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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78화 (178/242)
  • 178화

    까앙!

    “크억!”

    드넓은 연무장 한가운데에, 검을 쥔 사내가 형편없이 나동그라졌다. 절뚝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이를 바라보던 우드가 무심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음.”

    나가떨어진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손에 쥐고 있는 진검을 바라보았다.

    우드가 쥐고 있는 것은 연습용 목검 한 자루뿐이었다.

    오래 사용하여 손잡이 부분이 닳은 연습용 목검으로 잘 벼려진 진검을 가볍게 쳐 내다니?

    심지어 그는 벌써 일곱 명째 상대 중이었다.

    힘이 빠질 법도 하건만, 우드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말끔한 얼굴로 여덟 번째 도전자를 멀리 날려 보냈다.

    “한 사람씩 상대하려니 시간이 많이 걸리는군. 한꺼번에 덤비지.”

    눈에 비친 옅은 무료함에, 주춤거리던 이들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도로테아 곁에 오래 머물다 보니 상대를 도발하는 일에는 그 누구보다 능할 수 있었다.

    그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묶을 요량으로 한번에 다섯이서 달려든 순간, 우드의 검이 한발 더 빠르게 그들 모두를 걷어 냈다.

    “제길!”

    “뭐, 뭐야 대체!”

    사내는 마치 거대한 나무처럼, 그곳에 뿌리박은 채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 검을 다섯 번 이상 휘두르게끔 만들지 못했다.

    다들 충격에 잠겨 입을 꾹 다문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자괴감과 열등감, 분노가 가득한 얼굴들을 살핀 우드는 내심 안도했다.

    ‘호승심이 있다면 그럭저럭 희망은 있는 셈이지. 상태 또한 아주 나쁘진 않아.’

    굳이 따지자면 이곳에 주둔해 있던 병사보다 패잔병의 움직임이 오히려 효율적이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 변경백 아래에서 오래 훈련을 받은 티가 났다.

    전투에서 패한 데다 남의 성에 얹혀 지내게 된 셈이니 의기소침한 구석은 있겠지만, 아직 쓸 만해 보였다.

    ‘그에 비하자면 카메르 백작은 딱 자기 수준으로만 병사들을 유지했군.’

    의무적으로 해야 될 만큼만.

    그 이상의 투자를 하지 않은 탓에 조금만 변칙적인 움직임을 보여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헤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총평을 하자면 엉망이긴 해도 살아날 작은 불씨는 있다, 정도일까.

    “으아아아!”

    독기가 가득 서린 눈을 한 누군가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뻐엉!

    “쿠에엑!”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우드가 반사적으로 달려드는 상대를 걷어 내자, 병사는 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멀리 날아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에 처박았다.

    멍하니 지켜보던 병사들 중 하나가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제까지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건가?”

    “대체 뭐하는 작자길래…… “

    “탈영병이었다고 하지 않았어?”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고개를 든 우드가 아이들이 머무르고 있을 방 창문을 살폈다.

    ‘불안하군.’

    얌전히 있으라, 말은 해 두었지만 도로테아가 어디 그런 말을 따르는 인물인가.

    심지어 어젯밤 마주했던 수상쩍은 웃음은 또 어떠한가.

    보는 순간 소름이 우수수 솟아난 것을 보면 십중팔구 그를 고단하게 할 만한 일을 꾸미고 있으렷다.

    고개를 돌린 우드가 찜찜함이 가시질 않는 속내를 애써 달랬다.

    ‘아니, 적어도 수족이 다 잘려 있으니 남의 성에서 활개 치는 것에도 한계가 있겠지.’

    하필이면 그 못된 것 옆에 바글거리는 ‘지나치게 유능한’ 수족들 덕에, 그녀가 치는 사고의 규모는 늘 황도를 발칵 뒤집다 못해 제국 전역을 들썩이게끔 만들곤 했다.

    그래, 여기는 그나마 그녀의 눈과 팔이 되어 줄 인간들이 없다.

    ‘게다가 성주의 감시견이 붙어 있기도 하고.’

    여차하면 아이들을 인질 삼아 옭아매겠다는 꿍꿍이겠지만 우드는 그런 성주의 경계심이 몹시도 기꺼웠다.

    수고롭게도 직접 품을 들여 꼴통 주인을 감시해 주겠다니,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생각을 마친 우드가 고개를 돌려 움츠러든 병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기본적인 방어 자세부터 가르치도록 하겠다. 우선 자세를 교정해야만 제대로 된 전투의 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

    “…….”

    어딘가 숙연해진 얼굴을 하고 섰던 이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 있는 병사들의 대부분은 원치도 않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징집되어 왔거나 혹은 먹고살 방편이 없어 자원한 자들이었다.

    훌륭하고 좋은 장비들은 공들여 가꾼 기병이나 기사들에게 먼저 주어졌고, 보병은 언제나 가장 앞에 서면서도 가장 굶주리고 부족한 장비를 들어야 했다.

    훈련관이라고 다를까.

    그 이전의 훈련 담당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물이었을지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불 보듯 뻔했다.

    ‘그러니 제대로 가르쳐 주겠다는 말에 의욕이 생긴 거겠지.’

    제법 그럴듯하게 살아난 눈을 바라보며 우드가 입을 뗐다.

    “우선 첫 번째 자세를…….”

    그 순간이었다.

    그의 귀에 성내의 복도를 내달리는 분주한 발소리와 사람들의 다급한 말소리가 들려온 것은.

    “아이들 둘이서만 나갔단 말입니까?”

    “조그만 아이들끼리 저 아래 번화가까지 내려가는 동안 보초들은 뭘 하고 있었답니까?!”

    “성 아래는 치안도 좋지 않은데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저자가 무슨 꼬투리를 잡을지…….”

    치안이 좋지 않은 번화가, 보초를 뚫고 빠져나간 아이들 둘.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우드의 귓가로 쏙쏙 스며들었다.

    이제껏 갈무리해 두었던 살기가 풀풀 날리고, 분노로 가득한 눈에 형형한 빛이 어리자 앞에 정렬해 있던 병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흡사 눈앞의 누군가를 죽인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이 망할 계집 같으니!”

    빽 소리를 지른 우드가 이내 고개를 돌려 이글거리는 눈으로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듯 명을 내렸다.

    “자세를 갖추기 이전에 우선 체력을 기르도록 하지. 우선 이곳 성 주변을 50바퀴 도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누구도 열외 없이, 끝까지 마무리 짓기 전까지는 훈련을 종료할 수 없다.”

    얼어붙어 있던 병사들이 기세에 눌려 예! 하고 답했다.

    이 넓은 성 주위를 50바퀴나 돌라는 기상천외한 명을 내린 우드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훈련장을 벗어났다.

    간간이 ‘잡히면 밧줄로 묶어 매달아 놓겠다.’는 둥의 무시무시한 말을 해 가며 빠르게 멀어지는 우드를 가만히 바라보던 병사들이 눈을 끔뻑였다.

    제대로 된 교관이 왔으니 응당 기뻐해야 옳은데…….

    ‘애 둘 아빠라며?’

    ‘탈영병 출신이라며?’

    ‘황도 출신 샌님이라며?’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우드의 살벌한 기세와 그가 앞서 보인 혁혁한 활약 덕에 병사들 사이에 보이던 신경전은 게 눈 감추듯 사그라졌다는 것이었다.

    *   *   *

    그 무렵, 유능한 수족 없이도 규모가 남다른 사고를 치고 있는 도로테아는 수많은 이들의 따가운 시선에 언제나 그렇듯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 아주 기세등등하시군.”

    “요새에서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쳤던 인간이, 이제 와 뭐가 어째?”

    “변경백 각하의 은혜를 입고도 뻔뻔하게 저버린 배신자가 아닌가!”

    누구 하나 달려들어 어린아이들을 해하려 한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살벌한 분위기였다. 상대가 허리춤에도 오지 않는 아이들이라는 사실만 아니었더라면 진작 칼부림이 났으리라.

    “사라, 내 뒤로 와.”

    새하얗게 질린 스탠이 결연한 눈을 하고서 한걸음 앞섰다.

    누가 보아도 여동생을 지키려 하는 태도에 몇몇 이들의 얼굴이 묘해졌다.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사람 복장을 뒤집어 놓는 시비를 건 것은 저쪽이 아닌가.

    왜인지 모르게 소년의 태도만 보아서는 말만 한 어른들이 모여 아이들을 때려죽일 듯 핍박하는 모양새가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떨리는 주먹 좀 보게. 고작해야 10살이나 되었을까. 제 동생 하나 지키겠다고 덜덜 떨면서 앞으로 나선 게지.’

    어쩐지 그 꼴을 보고 있자니 화를 낸 이쪽이 더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래 봤자 아이가 아닌가.

    어른이 한 말을 주워듣고 멋모르게 입에 올린 것이 분명할 진대, 거기에 열을 내어 폭력을 휘두르려 들다니.

    뭐에 씌인 게지.

    분노 가득했던 얼굴에 하나둘 허탈한 기색이 떠올랐다.

    ‘흠.’

    도로테아는 스탠에게서 발견한 뜻밖의 장점에 눈을 끔뻑였다.

    딱히 이런 효과를 떠올리고 그를 대동한 것은 아니나, 뜻밖에도 순식간에 정리된 분위기에 새로 생긴 오빠의 유용함(?)은 제법 쓸 만했다.

    “사라, 괜찮은 거지?”

    속삭이는 스탠을 가만히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생긋 웃었다.

    “잘했어.”

    마치 강아지를 쓰다듬듯 제 오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도로테아를 향해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고요하고 깊은 눈을 가진 노인이었다.

    “너희 두 사람, 이곳을 어찌 알았느냐?”

    “그야 아빠가…….”

    태연하게 거짓을 들먹이려는 도로테아의 말에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지. 네 아버지가 이곳에 들어가 네가 한 그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조리라 했다면, 그는 천하에 다시없을 악인이로다.”

    “…….”

    “제 딸과 아들을, 제 손 하나 더럽히지 않고 남의 손으로 죽이려 한 셈이니.”

    노인의 말에 숙연하게 듣고 있던 주점 안의 사람들이 술렁였다.

    호위 하나 없이 어린아이 둘이서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워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노인의 지적이 옳았다.

    어른의 허리춤에도 오지 않을 만큼 어린아이들에게, 저토록 상대를 자극할 만한 말을 하도록 시키다니.

    ‘그건 이 아이들더러 죽으라는 뜻이 아닌가.’

    도로테아가 고개를 갸웃하고 옆으로 기울였다.

    “제 아버지가 악인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왜 그럴 리 없다 단언하시나요?”

    “내가 보았던 우드 데버는 적어도 그런 이는 아니었어.”

    노인이 담담한 말과 함께 그렇게 말하고는 아이를 향해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 묻고 싶구나. 너는 어찌 이곳을 찾아냈으며, 어째서 우리를 도발하여 스스로를 해할 수도 있는 상황까지 만든 것인지.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어 이곳에서 영영 추방시키고 싶었더냐?”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희게 질린 얼굴로 눈을 말똥말똥 뜬 어린 소녀를 보았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 했으려고요…….”

    저 어린아이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아이를 향해 시선을 준 그 순간 도로테아의 눈이 활처럼 곱게 휘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꺼림칙한 시선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저는 단지 선생님을 뵙고 싶었어요. 문은 두드려야 열리는 법이고, 주인은 손님이 존재감을 드러내야만 맞이해 주는 법이니까요.”

    요새의 패잔병들이 이곳에 합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병사들은 모두 제국의 국민들이며, 결국 군사력의 일부이므로.

    요새가 함락되면 패잔병들은 자연스레 재편성되어다른 군에 흡수되는 법이지. 어디 귀족가에 소속된 사병이 아니라면.

    ‘그러나 함락된 요새에서 살아가던 영지민들은 어찌할까.’

    영주로서는 한번에 많은 유민을 받아들여야 하는 껄끄러움이 있을 테고, 이곳에 사는 원래의 주민들 또한 갑작스레 몰려든 타 영지의 사람들이 반가울 리 없겠지.

    결국 겉도는 이방인들은 자신들만의 쉼터를 만들게 될 터.

    분명 전 요새에서 요직에 있었으나, 이곳 영주에게는 발탁되지 못한 인물을 중심으로 모였겠지.

    현자와 같이 깊은 눈을 한 노인을 본 도로테아가 생긋 웃었다.

    “다행히 선생께서는 이리 나와 저희를 반갑게 맞아 주셨네요.”

    노인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곁에 서 있던 훤칠한 인상의 청년이 무언가 말을 하려다 애매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곳에 있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멀끔하고 세련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검을 제대로 배운 기사? 귀족 자제인가?’

    어느 쪽이든 간에 이곳의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로 보였다.

    ‘이 영지에 아주 머저리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나 봐.’

    그녀가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자, 청년은 떨떠름한 얼굴로 머뭇머뭇 손을 올려 흔드는 것으로 화답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벼락같은 소리와 함께 거칠게 열린 문으로 살기를 풀풀 날리는 우드 데버가 들어섰다.

    “이 망할 놈의 꼬맹이!”

    자욱하게 이는 먼지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도로테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아직 뭘 해 보기도 전인데.

    무시무시한 살기를 흘리며 주변을 훑다 무사한 스탠을 보고 안도함도 잠시, 냉큼 들어다 한쪽 옆구리에 낀 우드는 도로테아도 뒷덜미를 잡아다 들어 올린 뒤 남은 옆구리에 끼워 넣었다.

    “피해 본 것은 없습니까?”

    “그…….”

    댁이 방금 부순 문이요.

    “문이라면 변상하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이 아이가 와도 절대 열어 주어서는 안 됩니다. 이 안으로 들이는 순간 몹쓸 일에 휘말리실 테니까요.”

    “아니, 저기…….”

    대관절 당신은 대체 누구신데요.

    어안이 벙벙한 이들이 채 묻기도 전에 양 옆구리에 아이들을 둘러멘 우드가 거리로 뛰쳐나갔다.

    창졸간 벌어진 일에 다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실로 몇 년 만에 변경백이 아끼던 ‘늑대’와 재회한 노인은, 자신에게 인사는커녕 허겁지겁 아이들을 챙겨 나가기 바쁜 우드를 보고 꽤 놀란 얼굴로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꽤 변했군.”

    좀 전에 마주한 우드가 내뿜는 흉흉한 살기와 위압감, 느껴지는 존재감은 두드러질 정도였다.

    곁에 수많은 무장들을 두어 봐서 알았다.

    그의 경지는 기사들 가운데에서도 최상급이라 불릴 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장에서 뒹군 자들 특유의 날것의 느낌은 사라져 있었다.

    ‘후작 영애의 아래로 들어갔다 들었는데.’

    스스로 굽힐 만한 경지도, 그럴 만큼 부족한 작자도 아닌데 어린 영애의 호위를 자처했다는 것은 역시 후작에게 사사(師事)하고 싶어서였나.

    “허어…….”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더라면 재회를 한껏 기뻐했으리라.

    변경백이었더라면 호쾌한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우드의 드높아진 경지를 진심으로 축하했겠지.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어.’

    우드 데버의 존재는 위험했다.

    그 한 사람만으로도 성내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질 수 있을 터.

    그자는…….

    ‘내 계획에 변수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는 안 돼.

    번뜩이던 눈빛 사이에 살기가 침잠하듯 가라앉았다.

    이윽고 깊은 숨을 내쉬자, 곁에 있던 멀끔한 차림새의 청년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스승님?”

    언제 그랬냐는 듯 인자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돌아온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괜찮고말고.”

    그리 말하는 스승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묘하게 흐릿하게 들린다고, 리안은 생각했다.

    ‘그나저나 그 아이, 뭐였을까?’

    꺼림칙한 기분이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제 아비의 옆구리에 달랑 끼인 채, 눈이 마주친 소녀는 활짝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몹시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앞둔 사람처럼.

    “리안, 내 사랑하는 제자야.”

    노인이 그를 부르자 상념을 흐트러뜨린 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예, 스승님.”

    “계획이 머지않았으니 너는 더욱 정진해야 한다.”

    “예.”

    고개를 조아리는 그를 내려다보던 노인이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반드시 계획을 성공시키리라.

    그리하여, 실종된 변경백을 찾아내 그분께 이 요새를 바치리라.

    소리 없는 간절한 바람이 속으로나마 맴돌다 삼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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