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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57화 (157/242)
  • 157화

    놀랍다 못해 파격적이기까지 한 말에 다들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모두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도로테아는 태연한 얼굴로 기절한 아이를 토닥였다.

    “자아,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그녀 옆에 조르륵 앉은 미네가 걱정스러운 듯 어린 왕녀를 내려다보았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대신관이었다.

    “도대체 그 무슨 무도한 말입니까? 영애의 말은 성녀께옵서 황실의 피를 타고났다는 겁니까?”

    황제조차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테아야, 그 아이는 분명 네가 데려온 아이가 아니더냐. 스펜서 영지로 내려가던 길에 우연하게 네게 도움을 청해 몸을 의탁했다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복잡한 얼굴을 한 채 말을 잇는 황제의 눈이 어린 성녀에게 머물렀다.

    분명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동시에 묘한 흥분감과 희망이 솟아올랐다.

    이 일에 4황자가 엮여 있다는 사실만으로 속이 문드러지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나마 손해라도 덜 보는 방향으로 어떻게든 일을 수습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뜬금없이 각성한 성녀가 황손일 가능성이 있다니.

    ‘사실이기만 하다면 몹시 기쁜 일이지.’

    황제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본 대신관이 서둘러 입을 열기도 전에, 무릎을 꿇고 있던 프란체스코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헛소리 그만하시지요, 후작 영애. 이분께서 황실의 핏줄일 리 없잖습니까,”

    “어머나, 저는 아이가 황실의 핏줄이란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답니다.”

    도로테아가 생긋 웃자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좀 전에는 분명…….”

    “핏줄이 아니어도 황실의 계보에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있으니까요.”

    부드러운 대꾸에 다들 생각에 잠겼다.

    그때, 도로테아의 곁에 서 있던 펠릭스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몇 달 전부터 7황자 전하와 서신을 주고받는 횟수가 잦아진 것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분이 필요하다고 다그쳤다고 한들, 네가 아무런 대가 없이 그 많은 군비를 지원했을 리 없지.”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던 에드윈이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로 서둘러 입을 열었다.

    “테아, 너 설마 7황자 전하와 군비를 가지고 거래한 거야? 그분께서 이 아이…… 아니, 이분을 입양하셨어?”

    “말도 안 됩니다.”

    대신관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황자가 직접 자신의 딸로 입양한다면 그녀의 신분이 평민이라 하더라도 황실 족보에 올라가는 것이 가능하긴 했다.

    그러나 핏줄도 아닌 양녀를 황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입양 절차는 몹시 까다로웠다.

    황제의 윤허는 물론이고, 귀족원의 회의를 거쳐 신전에도 통보되어야 했다.

    “양녀라니요. 들어 본 적 없습니다! 일개 황자가 폐하의 윤허조차 받지 않고 멋대로 양녀를 본인의 호적에 올렸단 말입니까?”

    대신관의 목소리가 흥분 탓인지 높아졌다.

    그런 그의 의견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사도 프란체스코가 다소 서늘한 눈으로 덧붙였다.

    “게다가 황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면 반드시 신전에서 ‘세례’를 받는 과정을 거쳐야 하지 않습니까.”

    그 과정에서 그녀가 ‘성녀’임이 밝혀졌다면 황실은 그녀의 신변을 고스란히 성국에 인계해야 했을 터.

    어느 쪽으로든 정당한 절차 없이는 합법적인 양녀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대신관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7황자 전하와 어떠한 대화를 나누셨건 간에, 성녀께서 발현한 이후로는 그 어떤 조건이나 거래도 무효화됩니다. 감히 신의 선택을 받은 분을 한낱 인간들의 거래에 엮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성녀의 신변은 이제부터 저희가 보호하지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편에 대치 중이던 성기사들이 형형한 살기를 내비치며 다가왔다.

    프란체스코가 어린 왕녀를 품에 안으려 손을 뻗은 순간, 도로테아는 자연스레 그를 밀어냈다.

    “미안하지만 이미 법적인 절차는 ‘발현 전에’ 마무리되었답니다.”

    모든 이들의 눈이 도로테아의 품에서 나온 한 장의 서류로 향했다.

    7황자 루크의 정식 서명과 함께 찍혀 있는 인장을 본 황제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을 벌렸다.

    “영명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변경의 혼란을 정돈하러 떠나는 7황자 전하께, 그가 일전에 겪었던 곤란함이 반복되지 않게끔 ‘절대적 자치 권한’을 부여하셨지요.”

    원정군 내부에서 일어나는 군사 비리는 물론이고, 그에게 협조하지 않는 변경의 타 영주들을 ‘윤허 없이’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파격적인 권한을 두고 귀족들은 강하게 반발했지만, 때마침 폐태자의 군 비리와 악습이 드러났던 때였던지라 강행할 수 있었다.

    오로지 ‘총사령관’의 지위에 있는 루크에게만 주어지는 자치 권한.

    “원정군 내에서 갖는 절대적 권한을 ‘황제에 준한다.’라고 하셨으니, 황족이자 절대적 권한을 갖춘 7황자 전하가 입양 절차를 간략히 생략한 채 아이를 호적에 들이는 것도 가능하지 않나요?”

    그녀의 말에 대신관이 눈을 부릅떴다.

    곁에 있던 다른 노회한 귀족이 머리가 아픈 듯 고개를 흔들었다.

    “폐하께서 권한을 내리신 까닭은 애초에 7황자 전하의 통솔권을 보장해 주고자 함이거늘, 이건 너무 막무가내가 아닌가.”

    성녀를 제국에 둘 수 있다면 확실히 나쁠 것이 없지만, 지나친 우격다짐은 자칫하면 전면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심지어 이 자리에는 성국의 사도까지 자리하고 있지 않는가.

    도로테아는 성기사들의 형형한 살기와 압박에도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아시겠지만 폐하께서도 신경을 쓰실 만큼 이번 원정은 몹시 중요했지요. 7황자 전하께서도 전에 없을 만큼 강한 부담감을 갖고서 출전하셨고요.”

    “…….”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느라 부담감에 짓눌린 7황자 전하께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자 바랐던 것은, 다름 아닌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위안이 되어 줄 가족입니다. 바로 그분의 어린 따님이시지요.”

    “……?”

    술술 흘러나오는 도로테아의 말에 홀렸던 사람들이 7황자를 떠올리고는 정신을 차렸다.

    어깨에 무거운 짐? 강한 부담감에 짓눌려?

    누가? 걔가?

    심지어 그의 친부인 황제조차도 도로테아의 말에 차마 동조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7황자 전하께서 최선을 다해 제국의 안정을 되찾아 주길 바라며 전권을 부여하셨습니다. 어린 딸의 존재로 하여금 그가 자신의 직책에 더욱 책임감을 느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닌가요?”

    도로테아가 주섬주섬 7황자가 직접 보내온 서찰을 내밀었다.

    “보세요. 직접 이름도 지어 주었습니다.”

    제노사이더 힐데가르트(Genocider Hildegard : 전장의 대량 학살자)

    “…….”

    “허, 허어…….”

    하얀 종이 위, 검은 잉크로 수놓은 선명한 글씨를 보는 순간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누가 저 어린 성녀에게 저따위 흉폭하고 끔찍한 이름을…….

    “필적 조회 따위는 필요 없을 성싶구나. 내 아들의 짓이 확실하니.”

    지극히 7황자다운 작명에 황제가 조용히 탄식했다.

    하다못해 누군가와 상의라도 좀 하고 이름을 지을 것이지, 어쩌자고 살아갈 날이 창창한 아이에게 저런 이름을 지어 줬단 말인가.

    도로테아는 어느새 부스스 눈을 뜬 어린 왕녀를 부드럽게 일으켜 세웠다.

    “힐데, 일어나 보렴.”

    “…….”

    아이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떨떠름하고 불편한 눈초리로, 누군가는 몹시 열망하는 눈초리로.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은 사도의 눈이 집요할 정도로 ‘힐데’를 쫓자, 움츠러든 그녀는 도로테아의 옷소매를 꾹 붙들었다.

    “아무리 7황자 전하와 어린 성녀께서 부녀의 연을 맺으셨다 하더라도 지금은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모두가 목도할 만큼 강력한 신성의 빛을 보여 준 성녀를 어찌…….”

    평소 신실하기로 유명한 빙엔 자작의 말에 도로테아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렇다면 자작께서는 정식으로 이 사안에 이의를 제기하시는 건가요? 이미 마무리된 입양 절차를 무효화하도록요?”

    “…….”

    늙은 자작이 복잡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신을 섬기고는 있지만 그 이전에 그 또한 제국의 귀족이었다.

    후계 구도가 정리되지 않은 제국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상황인지, 이 틈을 타 성국에서 제국의 황제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성녀의 존재가 흔들리는 제국을 다잡을 좋은 구심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다들 팽팽하게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무렵, 신중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는 대신관을 대신해 프란체스코가 입을 열었다.

    “신의 계시를 받아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자 내려오신 성녀이시여, 제게 명을 내려 주십시오. 당신의 명이라면 무도한 자들을 무릎 꿇리고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자리에 당신을 세우겠습니다.”

    굳이 제국의 황자 따위가 내린 이름에 얽매일 필요도, 저 늙은 황제의 손녀가 될 필요도 없게끔.

    그녀를 이용하고자 하는 이들을 모조리 도륙 내고서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머무르도록.

    어린 힐데는 제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사도와 가볍게 묵례하는 성기사들을 향해 어쩔 줄 몰라 하다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있을 거예요.”

    프란체스코의 눈이 음울한 빛을 띠었다.

    “성녀께서 머무르셔야 할 곳은 신의 성전입니다.”

    도로테아의 옷깃을 잡은 조그마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를 아프게 했던 낯선 무리의 사람들이 떠올랐다.

    잘 지내고 있던 그녀에게 다가왔던 이들은 끔찍한 액체를 뒤집어씌우고 이상한 주문 따위를 외웠다.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극한의 고통과 무력감이 반복되었다.

    흐려져 가던 의식 속에서 그녀의 손을 잡아 준 것은 도로테아 한 사람뿐이었다.

    “저는 이곳에 남을 거예요.”

    도로테아는 제게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해 보라 말했다.

    무엇이든 경험하고, 생각하며,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가 직접 결정하라고.

    그것이 어린 왕녀가 ‘왕녀로서의 이름’을 빌려주고 받은 대가였다.

    ‘그러니 나는 요구할 권리가 있어.’

    겁먹은 얼굴로 힐데가 사도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성국엔 안 가요.”

    7황자는 무서워 보였지만 한 번도 제게 해를 끼치거나 무언가 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해야 한다고도 말한 적 없었다.

    “성녀 같은 거 안 해요.”

    “성녀님.”

    단호한 말에 신관이 난처한 듯 그녀를 불렀다.

    힐데는 요지부동이었다.

    단호한 어린 소녀의 말을 들은 황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힐데 앞에 섰다.

    “아이의 의지가 확고하구려. 설령 황자가 내가 내린 권한의 ‘빈틈’을 이용해 절차를 생략하는 가벼운 죄를 저질렀다고는 하나, 가장 중요한 당사자들이 모두 동의한 일이라면야.”

    “…….”

    “나는 기꺼이 이 아이를 황손으로 품으리다.”

    황제의 선언에 머무르고 있던 이들이 환호했다.

    성녀가 ‘제국의 품’에 안겼다.

    기뻐하는 이들 사이로 프란체스코가 도로테아를 노려보았다.

    오늘의 패배는 몹시 뼈아팠다.

    무력으로는 결코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상대는 교활하게도 자신의 신실함을 이용하여 함정을 팠다.

    프란체스코가 안하무인으로 힘을 휘두를 수 있었던 명분이 이번에는 도로테아에게 있었다.

    남색 눈동자 너머로 넘실거리는 불길한 불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프란체스코가 담담히 힐데의 허락을 구했다.

    “하다못해 제가 곁에서 당신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힐데의 눈이 흘끗 도로테아를 살폈다.

    옅은 미소를 띤 도로테아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힐데의 귓가에 속삭였다.

    “축하해. 네게도 혈통 좋은 강아지가 생겼구나.”

    저건 강아지라기에는 너무 크고 징그러운데.

    도로테아의 축하를 받은 힐데가 눈을 끔뻑였다.

    *   *   *

    성녀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는 많은 이들의 마음에 깊은 여운과 감동을 남겼지만, 누군가에게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선사하기도 했다.

    “으…… 으으으!”

    견딜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고통에 휩싸인 파비안이 몸부림쳤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른 열이 도무지 잦아들지 않았다.

    “파비안, 정신 차려요. 파비안?”

    누군가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파비안의 입술 사이로 하얀 거품이 흘러나왔다.

    “나 좀……!”

    웅얼거리는 말의 절반은 뭉개져 나왔지만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날 좀 죽여 줘. 이제 그만 고통스럽지 않게 해 줘.

    온몸을 비트는 파비안 벨로크를 보는 메릴린의 얼굴에 착잡함이 서렸다.

    “설령 깨어난다 해도 그녀는…….”

    파비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추락뿐일 터.

    그것이 결코 옳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파비안이 어째서 도로테아를 지독히도 물고 늘어졌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채 사람들로부터 버려질 것이라면, 적어도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그녀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질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흔들리는 방울 소리에 그녀를 감싸는 금빛 결계가 짙어지다 옅어지기를 반복했다.

    계속해서 방울을 흔들던 메릴린의 손이 점차 느려지던 그때였다.

    “수고했어요.”

    “영애.”

    어느새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파비안 앞에 선 도로테아가 메릴린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녀의 몸을 구속하고 있던 결계가 옅어지자 어두운 기운이 더욱 거세게 파비안의 몸을 감쌌다.

    “당신의 ‘주인’이 증거를 인멸하려는 모양이로군요.”

    지금쯤 펠릭스와 콜린이 케빈 던컨이 있는 거처를 수색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케빈 던컨은 신중한 인물이니 이쯤에서 발을 빼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겠지.

    파비안의 몸에 새겨진 종속의 인이 없다면 그를 추적할 방법은 없었다.

    천천히 그녀 가까이 몸을 기울인 도로테아가 물었다.

    “살고 싶어요?”

    고통에 헐떡거리던 파비안이 고개를 들었다.

    살고 싶냐고?

    내가 살 수 있을까? 가진 모든 것을 잃었는데.

    가문. 평판. 그녀에게 구애하던 수많은 남자들.

    그 무엇도 이제는 손에 쥐어진 것이 없었다.

    “살아남아도,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잖아.”

    모든 것을 가졌던 완벽한 때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물었다.

    “당신의 그 잘난 가문, 평판, 명예. 그것들이 채우고 있는 삶이 행복했어요? 당신이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이 당신을 추락에서 꺼내 줄 수 있었던가요?”

    이 여자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게 행복했냐고? 그거야 당연히…….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피부에 난 작은 생채기가 흉이 될까 전전긍긍하며, 혹여나 잘록한 몸매가 망가질까 좋아하는 것조차 마음껏 먹지 못하는 삶에서 해방되는 일.”

    파비안이 부드럽게 휘어진 눈을 한 도로테아를 올려다봤다.

    “이대로 끝내고 나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없어요. 현생이 아니라 내생에서조차도.”

    그걸 알고서 저지른 일이었는데도 덜컥 겁이 났다.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나는 거야?

    적어도 고통에서는 해방될 테지만, 그러고 나면 그냥 끝인 건가? 아무것도 남지 않고?

    “원한다면 기회를 줄게요. 가진 모든 것을 잃겠지만, 대신 당신을 옥죄고 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 새로이 시작할 기회를.”

    속삭임을 들은 파비안이 고개를 들었다.

    “단 한 가지. 당신이 불러들인 부정함은 직접 밀어내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테니까.

    “아, 아프단 말이에요.”

    목소리가 덜덜 떨려 나왔다.

    “그러니 선택해요. 당장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죽음과, 모든 것을 새로이 담아야 하는 무겁고 힘겨운 삶 중에서.”

    울며불며 매달려도 냉정하게 선택지를 내미는 도로테아를 보던 파비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살고, 싶어…….”

    그녀는 살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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