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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62화 (162/242)

162화

필립이 갖고 온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후작과 펠릭스는 그 길로 곧장 입궁을 택했다.

에이든이나 데인, 에드윈은 물론이고 다이애나와 후작 부인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여 주변 지인들과 공유할 수 있을 만한 다른 정보들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요새가 함락되다니…….”

홀로 테이블에 앉아 꿋꿋이 식사를 이어 나가는 도로테아의 뒤에서 우드가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얼굴이 상황의 심각성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제국 전체가 뒤집어지겠어.”

근심 어린 그의 말대로, 다음 날이 되자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황제가 손을 쓰기도 전에, 7황자의 실종 소식이 제국 전역에 퍼진 것이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퍼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퍼진 소문은, 제국민들에게 충분한 공포를 심어 줄 만큼 자세하고 악의적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황실이 적극적으로 단속에 나서야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까닭이 있었다.

“상황이 낙관적이지 않으니까요.”

한쪽에는 로헨 왕국을, 그 측면에는 몬스터들이 날뛰는 거대한 산맥을 끼고 있는 변경의 요새는 ‘철혈의 성’이라 불렸다.

국의 건국과 동시에 세워진 철혈의 성은 단 한 번의 침입도 허용한 적 없었던 ‘저지선’이었다. 그런 그곳을 지켜 온 변경백과 7황자, 그리고 그들이 이끌던 군대의 실종은 많은 이들을 패닉 상태에 빠지게끔 만들었다.

제국에 의해 보호받고 있던 주변 도시 국가들은 물론이고, 비교적 먼 거리에 위치한 성국에서까지 나서서 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든 로헨 왕국이 움직이겠군요. 선전 포고를 할 수도 있겠어요.”

“작년 폐태자의 일 이후 일체 교류를 끊었을 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기는 합니다.”

“다들 언제나 그래 왔듯 제국의 승리로 끝이 나리라 믿었겠지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요새가 뚫릴 리는 없다고 말입니다.”

“그토록 현실 감각이 없으니 저들이 요새를 무너뜨릴 만한 힘을 기를 때까지도 전혀 눈치를 못 챈 것이 아니겠습니까!”

뒤늦게 사태를 두고 성토하는 자들도, 묵묵하게 침묵을 지키는 자들도 뾰족한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다급히 소집된 동맹국 간의 회의에서는 그 암담함이 더욱 눈에 보였다.

최근 몇 년간 갖은 사건들이 마치 우연의 일치처럼 얽히고설켜 제국의 중앙 정치를 흔들어 놓았던 것처럼, 이들 또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내부 사정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다들 연합군의 필요성만큼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황제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진즉부터 군을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7황자의 건의를 듣지 않았던 것이 이토록 후회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포함해서 다들 지나치게 평화에 젖어 있었던 모양이야. 오로지 그 아이만이 이 모든 것들을 예견하고 있었던 게지.”

씁쓸하게 고개를 저은 그는 비교적 단호하고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   *   *

황제의 이름으로 내려온 징집령에 당연하게도 제국이 들썩였다.

전장에서 멋들어진 활약을 선보이고 공을 세워 가문을 일으키려 하는 자들보다는, 어떻게든 이 아수라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궁리하는 자들이 더 많았다.

물론 황제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 누구도 사정을 봐주어서는 안 된다. 특히 기사 작위를 받은 자들이라면 적극적으로 연합군에 합류할 수 있도록 독려하라.”

황제가 이리 나오니 대영주들 또한 마지못해 가문의 사병들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이클레어 후작은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서 군을 통솔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황제 옆에서 흔들리는 정치적 상황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펠릭스와, 그의 장남인 에드윈을 제외한 후작가 남자 대부분이 모두 군에 합류했다.

다이애나는 자선 파티를 열고 귀부인들을 독려해 군수품 및 군비를 모았다.

도로테아는 저택 가장 위층의 다락방에서, 다들 바삐 움직이는 것으로 ‘떠나보내는 슬픔’을 잊고자 하는 저택의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린 벤이 조심스럽게 딸아이가 머무르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 봐도 참 적응하기 어렵군.’

코끝을 얼얼하게 만들 만큼 짙은 향으로 가득한 방의 모습은 독특하기 짝이 없었다.

화려한 색감의 탱화도, 주인 없는 신의 명패도, 향이 꽂혀 있는 향로와 옥수그릇 따위의 물건들도.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탱화 속 장군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벤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딸아이를 향해 다가섰다.

후원에 가득 모인 부인들을 내려다보는 소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던 그가, 딸아이의 손에 데인이 건넨 단검이 있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모두 무사히 돌아올게야.”

“알아요. 걱정에 잠겨 있다고 한들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다들 무사히 돌아오길 바란다면 외숙모들처럼 보탬이 되게끔 노력하는 것이 현명할 거예요.”

턱을 괸 채 나직이 대꾸하는 도로테아의 말에 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현은 서툴어도 아이가 자신의 가족들을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옆에 떠 놓은 맑은 물을 흘끗 바라본 벤이 머뭇거렸다.

차분한 딸아이의 눈을 마주하자 하고자 했던 말이 쉬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곁에 있는 많은 이들을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곳으로 떠나보낼 예정이었으니까.

“아버지도 가시려고요?”

불쑥 꺼낸 말은 담담했다.

머뭇거리던 벤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가지 말라는 말도, 그렇다고 잘 다녀오라는 말도 없이 그저 눈을 내리깐 채 침묵하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후작 가문에서는 이미 폐하께서 권유하신 징집 인원을 충분히 채웠어요. 할아버님께서 개인적으로 내어놓은 군비는 물론이고, 둘째 외숙모께서 여는 자선 사업만 하더라도 규모가 상당하죠.”

“테아야.”

“가지 않으셔도, 그 누구도 감히 아버지께 비난의 말을 건넬 수는 없어요.”

하이클레어 후작가에서는 언제나 제국이 요구하는 것 이상을 해 왔으니까.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벤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설령 합류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공을 세울 수 있을 거라고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겠지.”

“공 같은 것은 세우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당신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전생에 받지 못한 아비의 사랑을 그 이상으로 건네어 주는 인간에게 그녀는 ‘인간’의 감정을 배웠다.

애정을 받는 법도, 주는 법도.

벤은 눈을 느릿하게 끔뻑이는 딸의 뺨을 쓸어 주었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없는지보다는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어째서요?”

“네가 이곳에 있으니까.”

하나뿐인 내 딸아이가 안전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네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제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제국이 충분히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길 바라기 때문에.

“상황을 모면하고자 눈앞에 보이는 것을 외면하면 더 큰 문제가 되어 돌아오는 법이란다.”

“…….”

“내가 끼치는 영향력이 설령 미미한 수준이래도, 가만히 숨어 있고 싶지는 않구나.”

다정하고 애틋한 아비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눈을 마주하고 있던 도로테아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무릎에 제 머리를 기댔다.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부리지 않던 어리광에 벤은 말없이 딸아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벤이 조심스럽게 저택을 떠난 그날 저녁, 도로테아는 줄리앙이 주었던, ‘성녀’가 건넨 물건을 손에 쥔 채 신전을 찾았다.

거대한 돼지 한 마리를 산 채로 등에 짊어진 우드와 함께.

*   *   *

기도실에 앉아 무릎을 꿇은 채 신께 기도를 올리고 있던 대신관은 복도를 가득 메우는 발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벌컥 열린 기도실 문으로 신관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경박하구나. 기도실을 들어올 때에는 정갈하게 숨을 고르고…….”

“그럴 때가 아닙니다, 대신관님!”

몹시 다급한 얼굴을 보자 대신관 또한 덩달아 심각해졌다.

“무슨 일이냐? 혹 성국에서 연락이 온 게냐?”

온 대륙이 뒤숭숭하게 들썩이는 마당에 어떤 소식이 들려오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다그치듯 묻는 대신관의 말에 막 답을 하려던 찰나였다.

꾸웨에에-!

신전 복도를 가득 울리는 정체불명의 소리에 대신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무슨 소리냐?”

“그것이 말입니다.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께서…….”

당혹스럽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는 신관이 말을 잇기도 전에 복도에서 쿵쿵 발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들리던 정체불명의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꾸우, 꾸웩! 꾸웨에에에엑!

고요한 복도를 가로질러 들려오는 괴물 같은 소리에 대신관의 뒷목이 서늘해졌다.

신을 모시는 신전에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란 말인가.

우물우물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신관을 슬쩍 밀어낸 그가 복도로 고개를 내민 순간이었다.

“…….”

소리를 자아내는 이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대신관이 할 말을 잃었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아름다운 소녀의 뒤로, 남자의 어깨에 둘러메어진 거대한 돼지가 미친 듯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

도로테아가 우아하게 제 드레스의 양쪽 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혀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대신관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오?”

황망한 듯 자리에 우뚝 선 채로 아무 말도 잇지 못하는 대신관을 본 소녀가 웃는 얼굴로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전에 대신관님께서 권하신 대로 신에게 기도를 올리러 왔어요.”

“아, 아니, 영애. 경건하게 기도를 올려야 할 곳에 어찌 돼지를 산 채로 잡아 왔단 말이오?”

“물론 산 제물을 바치기 위해서지요.”

“뭐라?”

대신관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뭘 갖다 바친다고? 산 제물?

그의 눈이 남자가 어깨에 둘러멘 사람만 한 돼지를 바라봤다.

도로테아는 어깨를 으쓱하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암컷과의 교미 경험이 없는 검정 수퇘지예요. 특별히 목청이 가장 크고 대단한 놈으로 골라 왔으니, 신께도 비명이 잘 닿을 거라고 봐요.”

(*혼술사들은 접신에 앞서 산 제물을 바치며, 그중에서도 특히 교미 경험이 없는 꺼먹 돼지의 마지막 단말마가 크면 클수록 높은 신을 부를 수 있다고 여긴다.)

“…….”

이게 도대체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대신관이 재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신전에서는 산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고 타이르려던 그때였다.

도로테아가 제 손에 쥔 것을 들어 보였다.

대신관은 의아한 얼굴로 천에 꽁꽁 감춰진 물건을 바라보았다.

“성녀께서 제게 주신 물건이에요. 신의 말씀을 들을 때에 지니셨던 신물 같은 것이라고 하셔서, 신께 기도를 올릴 때에 분명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그건 충분히 성의가 넘치는 일이로군요.”

조마조마한 얼굴로 대화를 듣고 있던 신관이 힐끗, 몸부림치는 새까만 돼지를 불안하게 바라봤다.

기도실의 문을 막고 선 대신관이 온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성녀께서 주신 신물이라니. 후작 영애는 큰 축복을 받으셨군요. 거기에 기도를 올리려 오셨다니 저로서는 기쁠 따름이지요.”

“그럼 기도실로…….”

“그 전에.”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명했다.

“돼지를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보내 주고 들어오십시오.”

“신단에 올려다 놓고 멱을 따서 그 피를 바치지 않고요?”

“돌려보내세요.”

도로테아의 얼굴이 불퉁해지는 것을 본 우드가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

“거봐라, 내가 이건 아니라고 했지.”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를 돌아선 그녀가 자신의 권속을 향해 명했다.

“숲에다 풀어 주고 와. 민가에 놓아주면 괜히 또 문제가 될 테니까, 깊은 숲에 풀어 줘.”

꿰엑, 꾸에엑.

자유를 얻게 되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돼지의 처절하던 비명 소리가 한결 잦아들었다.

점차 멀어지는 돼지를 바라보던 신관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이, 대신관은 도로테아에게 자신이 쓰던 기도실을 내주었다.

“신께서는 산 돼지의 피가 아니라, 영애의 정성 어린 마음을 보십니다.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리면 그러한 제물 없이도 응답해 주실 겁니다.”

“마음만 보나요?”

“그렇습니다.”

“마음만요?”

“예.”

대신관에게 명확한 답변을 얻어 낸 도로테아가 화사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에요. 최근 제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로 지출이 많았거든요. 신께서는 오롯하게 마음만 보신다니, 외숙모께서 신전에 기부하려던 성금을 군에 합류할 아버지께 보내 드릴 수 있겠어요.”

“…….”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린 대신관을 가볍게 지나쳐 기도실로 향한 소녀가 문을 닫았다.

모여든 신관들 모두 눈을 끔뻑이며 대화 내용을 곱씹어 보고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거, 당한 것 같지 않아?’

‘내가 봐도.’

‘영애는 처음부터…….’

신전에 기부금을 내기 싫어서 일을 벌인 게 아닐까.

다들 차마 말은 하지 못했지만 확신 어린 눈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 방 거하게 먹은 대신관이 허탈한 얼굴로 성호를 그으며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혹여 기도실 주변을 얼쩡거리다 저 만만치 않은 소녀에게 또 다른 꼬투리를 잡히거나 무언가 떼어 먹히게 될까 두려웠던 신관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덕분에 기도실 앞 복도는 텅 비게 되었고, 그 누구도 기도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눈부신 빛을 목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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