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
“…….”
“…….”
좁은 테이블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이 준비되기까지,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제타와 리안이야 라파예트라는 접점이 있으니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것이 분명했고, 나머지는 비록 말을 섞어 볼 기회는 없었어도 서로의 존재 정도는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
과묵한 양옆의 눈치를 보던 할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난데없이 갑자기 티 파티라니. 네가 우리를 이곳으로 부른 게, 정말 같이 차를 마시고 싶어서였니?”
찻주전자의 윗부분을 우아한 손놀림으로 닦던 도로테아가 생긋 웃었다.
“좋은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무슨 이야기를 나눈다는 거지?”
줄곧 침묵하고 있던 그레함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도로테아는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차를 아쉽다는 듯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제타.”
나지막한 부름에 제타가 움찔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온 얼굴에 ‘고뇌’한 흔적이 역력한 그의 눈 밑이 거뭇거뭇했다.
창백한 안색의 원인이 된 것을 품에 꼭 숨긴 채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곳에 우드 경이 계시리라 생각했는데.”
“아빠는 바빠요. 게다가 아빠가 움직이면 지나치게 많은 눈이 우리를 쫓게 되니까요.”
지난 며칠간 천둥벌거숭이처럼 굴었던 보람이 있는 것인지, 두 아이를 향한 감시의 시선이 막 성에 도착했을 때에 비해 사그라졌다.
그에 반해 우드에게 붙은 감시는 그 전보다 훨씬 많아졌지.
물론 일이 바쁜 것도 한몫했다.
어차피 덤터기를 씌우려고 맡긴 직책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전장에서 개죽음당할 이들이 가여워 기꺼이 멍에를 쓰는, 대책 없이 미련한 호구 같으니.
‘그러니 네가 안 된다고 하는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너를 내 곁에 두는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제가 부탁드린 것은 가져오셨을까요?”
“…….”
도로테아의 물음에 제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소녀의 눈이 남자의 불룩한 재킷 안쪽을 향했다.
가지고 있음에도 내어 놓지 않는 것은 아직도 그에게 망설임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억지로 다그쳐 꺼낸다 한들 의미 없으니,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스스로가, 꺼낼 수 있게끔 해 주어야지.
“오는 길에 조세핀 아르투아 남작 영애를 마주했어요.”
조곤조곤한 소녀의 말에 그 사실을 미리 들은 리안을 제외한 이들이 움찔했다.
도로테아는 제 곁에 앉아 온순한 눈을 끔뻑이고 있는 스탠을 토닥였다.
“일개 남작령의 영애가 성의 정원에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데도 제지하는 이들이 없다는 것은 꽤 놀랍던 걸요. 심지어 성내에서 절대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귀빈의 아이를 향해 망설임 없이 채찍을 휘두르기까지 했고요.”
그레함의 눈이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는 스탠을 재빠르게 훑었다.
다행히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도로테아가 굳이 이들을 모아 두고 거짓을 말할 까닭이 없으니 아마 좀 전의 말은 모두 진실일 터.
‘아르투아 남작 영애라.’
허드슨 블랑이 근방의 귀족들과 자주 어울린다는 사실 정도는 그들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 좋은 수완으로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영주의 신임이 있었더라도 이토록 빠르게 요새의 요직을 차지하지는 못했으리라.
“주변에 영애를 말리는 이가 없었던 모양이군.”
“그럼요. 도움을 요청하려고 보니, 멀찍이 보이는 기사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더군요. 영주님의 뜻인 걸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
“그녀를 귀빈으로 대하는 것은 허드슨 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리안의 말이 그녀에게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조세핀 아르투아와 허드슨 블랑은 제법 친밀한 관계에 있고, 그런 그녀의 도가 지나친 행동에도 병사들이 감히 제지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은 허드슨 때문임을.
“허드슨 경의 장악력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깊고 넓은 것 같아요.”
갑작스레 훅, 들어온 이야기에 쿠키를 집어먹던 할린이 사레가 들린 듯 요란하게 기침했다.
그런 동료를 바라보던 그레함이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요새 내에서 그 어떤 정치적인 세력과도…….”
“이미 관여하고 있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리고 당신은 그걸 알고 있었고.”
요새로 들어오기 전, 허드슨에게 험한 꼴을 당할 게 뻔한 탈영병들을 제타가 편히 보내 주려던 그때, 아주 공교롭게도 모두가 자리를 비웠더랬다.
스탠이야 생리 현상으로 부재한 것이니 그렇다 쳐도, 우드가 정찰을 나서는데 굳이 그레함까지 따라붙을 필요는 없었다.
“눈감아 주고 계셨지요. 계속.”
조그마한 소녀의 말에 그레함은 눈을 감고서 나지막이 말했다.
“정확히 하고픈 말을 해라. 빙빙 돌리지 말고.”
“여러분들은 ‘독전대(督戰隊)’죠. 탈영병들을 추격하여 다시 성으로 호송해 오는 역할을 하는. 허드슨은 그런 이들을 인계받아 처벌해 왔고요.”
말만 처벌이지, 혹독한 고문과 끔찍하고 잔인한 일들이 자행되었을 터.
죄인의 이름으로 다시 성으로 돌아온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영주는 악마에게 모든 권한을 넘긴 채 뒷짐을 졌다.
탈영병을 변호하는 병사들은 그에 준하는 불이익을 염려하여 입을 다물고, 허드슨은 죄수들을 ‘처벌’함으로써 이 요새를 공포로 물들여 장악했다.
이매망량 따위보다 더 무서운 인간이라니.
“용건.”
짤막한 그레함의 재촉에 도로테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실례지만 귀하 부대의 전적을 알아봤어요. 처음에는 빠르게 탈영병들을 생포해 왔는데 그 뒤부터는 실적이 엉망이더군요.”
죄를 저지른 탈영병들을 제압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부득이하게 즉결 처분.
인계 과정에서 죄수들의 행방이 묘연해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제타의 손이 움찔했다.
“생각해 봤는데, 이번에 현장에서 바로 그러지 못한 건 저와 스탠 때문이었죠?”
돌아가면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게끔 배려하는 뜻에서 목숨을 거두려 했어도, 아이들 앞에서 그리할 수는 없었기에.
“그렇다면 감옥에 있을 때 목숨을 거두거나, 아니면 이번만큼은 그냥 뒀어야 할 텐데요. 요새 내에서는 보는 눈이 많을 테니. 그런데 어째서, 굳이 들통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탈영병들을 빼돌렸을까, 궁금해지더라고요.”
순간 그레함이 침묵하고 있는 제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가 최근 누구와 접촉하는지는 알고 있었을 테니, 탈영병을 빼돌려 어디로 데려갔을지도 눈치챘겠지.
도로테아는 그레함의 생각이 결론으로 이어지기까지 기다리는 대신,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생각해 보다가 깨달았어요.”
깊고 짙은 새까만 눈이 곱게 휘어졌다.
“병사들을 데려간 것은 라파예트 경의 뜻이었겠구나.”
“……!”
“그리고 하나 더.”
도로테아는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독전대는 요새 내 다른 병사들에게 배척받고 있고, 리안은 아버지의 신임을 받지 못해 병력들 가까이 접근할 수 없죠.”
우드는 이제 막 징집되어 온 오합지졸과, 남은 패잔병들을 떠맡았을 뿐이다.
“자, 그럼 여기서 질문입니다. 현 요새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부류는 누구일까요?”
“그거야…….”
할린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 눈을 크게 떴다.
“무기는 얼마나 지급되었는지, 군량은 어느 정도 주어지는지, 병사들의 사기는 어떤 상태인지.”
그레함의 눈빛이 더욱 가라앉은 것과는 달리 놀라 제타를 바라보던 할린이 고개를 테이블 위로 푹, 박았다.
“이런 미친.”
아무리 눈치가 없는 그라 해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한 것이다.
“라파예트 경이 날을 결정하셨군요.”
꾸벅꾸벅 졸면서 반쯤은 흘려듣던 스탠이 제 누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봉기(蜂起)를 결정했다는 폭탄 같은 말에 다들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다.
도로테아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이 놀랍고도 경악스러운 사실들을 그레함과 할린이 받아들이기를 기다렸다.
“너, 너……!”
차분한 그레함과는 달리 입을 쩍 벌린 할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동료를 향해 삿대질했다.
침묵 끝에 제타가 결국, 도로테아의 ‘추측’을 모두 인정하듯 나지막이 답했다.
“거사가 무사히 성공하거나, 혹은 실패로 돌아간다 해도 우드 경에게 큰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게다. 오히려 이대로 요새가 허드슨의 손에 쥐락펴락되는 상황이 이어지면, 우드 경이 위험할 게야. 카메르 백작은…….”
“알아요.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하여 떠넘기고 덮어씌우려 직책을 넘겼다는 사실 정도는.”
도로테아의 말에 할린이 뜨악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그걸 알면서도 너는 대장을, 아니, 우드 경을 안 말렸어? 그리고 우드 경은 무슨 생각으로 그걸 받아들인 거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스탠을 제외한 이들 모두가 착잡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침묵하고 있던 그레함이 입을 뗐다.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리려고 이곳으로 불렀나? 무모한 계획이니 저지하라고?”
도로테아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명색이 티 파티인데 사람이 너무 적으면 외롭잖아요. 기왕 초대할 거라면 친한 이들끼리 함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한 도로테아가 쿠키를 집어 들었다.
입안에서 부스러지는 바삭, 소리가 고요한 방을 메웠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피곤한 듯 눈두덩을 문지른 제타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몹시 두터운 장부였다.
“이게 뭐야?”
할린의 날이 선 물음에 제타가 담담히 답했다.
“우리가 이곳 요새로 합류한 뒤, 사망한 병사들의 목록.”
장부 안쪽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하게 새겨진 이름들이 가득했다.
죄를 지어 처형된 이들도 있었지만, 훈련 중의 부상이 덧나 죽은 이들도 상당했다.
물론 허드슨이 영주의 눈에 띠게 된 결정적인 계기나 다름없는 첫 전투에서 가장 많이 사망자가 나왔지만.
“감사합니다. 잃어버리지 않게 잘 쓰고 돌려 드릴게요.”
도로테아는 제 몸통만 한 두꺼운 장부를 두 팔로 안은 채 예의 바르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걸로 뭘 하려고?”
물음을 던진 것은 할린이었지만, 사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모두가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도로테아는 답을 하는 대신 빙긋 웃었다.
그레함이 질문을 바꿨다.
“정말, 이 모든 것을 우드 경이 요청하신 건가? 오늘의 이 자리도, 그 전의 라파예트 경께 건넸던 그 무례한 말들도?”
아니, 애초에 그 전부터.
애초에 우드는 정말로 후작의 지시를 받고 이곳에 온 건가?
모두의 시선이 아이 같지 않은 의뭉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녀에게로 향했다.
깊은 잠에 빠진 소년과는 다르게 어딘지 알 수 없는 묘한 ‘오라’를 뿜어내는 소녀에게.
“가뜩이나 생각할 것이 많은 분들이시잖아요. 그리 아시는 편이 속은 편하시겠지요.”
활짝 웃은 도로테아가 덧붙였다.
“진실이 무엇이든 크게 상관없어요. 제가 아빠를 위해 일하든, 아빠가 저를 위해 일하든.”
우리 두 사람의 뜻이 같으리라는 것이 중요하죠.
결국 그녀는 ‘사망자들의 이름’이 적힌 장부로 무엇을 할 생각인지 답하지 않았다.
* * *
제법 거칠게 열린 문 너머로 서늘한 바람이 섞여 들어왔다.
그와 함께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우드가 지친 듯 털썩, 의자에 등을 기댔다.
“왔니? 갔던 것은 잘되었고?”
한가로이 침대에서 무언가를 뒤적이고 있던 도로테아의 말에 그제야 그가 고개를 돌려 소녀를 응시했다.
“뭘 보고 있는 거지?”
거칠게 쉰 목소리로 묻는 말에 도로테아는 친절히 웃으며 답해 주었다.
“요새 내 사망자 명단.”
“그건 또 왜.”
“고민해 볼 것이 있어서.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죽었더라.”
“…….”
두꺼운 장부를 보는 우드의 눈이 씁쓸한 빛을 띠었다.
지금의 영주가 무능하며 허드슨에게 지독히도 기대고 있다는 사실도, 허드슨의 공포 정치로 아랫사람들이 경직되어 요새로서의 기능이 거의 마비된 상태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니 이 상황을 뒤집어엎을 만한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승산은 있어 보이든?”
“주변의 영지 절반 가까이가 라파예트 경을 지지하기로 약조했더군. 사병을 보내겠다는 영지도 있었다.”
“허드슨을 지지하는 영지도 있잖아?”
“아르투아 말이냐?”
“아마 허드슨은 라파예트 경보다 더 좋은 조건을 걸었을걸? 예를 들자면 지속되는 전투로 ‘사병’을 빼앗길 위험을 염려하는 영주들에게 안심할 만한 각서를 써 주었다거나.”
“…….”
“오히려 라파예트 경을 지지한 영지들을 삼켜, 그 손익을 나누자는 제의를 했을 수도 있겠지.”
라파예트 경을 지지하는 자들은 변경백과 함께하던 옛 영광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실리에 눈을 떠 허드슨의 손을 잡은 이들보다 덜 교활하며 순진한 면이 남아 있지.
“승산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야. 라파예트 경이라 해서 그리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다.”
“알아. 그러니 일을 이렇게 키웠겠지.”
이토록 많은 이들이 죽을 동안, 병사들이 하나둘 허드슨에게 반감을 가지게 될 동안.
지금은 공포에 짓눌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공포 정치라는 것이 그러하듯 마음속의 공포가 걷힐 계기가 주어진다면 상황은 바뀐다.
상대를 향한 증오와 어마어마한 분노가 폭발할 계기가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록 방치한 것도 그 때문이겠지.”
우드가 불편한 얼굴로 일어서서 소녀가 뒤적이던 장부를 빼앗아 들었다.
성조차 적히지 않은 존, 톰, 따위의 평범한 이름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는 페이지를 덮자, 소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합류하려고?”
“그럴 리가 있나.”
우드가 나직이, 그렇지만 단호하게 답했다.
당장 실종된 변경백을 찾을 상황은 묘연하다.
영주가 비록 많은 부분에서 무능하고, 그런 무능함을 부추기는 허드슨을 당장이라도 치워 버려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장 점령하는 것에 찬성할 수는 없었다.
이미 자대 배치를 받은 병사들이라면 모를까, 그가 가르치는 명확한 소속이 없는 병사들은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희생될 존재들이기도 했고.
“차라리 사령부에 이 상황을 알리는 것이…….”
“너무 늦어. 게다가 저쪽은 연합군이라, 타국이 제국 내 사정을 알게 되는 셈인데 폐하께서 좋아하실 리 없지.”
제국에게도 지나친 손해가 될 것이다.
국제 정세에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
이쪽이 약점을 드러내면 이를 드러내 물어뜯을 이들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니.
“마음에 걸리는 건 허드슨이다. 여러 번 머릿속에서 앞으로 벌어질 전투를 그려 봤지만, 현 영주의 사병이나 그쪽 휘하에 있는 병사들로는 봉기를 막지 못해.”
라파예트의 방법은 비록 꺼려질지 몰라도 효과는 분명했다.
병사들 사이에서 그의 악명은 높았고, 영주에게 가진 기대는 미미했다. 이 상황에서 봉기가 일어나면 절반 이상은 허드슨에게 이를 드러낼 터였다.
“뛰어난 기사도 홀로 모든 고난을 해결할 수는 없는 법인데, 분명 자신에게 화살이 겨누어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여유로운 자신감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군.”
우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도로테아가 창가로 향했다.
“저 장부에 적힌 수많은 병사들은 아마도 쉬이 눈을 감지 못했을 거야.”
“…….”
“보통 귀(鬼)라는 건 원과 한을 품고 차마 이승의 미련을 떨치지 못한 탓에 육신 없이 이곳에 머물게 되는 거야. 어떤 혼은 터에 매여 있기도 하고, 남은 미련으로 사람에게 붙기도 하며, 혹은 갈 곳이 없어 떠돌기도 하지.”
“……?”
뜬금없이 귀가 뭔지 설명하는 도로테아의 말에 우드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창가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평소에 비해 날이 서 있었다.
“성을 감싼 공기가 불온한 사기를 이토록 많이 머금고 있는데, 막상 맴돌거나 붙박이가 된 죽은 자의 혼은 보이지 않는다니 이상한 일이잖아?”
더군다나 수호(守護)의 특성을 띤 성채에 응당 존재해야 할 성주신의 흔적이 요새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머저리 같은 대주(垈主)여도, 정식으로 요새를 물려받은 적장자란 말이야.”
그런데 성주도, 귀도 보이지 않는 요새라니.
“말이 되질 않거든.”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함께 달빛에 비친 도로테아의 눈이 요요히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