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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64화 (164/242)
  • 164화

    가장 높은 곳에서 제국민들을 내려다보고 다스리는 황제의 위엄을 나타내는 황궁의 첨탑은, 제국의 어떤 건물보다도 높이 솟아올라 있었다.

    아름다운 첨탑 아래, 황금빛 기둥들과 푸른 대리석이 깔린 호화스러운 궁에 머무르는 황제는 오늘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오늘로서 그 아이가 실종된 지 사흘째로군.”

    한숨을 쉬는 그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후작가에서 사병을 풀어 뒤지고 있지만 감쪽같이 사라진 도로테아를 찾기란 요원해 보였다.

    “그 아이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면 짐이라고 별수 있을까.”

    애초에 실종이라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신전에서 이제 와 그녀를 납치해 좋을 일이 뭐가 있다고.

    어린 성녀가 그녀를 제법 따르고 있다고는 하나, 성녀는 법적으로 제국의 황손이지 하이클레어 후작가의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 대의 교황은 그리 무모한 인사가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중앙 신전 깊숙한 곳에 다른 세력이 침투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거니와, 누군가가 그리 쉽게 도로테아를 납치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 아이가 가진 힘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낮지.”

    차라리 스스로 모습을 감췄다는 쪽이 더 신빙성 있어 보였다.

    후작가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섣불리 일을 키우는 대신 쉬쉬해 가며 아이의 행방을 찾고 있는 것일 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겐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그의 가슴 한편에 불안이 서렸다.

    그녀가 움직이면 그 방향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일이 커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 곁에 두고 의논할 이가 없다는 것이 참으로 괴로운 일이로다.”

    “폐하…….”

    황제의 침울한 중얼거림에 궁내부 장관의 얼굴 또한 흐려졌다.

    그렇게 골머리를 앓고 있는 와중, 뜻밖의 인물이 그를 알현하고자 황궁의 문을 두드렸다.

    황제는 제 발 아래에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자신의 어린 동생을 몹시도 못마땅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폐하.”

    “글쎄, 내가 그리 평안한 나날들을 보냈는지 아닌지는 경이 더 잘 알겠지.”

    퉁명스레 답한 황제가 키엘 스펜서를 향해 비꼬듯 말을 이었다.

    “놀랍구려. 도통 저택을 벗어나는 일이 없던 백작이 이리 나를 만나러 와 주다니.”

    키엘은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무릎을 꿇은 채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일들이라면 저 또한 들은 바가 있습니다. 고작해야 몇 가지 뜬소문들을 주워들었을 뿐인 제가 폐하의 크나큰 근심을 어찌 전부 이해하겠습니까마는, 수심 어린 용안(龍顔)을 뵈니 가슴이 아프군요.”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이 드물었던 제 어미와는 달리 입에서 술술 튀어나오는 말들이 꿀처럼 달짝지근했다.

    내 얼굴에 서린 수심에 가슴이 아파? 기쁨에 춤을 추는 게 아니고?

    가당치도 않은 말에 웃음조차 나지 않았다.

    “제국의 수호 방벽이 무너지고 아끼시던 7황자 전하의 행방마저 알 수 없게 되셨으니 어찌 마음이 편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픈 구석만 쏙쏙 골라 찌르는 상대의 말에 황제의 눈이 형형해졌다.

    말 몇 마디로 살심을 일으키다니. 정말이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반반한 낯짝을 치켜 든 키엘 스펜서가 유들유들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이럴 때에 폐하의 곁을 지키며 근심을 걷어 내 줄 유능한 인재들이 없다는 것이 참으로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경은 저택에 눌러앉아 있으면서 어찌 상황을 마치 그린 것처럼 상세히 알고 있나 모르겠소. 보이지 않는 곳에 심어 둔 눈과 귀가 대체 얼마일지 나로서는 가늠이 되지 않는구려.”

    “폐하께서 저를 그토록 높이 사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 싱글거리는 얼굴에 찬물을 끼얹어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말을 더 나누다가는 이성을 잃고 체통 없이 상대의 멱살을 잡게 될 것 같다는 생각에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온 게요?”

    “제가 연합군에 합류하고자 함을 부디 허락해 주십사 청하러 왔습니다.”

    예상하고 있던 말이 튀어나오자 황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입안이 씁쓸했다.

    젊고 생기 넘치며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는 맹수의 눈을 한 남자.

    자신도 한때는 저렇게 잘 벼려진 눈을 하고서 무슨 일이든 거침없이 달려들 때가 있었다.

    ‘내 자식 놈 중에 저런 이가 나오길 바랐지. 내 뒤를 이어 제국을 통치할 수 있게끔.’

    냉정한 이성을 지니고서 무슨 일이 있든 간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 유한 면과 단단한 면을 동시에 지닌 군주가 나타나 주길 바라며 오랜 세월 자리를 다져 왔다.

    인고 끝에 정한 후계가 성에 차지 않았어도, 이만하면 최선 이었다 만족하려 했건만.

    결국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그토록 그리던 ‘이상적인 군주’로서 두각을 드러낸 것이 자식뻘의 이복동생이라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황제의 눈이 가라앉았다.

    “경이 이렇게 내게 와 허락을 구하는 것을 보면, 단순히 입대를 하겠다는 뜻이 아니겠군.”

    “제게 군을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을 내려 주십시오.”

    “…….”

    “상실한 요새를 탈환하려면 정예가 필요합니다. 특히 자폭을 각오하고 덤벼들 만큼 강한 충성심과 뛰어난 실력을 갖춘 휘하를 이끌어야 하지요. 제게는 그러한 인재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모두 경의 손에 쥐고서 하나도 내어놓지 않은 채 공치사까지 차지하겠다?”

    감히 제가 가진 군사력으로 황제를 위협하려 하는가.

    제아무리 많은 타격을 입었어도 그는 제국의 황제였다.

    일개 백작 따위가, 그것도 선황의 호적에 들지도 못한 황실의 핏줄이 뻗댈 수 있을 만한 상대일 리 없었다.

    황제가 내뿜는 분위기가 급변하자 그의 곁을 지키던 근위 기사의 기세 또한 달라졌다.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 키엘이 입을 열었다.

    “저는 폐하께 증명하고 싶습니다.”

    “…….”

    “제가 어떠한 식으로 사람들을 통솔하고 다스릴지, 어떻게 상대를 굴복시킬지에 대해 제가 이제껏 그려 온 그림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이번 전쟁이 끝나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그의 뒤를 잇게 될 후계가 서서히 가려질 터.

    키엘은 황제 앞에서 그 후계 다툼에 참여할 기회를 달라 당당히 청하고 있었다.

    “내가 그리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

    그래서일까? 그를 대하는 황제의 어투 또한 달라졌다.

    “그리하실 겁니다. 폐하의 뒤를 이어 제국을 다스릴 완성된 후계가 없지 않습니까. 모두가 쓸 만해 보이는 원석일 뿐.”

    “…….”

    “폐하께서는 평생을 ‘군주’로서 살아오셨습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이들을 쳐 내셨지요. 그러니 그 냉정한 이성으로 판단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의 뒤를 이어 군주가 되는 것이 누구든 간에 아직 계속해서 다듬고 단련해야 한다는 것을.

    수많은 이들과의 경쟁을 통해 좀 더 날카롭고 단단하게, 때로는 부드럽고 유연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제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제국의 미래를 그려 볼 기회를.

    납득할 만큼의 결과를 맞이할 때까지 있는 힘껏 부딪힐 수 있게 해 달라는 그의 말에, 기나긴 침묵을 지키던 황제가 이윽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대에게 추가 원정군을 꾸려 연합군에 합류할 수 있게끔 권한을 내리지.”

    “폐하의 영명하신 판단에 감사드립니다.”

    고개를 조아린 키엘을 잠시 내려다보던 황제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이만 물러가 보시오.”

    손을 저으며 내린 축객령에 몸을 돌리던 키엘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창문 밖을 바라보는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실례이긴 합니다만, 좀 전에 폐하께서 나누시던 대화를 조금 듣고 말았습니다.”

    “무슨 대화 말이오?”

    “실종된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 말입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 그 아이가 경과 친분이 꽤 깊었더랬지.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키엘이 확신 가득한 어조로 단언했다.

    “수색대를 따로 파견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지금처럼 온 제국이 긴장감으로 가득 찬 상황에서, 황도를 들쑤실 일은 없는 편이 나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실종된 아이를 찾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오.”

    “황도 주변에 사람을 풀어 수색한들 찾을 수 없을 거란 뜻입니다.”

    “……?”

    황제가 다시 고개를 돌려 키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의아한 듯 미간을 좁힌 그를 향해 키엘이 가볍고 산뜻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폐하.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일련의 일들을. 그 모든 것의 배후가 이제는 본격적으로 드러났고, 전쟁이 터졌습니다.”

    “그랬지.”

    생각해 보면 가장 많은 공격을 받은 것은 하이클레어 후작가와 그에 관련된 이들이었다. 그들과 황실의 관계가 어그러진 것 또한 그러했고, 도로테아 본인이 직접 공격을 받기도 했다.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연합군에 합류했고, 교류가 잦았던 7황자 또한 실종된 상태이지요. 가히 위협을 느낄 만한 상황입니다.”

    황제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 그 애는 위협보다는 분노를 느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종결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식을 택하려 들겠지요.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겁이 없고 무모하며 인내심이 없는 아이니까요.”

    “경의 말은, 그러니까…….”

    “감히 폐하께 여쭙겠습니다. 가장 빠르게 전쟁을 종결시키려면 무엇을 해야 하겠나이까.”

    “글쎄, 아마도 종전을 하려면 어떻게든 결과가 나와야겠지.”

    “예.”

    스멀스멀 불안감이 기어 올라왔다.

    황제의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창백한 낯빛으로 조용히 물었다.

    “설마, 아닐 테지?”

    “아하하…….”

    키엘이 소리 내어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를 악문 황제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며 다시금 느릿하게 물었다.

    “경이 말하는 것이, 그러니까…….”

    “전장에 뛰어들었을 거라는 겁니다.”

    “…….”

    이런 미친.

    황제의 숨이 거칠어졌다.

    뒷목을 잡고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은 황제의 상태를 보면서도 키엘은 태연한 얼굴로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다만 좀 놀라운 점이, 그 녀석이 참을성 없는 편에 속하긴 해도 그만큼이나 게으른 구석이 있거든요. 누군가가 옆구리를 대놓고 찌르며 화를 돋우지만 않으면 전장까지 갈 만큼의 의욕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위기에 처한 제국을 구하겠다는 거창한 일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누가 녀석의 등을 떠밀었을지는 조금 궁금합니다. 전 그게 제가 될 줄 알았거든요.”

    만반의 준비까지 다 끝내 놓고 있었거늘.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키엘의 모습에 황제의 뒤를 지키던 친위기사가 질린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도대체가 제정신이 박힌 작자인가?’

    아무리 그래도 어엿한 귀족 영애를 두고 무엇이 어쩌고 저째?

    다른 이들의 시선이나 말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키엘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어렸다.

    “아무튼 기대되는군요.”

    그 아이와 전장에서 재회하게 될 날이.

    *   *   *

    바로 그 시각, 신에게 등 떠밀려 전장에 뛰어들게 생긴 도로테아는 온몸이 쑤셔 오는 낯선 감각에 눈을 떴다.

    뚝뚝.

    가장 먼저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흐릿한 시야 너머 비가 새는 천장이었다.

    눅눅한 곰팡이가 자리한 벽 한구석에는 균열이 가득했다.

    부석거리는 아래를 내려다보자 젖은 지푸라기들이 몸에 달라붙은 것이 보였다.

    “…….”

    이토록 열악한 환경에 놓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 때문일까.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아 이곳저곳 저려 오는 몸을 주무르며 두리번거리던 도로테아가 제 손을 들여다보았다.

    뻗어 올린 팔도, 눈에 비친 손도 어제 아침과는 전혀 다른 크기와 형태를 하고 있었다.

    어깨까지 오는 뻣뻣한 머리카락은 칠흑같이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낡고 해진 누더기에 가까웠다.

    몸을 일으키자 목에서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시야에 익숙한 십자가 목걸이가 보였다.

    “…….”

    말없이 목걸이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창고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깼네?”

    얼핏 보기로 열셋가량 되었을까.

    아직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의 소년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있었다.

    “비도 오는데 이런 날씨에 길거리에서 자다가는 얼어 죽어. 그 와중에 참 잘도 자더라.”

    그 말과 함께 그녀의 앞에 툭, 하고 놓인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희멀건 물이었다.

    “보아하니 며칠은 쫄쫄 굶은 모양인데, 이거라도 먹어 두는 게 좋을걸.”

    아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거대한 양갈비를 혼자 몇 대나 뜯고 왔는데.

    혀를 쯧쯧 차는 소년의 눈에 들어 있는 안쓰러움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갸웃하다 입을 열었다.

    “거울을 좀 가져와.”

    “거울?”

    이런 곳에 거울이 있을 리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반문하는 소년을 본 도로테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신 같으니.”

    도대체 날 어디로 보낸 거야?

    그녀의 곁에 서서 머뭇거리던 소년이 머리를 긁적이다 물었다.

    “그래서 넌 어디서 온 거야? 나이는? 이름이 뭐야?”

    이쪽을 바라보는 눈에는 호기심이 그득했다.

    와다다, 질문을 쏟아대는 소년의 말을 못 들은 척 도로테아는 눈을 감았다.

    ‘다행히 권속들과의 계약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고.’

    천천히 눈을 뜨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상아빛을 띤 조막만 한 아이의 손바닥 위로 머리카락 한 올이 내려앉았다.

    마치 까마귀의 깃털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이었다.

    ‘신의 안배라는 것이 이런 것이었나.’

    돌고 돌아 오랜 시간 끝에 돌아왔다.

    오래 전, 가문의 수많은 액을 삼키고도 살아남게끔 만들었던 ‘액받이’의 몸으로.

    육신 가득 흘러넘치는 강력한 혼력이 느껴졌다.

    이제 잡귀 따위를 달래어 그 힘을 취하거나, 계약을 맺어 대가를 통해 힘을 얻거나, 보통 사람들의 수십 배 이상의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기(氣)를 채울 필요도 없었다.

    이건 명재신의 몸이니까.

    ‘이제 와서, 내게 이 몸을 쥐여 주겠다고?’

    하긴, 차라리 잘된 것일지도.

    이 몸으로 무엇을 하든 간에, 더 이상 세간의 눈을 신경 쓸 필요는 없어졌으니까.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에게 주어졌던, ‘후작가의 아가씨’로서 지켜야 할 사회적 지위와 의무와 체면이 명재신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테니까.

    그것을 충분히 이해했음에도…….

    ‘더러운 기분은 가시질 않네.’

    게다가 하필이면 눈을 뜬 이곳은, 그 옛날 그녀가 갇혀 지내던 신당만큼이나 인간의 악의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끄아아-

    원귀들의 비명소리가 귀를 아프게 울려왔다.

    “혹시 너도 버려진 거야?”

    딱히 답을 바라고 물은 것이 아닌 듯, 소년은 착 가라앉은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도로테아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네 부모님도 참 너무하네. 아무리 그래도 이름 정도는 줄 것이지…….”

    마치 심란한 마음을 모두 이해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럼, 네 이름을 내가 지어 주는 건 어때?”

    “…….”

    “실은 말이지, 아주 가끔씩 상상해 본 적이 있었거든. 내게도 부모님과 동생이 있으면 어떨까, 하고.”

    마치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듯, 줄곧 아무런 반응이 없던 도로테아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용기를 얻은 듯 소년이 조심스레 제안했다.

    “사라는 어떨까?”

    사라.

    새로 주어진 이름은 퍽이나 흔해 빠진 이름이었다.

    그렇지만, 뭐 이것도 나쁘지 않나.

    손가락으로 코를 매만지며 꺼낸 제안에 도로테아는 별 반발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는 소녀를 바라보던 소년의 얼굴에 쑥스러움이 서렸다.

    “내 이름은 스탠이야. 보다시피 이 거처의 주인이지.”

    이게 거처였나? 그냥 창고가 아니라?

    도로테아가 새삼스러운 눈길로 주변을 훑자 스탠이 물었다.

    “그건 그렇고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든 거야? 이 주변에는 산적들도 있고, 여자애 혼자 돌아다니기에는 쉬운 길이 아니었을 텐데.”

    “신의 뜻으로.”

    심드렁한 말에 스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라고?”

    도로테아가 다시 한번 또박또박 소년을 향해 친절히 알려 주었다.

    “신의 뜻을 받들어 이 땅에 오래된 재앙을 거두러 왔다고.”

    가만히 소녀의 눈을 들여다보던 스탠이 숙연해진 얼굴로 말했다.

    “이미 정신 줄을 놓은 지 오래였구나, 너…….”

    몹시도 무례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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