔이지만, 몇몇은 그와 접촉하고자 ‘신호’를 보내오기도 했고.
그럼에도 모른 척했던 것은 자신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농을 던진 동료의 눈에서 묘한 장난기를 읽어 냈다.
‘그분께서는 이 일에 그다지 개의치 않으시는 모양이로군.’
명계의 존재는 모두 하데스에 속해 있다.
도로테아는 그런 하데스의 권속을 사로잡아 사사로이 복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가진 사신으로서의 능력을 개인적인 사안에 종종 사용해 왔다.
하는 말마다 오만하기 짝이 없고, 행동은 무모하기 그지없으며, 명계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을 만한 사안에도 거침없이 손을 대는 인간 계집.
만일 하데스가 불쾌하게 여긴다면, 그의 권속인 사신들 또한 그녀를 적대했을 터였지만…….
상대의 반응으로 보건대 명계는 생각했던 것보다 도로테아에게 호의적인 듯했다.
‘왜지?’
시건방지기 짝이 없고 하는 말마다 복장을 뒤집어 놓기 일쑤인 계집인데.
그런 찜찜한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로테아는 사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길 이따위로 방치한 머저리 같은 책임자가 너야?”
- ……허!
“명부에도 없는 죽음이 수없이 발생했음을 알았으면 진작 인외의 존재가 개입했음을 눈치챘어야지. 손 놓고 있다 이제 와 다 잡아 놓은 것을 채 갈 생각을 하다니. 능력은 쥐뿔도 없는 게, 욕심만 한가득하니 머저리 이상이지.”
조그마한 입에서 쏟아지는 폭격에 사신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어버버, 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신을 바라보던 콜린이 발치에 데리고 있던 허드슨의 육신을 툭, 하고 걷어찼다.
데굴데굴 구른 육신이 그의 앞에 안착했다.
사신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사기를 베어 내며 투덜거렸다.
- 어지간하면 직접 왔을 테지만, 최근 들어 우리 쪽도 여유가 없다고. 곳곳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 때문에 개미손이라도 빌려야 할 지경인걸.
흘끗, 콜린을 바라보는 시선을 읽은 도로테아가 제 품에서 사마제압부(邪魔制壓符)를 꺼내어 가볍게 상대를 향해 투척했다.
- 어이, 너무하잖아!
“할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그쪽을 대신해 수고로운 일까지 마다 않았는데, 종속까지 탐해서는 곤란하지.”
애초에 저치도 이쪽 소속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사신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콜린을 흘끔거렸다.
하도 당당하게 나오니 할 말이 없었다.
상대의 반응 따위야 안중에도 없는 도로테아가 떨떠름해 보이는 사신에게 대뜸 본론을 꺼냈다.
“거래를 하자.”
- 거래?
“아무리 당신의 일이라고는 하나, 이곳에 머무는 혼들을 일일이 저승길로 인도하려면 꽤 수고로울 거야. 내가 당신의 일을 도와줄게.”
사신의 눈이 커졌다.
“원인이 되는 귀태를 사로잡았다고는 하지만 이미 종속되어 버린 인간의 혼백은 본디 가졌던 이름을 잃은 상태일 터. 제 이름조차 모르고 떠도는 가여운 혼백에 이름을 되찾아줄게.”
수완 좋은 필립이라면 늦어도 일주일 안에 이곳으로 관을 보내어 올 수 있을 것이다.
수백의 관을 들여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주고 평온을 빌고 나면, 비로소 빼앗겼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은 혼백 또한 명계로 향할 수 있겠지.
- 그래 준다면야…… 몹시 고마운 일이지만.
조금 전까지는 머저리니 능력이 쥐뿔도 없니 하며 독설을 퍼붓더니만, 지금은 수고로운 일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도와주겠다니.
도로테아를 향해 경계 어린 시선을 보낸 사신이 조심스레 물었다.
- 그 대가로 무엇을 원하지?
“별것 아니야. 당신이 가진 생사부(生死簿)…….”
- 으엑! 미쳤어! 아무리 내가 다급해도 그걸 건네줬다가는 자격 박탈이라고!
“……에서 어느 한 사람의 죽음을 알아봐 줬으면 좋겠어.”
기겁하던 사신이 뒤늦게 덧붙여진 말을 듣고 눈을 끔뻑였다.
그러고는 재차 물었다.
- 죽음을 알려 달라?
“언제, 어디서 죽게 되는지만 알려 주면 돼.”
- 그게 다야?
사신은 꽤 놀란 눈으로 도로테아를 내려다봤다.
물론 생사부에 적힌 사람의 명운은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될, 극비 사항이지만…… 이곳에서 들일 어마어마한 수고로움과 비교하자면 미미한 것이기도 했다.
“죽음 자체에 개입할 생각은 없어. 정해진 운명을 건드리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아니까.”
- 그렇다면야.
도로테아의 말에 사신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명계의 사신과 ‘진명(眞名)’을 걸고 하는 거래에서는 결코 거짓된 말을 할 수 없다.
도로테아가 내거는 조건은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이쪽이야 손해 볼 것이 없으니, 오히려 기껍게 거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셈이지.
‘사신을 복속시켜서는 매일 같이 그 힘을 뽑아 먹는 잔인무도한 계집이라기에 가진 힘을 빼앗으려 들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호구잖아?
히죽대는 사신의 속내를 눈치챈듯 콜린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봤다.
도로테아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의 이름은 드웰로 베크만. 히사르 요새의 전(前) 성주이자, 드웰로 변경백으로 불렸던 이의 죽음이 어떠했는지 알려 줘.”
품에 있던 생사부를 뒤적거리던 사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응? 이미 죽었는데?
도로테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언제, 어디서 죽었지?”
머리를 긁적이던 사신이 그녀의 물음에 입을 열었다.
* * *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루크는 흩어지는 의식을 되찾고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저항이 거세어질수록 거북하고 불편한, 알 수 없는 힘이 저를 무기력하게 내리눌렀다.
아득한 머릿속에 생각이 떠오르려다 흩어진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누군가의 등뿐이었다.
아니, 저것이 누군가의 등이 맞을까?
벌써 몇 시간째, 혹은 며칠째 미동 한 점 없는 저 등만이 이곳에서 그가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바짝바짝 마른 입안을 적실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까슬까슬한 입술의 감촉에 다시 눈을 감았다.
“용서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째서…… 였을까.
“설사 결과가 당신을 몹시 고통스럽게 만든다 하더라도 저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뇌리에 남아 있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다시 귓가를 맴돌았다.
이것이 누가 남긴 말이었더라.
감각이 없는 왼쪽 팔을 흔들어 보다 다시 축 늘어졌다.
마비가 된 듯 늘어진 사지와, 좀처럼 선명해지지 않는 시야. 의식이 돌아왔다 혼미해지기를 반복하는 증상이 이어졌다.
루크는, 이 증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디기탈리스(Digitalis). 일명 죽은 자의 종.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이었다.
혹독한 겨울을 겨우 보내고, 봄이 찾아온 요새에 공급되어 오던 식량이 ‘기후 문제’를 핑계로 줄었다.
고된 훈련에 잔뜩 긴장한 상태로 상대와의 대치를 이어 나가는 와중에, 부실한 식량은 병사들로 하여금 주변의 작물들까지 닥치는 대로 탐하게 만들었다.
수십의 병사가 중독으로 사경을 해매는 지경이 되고 나서야 원인이 식물에 있음을 알았다.
뿌리째 모두 뽑아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몰래 재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설마 이렇게 당할 줄은 몰랐으나, 명백히 방심한 자신의 실수였다.
‘그 누구도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끔뻑이는 눈꺼풀이 유독 무거웠다.
목 안쪽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온 시큼한 액이 왈칵 입 밖으로 쏟아졌다.
불을 삼킨 듯 뜨거운 속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곳에서 죽는 걸까.
그런 생각이 처음으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검을 들 줄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쏟아졌던 수많은 경계 어린 시선들, 그를 괴롭히던 형제들, 어떻게든 구슬려 이용하려던 귀족들까지.
아직 어렸던 그가 멋모르고 후작이 바친 반짝이는 보석 상자를 받았을 때, 부황이 보냈던 그 냉랭한 눈빛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했다.
그는 시먼 후작이 누구인지도 잘 몰랐는데.
황태자는 그것을 두고서 ‘벌써부터 어린것이 제 몫을 챙기고자 귀족들을 끌어들인다.’며 몰아붙였고, 귀족파의 득세를 불편해하던 황제는 그 사건을 빌미로 시먼 후작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아들아, 네게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황족으로서 마땅히 책임져야 하는 일이란다.”
명심하라.
그 누구도 믿지 말고, 함부로 탐하지 않으며, 이기리라는 확신이 없다면 움직이지 말라.
그 조언 한마디를 선심 쓰듯 남기고 황제는 어린 그를 전장으로 보냈다.
변경백은 제 허리춤에 겨우 닿을 법한 어린 황자를 보낸 황제에게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전하의 처지가 참으로 곤궁하십니다.”
받은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전장으로 떠밀기 전의 ‘조언’ 몇 마디뿐이었던 황제와 달리, 드웰로 백작은 그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쳤다.
검을 쥐는 법, 정적(政敵)을 베는 법, 상대를 제압하는 법, 군을 다스리는 법.
상대의 목덜미를 확실하게 물어뜯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스스로를 굽히게끔 하는 법까지.
모든 생존 방법을 그에게서 배웠으며, 글과 지식으로는 결코 체득할 수 없는 값비싼 실전 경험도 그의 도움으로 흡수했다.
그러니 아무도 믿지 말라는 그의 말에, 변경백 본인이 포함되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도 하지 않나.
그가 내밀었던 음식을 의심 한 점 없이 입으로 털어 넣는 것도, 당연하지 않나.
스승이자 아버지였으며, 모자란 빈자리들을 채워 준 그는 루크에게 삶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그의 배반은 루크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매일같이 눈앞에서 자행되는 수백, 수만의 학살들이 저를 좀먹어 갑니다. 죽은 자들의 비명이 독이 되어 제 눈과 귀를 멀게 만들기 전에, 제 숨이 끊어지기 전에.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을 때에 당신을…….”
처음부터 탐한 적 없는 자리였다.
생각해 본 일도, 그리하고 싶다 바란 적도 없다.
나이를 먹고 이제 ‘죄를 갚았으니 돌아오라.’는 황제의 말에 살기를 머금고 돌아간 황궁에서 그가 마주한 것은,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짊어진 채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발버둥 치는 늙은 황제의 모습이었다.
돈에 취하고 권력에 취해 몸조차 못 가누는 못난 형제들도 있었다.
그 이면을 보았을 때 루크는 비로소 변경에서의 시간들이 오히려 값진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흐리멍텅한 눈동자를 하고서 가져도, 가져도 족하지 못하는 갈증에 평생을 시달리는 이들.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추하고 모자란 것들을 볼 때마다 구역질이 차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주의 자리를 염원하지 않았다.
그는 ‘포용’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를 베어 넘기는 법 외에는 아는 것이 없으니.
누군가의 목숨을 취하고, 또 취하고……
할 줄 아는 것은 인간 백정처럼 검을 휘두르는 것뿐인 제게 대체 무엇을 바라기에.
그 자리는 수많은 이들을 살리고자 하는 이가 앉아야 했다.
겨울이 되면 혹독한 추위 속에 얼어 죽은 이들을 돌보고, 여름이 되면 홍수에 떠밀려 세간을 잃어버리는 이들을 돌보는 군주.
필요하다면 펜을 들고, 필요하다면 검을 든 자를 움직일 수 있는 군주면 충분했다.
자신은, 루크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은 그런 군주의 검이 되어 줄 수는 있겠지만, 결단코 군주가 될 수 있는 인간은 아니었다.
기대가 버거워 거절했던 것이, 그토록 당신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끔 만들었나.
‘아니, 한 가지 바란 것이 있긴 했지.’
평온을 찾고 싶었다.
검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누군가의 핏방울이 무서워지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제가 뿜는 살기에 스스로가 질식할 것만 같은 답답함은 언제부터였을까.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를 염원했을 뿐이었다.
군주가 되어 수많은 이들을 책임지는 자리에 오르는 것은 그의 평온을 보장해 주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그 누구에게도 입 밖으로 뱉어 본 적 없었던 바람이었다.
그런데 그 계집은, 그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고 들킨 적 없던 자신의 속내를 마치 들여다본 것처럼 끄집어내었을까.
“나는 지금 너를, 내가 지켜야 할 울타리 안에 넣어 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만큼 강한 무위를 손에 넣었지만, 실은 검을 들고 싶지 않았다.
“설령 밖에서 폭풍우가 몰아쳐도, 그 안은 몹시 안락하고 따뜻할 거야.”
헛소리로 치부하고서 밀어낸 그때의 그 말이 왜 이제 와서 머릿속을 뒤흔드는 걸까.
곧 다가올 죽음을 앞두고서야.
“내 울타리 안의 양이 되렴.”
지금 이 순간 네가 마치 마법처럼 눈앞에 나타나, 또다시 같은 말을 한다면……
“꼴이 아주 엉망인걸.”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뿌연 안개를 걷어 낸 듯, 갑작스레 흐릿하던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저릿한 손과 발의 감각이 돌아오고, 흐릿하던 시야가 선명해지고,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던 이명이 사라졌다.
그리고 무릎 꿇은 채 묶인 제 앞에 낯선 소녀가 서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눈을 가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소녀가 그를 향해 타박했다.
“그것 보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밖에서 놀다 이렇게 엉망이 되는 거야. 애당초 따듯한 울타리 안에 있었으면 다치지도 않았을 텐데.”
제 모습을 담은 반짝이는 두 눈은, 이상하게도 전혀 닮지 않은 또 다른 소녀를 떠올리게끔 만들었다.
“이제는 너도 깨달아야 할 텐데. 내가 얼마나 좋은 주인인지를.”
소녀의 눈이 활처럼 휘었다.
뺨에 깊게 패인 볼우물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에게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길 잃은 양을 찾으러 왔단다. 네가 만일 내가 잃어버린 양이 맞다면,“
“…….”
“얼른 기어 와 목줄부터 차는 것이 좋겠다.”
내밀어진 손에 쥐어진 가죽끈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크가 이내 입을 열었다.
“개소리 하지 마.”
도로테아가 까르르, 웃음 지었다.
“울어 대는 것을 보아하니 아직 기운이 남았네.”
이마에 닿은 손에서 전해지는 시원한 감각에 눈을 감았다.
머리를 어지럽히던 시끄러운 소리들은 어느새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자, 이제 돌아가야지.”
불온하고, 무례하며, 불충한 계집 같으니.
루크는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던 의식이 깊이, 잠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