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술사 도로테아-166화 (166/242)

166화

말없이 스윽 자리에서 일어난 도로테아가 육포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설마 이곳에서 천축계(天竺桂)를 보게 될 줄이야. 새삼스럽지만, 인간들은 참 대단하네요.”

“처, 천……?”

육포에 입혀진 향을 맡은 순간, 너무 반가운 마음에 치가 떨렸다.

생을 건너 다른 세계로 왔어도, 새로운 육신을 덧입어도……

뇌리에 남아 있던 과거의 잔재는 불씨가 되어 기억을 되돌렸다.

도로테아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예요.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던 어느 강대국은, 자신이 가진 힘으로 작고 힘없는 나라들을 손에 넣었죠. 그곳에 있는 광산을 헐값에 개발하기 위해서.”

하루아침에 나라를 잃은 국민들은 어쩔 수 없이 험한 광산으로 들어가 일을 하게끔 등을 떠밀렸다.

“광산에서 값비싼 보석들이 쏟아지니 정복자들은 더 많은 보석을 얻고자 궁리했어요.”

정복자들은 독특한 향을 가진 어느 나무의 잎을 광부들에게 나눠 주고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하게끔 만들었다.

“그 잎을 씹으면 신기하게도 하루 종일 일을 하고도 지치질 않아요. 잎을 말려 빻은 가루를 흡입하면, 마치 대단한 영약이라도 먹은 양 피로가 사라지죠. 고통이 사라지고 피로가 느껴지지 않으니, 자연스레 흡족한 결과들이 뒤따랐어요.”

“…….”

“오래 복용할수록 원할 수밖에 없어요. 그도 그럴 것이 현실의 괴로움을 잊게 만들어 주니까. 보고자 하는 환상을 보여 주고, 당장의 고통에서 벗어나게끔 해 주니까.”

설령 효과가 끝나고 나면 견딜 수 없는 외로움과 고통, 갈증이 덮쳐 온다 하더라도.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기분에 잠겨 현실의 고통을 잊고자 기대고, 종국에는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의존하지.

그때의 나처럼.

“정신 차리거라!”

자신을 향해 일갈하던 스승의 얼굴이 흐릿하게나마 떠올랐다.

그때 그는 어떤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가.

몸을 가누지도 못한 채 초점 없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대던 자신이 어찌 보였을까.

‘아주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건만.’

향을 맡은 순간 되살아난 감각에 손끝이 저릿했다.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도로테아의 시선에 하얗게 질린 여인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들을 내쫓았다.

“다, 당장! 당장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겠니!”

그 와중에도 제 새끼만큼은 소중하고 또 소중한 거로구나.

‘최소한 어미 노릇만큼은 제대로 하는군.’

비록 남의 새끼에게는 인두겁을 쓰고선 차마 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어도.

어린 명재신에게 하얀색 가루가 덕지덕지 묻은 빵을 건넨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아버지였다.

퀴퀴한 냄새를 풍겨 대던 빵을 게걸스레 먹어치운 것은 비단 배가 고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해칠 리 없다고 믿었기에.

주는 것만큼은 애정이 담겨 있다고, 그녀를 위해 주는 것이라 믿었기에.

빵을 탐한 것은 식욕이 아니라 부족한 애정이었다.

“이걸 먹으면 통증이 가실 게다.”

액막이 의식을 치르고 나면 끈적거리고 새까만 악의들이 달라붙어 육신을 짓눌렀다.

끙끙 앓아누운 채로, 고통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그때 자신에게 주어졌던 빵.

그것을 건네던 손을, 자신을 향한 호의라 여겼던 때도 있었다.

덕분에 끔찍한 악몽에서 헤어 나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갈증에 몸부림치며 견뎌 내어, 겨우 정신이 도로 맑아졌을 때에는 이미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지.

오라비의 애정도, 하나뿐인 스승의 존재도.

“너, 너…….”

창백한 얼굴의 여인은 말을 잇지 못한 채 연신 입술을 달싹였다.

도로테아는 저조한 기분과는 다르게 화사한 웃음을 얼굴에 가득 걸쳤다.

“실로 유감이에요. 폐하께서 그토록 제국민들을 자식처럼 아끼고 계신데, 정작 그들은 고아를 데려와 가축보다도 못한 대우를 하며 도구 취급하다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어떻게 이걸 알고 있는 거야!”

어디선가 굴러 들어온 보잘것없는 고아라 여겼기에 아무런 경계심 없이 받아들인 것이 문제였을까.

여자아이니 이대로 뒀다가 크면 어디든 쓸모가 있으리라 믿었고, 설령 그렇지 않아도 스탠의 도망을 막아 줄 좋은 패가 되리라 믿었으니까.

그런데 이 아이…….

‘어제도 이런 눈을 하고 있었나?’

깊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눈을 마주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게다가 도대체 어떻게 이 ‘육포’를 알고 있는 걸까.

‘하얀 섬광을 알아봤다고?’

그 누구도, 심지어 신전에서 나온 신관들조차 의심하지 않았던 물건인데.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도로테아가 새까만 눈을 들어 여인을 담았다.

여인은 덜덜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며 애써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밀려드는 두려움에 견디지 못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주머니.”

도로테아의 사근사근하고 앳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스탠이, 처음이 아니지요?”

여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런 그녀를 살피는 도로테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곳에 아주 재미난 것이 있더라고요.”

“무, 뭐?”

“새타니는 말이에요. 흔히 보이는 귀와는 달라요.”

아주 특별한 조건 속에서만 탄생하기 때문에, 흔히 염매(厭魅)의 술법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 내는 경우가 대부분.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가 어딘가에 갇혀 굶어 죽었다…… 이런 일이 그리 흔하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이곳에 있는 혼은 하나가 아니더군요.”

간혹 강력한 힘을 갖춘 권속을 원하는 작자들이 시도한다 듣기는 했지만 본 적은 없었다.

자칫하면 술사조차 쉬이 통제할 수 없는 흉악한 역귀가 되기 일쑤라, 술사들조차 꺼리는 방법이었다.

그것을 설마 평범한 인간이 제 손으로 만들어 낼 줄이야.

감탄이 절로 나왔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니.”

갈색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도로테아는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갸웃, 하고 옆으로 기울였다.

“우연히 발견해 그 효능을 깨달았다기에는 효과도 부작용도 너무 잘 알고 있는 듯 보이니, 단순히 우연으로 쓰이게 된 것은 아닐 테죠. 누군가가 부작용에 시달리는 것을 봤거나, 누군가에게 사용법을 배웠거나.”

훈제로 만들어 연기로 입힌 뒤 건네는 방식을 쓴 것을 보면 역시 후자려나.

“당신이 그 정도로 영악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입술을 꼭 깨문 채 아무런 답이 없는 여인을 보던 도로테아가 한층 은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말해 봐요. ‘추적이 불가능한 고아’를 데려다 시킬 만한 일이 대체 뭘까요?”

“……!”

여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파르르 떨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스탠의 손톱 아래에는 늘 흙이 가득했다.

바람 소리에 실려 온 아이의 거친 숨소리는 사방이 막힌 곳에서 들려오듯 답답하게 울렸다.

“당신들, 위험한 일에 손을 댔군요.”

돌처럼 굳은 채 도로테아를 내려다보고 있던 여인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이윽고 우악스런 팔이 가늘고 조그마한 몸을 잡아끌었다.

소녀는 별다른 반항도 없이 여인의 손길에 질질 끌려 나가, 좁은 창고에서 벗어났다.

“이런 미친 계집 같으니. 어디서 그따위 말을…… 도대체 누가…….”

연신 거친 말들을 입에 담던 여인은 마을 어귀에 매여 있던 작은 나귀 위에 소녀를 태웠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마을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소녀의 작은 발걸음으로는 결코 돌아올 수 없을 만치 먼 곳을 향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소망하는 여인의 발걸음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

*   *   *

어느새 마을이 보이지 않는, 깊은 숲 어귀까지 온 여인이 소녀를 나귀에서 내려놓았다.

손이 닿는 순간 꺼림칙하다는 듯 부르르 떠는 여인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말 몇 마디에 그리 두려워하면서, 어찌 그랬을까.’

그토록 여럿에게 말도 못 할 만큼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이제 와 무서워 벌벌 떠는 꼴이라니.

‘차라리 납작 엎드려 빌었어야지.’

여인은 반항도 없이 얌전한 소녀의 눈을 피한 후 중얼거렸다.

“나는 너를 거둬 주려고 했어. 알아? 나라고 해서 그러고 싶었던 게 아니라고. 이건 내가 생각해 낸 것도 아니고, 내가 시작한 일도 아니야. 네가 어쭙잖게 아는 척만 하지 않았더라도…….”

웅얼대는 목소리에는 자기 합리화가 가득했다.

이제껏 목숨을 앗아 간 아이들에게도 늘 이런 식이었을까.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다, 내가 시작한 일이 아니다, 내가 생각해 낸 일이 아니다……

어째서 변명이라 늘어놓는 것들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건지.

이윽고 여인은 가져 온 밧줄로 도로테아의 두 손을 나무 등치에 묶기 시작했다.

매듭을 짓고, 혹여 풀리지는 않을까 몇 번이고 확인하는 여인의 뒤통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도로테아가 입을 열었다.

“직접 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누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했냐는 것만으로도 죄와 업은 생겨나는 법이에요.”

“…….”

“설령 저 숲에 사는 굶주린 맹수가 나를 물어뜯는다 한들,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이곳에 나를 버리고 간 당신이 될 테죠.”

여인은 아무 말 없이 매듭에서 손을 뗐다.

딱딱하게 굳은 옆얼굴을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나직이 덧붙였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목숨들을, 이처럼 스스로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죽음으로 몰아넣었을까.”

“…….”

“어리석게도 그 손에 아무것도 묻히지 않았다고 믿는 우매한 인간들이니.”

죄책감조차 없이, 그렇게 당당히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일 테지.

여인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은 채 매어 놓은 나귀를 데리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숲속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불길한 울음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시야를 벗어나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여인을 가만히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품속에서 찍찍대는 피피를 부드럽게 얼렀다.

“아직은 아니야.”

가만히 있으려무나.

“곧 귀인이 올 거야. 괜히 네가 끼어들었다가는 초면부터 지나치게 경계하게 만드는 꼴이 될 것 아니니.”

멈칫한 다람쥐가 다시 품속을 파고들려는 순간, 그녀가 속삭였다.

“이제 슬슬 내 권속을 불러와야겠구나.”

지긋지긋한 잔소리에서 벗어난 것도 좋지만, 홀로 다니려니 다리가 아프지 뭐니.

찌이-?

“가서 지금쯤 나를 찾아 서글피 울고 있을 가여운 다리를 데려오렴.”

찌이-.

“직접 소환해도 좋겠지만.”

도로테아가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고생 없이 이곳에 다다르면 버릇이 나빠지잖니.”

직접 걸어오는 것이 시건방진 성격을 교정하는 데에는 훨씬 좋을 게야.

“물론 너도 그렇고.”

불안함을 느낀 신기가 주춤주춤 물러서자 도로테아가 생긋 웃었다.

“지금부터 쉬지 않고 달리면 그 조그마한 몸으로도 금세 다녀올 수 있을 거야.”

고슴도치처럼 털을 곧추세운 채 고개를 젓는 다람쥐를 바라보며 도로테아가 재촉했다.

“얼른.”

대장간에 집어넣고 녹여 버리기 전에 다녀와.

*   *   *

얼마 있지 않아, 어둑한 숲을 지나던 한 무리의 사내들은 제 머리 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다람쥐를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개중 한 사내의 뺨에 뚝, 하고 작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응? 저 다람쥐 지금 볼일을 본 거야? 냄새가 나진 않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방울을 닦아 낸 남자는, 설마 그것이 원치 않게 장거리 심부름을 가게 된 다람쥐의 눈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눈치였다.

“빨리 와라.”

선두에 선 남자가 무뚝뚝하게 말하자 잠시 멈춰 섰던 남자 또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무리는 숲의 출구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곳 어귀에 두 손이 결박되어 있는 조그마한 소녀를 볼 수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이 인상적인 아이는 고작해야 10살 남짓이나 되었을까.

“뭐야? 웬 어린아이가 여기…….”

아이의 두 손이 단단히 매듭지어져 묶인 것을 본 남자, 할린의 미간이 좁아졌다.

가장 먼저 선두에 서서 걷고 있던 그레함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곳에서? 이렇게 묶인 채로?

게다가 곧 해가 질 텐데.

이런 날씨에 얇은 옷 한 장만 입혀 두고 간 것만으로도 당황스럽건만, 이곳은 맹수들이 출현할 수 있는 숲 어귀였다.

잠시 시선을 주고받은 남자들의 무리 가운데, 가장 인상이 부드러운 ‘제타’가 몸을 숙여 아이와 눈을 맞췄다.

“누굴 기다리고 있었니?”

“절 이곳에 두고 가신 아주머니요.”

제타는 도로테아를 향해 다시금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네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딜 계시니? 어느 아주머니가 널 이렇게 두고 갔는데?”

눈을 끔뻑인 도로테아가 태연하게 거짓과 진실을 섞어 늘어놓았다.

“제 부모님은 멀리 계세요. 마을에서는 저와 오빠 단둘이서 지내요. 오늘 다른 아이들이 제게 놀자고 찾아와서 같이 놀고 있었는데, 아주머니는 저랑 아이들이 어울리는 게 싫대요. 그래서 이곳에 저만 두고 가신 거예요.”

담담하게 말하는 아이에게서는 서글픈 기색도, 외롭거나 고통스런 기색도 없었다.

필시 마을에서 배척당하는 어린 고아 남매가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린 이들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천진한 눈망울을 한 소녀는 더없이 순수해 보였다.

‘이런 아이에게 몹쓸 짓이라니.’

착잡한 듯 매듭을 내려다보던 남자 중 하나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네가 사는 마을이 이 근처에 있니?”

“저쪽으로 쭈욱 가면요. 나귀를 타고 한 30분가량 왔으니까 그리 멀지는 않아요. 나귀의 걸음이 빠르지 않았거든요.”

도로테아가 가리킨 방향을 흘끔 바라본 할린이 그레함을 향해 말했다.

“대장, 녀석들은 잔뜩 굶주린 상태입니다. 이 근처에 마을이 있다면 당연히 그리로 갔을 겁니다.”

할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레함이 입을 열었다.

“마을로 향한다. 다들 도착 전에 면밀히 정비하도록.”

곧장 걸음을 옮기려던 그레함이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제 허리춤에도 오지 않을 만큼 야위고 자그마한 소녀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새까만 검은 눈을 바라보고 있자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꼭 그 안에 더 크고 대단한 것이 도사리고 있는 듯한…….

‘일개 어린아이를 두고 못하는 생각이 없군.’

상념을 깬 그레함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네 오라비는 어디에 있지?”

“지금쯤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서 일하고 있을 거예요.”

그레함은 지니고 있던 단검으로 도로테아의 손목을 묶고 있던 매듭을 잘라 냈다.

“그에게로 가거라. 그리고 마을로 돌아오지 말고, 차라리 성 안쪽의 신전을 찾아가. 그곳에서라면 너희에게 더 나은 일자리나 먹을 것을 줄 게다.”

도로테아가 단단히 묶여 있느라 얼얼한 손목을 쓰다듬는 사이, 그레함은 아이에게서 눈을 떼고 단호히 돌아섰다.

그의 옆으로 다가온 할린이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않고 주절거렸다.

“운이 좋은 녀석입니다. 지금쯤 마을에 ‘녀석들’이 도착했다면 초토화가 되었을 텐데. 그 아주머니가 누군지는 몰라도 애를 여기다 묶어 두고 간 덕에 비참한 꼴은 면했네요.”

“말을 주절거릴 시간이 있으면 발을 더 빨리 놀리도록. 서둘러 가지 않았다가는 놈들을 또다시 놓칠 수도 있다.”

“예이, 예이.”

장난스레 답한 할린이 한층 속도를 높였다.

정체도 모르는 사내들은 어느새 점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자신을 해방시켜 준 ‘귀인’을 마을로 보낸 도로테아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스탠에게로 가자.”

주변을 맴돌던 리리가 곧장 그녀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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