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다음 날 아침.
근육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몸을 질질 끌고서 훈련장으로 향했던 병사들은 몹시도 괴상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을 잃었다.
어제 단신으로 수십의 병사를 바닥에 뒹굴게 만들었던 무패(無敗)의 기사가…….
“저기 몸에 두르고 있는 거…… 밧줄이지?”
조그만 여자애를, 줄로 묶어서 자기 몸이랑 연결시켜 놓은 거지?”
“자기 딸을?”
훈련 도중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체력을 기르란 과제만 내주고 박차고 나갔던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번화가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덕분에 어제 옆구리에 어린아이 둘을 낀 기사가 성내를 질주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아이들이 사라져서 놀란 마음이야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
병사들 또한 대부분이 어린 자식을 낳아 기르는 가장이었으니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아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걱정하는 마음이야 이해를 하지만…….
‘기르는 짐승처럼 밧줄로 묶어 데리고 다니다니?’
심지어 소년은 내버려 두고서, 얌전하게 한쪽 구석에 앉아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소녀를 밧줄로 묶어 둔 것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녀는 향긋한 차를 음미하듯 홀짝이며 사용인이 가져다준 달콤한 과자를 한 입 베어 문 채, 은은한 미소와 함께 제 오빠옆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어린아이치고 몹시 의젓해 보이는구만!’
‘너무 의젓해서 제 오빠를 마치 귀여운 동생처럼 바라보고 있지만!’
굳이 묶어야 한다면 이 나이 즈음 활동량이 폭발적일 소년을 묶어야 할 것이 아닌가.
우드는 자신을 향한 무수한 의문 어린 시선에도 해명 한마디 없이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알다시피 첫 훈련을 시작할 예정이다. 어제 체력 훈련의 여파로 과도한 운동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테니, 우선 체형과 근력 및 민첩성을 시험해 각자에 맞는 자세와 무기를 부여하지.”
“그, 줄을 묶은 채로요?”
아무리 그래도 허리춤에 있는 줄은 풀어야 훈련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에 우드가 눈썹을 들어 올린 채 대꾸했다.
“어차피 내가 이 자리에서 움직이게 될 일은 없을 테니 상관없다.”
명백히 병사들의 수준을 얕잡아 보는 발언에 몇몇이 발끈한 듯 주먹을 쥐었다.
우드는 제 말을 증명해 보겠다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하나씩 차례로 나오도록. 너희들을 크게 네 개 집단으로 분류할 생각인데, 분류를 하려면 일단 시험부터 치러야겠지.”
쭈뼛쭈뼛 다가선 병사에게 가벼운 목검이 주어졌다.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을 보이도록.”
우드의 말에 머뭇거리던 그가 이내 결심한 듯 목검을 든 채 달려들었다.
* * *
쿠당탕!
둔탁한 소리와 함께 병사가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어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광경이었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찍어 누르듯’ 상대를 제압하던 어제와는 달리 일부러 여러 번 합을 맞추며 여러 움직임을 유도하고 있다는 정도일까.
수많은 병사를 상대하다 보면 숨소리가 거칠어질 법도 하건만, 우드의 얼굴에는 땀방울조차 맺히지 않았다.
“사라, 아빠 대단하지 않아?”
“대단하지.”
저걸 권속으로 둔 내가 참으로 대단하다.
비록 주인에게 순종적이지 않고, 때때로 반항하는 데다, 불손한 태도까지 보이지만 한 번도 벌한 적 없는 관대한 주인이었다.
심지어 이렇게……
“아빠, 힘내세요!”
귀여운 딸아이 노릇도 해 주고 있지 않은가.
도로테아의 외침이 들리기가 무섭게 마지막 병사를 상대하고 있던 우드가 주르륵, 검을 놓쳤다.
“저런.”
잘하다가 왜 삐끗했대?
내가 이렇게 기를 모아서 응원해 줬는데.
가만히 지켜보던 도로테아가 김샌 얼굴로 빈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그녀의 옆에 앉아 불안하게 우드를 살피던 스탠은, 아빠가 재빠르게 일어나 상대를 제압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소년의 눈에 감탄이 서렸다.
1차 분류가 끝이 나고, 네 부류로 나뉜 병사들에게 몇 가지를 당부한 우드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섰다.
“수고하셨어요!”
용기를 낸 스탠의 말에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준 우드가 ‘물을 가져다 달라.’라는 부탁을 건넸다.
상기된 얼굴로 심부름을 하러 떠난 소년을 흘끗 바라본 도로테아가 물었다.
“의외로 의욕이 넘치는걸? 널 곤란하게 만들 생각에 앉힌 자리라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저대로 전장에 나가면 저들은 모두 쓸데없는 희생양이 될 거다. 기본도 가르치지 않고서 등을 떠밀어 보낸다면 죽을 자리에 밀어 넣는 것밖에 더 될까.”
귀족들이 전투에서 일반 보병들을 ‘사용하는’ 방식은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굴러 온 그가 누구보다 제일 잘 알았다.
뼈아픈 패전을 겪든, 눈앞에서 분통을 터뜨리든 간에 그들의 인식은 바뀌지 않는다.
보병은 ‘쓸 만한 물건’이 아니라, 언제든 교체할 수 있는 ‘소모품’이니까.
“최선을 다해 가르쳐서 성과를 내면 그 결과는 영주의 것이 될 테고,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패전을 하면 그 책임은 네게 주어질 텐데?”
“공을 얻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냐. 저들이 다 죽는 걸 알면서도 방관하느니, 무엇 하나라도 쥐여 주는 것이 마음 편해서 하는 일이지.”
“글쎄.”
도로테아는 빈 찻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나른한 얼굴로 몸을 뒤로 기댔다.
“이렇게 해야만 네 마음이 편해진다니, 나로서는 사서 고생을 하는 네 꼴이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지만…….”
고개를 들어 우드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차피 당분간 이곳에 머물러야 할 터이니 네가 하고픈 것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지.”
“이곳에 머무른다고?”
“상대해 보니 알았을 것 아니니. 이곳에 있는 병사들의 상태를. 한쪽은 이상할 만큼 기가 죽어 있고, 다른 쪽도 불안과 의심이 가득해. 아무리 굴러온 돌이 껄끄럽다고 한들, 이건 좀 분열이 지나치지.”
어차피 전장에 나가 함께 싸우게 될 이들이었다.
텃세 정도는 있을지 몰라도 그 이상 날을 세우면 서로가 손해라는 사실을 대체 누가 모를까.
본디 훈련을 몇 번 거치다 보면 자연스레 흡수되어야 하는 것이 섭리였다.
“누군가가 뒤에서 손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나?”
“글쎄.”
병사들의 어깨 위로 들러붙은 새까만 사기가 넘실거렸다.
부정한 기운에 닿는다 하여 다들 미쳐 날뛰는 것은 아니다.
사자(死者)가 생인(生人)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드물거니와, 이렇게까지 영향을 미치려면 오랜 기간 동안 매우 잦게 사기(邪氣)에 노출되었어야 했다.
“수백이 죽어 나가는 전장에서라면 익숙할지 모르나, 이들 중 절반은 아직 전쟁을 겪지 않았어.”
그러니 분명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게지.
“훈련을 계속해 나가면서 저들 사이의 유언비어를 수집해 보렴.”
“…….”
“헛소리에 불과한 것들이지만, 사람들의 입을 타는 이야기들 사이에는 교묘하게 진실이 숨어 있는 경우도 많으니까.”
우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다가온 스탠이 찰랑찰랑 물을 채운 잔을 내밀었다.
자신을 향해 반짝이는 두 눈을 보며 물 잔을 받아 든 우드가 나직이 고맙다, 고 답했다.
“저 열심히 배울게요.”
“……검을 배울 생각이냐.”
“네, 그래서 사라를 지켜 줄 거예요.”
제법 다부진 답에 물끄러미 소년을 내려다보던 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테아가 곁에 있다고는 하나, 이런 난세에 제 한 몸 정도는 지킬 줄 알게 된다면 소년에게도 큰 도움이 될 테지.
무엇보다도 병사들 사이에서 떠도는 유언비어나 이상 현상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친근하게 다가설 계기가 필요하기도 했고.
‘순진무구한 아이만큼 경계심을 늦추는 것이 없으니.’
“내일부터 훈련에 합류해도 좋다.”
“네.”
기쁜 듯 손을 꼼지락거리는 소년의 어깨를 다독여 주는 사이, 단단히 묶인 줄을 홀연히 풀고 유유히 빠져나가는 도로테아를 본 병사가 감탄했다.
“거, 아이가 빠져나가는 데에 도가 텄구만.”
“자식새끼 키우는 게 저렇게 힘들다니까.”
* * *
한밤중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푹신한 침대에 곤히 잠들어 있던 도로테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성에 도착한 지 며칠째.
사방에서 들려오는 사자(死者 : 죽은 자)의 비명 소리는 도통 근원을 알 수가 없었다.
성채를 가득 드리운 탁기(濁氣)가 그러하듯, 너울거리는 기운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넓고 촘촘히 퍼져 있었다.
마치 그물처럼.
맨발로 창가로 다가선 그녀가 어린 몸으로 가볍게 폴짝 뛰어 창틀 위로 올랐다.
새까만 어둠 아래 꿈틀거리는 무엇인가를 따라 수풀이 움직였다.
“유언비어라고 해 봤자 특별한 것은 없었다. 죽은 자들의 혼이 운다느니, 가끔 밤중에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수풀이 흔들린다느니 하는 말들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는 전장에서 자주 도는 말들이다. 일관된 장소도 없고 목격자도 횡설수설. 제대로 된 말을 못 하더군.”
우드는 아마 ‘특별한’ 목격담이나 소문이 없다는 것만으로 큰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 듯하지만…….
‘지금처럼 사람들의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황에서 들려오는 소문이나 목격한 현상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의심스럽지.’
사람들의 불안감이 이토록 높이 치솟아 있다면, 그 감정에 따라 헛소문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살이 붙어 있었어야 한다.
그런데도 소문은 지나칠 정도로 빈약하기만 했다.
대관절 그 까닭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역시 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뒤를 돌아본 도로테아는 어느새 일어나 제게로 다가오는 우드를 보고 손을 뻗었다.
“말해 두겠지만, 지금의 네 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루 종일 네 다리로 걸어 다녀도 지치지 않을 만큼 튼튼해.”
“알아.”
짤막하게 답을 한 소녀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결국 짤막한 한숨을 내쉰 우드가 스탠을 향해 이불을 덮어 주고 소리 없이 문을 열었다.
감시를 겸해 보초를 서고 있어야 할 이들 모두 어느새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소녀를 품에 안은 우드는 익숙하게 복도를 가로질러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쫓았다.
“네가 밤중에 움직이는 것을 보니, 이곳에도 무언가 괴상한 것이 있나 보군.”
한때 인간이었거나, 그런 인간에서 파생된 존재들을 접하는 일에 제법 익숙해진 우드의 말에 빤히 그를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입을 열었다.
“밤에 움직이는 것이 이매망량뿐이라고 누가 그러든?”
우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소녀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입을 다문 채 앞을 응시할 뿐이었다.
도로테아는 창 아래로 내려다보이던 장소에 다다르자, 우드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려 흔들리던 수풀을 따라 그늘진 담벼락 아래에 섰다.
“이건…….”
그녀를 따라 다가선 우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가까이서 자세히 살핀 끝에야 알 수 있었다.
“가벽(假壁 : 임시로 세워 놓은 벽)인가.”
미묘하게 다른 색의 벽을 두드리자, 돌벽이라고는 믿기 힘든 가벼운 소리와 질감이 느껴졌다.
손을 뻗어 밀어 보니 쉽게 밀려 난 벽 너머로 익숙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소녀는 다시 우드의 품에 안겨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뒤덮인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멀리서 들려오는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유독 불길하게 귀를 때렸다.
* * *
온통 새까만 복면을 쓴 자들이 자루에 담겨 있는 것을 은밀히 커다란 술통 안으로 집어넣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자루의 무게가 상당했던지, 복면인들 가운데 몇몇은 수레 옆에 몸을 기댄 채 반쯤 늘어져 있었다.
이윽고 다른 방향에서 온 일행들이 수레를 넘겨받으려 하는 순간이었다.
“늦은 밤중에까지 일하시느라 바쁘신가 봐요.”
앳된 목소리에 장발을 질끈 묶어 뒤로 넘긴 복면인이 움찔했다.
이윽고 일행들 모두 일사불란하게 날개를 펼치듯 양옆으로 늘어섰다.
경계 어린 이들 앞에, 우드의 품에 안긴 채 생글생글 웃고 있는 도로테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까만 복면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가리고 있긴 하지만, 경계 태세를 갖추는 것만 보아도 제대로 훈련받은 군인임을 알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저렇게 좁은 공간에 사람을 넣는 것은 추천하지 않아요. 아무리 건강한 이들이라 하더라도 장시간 호흡이 어려우면 후유증이 남으니까요.”
가만히 굳어 있던 남자들 중 몇이 몸을 낮췄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태세를 보이는 이들의 모습에 우드의 눈에도 날카로운 예기가 서린 순간이었다.
장발의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을 벗었다.
“……!”
달빛에 익숙한 얼굴이 드러난 순간, 우드가 신음하듯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
“제타.”
마주한 이들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망설이는 우드를 본 제타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긴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시기가 그리 적절하지 않군요. 어린 꼬마 숙녀님의 말대로 오랜 시간 호흡이 어려우면 이들 모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저기 든 것이, 사람인가?”
“예.”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답에 우드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들었다.
제타의 얼굴은 어두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끼는 기색은 없었다.
“누굴 성 밖으로 빼돌리는 거지?”
“뻔하잖아.”
우드의 물음에 답한 것은 제타가 아닌 도로테아였다.
“우리가 호송해 와서 영주에게 넘겼던 탈영병이겠지.”
“뭐라고?”
눈을 크게 뜬 우드가 홱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려 사람이 든 술통을 바라보았다.
미동도 없는 술통 안에 오래 있어야 할 이들이 걱정되었던 것인지 제타가 순순히 인정했다.
“저희를 보내 주시겠습니까?”
“저들이 나가면, 어디로 합류하지?”
“…….”
아무 말 없는 제타 앞에서 우드가 머뭇거렸다.
이 일이 발각되면 문제가 되는 것은 제타뿐만이 아니었다.
아마 현 영주는 더욱더 요새 출신의 기사나 병사들을 경계하게 될 것이고, 독전대 전원이 강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탈영병들을 성으로 데려간다면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불 보듯 뻔했다.
“허드슨 블랑은 탈영병들이 잡혀 오면 목을 쳐 머리를 성문 아래에 걸어 두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제타가 나직이 덧붙였다.
“이번에는 산 채로 가죽을 벗길 것이라 빈정대더군요.”
그자라면 너끈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우드의 얼굴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