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술사 도로테아-187화 (187/242)

187화

우드는 어두운 표정의 리안과, 그 뒤를 이어 들어오는 자신의 옛 동료들을 보다 흘끗 도로테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등지고 있는 조그마한 뒤통수에 도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기야 언제는 친절하게 설명해 가며 일을 벌였었나.’

한숨을 삼키던 그때, 침묵하던 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도로테아가 건넸던 명부를 품에 안은 채, 한때 스승이라 믿고 따랐던 이를 향해 어렵게 입을 뗐다.

“스승님께서는 제게도 ‘명분’이 주어진다면 이 요새를 임시로 점거할 수 있다 하셨습니다. 이곳 영지에서 허드슨 경이 벌인 학살과, 아버지의 묵인을 알린다면 그 명분이 주어질 거라 하셨지요.”

그 뒤 리안은 주변 영지들의 지지를 받아 요새를 정식으로 승계받을 자격을 갖고, 실종된 변경백이 돌아온다면 그에게 이곳 요새를 넘기면 된다고.

“제국을 탐하고자 하는 이들을 상대해 온 변경백 각하만이, 이곳 요새를 맡을 자격이 있다고요.”

“…….”

“저는 그런 스승님의 말씀에 동의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계획에 동조했고, 타 영지 사람들과의 접촉에도 최선을 다했다.

인정받지 못했던 귀족으로서 인정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대단한 자리에 오르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더 이상의 희생을 볼 필요 없는, 그 어느 곳보다 튼튼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게끔 만들고자 한다는 이들의 말을 믿었을 뿐.’

적어도 저들이, 무능한 데다 책임조차 떠맡기 싫어하는 아버지보다는 훨씬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으니.

‘아니었어.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순진한 나를 이용했던 거야.’

소녀의 말에 다시 한번 계획을 찬찬히 살폈다.

옳은 일을 한다는 설렘과 스스로의 신념에 매몰되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가 접촉했던 귀족들을 떠올려 봤습니다. 스승님께서는 그들이 일제히 저를 지지할 경우, 폐하께서 승계할 후계자를 재고하실 거라 말씀하셨지요.”

“리안.”

“생각해 보니 그들이 저를 지지한들, 얻을 수 있는 이득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특히 보에트 백작은 애초에 변경백 각하를 좋아하지 않았지요. 방어책 구축을 명분으로 사병을 데려간다고요.”

변경백은 귀족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그들로서는 차라리 무능한 카메르 백작이 이곳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덜 성가실 터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게냐?”

지금도 카메르 백작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 듯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고작이지 않는가.

리안은 명부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나직이 말했다.

“그들이 지지하는 것이 변경백 각하가 아니라 실종된 7황자 전하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

“……!”

“……!”

자신의 허를 찌른 제자의 말에 라파예트는 눈을 감았다.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듯한 얼굴에 뒤에 서 있던 제타가 울컥한 듯 입을 열었다.

“다들 의심 한 점 없이, 우리가 정당한 절차에 따라 이곳 요새를 승계받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이 일이 7황자 전하를 황위에 올리고자 하는 반역을 도모하는 길임을 알았으면…….”

“그것이 무엇이 그렇게 다른가?”

침묵하던 라파예트가 한숨처럼 말을 뱉어 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지. 황도에서는 늘 이곳 변경을 중요하다, 말만 하면서도 그리 대단케 여기지 않았어. 중앙의 귀족들은 누구 하나 이곳의 심각성을 모르네.”

매년마다 부족한 군비를 메우고자 고개를 굽히고 빌어야 했다.

제국의 안녕을 위한 일인데도 누군가의 적선을 받듯이, 비웃음과 함께 발치에 떨어지는 돈주머니를 손을 벌벌 떨며 주워야 했다.

온다던 신병들은 하나같이 훈련조차 되어 있지 않고, 지원해 주겠다던 무기는 상태가 엉망이었다.

사람을 살리고자 자원하여 군에 입대한 이들 모두가 제대로 된 훈련조차 받지 못한 채 고기 방패처럼 전장에 내몰렸다.

“오직 7황자 전하만이 이 모든 일들을 아시지. 이 모든 것들을 헤아릴 군주가 되실 걸세!”

“그럼 왜 떳떳하게 설명하지 않으셨습니까!”

죽어 갔던 이들에게.

제타의 외침에 라파예트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도로테아는 경악과 분노, 당혹, 서글픔 등의 여러 감정들이 교차하고 있는 공간을 환기라도 하듯 손뼉을 짝! 소리가 나게끔 쳤다.

라파예트의 앞에 선 그녀가 노래하듯 그의 죄를 읊었다.

“경께서는 허드슨의 만행을 대충 짐작하시고도, 수많은 병사들이 탈영을 하다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함을 아시고도, 혹은 탈영조차 하지 못한 병사들의 죽음을 아시고도.”

자신의 조국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군에 들어온 이들이, 누군가의 필요에 따라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본인의 ‘거사’ 성공만을 바라보며 여론을 조성하고 일을 키우셨어요.”

고개를 갸웃, 옆으로 기울인 그녀가 우드를 힐끔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희 아버지가 말하는데 그런 것을 보통 기만이라고 한대요. 경을 믿었던 이들의 신뢰를 이용해서 교묘하게 상황을 조종했으니까요.”

어린 소녀의 낭랑한 목소리에 다들 입을 꾹 다문 채 귀를 기울였다.

“무릇 현자란 군주를 보필하며 그들이 바른 방향으로 가고자 인도하는 이들이라고 하던데.”

라파예트 코앞까지 다가온 도로테아가 고개를 들어 ‘현자’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백작님의 그릇이 모자라 그르친 판단을 한다면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경께서 하셔야 마땅할 일이지요. 그러나 그런 목적을 숨기고 백작이 그릇된 판단을 하게끔 유도하는 것 또한 경의 의무인가요?”

그 과정에서, 백작의 잘못된 판단으로 만들어진 희생자들도 책임질 수 있다,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소녀가 손으로 사지가 잘린 채 벽에 묶여 으르렁대는 창귀를 가리켰다.

“저기 저분은 허드슨이 날뛰어 그 악명이 더욱 높아지기를 경이 기다리던 사이에 잡혀 왔답니다. 이 감옥에 갇혀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상태로 오랜 시간을 견뎌 왔어요.”

라파예트의 눈이 아연해졌다.

“저분의 앞에 가서, 당신의 희생은 훌륭했노라. 말씀하실 수 있으세요?”

“…….”

“말해 봤자 이제는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요.”

비웃음 섞인 목소리에 현자라 불리던 노인이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희생은 있을 수밖에 없다 여겼다.

오로지 대의를 위해.

언젠가는 다들 알아주리라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그 대의만을 좇아 움직여 왔다.

이제 와서야 그 희생들이, 그가 희생이라고 생각했으나 결국 자신 탓으로 사망한 피해자들의 무게가 노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7황자가 이 무모한 찬탈 계획에 찬성했을 리 없죠.”

애초에 루크라면 이들의 계획을 듣자마자 목을 베어 황도로 올려 보낼 성싶은데.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변경백 또한 루크를 어딘가에 감금해 둔 것일 터.

“지금 두 사람은 어디 있지요?”

“모른다.”

라파예트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혹여 정보가 새어 나갈까 조심 또 조심하셨다. 7황자 전하의 눈치가 기민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셨지.”

‘실종’으로 꾸민 까닭은 7황자를 감금해 두고서 설득할 시간을 벌고자 하는 핑계였을 터.

연락이 닿지 않는다니, 골치 아프네.

도로테아가 한숨을 삼키며 멍하니 서 있는 백작을 향해 손짓했다.

“으, 응?”

“황도에 올릴 보고서를 써야 하는데요.”

“……!”

“저희 아버지가 그러는데.”

흘끔 우드를 바라보자 시선을 받은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일단 백작님이 허드슨의 진면목을 몰랐던 것도 사실이고, 무능하고 뒷돈 좀 챙긴 것 외에는 다른 죄가 없으니까 그 점을 참작해서 보고서를 써 주시겠대요.”

“저, 정말이냐?!”

백작을 바라보는 우드의 눈빛이 냉랭해졌다.

무능한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 같으니.

폐하께서 그의 무능함을 보고받고도 이토록 중요한 곳에 그대로 두리라 믿는 걸까.

“그동안 백작께서도 하실 일을 드리려고요.”

도로테아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리안의 품에 있던 ‘사망자 명부’를 들고 왔다.

백작은 다소 얼떨떨한 얼굴로 제게 건네어지는 두꺼운 명부를 두 손으로 받았다.

깨알 같은 글씨들로 빼곡히 적힌 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곧 이곳 영지로 수많은 관(棺)들이 이송되어 올 거예요.”

본디 전장에서 죽은 이들을 기리려고 만들었던 관이었건만.

설마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오히려 잘되었지.’

눈을 내리깐 도로테아가 되뇌었다.

향장(香樟)으로 짠 관이라면, 그동안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한 채 이승을 헤매느라 고단했을 이들을 편히 쉬게 해 줄 터이니.

“짜인 관에 넣을 이름을 하나하나 새겨 주세요. 명부에 적혀 있는 이름들 모두.”

적어도 그들의 넋이 평안을 찾을 수 있게끔.

“이, 이 많은 이름을 언제 다……!”

“일손이라면 이곳에 있네요.”

라파예트와 그의 호위들도 어차피 구금되어 있어야 할 이들이었다.

어차피 감시해야 하는 인물들이니, 함께한다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

어깨를 으쓱한 도로테아가 말했다.

“책임은 지기 싫고, 적당한 역할은 필요하고, 위험하고 싶지도 않잖아요? 그러니 이 일이야말로 당신에게 가장 적합하지요.”

한 자 한 자 그 이름을 새기며 당신이 무능한 탓에 희생되어야 했던 인명들을, 그 목숨의 무게만이라도 이해하기를.

도로테아는 여전히 억울한 듯 우드의 눈치를 살피는 백작에게서 눈을 뗐다.

그가 일을 완수하기 전까지, 매일 밤마다 죽은 자들이 그의 꿈을 방문하리라.

고단했던 삶을 토로하고 분노할 수 있게끔.

저 두꺼운 명부에 쓰인 이름이 모두 관에 새겨질 때까지.

고개를 돌린 도로테아가 리안과 그레함 일행을 향해 입을 열었다.

“라파예트 경 아래에서 일했으니, 접촉한 귀족들과 현 상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테죠. 남은 무리들이 숨어 있는 장소 또한.”

“…….”

“아버지와 함께 그쪽으로 가서 상황을 정리하세요. 폐하께서는 관대하시니 아직 구두로 은근한 이야기가 오고 간 것까지 역모로 취급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가문까지 멸하지는 않으시겠지. 가주 정도야 갈아 치우실지는 몰라도.

심드렁하니 하는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우드가 그녀를 안아 올려 속삭였다.

“너는 뭘 하려고?”

“7황자를 찾아야 하잖아.”

“라파예트 경도 모른다는 7황자의 행방을 어찌 찾아?”

도로테아의 눈이 구석에서 꿈틀대고 있는 ‘허드슨’이었던 존재에게로 향했다.

사지와 혀가 봉인당한 귀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저기 나침반이 있으니, 저걸 이용해서 한번 찾아보려고.”

알 수 없는 말에 우드가 침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녀가 할 수 있으리라 단언했으니 허튼 말은 아닐 터였다.

*   *   *

남은 수습은 죄다 ‘아버지가 해 주실 거예요~.’라며 우드에게 맡긴 도로테아는 허드슨을 질질 끌고 인적 드문 망루로 올랐다.

- 또다시 사신을 불러내겠다고?

“우드가 옛 동료랑 회포를 푸는 것을 보니, 네 옛 동료도 불러 주고 싶어서.”

뜬금없는 말에 콜린이 흘끗, 허드슨을 내려다보았다.

멸해야 할 존재를 두고 쓸데가 있다며 말릴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창귀가 된 자들을 족히 수백 구가 넘도록 베어 냈으니, 아마 근처에 와 있겠지.”

그 많은 넋들을 모두 인도하려면 밤을 새도 모자랄 테니.

- 불러서 무엇을 할 생각이냐?

“7황자의 행방을 물어봐야지.”

그걸 왜 사신에게 묻느냐는 듯한 콜린의 눈빛에 도로테아가 어수선한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변경백의 이번 일, 역시 그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가 히사르 요새에서 국경을 지켜온 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수많은 일들이 있었겠지.

카메르 백작보다도 더 무능한 인간도 있었을 테고, 허드슨보다 더 잔혹한 인간도 있었을지도.

불합리한 일이 없는 전장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며 버텨 온 것은, 그 또한 ‘군주’를 바꾸는 일의 무게를 잘 알기 때문이리라.

“지나치게 조급했어.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간에 희생자가 너무 많이 나올 텐데.”

심지어 현재의 황실과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 상황에서 군주를 바꾼다는 것은 지나친 모험이었다.

“심경의 변화를 이끌어 낼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지. 패전만으로는 그렇게 될 리 없거든.”

그렇지만 만일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필립이 그러더라. 변경으로 흘러 들어간 밀매품 중에 희귀병에 쓰이는 약재도 있었다고. 근데 그 약재가 어디로 공급되었는지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알기가 어려웠대.”

그 정도로 보안이 철저하다면 병환을 앓는 당사자는 적어도 원수(元帥)급 이상의 인물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상황이 딱 들어맞더라고.”

평생을 받쳐 이 제국의 국경을 지켜왔는데, 하필이면 죽음을 앞둔 지금 뚫리고 말았지.

주변을 둘러봤을 때 도무지 요새를 맡길 만한 인물은 없고.

죽음조차도 마음 놓고 받아들일 만큼 제국의 정세가 안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조급함이 성급한 결정을 부른 셈이다.

“죽음과 맞닿아 있는 자를 찾는 데에는 사신 만한 인물이 없잖아?”

- ……죽은 자의 혼을 인도하는 하데스의 종을 고작해야 사람의 행방을 찾겠다고 부르는 인간은 너밖에 없을 거다.

“그래서, 싫다고?”

도로테아의 가벼운 물음에 콜린은 짧은 한숨과 함께 신기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봉인되어 꿈틀거리는 것 외에는 하지 못하는 귀태를 내리쳤다.

신기가 반쪽짜리 귀의 육신을 가르자, 그 균열에서 흘러나온 사기가 허공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꾸물꾸물, 살아 있는 듯 밤하늘을 채운 사기를 가르고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 이런 미친! 어디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운이 흘러나오나 했건만!

콜린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짧고 얄팍한 낫을 쥔 존재가 천천히 도로테아가 있는 곳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새로이 만난 사신에게 다정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윽고 서로의 모습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선 사신이 말을 건넸다.

- 멀쩡하게 일하고 있던 사신을 사람의 육신에 처넣고서는 하데스 님보다도 더하게 부려 먹는다던 악덕 고용주가 바로 너구나?

다짜고짜 던져진 힐난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홱 돌려 콜린을 바라봤다.

“내 험담을 하고 다녔어?”

- …….

콜린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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