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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80화 (180/242)

180화

“저희가 요새를 내주고, 이곳까지 떠밀리듯 오게 되었을 때.”

제타가 입을 열었다.

“카메르령으로 허겁지겁 밀려든 병사들은 아군뿐만이 아니었습니다.”

“…….”

“치열한 싸움으로 양측 모두 피해를 입었지만, 변경백과 7황자 전하의 실종은 저들에게 기회였을 테니까요. 큰 손해를 감수하며 히사르 요새를 함락시켜 남은 병력이 많지 않았음에도, 이 근방까지 진격해 왔습니다.”

“카메르 백작은?”

힘겨운 전투 끝에 간신히 승기를 잡은 뒤 제대도 정비조차 하지 않은 채 진격한 군이, 예비 병력들이 상주해 있는 이곳을 쉽사리 함락시킬 수 있을 리 없었다.

정신만 차리고 있었어도 쉽게 격퇴했을 텐데.

영주와의 대면을 떠올린 우드는 일이 그리 쉽게 풀리지 않았을 것임을 직감했다.

“카메르 백작은 변경백의 무책임함에 자신이 뒷수습을 해야 한다며 펄펄 뛰었지요. 그리고 장비를 제대로 갖춘 자신의 사병들과 기사들 대신, 전투에 패배하여 이곳까지 겨우 다다른 우리를 다시 전장으로 내몰았습니다. 성벽 아래, 개방된 문 앞으로.”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이들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기세를 올린 적군이 밀려들 때, 겁먹은 영주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손을 놓았다.

“허드슨이 도륙을 시작한 것은 그때였습니다. 그제야 알았지요. 줄곧 힘을 비축하던 작자가 어째서 그때 날뛰기 시작했는지.”

그래야 영주의 신임을 쉽게 얻을 수 있으니까.

어수룩하고, 겁이 많으며, 책임지기 싫어하는 영주에게서 ‘마음대로 날뛸 수 있는’ 권한과 이 요새를 자기 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전권’을 부여받고자 했겠지.

그때만 하더라도 그만한 무위를 지닌 존재가 요새에 없었을 테니, 영주로서는 눈이 번쩍 뜨였을 밖에.

“영주는 그자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허드슨의 말이라면 아무리 헛된 이야기라도 철석같이 믿었죠.”

전투와 지휘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걸 모르는 작자가 한 영지의 책임자라니.

그의 무능은 그동안 주변 영지들이 히사르 요새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변경백이 조금 덜 유능했더라면.’

그동안의 안온함에 기대어 무능해진 영주들이 드러날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황도와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세세한 보고를 받기에는 너무 많은 이들의 손을 거치는 것이 문제였다.

‘썩 유능한 아비는 아닐지라도, 황제는 상황의 경중을 알아. 저들의 작위를 박탈하고 봉토를 회수하여 적절한 이에게 다시 내렸을 거야.’

대화를 듣고 있던 도로테아의 눈이 술통을 향했다.

제 스스로 자루 안에 들어가길 자처한 자들의 공포감이 그녀가 있는 곳까지 와 닿았다.

인간이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느끼는 것이 가능한가.

‘적어도 허드슨 블랑은 저들을 그렇게 만든 모양이지.’

간혹, 태어날 때부터 무언가 결핍된 것처럼 갈구하며 사는 인간들이 있다. 스승은 그런 자를 일컬어 겁재, 혹은 편재를 타고난 자라 말했었다.

스스로 가진 정이 부족하여 타인의 강력한 감정들을 통해 그 파편을 느끼고 살아가는 자들.

그렇기에 눈에 가장 드러나는 공포감, 두려움, 고통 등 강렬하고 부정적인 감정들을 끌어내고, 또 그것을 통해 제 허함을 채우려 드는 자들.

허드슨의 혼은, 스펀지처럼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군데군데 비어 있던 혼을 채우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타인에게서 끌어온 생기일 테지.

남에게서 빼앗아 온 생기는 육신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허공에 흩날리기 일쑤일 터.

그러니 탐하고 또 탐해도 늘 허할 수밖에.

시선을 술통에 고정한 도로테아를 본 제타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린아이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하물며 할 말 못할 말 분간 못 하는 아이가 알아서도 안 될 일이고요. 오늘은 돌아가시지요. 내일 제가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간절한 말에 우드가 가만히 도로테아를 안아 들었다.

그녀는 멋대로 주인을 옮기는 권속의 행동에 불만을 토로하는 대신 얌전히 안긴 채, 멀어져 가는 복면인들을 꼼꼼히 지켜봤다.

수레 안에 실려 있는 자들은 독하게도 작은 기척 한 번 내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 안에서 숨을 죽인 채 이 순간을 힘겹게 견디고 있을 뿐.

‘살고 싶은 게로구나.’

애초에 군에서 도망친 것도 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하루, 연명하듯 이어 나가던 전장 생활을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언제라도 개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짓눌리다 못해 자신의 삶이 너무나도 덧없게 느껴져서, 언젠가 다가올 수 있는 죽음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도망치는 것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살의가 깃든 몸은 피를 보기 시작한 이상 적당히 끝낼 수가 없었을 터. 그 결과 약자들을 수탈하고 학살하는 것으로 이어졌겠지.’

괴물이 된 스스로를 알면서도 다시 도망치는 까닭 또한 너무나도 분명했다.

그럼에도 살고 싶기에.

이미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진 이들이 향한 쪽을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입을 뗐다.

“변경백이라는 작자는 어째서 허드슨을 내버려 두었지? 그 자의 성질일랑, 함께 전장을 누볐다면 모를 수가 없었을 터인데.”

“그자는 강자에게 만큼은 복종했으니까.”

백작이 곧 그의 목줄이었다.

어째서 그 위험성을 모른다 할 수 있었겠는가.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고통 속에 들이밀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잔학성은 가히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곳은 전장이었다. 그자의 그런 면이, 필요했어.”

모든 것이 부족했다.

매일같이 죽어 나가는 아군과, 끝이 없이 몰려드는 적군들.

오늘의 승전에 안심할 수 없는 내일의 전투가 이어지기를 반복하다, 그 어느 순간부터는 희망을 잃어 갔다.

“사기를 돋워 주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적의 수를 줄여 주기는 했다.”

배를 잔뜩 곯아 무기를 들 힘이 없어도 발을 질질 끌어 가며 나가야 하는 전투에서, 누군가 앞서 날뛰어 줄 미친놈이 있다면 그것만큼 도움이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 악마의 자식이라 해도 기꺼이 손을 잡은 거다. 그 악마가 어떤 천성을 지니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어.”

“목줄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말이지.”

“…….”

변경백도, 7황자도 없는 지금 목줄이 사라진 허드슨은 제 본색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그래서 성이 이 모양이었구나.”

그토록 짙은 고통과 한을 가두고 있는 성에, 어째서 떠도는 객귀들은 이토록 적은 것일까 의아하게 여겼건만.

‘살아 있다’는 사실이 끔찍할 만큼 고통받은 이들은 온전하게 혼을 보존하지도 못 할 만큼 닳고 닳아, 죽은 후에도 망가진 채 성 아래 깊은 곳에 침전해 있기 때문이었다.

이 성 전체가 인간의 고통과 절망 위에 세워진 거대한 무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우드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서렸다.

단순히 실종된 자들을 찾아내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사라진 빈자리에 채워 넣을 마땅한 인재가 없어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문제들이 그의 머릿속을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여기가 제 기능을 못 한다면, 히사르 요새를 다시 탈환하고자 전방에 자리 잡은 본대도 위험해질 거다.”

그곳에 있는 하이클레어 후작 또한.

뱉지 못하고 삼켜 넣은 말을 읽어 낸 도로테아는 말없이 우드의 어깨 위에 얼굴을 묻었다.

*   *   *

다음 날 늦은 저녁, 우드의 방을 찾은 건 제타뿐만이 아니었다.

도로테아가 ‘히사르 요새의 생존자’들이 모여 있던 곳에서 봤던 한 젊은 남자. 말쑥한 차림새와 어딘가 이질적인 분위기를 내뿜던 그 청년이 정식 기사복을 입은 채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쪽은 리안. 이곳 요새의 기사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허드슨이 관리 중인 죄수들을 쉽게 빼돌렸다 했더니 내부자가 있었군.”

청년이 움찔했다.

‘내부자’란 말이 거슬렸던 것일까, 아니면 ‘허드슨’이라는 이름이 거슬렸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간에, 그의 얼굴에 스치듯 지나간 부정적인 감정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사라졌다.

감정을 갈무리하는 능력이 제법이라 여긴 듯 우드가 눈에 이채를 머금고 청년을 바라봤다.

“그는 카메르 백작의 서자이기도 합니다.”

“……!”

“아시다시피 카메르 백작의 본처와 적자는 황도에 있지요.”

공적을 챙겨 주려고 데려왔다기에는 차림새가 좀 부족해 보였다. 남루하진 않지만, 한 요새의 책임자인 백작의 아들이라고 보기에는 좀 부족해 보인다고나 할까.

백작의 아들이라.

물끄러미 바라보는 우드의 시선에 청년이 어색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바람에 흩날리는 커튼 아래로 조그마한 두 발이 쏙, 내려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기…….”

난처한 듯 손가락을 내밀어 조그만 두 발을 가리키자, 성큼 성큼 창가로 다가선 우드가 커튼을 홱 밀어젖혔다.

숨어 있던 도로테아는 발각이 되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 달랑 들어 올린 우드가 한숨을 쉬었다.

“스탠과 함께 있으랬지.”

“오빠는 지금 명상 중이라.”

“너 또 그 아이를 재운 게냐.”

“명상 중이라니까?”

그것도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온몸에 활력이 솟는 효과 만점의 명상이다.

길몽을 꿀 수 있게끔 특별히 기원까지 해 주었건만, 어찌하여 이토록 흉한 표정을 짓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숨을 쉰 우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

우드가 아이를 방에서 내보낼 생각이 없어 보이자 제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내보내지 않으실 겁니까?”

“어차피 내쫓는다고 순순히 쫓겨날 아이도 아니라서. 어디 가서 말을 흘리고 다닐 녀석은 아니니, 계속 말하지.”

“그렇지만…….”

머뭇거리던 제타가 도로테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그간 정신이 없어 미처 챙기지 못했기에 넘어갔지만, 저 어린 아가씨에게는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영민해 보이는 새까만 눈동자가, 그를 향해 곱게 휘어졌다.

‘분명 평범한 아이는 아니야.’

그렇지만 말 한마디에 수십, 수백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이상 제타 또한 신중을 기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라파예트 경은 이번 작전에 우드의 존재가 중요한 열쇠라고 말했었다. 계획이 성공하고 나면, 뒷수습을 할 때 그의 ‘뒷배’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우드는 분명 눈앞의 소녀를 그 누구보다 아끼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제타는 결국 도로테아를 내보내라 권하는 대신, 좀 전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저희는 오래도록 이곳 영주의 과실을 증명할 수 있을 만한 증거들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군의 관리, 요새의 군자금 문제 및 병사들을 향한 고문에 가까운 혹독한 처벌까지.”

제타의 말에 우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영주의 과실이라.

귀족 재판에서 책임자의 ‘무능함’은 처벌의 근거가 되기 어렵다.

특히 제타가 입에 올린 병사들의 관리 문제나 군자금의 쓰임새, 병사들을 향한 혹독한 처벌의 문제는 개인 재량이 부족하다는 손가락질이야 받을지 몰라도 책임을 묻기엔 어려울 터인데.

“고발은 저쪽의 꼬맹이가 할 예정인가?”

“제 이름은 리안입니다.”

발끈한 듯 그렇게 대꾸하는 청년의 눈은 맑고 정직했다.

적자인 형제를 대신해 이곳까지 끌려올 정도면 가문에서 그리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을 텐데, 기가 죽기는커녕 바른 길을 가려 하는 것은 기특하지만…….

“재판에서 이기기 힘들어질 거다. 심지어 서자가 제 아비를 고발한다면, 보수적인 판사들에게는 오히려 이쪽을 꺼리게끔 만드는 원인이 될 터.”

“평판을 어지럽히긴 할 겁니다. 황도의 귀족들은 이곳 사정에는 관심이 없으니까요.”

‘이렇게 정치적인 식견이 높은 분이었던가.’

몇 마디의 말로 상황을 단번에 파악해 내다니.

제타는 순간 눈앞의 남자에게서 몹시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

과거에 알던 상관은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굽히지 않고, 대범한 인물이긴 했지만, 이토록 넓은 시야와 깊은 생각을 갖추고 있지는 못했다.

‘무위의 경지만 높아진 것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가 성장했다.’

후작의 영향력이 이토록 뛰어났던가.

생각에 잠겨 잠시 말이 끊긴 사이, 앳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재판에서 이기지는 못해도 여론을 흔들 생각이시지요? 적어도 요새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는 ‘인식’을 심어 주면, 다음 대의 후계자를 승인하는 폐하께서도 사람을 보내어 상황을 확인하실 테니까. 그러면 최소한 계승권에 영향은 끼칠 수 있겠네요.”

도로테아의 맑은 목소리가 그들의 계획 일부를 정확히 짚어 내어 읊어 주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우드가 리안에게로 다시 눈길을 건넸다.

“그렇군. 계승권을 가져오겠다는 이야기였나.”

“어린 꼬마 아가씨께서 몹시나 영민하시군요.”

제타의 칭찬에 도로테아가 생긋 웃음 지었다.

“과찬이세요.”

리안은 지나치게 어른스럽고 똑똑한 도로테아를 꺼림칙하다는 듯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기나긴 대화 끝에 제타가 겨우 본론을 꺼냈다.

“저는 우드 경께서, 중앙 귀족들과의 친분을 이용해 여론을 흔드는 데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여론전에서 힘을 써 달라는 청탁에 우드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하다못해 황도에 머무르고 있는 펠릭스 소후작께서 폐하께 나아가 리안의 이름을 언급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귀족들은 태도가 바뀔 테니까요.”

현실이 아무리 불공정하게 느껴져도 인정해야 했다.

이토록 오랜 공을 들였어도, 그들의 노력은 후작이 짬을 내어 쓰는 추천서 하나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

“당장 답을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결심이 서신다면 언제고 저희를 찾아 주십시오.”

“그레함 아저씨랑 할린 아저씨도, 같은 입장이에요?”

불쑥 꺼낸 물음에 멈칫했던 제타가 씁쓸하게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 두 사람은…… 이 일을 모릅니다. 위험 부담이 큰 일이니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겠지. 자칫 영주 측에서 눈치라도 챘다가는 일이 틀어질 수 있는 일이니.

“그런데 아빠한테는 쉽게 권하네요? 심지어 황도의 귀족들을 움직여 달라는 청을 하면서?”

문을 열고 나가려던 제타가 도로테아를 보다 눈을 내리깔았다.

영민해 보이는 소녀가 오늘따라 자신을 묘하게 탐탁지 않아 하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 기우는 아닌 모양이다.

제 아비를 향해 위험한 청탁을 한다고 여긴 탓일까.

아이를 안정적으로 품에 안고 있는 우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타가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생각했던 재회와는 달랐지만, 뵙게 되어 반가웠다 말씀드리는 것을 잊었습니다. 못 보던 사이에 많이 바뀌셨군요.”

“너 또한.”

“자식을 품어 키운 덕분일까요. 완연한 ‘아버지’의 모습을 띠는 지금이 저는 보기 좋아 보이는군요. 전장에서 날뛰던 짐승 같은 모습보다는 훨씬.”

탈영 직후 복수하겠답시고 떠났다가 웬 어린애에게 코가 꿴 채, 자식새끼는커녕 사랑하는 여인도 만나지 못한 채 구르기만 했던 우드의 얼굴이 굳었다.

과거를 회상하는 제타의 목소리가 아련해졌다.

“한편으로는 아쉬운 것도 있군요. 그때의 당신이었더라면 뒷일을 생각하는 대신 영주의 재수 없는 얼굴을 바닥에 처박아 그대로 짓이겨 버렸을 텐데요.”

픽, 웃고는 닫힌 문 너머로 유유히 사라지는 제타의 발소리를 듣던 우드는 안고 있던 도로테아를 재빠르게 품에서 떨어뜨렸다.

“완연한 아버지의 모습이라니. 내 어디가?”

“노총각처럼 보인다는 말보다는 낫잖니.”

위로라도 하듯 손을 뻗어 토닥이는 행태에 우드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도로테아는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그를 바라보다 이내 자리에 앉아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말 나온 김에 사용인을 불러 차를 한잔 내어 오라 전하렴. 이참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새끼에게 봉사 좀 해.”

죽을 때까지 효도는커녕 자식에게 봉사만 하며 살다 가게 생긴 우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인생 참 덧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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