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도로테아는 당장이라도 혼을 삼킬 듯 너울거리는 탁한 기운을 바라보았다.
그냥 이대로 숨통을 끊으면 파비안을 괴롭히는 끔찍한 고통은 사라질 터였다.
고통을 견뎌 내고 살아남아 봤자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수많은 이들의 손가락질과, 한 번 타락했던 혼의 자리를 노리는 여러 잡귀들뿐.
그렇지만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부정한 기운에 제 육신마저 물들여 버린 자는…….
‘내세에서조차 구제받지 못해.’
그러니 도로테아는 파비안에게 직접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제까지의 삶이 남긴 무게에 짓눌려 괴로운 삶을 살아 나갈지, 끔찍한 고통에서 해방되지만 영원히 삶의 기회를 잃을지.
당장의 고통을 피하고 싶어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을 택할 거라고 여겼었는데.
그럼에도 그녀는 삶을 선택했다.
“좋아요, 그럼.”
본인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짊어진 삶을 살아 보면 알게 되겠지.
오늘의 이 선택이 옳았는지, 아닌지.
무령 소리에 맞춰 손을 움직이던 도로테아가 해사하게 피어나는 검은 백합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움켜쥐듯 시늉했다.
“으, 으!”
끔찍한 고통이 밀려들자, 이를 악문 채 견디던 파비안은 결국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했다.
“그, 그녀는 괜찮은 건가요?”
멀찍이 떨어져 있던 메릴린이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족히 몇 시간 동안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본 메릴린의 눈에는 옅은 연민이 서려 있었다.
“괜찮아요. 아마도.”
“그렇지만, 검은 꽃이…….”
활짝 개화하기 바로 직전에 멈춘 검은 백합은 여전히 파비안의 목을 뒤덮고 있었다.
“저주가 아니라 종속의 인이에요.”
“지울 수는 없나요?”
흘긋 내려다본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에 뿌리를 내린 인장은 시전자의 의지가 아니라면 제거할 수 없어요.”
“그건…….”
메릴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파비안처럼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 것을 즐기던 영애에게 인장을 지닌 채 살아가야 한다는 건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시전자를 찾아낼 순 없겠죠?”
“글쎄요.”
도로테아는 애매한 답으로 말을 아꼈다.
목에 너울거리는 누군가의 ‘흔적’은 아주 익숙한 향을 머금고 있었다.
‘실력이 많이 늘었네.’
혼에 주술을 새기는 것은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심지어 상대가 먼 거리에 있다면 더더욱.
‘그때 살려 보내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
아니.
그때로 돌아가도 도로테아로서는 똑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알렉세이를 처리하는 것은 쉬웠지만, 그 과정에서 무리하게 코니움까지 쳤더라면 되레 덜미를 잡히는 건 자신이었을 테니까.
클레이브를 그렇게 쫓아내듯 보낼 수 있었던 것도 키엘이 그녀를 도운 덕분이었다.
‘그 탓에 반쯤 강제적으로 연금 상태이긴 하지만…….’
그것만 해도 저들이 얼마나 질기고 독한 상대인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회복도 되지 않은 몸으로 힘을 써 상대를 제거했더라면 그녀 본인의 안위도 장담하지 못했을 터.
미래의 불행을 막고자 온몸을 던져 희생했어야 할까?
마치 소설 속의 정의감 넘치는 영웅들처럼, 그렇게?
파비안을 걱정스레 살피는 메릴린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도로테아가 툭, 한마디 던졌다.
“걱정 말아요. 당장은 아니어도 곧 보게 될 테니까.”
그때가 되면 아마 알 수 있겠지.
손안에 들어왔던 그녀를 고이 돌려보냈던 것이 옳은 결정인지, 아닌지.
* * *
재판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일들이 순순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4황자야 어찌 법망을 피해 간다 하더라도 4황자비와 그녀의 오라비까지 법의 지엄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특히 납치극의 주범이자 이교도로 지목된 케빈 던컨의 경우에는, 제국과 성국에 이중 고발된 인물로서 그 죄가 더 중하게 다루어졌지만…… 재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던컨 상회를 급습했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었다.
“애초에 파비안을 통해 모든 상황을 듣고 보고 있었을 테니까.”
성녀의 발현 이전에 꼬리가 잡혔음을 알고 곧바로 내뺐겠지.
상회 가장 깊숙한 금고에서는 뜻밖에도 4황자비가 엉망이 된 꼴로 발견되었다.
누군가에게 심각하게 얻어맞은 듯 온몸이 멍투성이가 된 그녀를 본 4황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타게 그의 비를 끌어안았다.
망가진 그녀를 궁으로 데려온 황자가 애원했다.
“제발 황자비를 살려 주십시오, 폐하.”
머리를 조아린 채 고하는 4황자를 내려다보던 황제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벤 경에게 이미 들었다. 그녀가 일부러 밀수선 안에 물건을 남겨 두지 않았더라면 던컨 상단의 꼬리를 잡기 쉽지 않았을 거라고. 그 때문에 황자비는 자신의 하나뿐인 오빠에게 버림받은 셈이 되었지.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저지른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그녀는 황자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그를 유혹했다.
도중에 변심하였다고는 하나, 그녀를 제국의 황자비로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령 죄가 감면된다고는 하더라도 황자비 자리에서는 내려와야 할 터.
“계승권을 포기할 겁니다. 저는 그저 그녀와 함께 살 수 있으면 족합니다. 누려 온 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가진 것을 내려놓겠습니다.”
착잡하게 아들을 내려다보던 황제는 가만히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가 그녀를 위해 기꺼이 가진 지위를 포기하겠다면 말리지 않으마. 어차피 마음이 없는 아이를 붙잡아 두어 봤자 소용없을 터이니.”
사랑에 휘둘려서 제국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세력을 들인 것부터가 ‘황위 계승자’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할 만한 사안이긴 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고개를 조아리는 아들을 착잡하게 바라보던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못났어도 제 아들이었다.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이상 제국의 황제와 백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 버렸지만.
끈끈했던 연이 또 하나 사라진 허무함이 그의 가슴을 쓰리게 만들었다.
“폐하.”
얼마나 오랜 시간을 홀로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그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어느새 많은 이들이 알현실에 들어서 있었다.
황제의 시선이, 쭈뼛거리며 도로테아의 손에 매달려 있다시피 한 어린 성녀에게로 향했다.
아이는 낯선 곳에서 모르는 이들의 시선을 받는 것이 불안한지 제 몸을 반쯤 도로테아의 등 뒤로 숨기고 있었다.
“아가, 이리 오련?”
황제의 부름에 천천히 다가가는 성녀의 뒤를 검을 쥔 사도가 뒤따랐다.
마치 성녀의 한마디에 이곳에 있는 모두를 베어 버릴 수 있다는 듯, 검집에 손을 대고 있는 모양새가 광오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네 이름이 뭐라 하였지?”
물음에 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성녀를 대신해 도로테아가 알려 주었다.
“힐데가르트 제노사이더. 정식으로는 ‘힐데가르트 제노사이더 앤더 스트라이더’가 되겠네요.”
순진무구하게 눈을 끔뻑이는 어린 소녀를 바라보던 황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지금이라도 네 아비를 족쳐…… 아니, 평화로운 대화를 통해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겠구나.”
“별로예요?”
눈을 뜨자마자 생긴 ‘새로운 이름’이 내심 마음에 들었던 그녀는, 제 이름을 들을 때마다 얼굴에 그늘이 지는 어른들로 인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혹여 그 이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여 뒤를 돌아 소녀가 물어본 상대는…….
“아주 훌륭한 이름입니다. 힐데가르트는 오래전 돌아가신 성전사의 이름이기도 하지요. 그분께서 검을 들 때마다 간악한 이교도의 무리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쳤다고 합니다.”
“와…….”
“신을 우습게 보는 자들에게 무서움을 알리고 단죄하기에 알맞은 이름입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는군요. 우리 모두, 마땅히 심판의 그날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필이면 광전사로 소문난 성국의 사도였다.
프란체스코가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소녀를 ‘우러러보며’ 말하자 어린 힐데는 몹시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름으로 할게요.”
눈을 질끈 감은 황제는 하필이면 이곳에 없는 7황자에게 속으로나마 욕을 퍼부어 주었다.
군비를 지원받고자 혼인도 전에 호적에다 애를 달랑 올리는 만행을 저지른 것은 그렇다 쳐도, 그렇게 애를 책임지기로 했으면 이름이라도 잘 짓든가.
“정녕 내가 자식 농사를 잘못 지은 것인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자식이라고는 하나, 참으로 곤란하도다.”
한탄 같은 말과 함께 어린 소녀를 무릎 위에 올린 그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바뀌었다.
힐데는 그런 황제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도로테아의 말을 떠올렸다.
“네게 되도록 많은 자유를 주고 싶었어. 네가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주고 싶어서. 그렇지만 이제는 그러기에는 조금 어려워진 것 같네.”
“왜요?”
“네가 가진 그 힘 때문에.”
“…….”
“이제야 알겠구나. 어째서 로헨의 국왕이 널 궁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는지. 방치했다 하기에는 교육을 시키고, 아꼈다기에는 곁에 두지 않았지.”
너는 최후의 보루이자, 그의 희망이었구나.
그렇게 말하며 쓰다듬어 주는 손길은 늘 그렇듯 다정하고 따스했다.
그런 그녀가 가르쳐 준 길이었다.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스스로가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한 결과를 책임져야만 했다.
“이 이름이 좋아요. 저는 이 이름을 쓸래요.”
강한 사람이 되어서 얼른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지.
어린 성녀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본 황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양육은 전적으로 윌리엄에게 맡기게.”
“예.”
“그리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루크에게서 아이에게 서신이 오면…….”
황제가 곁에 있던 측근을 향해 속삭였다.
“열어서 확인해 보고 나서 건네게.”
군비를 늘릴 수만 있다면 호적도 이용하는 놈인데, 군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애를 전장 한복판에 데려가 성녀의 기적을 일으키라 할지도 몰랐다.
하필이면 아버지라는 이름에 전혀 걸맞지 않은 자식 놈이 성녀의 아버지라니.
“참으로 말세로다.”
* * *
도로테아는 힐데의 손을 잡고 윌리엄의 궁까지 함께 걸었다.
어린 성녀는 여전히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해하려 애썼다.
“주드는요?”
“네가 부른다면 이 궁으로 오게 될 거야.”
로헨의 왕녀를 빼 가서 멋대로 제국 황실 호적에다 박은 셈이니 욕은 좀 먹을 테지만.
어차피 성녀로서의 능력을 자각하게 된 이상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성국에 빼앗겼더라면 평생을 교황청 안에서 갇혀 살다 죽었겠지. 그저 신의 권위를 높이는 새장 안의 꾀꼬리로 사육당하면서.
“미네도 여기 올 수 있어요?”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조심스레 물었던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도로테아는 저 멀리 소식을 듣고 배웅 나온 윌리엄을 발견하고는 곧장 그에게로 다가갔다.
“상태는 어때?”
“좋지 않아.”
발견될 때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던 4황자비는 신관들이 치유력을 퍼부어도 좀처럼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헨드리는 반쯤 미쳐 가고 있고.”
황자의 자리를 내려놓을 만큼 사랑하는 여인이 죽어 간다는데 당연한 거겠지.
흘끗, 시선을 돌린 도로테아가 저를 바라보고 있는 힐데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이분은 네 숙부란다. 윌리엄 숙부라고 부르면 돼.”
천천히 몸을 굽혀 아이와 눈을 맞춘 윌리엄이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안녕, 힐데? 우리는 초면이지?”
다정한 숙부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가 수줍게 몸을 꼬았다.
“숙부와 함께 차라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게 어떨까?”
힐데의 등을 떠밀어 윌리엄과 함께 응접실로 보낸 도로테아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4황자가 머무르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이쪽입니다.”
복도 끝에서부터 들려오던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커졌다.
문을 열자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만큼 지독한 탁기가 그녀를 휘감았다.
“아아.”
이미 혼이 먹히고 있는 4황자비, 플로렌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등에 만개한 장미가 한 장 한 장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플로렌스……!”
흐느끼는 4황자를 밀어낸 도로테아가 천천히 다가섰다.
그녀의 뒤를 가만히 뒤따르던 우드가 착잡한 얼굴로 한때 제가 납치했던 4황자비를 살폈다.
한눈에 보아도 파비안보다도 훨씬 더 끔찍한 상태였다.
“되돌릴 수…… 있는 건가?”
“애초에 산 제물로서 바쳐진 육신을? 글쎄.”
도로테아가 그녀의 어깨에 만개해 있는 장미를 노려보았다.
야금야금 생기를 먹어치우는 잡귀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인을 가만히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불쑥 말을 꺼냈다.
“너, ‘업신’이란 게 뭔 줄 알아?”
제게 던져진 뜬금없는 물음에 우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제 뒤에 선 호위의 입에서 답이 나오든 말든 말을 이어 나갔다.
“아주 오래된 금기의 주술이지. 처음에는 그저 가볍게 공물을 바치는 것으로 시작해. 기쁜 일이 있을 때에는 환희의 기도를 올리고, 악재가 있을 때에는 정성을 다해 화를 풀어 주고자 어르고 달래지. 그저 터에 머물렀던 작은 기운은 사람들의 숭배를 먹고 자라나 업(業)에 관여할 수 있는 신이 돼.”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래 살아온 집에 자리한 터주신이나, 오래된 자연물에 깃드는 령들이다.
“이교도도 마찬가지야. 사람이 받들고 숭배하는 마음들이 하나둘 모여 커다란 힘을 가진 ‘신’이 되지.”
물론 그렇게 급조하듯 만들어진 신이 큰 힘을 갖고 있을 리 만무할 터.
기적을 선보이든 뭐든 해서 신을 성장시켰어야 했을 테지.
눈앞의 여인은 살아 있는 숙주로서 만들어진 신을 성장시킬 제물이었다.
“방법은 없나? 그 파비안인가 뭔가 하는 영애는 살렸잖나.”
“그녀는 인장이 육신에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적어도 혼에 뿌리내린 인장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지도, 이미 생기를 많이 빼앗기지도 않았어.”
아마도 프란체스코가 곁에 있었던 영향도 있겠지.
썩어도 준치라고, 그가 가진 신성력이 파비안의 육신에 깃든 부정한 기운을 어느 정도 억눌러 주었을 테니.
“그럼 방법이 없는 건가?”
우드의 무거운 물음에 4황자가 고개를 저었다. 하나뿐인 비를 잃게 된 그의 얼굴에는 절망이 그득했다.
도로테아가 천천히 그녀의 쇄골을 더듬었다.
만개한 장미 아래로 작은 꽃봉오리 하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가만히 그 꽃봉오리를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느릿하게 말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무슨 방법인가?! 제발 도와주게. 내 아내를 살려만 준다면…….”
고개를 든 도로테아가 우드를 향해 명했다.
“콜린을 불러와. 그리고 저 시끄러운 황자를 데리고 나가.”
번잡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