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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72화 (172/242)

172화

태연히 시중을 받는 우드나 도로테아를 제외하고, 호화로운 대접에 익숙할 리 없는 다른 일행들은 성대한 만찬을 앞에 두고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귀족 가문의 정석이라 불리우는 하이클레어 가문에서 몇 년간 단련받아 온 우드는, 한 치의 어긋남 없는 예법으로 다시 한번 옛 수하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런 우드를 바라보는 자작의 눈빛에도 확신이 들어찼다.

이윽고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후작 각하께서는 진즉 연합군으로 합류하셨는데, 경께서만 이리 따로 오신 까닭이 있으십니까?”

“저는 그분의 명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우드가 담담하게 답했다.

애초에 그는 후작이 아니라 도로테아에 속한 인물이었다.

제아무리 후작이라 하더라도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고 그를 멋대로 지방으로 내려보낼 리 없었다.

“그럼 역시, 후작 영애입니까.”

한층 나지막해진 목소리에 흘끗 고개를 든 우드가 자작을 살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하군.’

자작은 이미 우드가 후작이 아닌 후작 영애의 아랫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다.

군의 통솔권을 지니고 연합군의 사령부에서 직위를 가진 것은 후작이지 도로테아가 아니었다.

황도에서 제아무리 이름을 떨쳤어도 그것은 모두 황제와 후작가의 용인하에 벌인 일이었으므로, 지방에 있는 영주가 그녀의 호위기사 따위에게 주눅이 들 까닭은 없었다.

‘설마 오기 전에 뭔가 이미 저지른 건가?’

우드의 미심쩍은 시선이 도로테아를 향했다.

그녀는 아주 느릿하게 접시 위의 음식을 비우고 있었다.

“…….”

난생처음으로 메인 디시를 ‘한 접시로’ 그치는 아이를 보던 우드가 조심스레 물었다.

“입맛에 맞지 않는 거냐? 차라리 내 것을 줄까?”

잘게 썰린 고기 조각을 찬찬히 음미하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저었다.

‘딸’을 바라보는 우드의 눈빛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나는 열심히 먹고 있어. 이거면 충분해, 아빠.”

“그렇지만…….”

아플 때조차 너는 열 접시 이하로 밥을 먹어 본 적이 없질 않나.

안절부절못한 채 자꾸만 접시들을 소녀의 앞에 내려놓는 우드를 보는 할린이 신기하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대장, 그러고 있으니까 진짜 아빠 같다.”

돌처럼 굳은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우드를 힐끗 바라보던 도로테아는, 먹기 좋게끔 고기를 잘게 썬 접시를 스탠의 앞에 가져다주었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

“아, 응.”

눈치를 보며 식사를 이어 나가는 스탠과는 달리, 진즉 제 몫의 식사를 마친 도로테아는 접시를 밀어냈다.

많이 먹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 모이처럼 적게 먹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딱 한 사람분의 몫을 먹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챙기려 들고 있으니 주변에서야 과보호로 비칠 수밖에.

‘뭐, 상관없지.’

애초에 그렇게 비치는 편이 훨씬 움직이기 편할 테고.

여유롭게 등을 뒤로 기댄 채 자작을 바라보자, 눈이 마주친 그가 움찔했다.

도로테아의 새까만 눈동자가 마치 그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버리려던 그 순간 아이가 스윽,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자작 영애께서는 황도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응?”

자작의 곁에 있던 영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도로테아는 그녀가 차고 있는 브로치를 바라보며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올해 처음으로 공방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문양이잖아요. 4황자 전하께서 열었던 박람회를 보고 오신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께서, 그와 비슷한 문양의 브로치를 선물받으셨던 기억이 남아서요.”

도로테아의 말에 자작 영애가 기쁜 듯 얼굴을 붉혔다.

“실은 황도에 머무르고 있는 내 사촌이 보내 준 것이란다. 내 생일을 맞아 특별히 공방에서 맞추어 준 거야.”

“아직 혼담이 오고 가는 가문은 없으신가 봐요.”

“아버지께서 신중히 고르고 계셔서 그래.”

부끄럽다는 듯 몸을 비튼 그녀가 흘끔흘끔 우드를 바라봤다.

때 묻지 않은 소녀의 연정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우드는, 그저 심란한 얼굴로 음식 접시를 내려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사이 도로테아는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자작의 반응을 살폈다.

그가 급히 숨을 들이켠 건 단 두 번의 순간이었다.

후작 영애를 언급했을 때 한 번, 혼담 이야기가 언급되었을 때 한 번.

불안하게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던 도로테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엘포드 자작의 성향은 중립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대화에 쉽사리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혹여 말꼬리를 잡힐까 저어되는 탓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의 태도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감이 있었다.

‘당사자에게야 아무리 큰 고통이었다 하더라도 고작해야 외곽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에 불과해. 게다가 피해자는 죄다 죽음을 애도해 줄 이조차 없는 고아들이고, 귀족이 연루된 사건도 아니다.’

자작의 영지에서 일어난 일이니 관리 소홀로 몇 마디 질책이야 들을지 몰라도 대단한 타격을 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만한 일로 작위를 박탈한다면 제국에 남아 있는 귀족이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그가 눈치를 볼 일이 무엇일까.

후작도 아니고, 후작 영애의 기사에게.

‘사촌이 있으니 최근 황도의 소식들까지 빠삭하게 알고 있을 터.’

최근 황도를 뒤흔들어 놓은 가장 대단한 사건이라 함은 도로테아의 재판뿐이었다.

고심에 잠겨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던 도로테아가 손을 멈췄다.

‘마을 사람들이 퍼다 나르던 그 ‘검은 물’은 물건에 부정한 기운을 입히는 데에 쓰인다.’

최근 수상한 물건들을 제국 전역에 퍼뜨린 것은 케빈의 상단이었지.

상단이 이곳에서 검은 물을 꾸준하게 공급받아 그 부정한 물건들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면, 이곳 영지를 꽤나 자주 드나들었을 터.

그만한 규모의 상단에서 영지를 자주 드나들었음을 영주가 파악하지 못할 리 없었다.

아아.

그제야 머릿속에 퍼즐이 맞춰진 도로테아가 환하게 웃었다.

‘케빈 남작에게 줄을 댔거나 그에게 뇌물을 받았구나.’

어쩐 일인지 지나치게 전전긍긍하며 몸을 낮춘다 싶더니 제 풀에 찔려 그랬던 거군.

이곳에도 돈을 뿌려 두었다니.

새삼스럽게 케빈을 놓친 것이 안타까웠다.

그 많은 재산을 탈탈 털어 제 금고에 넣어 두었더라면 안 먹어도 배가 불렀을 텐데.

계산을 끝낸 도로테아가 활짝 웃으며 우드를 올려다봤다.

“그래, 네가 생각해도 더 먹어야겠지?”

주인의 웃음을 잘못 해석한 그가 손대지 않은 접시를 소녀의 앞에 놓아주려는 순간 도로테아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빠.”

“…….”

“곧 험하고 거친 곳으로 떠나야 할 텐데, 아빠도 많이 드셔야 하지 않을까요?”

“험하고 거친 곳?”

떨떠름하게 되물은 우드의 맞은편에서 대화에 유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자작 영애가 물었다.

“어머, 위험한 곳을 가시는 모양이지요?”

“네, 폐하께서 내리신 밀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도 바삐 움직여야 해서요.”

도로테아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쵸, 아빠?”

“…….”

폐하께서 내린 밀명 따위를 받았을 리 없는 우드가 침묵했다.

창백한 낯빛의 자작은 비교적 공략하기 쉬워 보이는 도로테아를 떠보기 위해 말을 붙였다.

“험한…… 곳이라고 하였더냐. 황도로 돌아갈 예정은 없는 모양이로구나.”

생글거리는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한테 주어진 일이 많아서요. 몹시 바쁠 예정이거든요.”

이 순간 가장 혼란스러운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드 본인이었다.

자신만 모르는 자신만의 예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밥 먹던 도중 알게 된 탓에 속에서 역한 것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그 탓에 안색이 굳자, 자작 또한 덩달아 긴장한 듯 뻣뻣하게 굳었다.

“그 예의 마을에 저를 잠입시킨 것도, 황도에서 있었던 마녀 몰이 사건과 연관성이 보였기 때문이잖아요. 그렇죠?”

도로테아의 말에 다들 놀란 기색으로 우드를 바라보았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우드는 눈썹을 꿈틀한 채 입을 꾹 닫고 있을 따름이었다.

“황도에서 있었던 재판이라면, 후작 영애가 치렀던 신성한 재판을 이야기하는 거니? 성녀님께서 그 거룩한 힘을 드러냈다던? 그게 우리 영지에서 벌어진 일과 관련이 있다고?”

눈을 동그랗게 뜬 자작 영애의 물음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조사한 바에 따르자면 죄를 짓고 수배된 케빈 남작이 이곳에서 몰래 헛수작을 부렸었다나 봐요. 이번에 잡아들인 마을 사람들과 관련된 이야기인데요…….”

도로테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양,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운을 뗀 그 순간이었다.

쾅!

파랗게 질린 엘포드 자작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식탁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우드의 어깨를 잡고서 애원하듯 속삭였다.

“경, 제발 부탁이니 내게 따로 소명할 기회를 주시오. 내가,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소!”

“…….”

애초에 아무것도 모르고 불려왔으며, 또한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알고 싶지 않은 우드가 천천히 시선을 내려 방긋방긋 웃고 있는 도로테아와 눈을 맞췄다.

자작의 눈물 섞인 애원과 더불어 도로테아의 무언의 압박에 그가 한숨을 삼키며 답했다.

“좋습니다. 독대하지요.”

자리를 옮기기 위해 천천히 나서는 그를 향해, 도로테아는 엄지와 검지를 구부려 동그란 형태를 만들어 보였다.

‘많이 뜯어 와.’

간이 콩알만 한 것을 보니까 넉넉하게 뜯어내도 되겠어.

보니까 뜯겼다고 어디 가서 말도 못하고 끙끙 앓을 인간인 걸.

*   *   *

“화 풀어. 속이 그렇게 좁아서 어디 써먹니?”

도로테아가 포도알을 굴리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제 권속을 달랬다.

좀 전까지 자작과의 길고 일방적인 협상을 끝내고 온 우드가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떻게든 이성을 유지하고 있던 자작은 단둘만 남게 되자 본색을 드러냈다. 눈물, 콧물을 쏟아 내며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고 매달린 것이다.

질질 붙들고 늘어지는 귀족을 상대하느라 심신이 지친 우드가 털썩, 의자에 앉았다.

도로테아가 그의 옆에 걸터앉아 조잘거렸다.

“알고 보니 자작이 젊었을 시절, 우리 할아버지 아래에서 복무한 적이 있었나 봐. 당시 기병대에 속해 있었는데 그때도 사소한 일로 군기를 어겼다가 죽도록 맞고 굴렀다나.”

그래서 이토록 반응이 과했던 거군.

고개를 주억거린 우드의 눈이 다시 날카롭게 소녀를 노려보았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그렇다고 상황도 제대로 알려 주지 않은 채 나를 그 자리에 집어넣어? 밤새도록 달려 이곳으로 오는 것이 전부였던 나를?”

“잘만 하던걸. 의외로 소질 있더라.”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또박또박, 그의 행위가 제국에 얼마나 큰 손실을 가져왔는지, 폐하께서 아시면 얼마나 심기가 불편하실지, 후작이 알면 어떻게 나올지 등등.

“보고 배운 것이 있어 그렇겠지.”

우드의 말에 도로테아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잘 가르친 것 같아.”

“…….”

저 망할 계집애는 정말이지.

울컥한 우드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제 허리춤도 오지 않는 조그마한 소녀를 보곤 멈칫했다.

그녀를 이렇게 내려다보던 때는 이미 한참 지났었지.

어엿한 숙녀티를 내던 아가씨가 다시 조그마한 소녀가 되다니.

새삼스레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라 기분이 묘해졌다.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와 머리카락.

왜소한 몸집과 조그마한 손과 발.

눈앞의 어린 소녀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와 전혀 다른 외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눈을 마주한 순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이 어린 소녀가 도로테아라는 사실을.

“……도대체 어쩌다 그런 꼴이 된 거냐?”

“글세, 누군가 내 등을 떠밀었다고 해야 할까.”

“등을 떠밀어?”

“지극히 사랑받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로는 절대 그 안락한 저택에서 나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그렇게 말한 도로테아가 한숨을 쉬었다.

신의 뜻을 모두 헤아리기에는 그녀가 살아온 생이 너무 짧았다.

애초에 그들의 속내 따위 헤아리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그렇지만 틀렸어.’

내가 움직이는 것은 여전히 내가 ‘도로테아’로 살고 싶기 때문이야.

하이클레어 후작가의 사람들이, 나의 가족들이 이 세상을 지키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지키고자 이용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나섰을 뿐이지.

기분이 가라앉은 듯 차분해진 도로테아를 흘끗 바라본 우드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후에 되돌아올 수는 있고?”

“아마도.”

“어떻게 하면 되는 거냐?”

“세상을 구하면 돼.”

제 이름도 모르고 태어나는 순간 미쳐 버린 가여운 신으로부터.

도로테아가 짤막하게 답에 신중한 얼굴로 귀를 기울였던 우드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놀림을 당했다 여기는 모양이었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사실인 것을.

마음을 다스리려는 듯 숨을 고르던 우드가 화제를 바꿨다.

옆방에서 곤히 잠을 청하고 있는 어린 소년이 마음에 걸렸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세상과 단절되어 사람들의 ‘도구’로서 이용되어 오던 소년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제껏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욕심에 삶의 대부분을 바쳐야 했던 아이였다.

“정녕 저 아이를 위험한 전장까지 데려갈 생각이냐?”

“응?”

“차라리 네 가문으로 보내는 건 어떠냐?”

드물게 마음이 쓰여 꺼낸 말에 도로테아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 애는 나와 함께 다닐 거야.”

“어째서?”

“약속했으니까. 당분간은 저 아이의 ‘사라’가 되어 주겠노라고.”

소년의 맑은 혼에다 대고 건넨 언약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고 싶지 않았다.

조곤조곤 말하는 도로테아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우드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외관도 외관이지만 너…….”

“응?”

“왜인지 너답지 않아.”

“내가?”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도로테아를 향해 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에 갇혔던 사람들에게 네가 했던 일을 들었다.”

아하.

도로테아는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내리깔았다.

“하는 짓이 괘씸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평소의 너라면 그렇게까지 몰아세우지는 않았을 게다.”

정령을 다룰 수 없는 상태도 아니었고, 굳이 이능을 숨기고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구태여 극한의 상황까지 밀어 넣지 않아도 추궁 몇 번이면 금세 털어놓았을 이들이다.

“지울 수 없는, 끔찍한 기억으로 남을 게다. 어쩌면 한평생 미쳐 살 수도 있어.”

“…….”

“게다가 자작을 그렇게까지 도발했으니, 그로서는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저들을 가볍게 처벌하지 않을 게다.”

“마땅히 치러야 할 죗값을 치르는 것뿐이야.”

짤막한 대꾸에 서늘한 기운이 서렸다.

“저들의 죄가 없다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이토록 많은 이들이 희생될 때까지 손 놓고 있었던 자작만이 빠져 나가게 된다면…….”

“누가 빠져나가게 두겠다고 했어?”

우드의 등에 기댄 채 도로테아가 심드렁하니 답했다.

“자작은 응당 그 위치에 따른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은 벌을 받게 될 거야.”

“그자를 조사하다 보면 우리가 그에게서 받은 ‘대가’가 밝혀질 텐데도?”

뇌물 받고 입 딱 씻기에는 꽤나 많은 것들을 받지 않았나.

우드의 말에 도로테아가 생긋 웃었다.

“누가 대가를 받았는데?”

“뭐?”

“그가 우리에게 건넨 물자들은 모두 제국군의 선전을 기원하며 자진하여 건넨 군자금이야. 대가라니. 위험한 소리를 하는 구나.”

“너…….”

아연해진 얼굴로 우드가 어버버, 입을 다물었다.

“죄를 범한 자도, 그를 방관한 자도 그 누구도 무고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우드는 새삼스럽게도 낯설게 비치는, 냉랭한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몸짓, 말투, 눈빛.

마주한 순간 그녀가 자신의 ‘주인’임을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왜일까.

생경한 느낌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런 우드의 기색을 빠르게 눈치챈 도로테아가 냉랭한 기색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화풀이를 조금 했을 뿐이야. 그자들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들을 기억나게 만들었거든.”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던 소녀가 눈을 내리깔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나도 사람이니까.”

사람이라.

생각해 보면 분노 또한 인간이 갖는 당연한 감정이었다.

평소 지나치게 어른스럽고 의뭉스럽게 구니 당연히 감정이 넘쳐 화풀이를 하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 여겼다.

“그…… 런가.”

네게도 어리고 미숙한 면이 존재하겠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텐데.

처음 만난 순간, 살아 있는 것이 기적처럼 보였던 왜소한 소녀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 성장이 눈부시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늘 남들에 비해 한 걸음 앞서 생각하는 영민함 때문일까.

우드는 그녀가 여전히 성년의 나이에도 채 다다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꾸만 잊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스탠이 필요할 것 같아.”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나를 바라봐 줄 사람이 필요해.

“그 눈으로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을, 그로서 내가 내리게 될 결론을 지켜봐 줄 사람이 필요하거든.”

어리석지만 그 누구보다도 올곧은 눈을 가진 소년이 곁에 있으면……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우드는 담담하게 말하는 소녀를 말없이 살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갈 거야. 저 아이는.”

도로테아가 그리 결정을 내렸으니, 그는 언제나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소녀가 조그마한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때까지 잘 부탁해, 임시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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