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한밤중 불려나온 총관은 의아한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비상용 열쇠를 건네주었다.
우드는 혹여 다른 이들이 보고 놀랄 것을 저어하여, 카메르 백작의 침실에 있던 담요로 허드슨을 덮었다.
“팔을 쥐고 끌고 다니다 끊기면 곤란하니, 줄로 묶어야겠습니다.”
“그, 줄로 묶어 다니는 것도 좀…….”
“그럼 백작께서 고이 안아 들어 옮기시겠습니까? 뒤에 있는 호위들을 시킬까요?”
“…….”
그 자리에 있는 누구라 해도, 허드슨과 살갗이 닿는 것을 기꺼워할 리가 없었다.
결국 무언의 허락 속에서 우드는 허드슨을 담요로 둘둘 감아 짐짝처럼 짊어졌다.
불편한 기색을 한 채 입을 꾹 다물고 걷던 백작의 눈에 우드 옆에서 종종걸음을 하고 있는 어린 소녀가 보였다.
“저 아이도 같이 가는 건가?”
“예.”
“아직 어리지 않나.”
“그리 어리지 않습니다.”
속에 들어 있는 건 이미 다 컸습니다만.
우드의 담담한 답에 백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문득, 황도에 남겠다고 갖은 떼를 쓰던 아들이 떠올랐다.
변변찮은 놈이래도 뒤를 이을 적장자라는 생각에 황도행을 허락했건만, 막상 중앙 귀족들의 화려한 삶에 취한 아들놈은 서신 한 번 부치는 일이 없었다.
제 부인은 아들놈 기를 죽여서는 안 된다며 풍족하지 않은 생활비를 펑펑 쓰며 자신의 무능을 탓하질 않나.
생각해 보면 허드슨에게 의존하기 시작한 것도, 늘 부족한 물자에 시달리는 백작에게 많은 세수를 걷는 법과 군자금을 아끼는 법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낀 돈을 황도에 부치느니, 차라리 이곳 요새를 튼튼히 하는 데 썼어야 했는데.
“속도를 늦추지 말고 제대로 걸어라.”
‘그에 반해 아끼는 딸아이에게 시련을 겪도록 안배하는 저 기사는, 확실히 나와는 다르군.’
흘끗, 우드를 바라보던 백작이 나지막이 물었다.
“경은 딸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되지도 않나?”
“괜찮을 겁니다. 제 딸은 강하니까요.”
솔직히 여기 있는 모두가 덤빈다 한들, 그녀를 이길 수는 없을 텐데 무엇이 걱정이란 말인가. 게다가 보호한답시고 방으로 돌아가라고 해 봐야 들어먹을 인물도 아니었다.
‘곁에서 지나치게 일을 키우지 않게끔 감시하는 것이 최선일 뿐.’
그런 우드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이들 모두 감탄 어린 눈길로 소녀를 바라봤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듯, 소녀는 어두운 복도를 지나 지하로 내려가는 길로 향하면서도 겁먹기는커녕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우드의 곁에 서서 걷고 있던 도로테아가 백작의 시선에 싱긋 웃었다.
“아빠가 사람은 모름지기 알아야 할 것들을 외면하면 성장할 수 없는 법이라 하셨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두렵고 불편한 것이어도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죠. 훗날 힘을 길러 일망타진하겠다는 생각으로 안일하게 현재의 불의를 모른 척한다든가, 나보다 더 잘 견뎌 낼 사람에게 맡겨 버린다든가.”
도로테아가 생긋 웃으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런 건 겁먹은 어린아이나 하는 짓이라고요. 저는 어른이 될 준비가 되어 있거든요.”
라파예트의 얼굴이 묘해졌다.
그건 분명 자신과 카메르 백작, 양측을 한데 묶어서 비판하는 말이었다.
아무리 영민하고 당차도, 제 앞길 하나 가늠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그런 말들을 떠올렸을 리 없으니 이것은 분명…….
‘딸아이의 입을 빌어 우드 경이 우리를 질책하고 있는 것이로구나.’
라파예트의 지긋한 시선을 외면한 우드가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분명 또박또박 말을 꺼낸 것은 도로테아인데, 도리어 자신이 그걸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수족들이 득시글거리는 황도를 벗어났는데도 벌이는 사고의 규모에는 변함이 없군. 아니, 오히려 더 대단해졌지.’
그리고 나는 다른 이들의 몫까지 배로 억울해졌고.
또박또박 할 말을 마친 도로테아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이 좀 전과는 달라졌다.
흘끔, 흘끔 소녀를 바라보는 이들의 가치관에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한 것일까?
‘어린 시절부터 아이를 강한 시련 속에서 길러 내면 저렇게 되는 건가.’
‘과연. 후작의 총애를 받는 기사답게, 자식 교육에도 엄격한 편이로군.’
‘그렇지, 모름지기 아이는 시련 속에서 성장하기 마련이니.’
앞선 짧은 대화로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의 자식 교육관이 바뀌었음을 눈치채지 못한 우드는, 망설임 없이 앞을 향해 걸어가던 도로테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만.”
무뚝뚝한 그의 만류에 걸음을 멈춘 도로테아 앞에 지하로 향하는 거대한 철제문이 보였다.
숨을 크게 고른 백작이 천천히 열쇠를 구멍에 밀어 넣었다.
* * *
끼이이-.
육중한 문이 열리자, 어두운 아래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좀처럼 문 안쪽으로 들어서지 못하는 카메르 백작을 힐끗 바라본 우드가 앞장섰다.
“횃불은 백작께서 들고 오십시오.”
“그, 그러지.”
별말도 하지 않았는데 주눅이 든 백작이 순순히 횃불을 들어 앞을 비췄다.
어둑한 아래,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에 한숨을 쉰 백작을 무심하게 지나친 우드가 먼저 발을 디뎠다.
이윽고 다들 말없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곳에 내려와 본 적 없으십니까?”
“막 백작이 되었을 때 한 번을 제외하고는.”
죄수를 집어넣는 것이야 지시를 내리면 휘하 기사들이 했을 테고, 죄수를 볼 일이 있다면 간수들에게 꺼내어 오라 하면 되었을 터이니.
그럼에도 백작 위를 승계받은 뒤에 처음으로 이곳을 찾는다는 것은 좀 놀라운 일이었다.
그 사실을 의식한 것인지 백작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다들 별달리 말을 보태지 않았다.
라파예트는 그럼 그렇지, 하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간수가 몇이나 있습니까?”
“교대병들은 넷입니다만, 따로 간수가 더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허드슨 경이 이곳을 맡고 나서부터는 다른 이들의 출입을 엄금했으니까요.”
총관의 설명을 듣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들었다. 안쪽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좁은 길목에 다시 문이 나타났다.
백작은 낯선 문을 보고서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런 문은 본 적이…….”
“허드슨 경이 새로 달아 놓으셨습니다. 간수들은 회유당할 위험이 있으니, 죄수들의 탈출을 막기에는 이쪽이 더 나을 거라고 하셨지요.”
“…….“
“백작께서 그의 명을 자신의 것처럼 따르라 하셨으니까요. 굳이 따로 보고드릴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변명 같은 덧붙임에 백작이 입을 다물었다.
육중한 쇠로 만들어진 문은 한눈에 보기에도 아주 튼튼해 보였다.
허드슨은 매번 세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백작에게 올렸다.
카메르 백작은 그가 올린 보고서를 훑어보며 자신이 ‘영지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파악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일일이 살피다 중요한 것을 놓치느니, 요약된 보고서를 받는 것이 효율적이라 여겼으니까.
그러나 이제 생각해 보니…….
‘그가 올린 보고서에서 누락된 것들은 알지 못하게 되는 셈이야.’
뒷목이 싸해졌다.
몸이 으스스 떨릴 만큼 서늘한 기온에도, 카메르 백작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비질비질 솟았다.
그는 대체 이곳에서 뭘 했단 말인가.
하얗게 질린 창백한 얼굴을 흘끗 바라보던 우드가 육중한 문에 걸려 있는 걸쇠를 부수고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중으로 잠겨 있던 문이 끼이익,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열리기 시작했다.
문 너머로 흘러나온 짙은 향이 코를 찔렀다.
그저 들이마시기만 해도 머리가 어질할 정도로 강력한 향이었다.
열린 문틈으로 들이마시기만 해도 이 모양인데…….
다들 섣불리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어두운 문 안쪽을 흘끗거렸다.
“이리 와라.”
우드가 아이를 품에 안고 망설임 없이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 순간이었다.
“그르르…….”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지막한 소리에 다들 긴장한 채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총관이 횃불을 높이 들자, 어두운 문 안쪽의 광경을 선명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다들 아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잃었다.
“이게, 대체…… 뭡니까.”
라파예트 경을 따르던 기사 중 하나가 툭 내던진 말에, 도로테아가 촘촘히 쌓여 있는 투명한 표본을 바라보며 답했다.
“한때 사람이었던 일부요.”
누군가의 귀, 누군가의 손, 누군가의 눈, 누군가의…… 수많은 이들의 신체 일부가 박제되어 있는 거대한 둥지였다.
동시에 그 박제된 신체에서, 가야 할 곳으로 떠나지 못한 가여운 혼백들의 울음소리가 귓속을 스며들었다.
한때 인간의 혼을 지하 세계로 이끄는 역할을 했던 사신의 신기가 우웅, 하고 울었다.
도로테아의 시선이 희미하게나마 들끓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향했다.
사지가 묶인 채 죽지 못해 살아 있는 인간은 이미 이지를 잃은 지 오래였다.
“후…… 저기 있는, 사람은 날 습격했던 이들과 비슷해 보이는군.”
라파예트의 말에 옆에서 구역질 중이던 백작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럼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고?
도로테아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곳에서 죄수들을 가지고 실험하고 있었던 거군요.”
본인의 전리품들로.
도대체 어찌 창귀를 만들었을까 궁금했건만.
설마 스스로 깨우쳤을 줄이야.
‘재능이 있다고 해 주어야 할까.’
지하에 이런 실험실을 갖추기까지는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다.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헛되이 쓰이고 있음을 눈치채지도 못하는 무능한 상관.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안타까운 희생양’ 삼아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방관하는 지식인.
그리고 사람의 목숨을 파리새끼만도 못하게 여기는 인간.
“공교롭게도 이 자리에 있었군요.”
그 모두가.
* * *
깊은 침묵을 깬 것은 카메르 백작이었다.
“내가, 이제껏 신임해 왔던 것이…….”
인간을 저런 괴물로 만들어, 자신만의 군대를 창설하고자 하는 끔찍한 존재였다고?
뒷걸음질 치던 백작의 등이 쿵, 창살에 닿자 소리에 반응하듯 매달려 있던 ‘괴물’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도로테아는 고개를 돌려 라파예트를 바라보았다.
백작에 비해서는 침착하나, 그 또한 그리 좋은 얼굴색을 띠고 있지는 못했다.
“폐하께서도 머리가 아프시겠어요. 히사르 요새를 대신해 제국의 새로운 방벽이 되어야 할 요새가 이렇게 엉망임을 알고 계신다면.”
소녀의 말에 카메르 백작이 불안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패전을 했다는 이유로, 요새가 함락당했다는 이유로 변경백은 작위를 잃을 처지에 놓여 있었다. 실종 상태만 아니었어도, 진작 마땅한 처벌이 내려졌으리라.
제국의 방어선이 뚫렸다는 사실은 그만큼이나 중한 문제였다.
‘그런데 이곳 요새에서 일어난 일들을 아시게 되면…….’
관리 소홀이라는 가벼운 말로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겁에 질린 백작이 우드를 향해 물고 늘어졌다.
“폐, 폐하께 보고를 드리는 건 내가 하게 해 주게! 무, 물론 없던 일로 무마해 달라는 것은 아니야!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내 잘못으로만…….”
“아직, 보고는 이르지요.”
도로테아가 울며불며 매달리는 백작의 추한 몰골을 바라보며 발랄하게 말했다.
소녀는 이 참혹하고 살벌한 풍경을 배경 삼아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직 요새 내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드러난 것이 아니니까요.”
밝혀지지 않은 일들을 두고, 부분적으로 보고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백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
“카메르 백작께서 쉽게 보였던 걸까요, 이곳 요새가 그토록 훌륭한 탓일까요? 탐내는 이들이 참으로 많아요. 그렇죠?”
도로테아가 고개를 들어 라파예트를 바라보았다.
“…….”
허망한 눈의 노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부정도, 긍정도 없이 입을 꾹 다문 채 허드슨이 만들어 온 참상의 결과물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 있을 뿐이었다.
백작이 대경실색하며 그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무슨 짓을 하려 했던 거요! 내 영지에서, 이곳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그와 동시에 라파예트 뒤에 서 있던 호위들이 백작을 향해 살기를 드러냈다.
그러나 라파예트는 손을 들어 이들을 저지했다.
이제 모두가 소용없는 일이었다.
“당장 입을 여는 게 좋을 거요! 이제까지 무슨 일들을 획책해 왔…….”
고개를 기웃기웃하며 들어왔던 통로를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말릴 새도 없이 폴짝 뛰어 누군가를 향해 달려갔다.
이윽고 소녀는 두 손으로 열심히 끌어당긴 이를 모두의 앞에 데려다 놓았다.
“여기 있네요. 밝혀지지 않은 나머지 죄들을 말해 줄 사람들이에요.”
제 스승과 눈을 마주치기는커녕 외면한 채 들어오는 리안과, 그런 그의 뒤로 어두운 얼굴의 그레함, 할린, 제타가 뒤이어 들어섰다.
한 번도 살갑게 말을 건네기는커녕, 제대로 된 아들 취급도 해 본 적 없었던 서자의 등장에 백작의 눈이 흔들렸다.
살풍경한 장소 한가운데에 선 리안은 멍한 얼굴이었다.
갑작스런 리안의 등장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 대던 백작이 어느 순간 멈칫했다.
서자를 제자로 들이겠다던 몽캄 자작, 그런 자작이 요새를 탐내고 있다던 소녀의 말.
‘설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든 그가 이내 분노 가득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설마 나를 제거하고 이곳 요새를 저 아이에게……?”
“…….”
라파예트는 여전히 지친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해명도, 변명도 없는 그를 바라보며 백작이 피를 토하듯 말을 뱉어 냈다.
“하녀의 핏줄이오! 절반짜리 귀족에 불과한 서자에게, 어찌 이런 요새를 쥐어 줄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이오? 본인의 입맛에 맞는 이를 자리에 앉히고자 어찌 혈통과 명예, 명분조차 무시할 수가 있어!”
고작해야 빨래터의 하녀에게 하룻밤 흔들린 것조차도 치욕이었건만, 그 허드렛일이나 하는 하녀에게서 아이를 보았다는 사실도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렇기에 다른 귀족들 눈에도 띄지 말라며 이 변두리에 처박아 두었던 것이다.
그런 아이를 데려다 교육시키겠다는 말에도 반대하지 않았던 것은, 라파예트를 회유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너 말해 보아라! 몽캄 자작이 나를 죽이라더냐? 나만 제거하면, 네가 감히 내 핏줄이랍시고 이곳을 승계받을 수 있을 줄 알았어?! 정당한 후계자가 황도에 있다! 이곳은 너 따위가 넘볼 곳이 아니야!”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아비의 외침에 리안은 침묵했다.
애당초 그의 분노는 두렵지 않았다.
이곳에 와 참상을 살피고서야 알았다.
그가 진짜 두려운 것은…….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일이, 신념을 갖고 행했던 일이 실은 누군가의 거짓 농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존경하는 스승님께 그는 고작 장기짝에 불과했으며,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진작 알았더라면…….’
희생될 이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까.
가슴이 콱, 하고 막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