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술사 도로테아-156화 (156/242)

156화

“그래서.”

시간이 조금 지나고 진정된 분위기 속에서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들을 굳이 이곳으로 데려온 까닭은 무엇인가?”

대충 이들이 이렇게 달려와 안달하며 죄를 자복한 이유는 알겠으나, 왜 하필 지금 그의 앞으로 데려왔는지가 중요했다.

재판 당사자의 아버지인 벤이 오늘 이 자리가 얼마나 엄숙하고 중요한지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저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보이고 싶어 일부러 가문의 사람들까지 동원해 해적들을 줄줄이 낚아 사람들 앞에 세울 이유가…….

‘설마.’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예감에 황제가 미간을 좁혔다.

벤은 아무 말 없이 품속에서 본인이 직접 정리한 장부를 꺼내 들었다.

해적들 대부분은 계급이 낮은 하층민 출신으로, 제대로 글을 익히지 못한 이들이 태반이었다.

당연하게도 알음알음 해 온 범죄에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이 부분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에이든과 데인이 손만 빨고 있을 동안, 상인으로서 제법 잔뼈가 굵은 벤이 빠르게 장부를 정리했다.

“이들은 생필품과 귀중품을 가리지 않고 유통해 왔으며, 관세를 어겨 왔습니다.”

단지 그것만이라면 굳이 이들을 이 자리로 끌고 올 까닭이 없었다.

황제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들이 유통하는 물건들을 모아 둔 창고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두꺼운 포장 아래에 가려졌던 그림이 드러났다.

도로테아의 품에 안겨 있던 어린 왕녀가 그림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 창고에서 봤던 그림이네.’

아름다운 여인이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보기만 해도 마음 한편이 따스해지는 그림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때 창고에서 그림을 발견한 파비안은 몹시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꼭 지금의 황제와 곁에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이건……!”

벤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이교도 가이아의 초상화입니다.”

“그 끔찍한 무리가 또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단 말입니까.”

언급된 이름을 듣자마자 대신관이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쳤다.

대신관의 격한 반응과 달리 황제는 비교적 조용하게 그림을 내려다보며 불안한 듯 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러한 사특한 물건이 이들의 손에 절로 들어왔을 리 없으니, 분명 이 초상화를 취급한 상단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조사 끝에 케빈 던컨 남작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뭐라?”

“아시다시피 남작은 4황자비 전하의 오라비입니다.”

황제가 눈을 부릅떴다.

불길한 예감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던가.

웬만한 일에는 놀라는 일이 없는 1황녀조차도 벤의 말에 입술을 잘근 씹으며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기겁할 만한데, 벤의 말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신이 추측컨대 파비안 영애는 박람회장 건물을 헤매다 잘못 들어선 방에서 이 그림을 목격한 탓에, 사특한 무리들에게 납치 후 구금된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증거가 있는가?”

무거운 목소리에 벤이 고개를 끄덕이며 본인이 찾아낸 물건들을 황제 앞에 내밀었다.

“당시 파비안 영애를 가두어 두었던 밀실로 보이는 거처를 발견해 치안대에 협조를 요청한 상태이며, 그곳에서 발견된 영애의 장신구와 옷가지입니다.”

사치스럽고 화려한 사교계의 꽃은 남들과 같은 물건을 쓰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녀는 제가 입는 드레스며 장신구가 오로지 세상에 단 하나뿐이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의 물건들을 눈썰미 좋은 귀족들이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저건 분명 벨로크 백작이 사 주었다던 귀걸이가 아닌가요?”

“파비안 영애가 실종된 당일 묶고 있었던 리본이군요.”

“맙소사, 그렇다면 정말로 4황자 전하께서…….”

황제는 어린 왕녀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사도와, 그런 그의 앞에 서 있는 도로테아를 바라보았다.

그 사도가 직접 참여한 재판에서도 당당히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신의 총애를 받는 성녀의 인정을 받아’ 공식적으로 죄를 사면받았다.

이제는 성국에서조차 저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리고 군중들은 이제 더욱더 도로테아를 찬양할 것이다.

신의 선택을 받은 성녀가 따르는 천재 정령사.

하이클레어 후작 가문의 아름다운 금지옥엽.

황실의 인기를 넘어 전 세계에서 그녀를 향해 찬사를 보내고 탐을 내겠지.

우려하던 일이 결국 일어나고야 만 셈이었다.

‘실로 악연이로다.’

황제의 마음을 손바닥 보듯 들여다본 후작이 천천히 다가가 그를 향해 물었다.

“폐하, 신의 사위가 공을 세웠나이다. 진정한 이교도의 무리와 그 실체를 알아냈으,며 파비안 영애의 잘못된 증언까지 밝혀냈으니, 그의 공을 봐서라도 제 손녀딸에게 씐 혐의를 사면해 주시지요.”

“…….”

이제 친우는 예전처럼 자신을 위해 검을 들어 주지 않을 터였다. 황제 또한 친우를…… 그를 견제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만 하겠지.

최소한 이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는.

사뿐사뿐 그의 앞에 선 도로테아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그 옛날 처음 그를 마주했던, 꾀죄죄하고 볼품없던 어리고 작은 소녀는 온데간데없었다.

평생을 다툰 정적처럼, 웃고 있는 그녀의 뒤로 거대한 크기의 그림자가 내비쳤다.

황제는 지칠 대로 지친 몸에 힘을 뺐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내 너에게 주어진 모든 혐의를…….”

내가 졌다.

“면한다.”

그리고, 너는 다시 한번 완벽한 승리를 그 작은 손에 거머쥐었구나.

*   *   *

잔뜩 흥분한 군중들을 해산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다행히 신전과 황실 양측 모두가 동일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더 이상 ‘보는 눈’을 늘리고 싶지 않다는 것.

성기사와 황실 근위대가 흥분한 군중들을 억지로 짓눌렀다.

이미 충분히 볼거리를 즐긴 이들은 아쉬움을 품고 집으로 향했고, 이 풍성한 연극의 가장 큰 수혜자인 도로테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왕녀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린 소녀의 앞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않는 사도를 무시하고서.

“우선 성국에 성녀의 탄생을 알려야겠습니다, 폐하. 이토록 축복받은 존재가 탄생한 것은 제국의 홍복입니다.”

황제가 무뚝뚝한 얼굴로, 성녀에 대한 권리가 성국에 있음을 드러내는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온화한 얼굴을 한 그는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어린 왕녀가 성국으로 송환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어찌할까.’

저들이 성녀라 우기는 아이는 본디 제국의 백성.

황제의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오늘과 같은 특수한 상황과 소녀의 출신만 아니면, 황제는 있는 힘을 다해 신관과 기 싸움을 벌여 소녀를 제국에 묶어 뒀겠지.

성국에 넘기기에는 너무 아까운 존재였다.

‘그렇지만 제국에 남기기에도 문제가 크지.’

흘끗, 도로테아에게 환히 웃어 주고 있는 어린 소녀를 본 황제가 짜증스레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 아이가 제국에 남는다면 저 어린 성녀에게도 ‘지위와 권력’이 생긴다. 그 발언권은 결코 황실의 인사라 하여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 터.

그런 영향력을 지닌 아이가 하필이면 도로테아 품속에 있으니…….

‘하이클레어 후작 가문을 더 키울 수는 없는 노릇.’

하는 수 없이 쓰린 속을 달래며 성국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황제의 심정을 이해한 대신관이 달래듯 말을 이었다.

“교황 성하께 말씀드려 이번 일을 수습하는 데에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4황자의 일이라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조사된 바에 따르자면 어디까지나 문제는 황자 전하가 아닌 상단에 있지 않습니까.”

주범만 처리한다면 4황자에게 죄가 있든 없든 들추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단’이 얽혔다면 철저하게 관련자 전원의 싹을 자르는 신전의 일 처리를 생각했을 때 상당한 양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나마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말에 황제가 조금이나마 얼굴을 폈다.

바로 그때.

“어머, 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요.”

도로테아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가 끼어들 사안이 아니다.”

황제는 그녀를 향해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재판은 끝났고 너는 혐의를 벗었다. 이제 너와는 무관한 국가의 일을 논하고 있는 게야.”

그러니 가족들에게로 돌아가라는 축객령에 도로테아는 도리어 그의 앞으로 쪼르르 걸어 나왔다.

황제는 저만치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당돌한 소녀를 보았다.

저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늘 찬바람만 부는 제 아들놈의 곁에 두고자 한 적도 있었다.

‘앞으로는 그럴 수 없겠지만.’

인간으로서 그녀를 아끼는 마음과, 황제로서 그녀에게 취해야 할 입장이 달라졌으니까.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 쉬도록 하여라.”

그늘진 황제의 말에도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제가 폐하께 많은 것들을 앗아 갔음을 알아요.”

“…….”

“폐하께서는 좋은 분이세요. 그러니 망가진 것을 알아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품고 계셨지요. 어쩌면 다시 멀쩡해질 수 있다고, 희망을 놓지 않으시고 말이에요.”

황제는 말없이 그늘진 눈 밑을 꾹꾹 눌렀다.

몇 번이고 후회하고 되씹었다.

처음 황태자의 잘못을 알았을 때 좀 더 강하게 다그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아들의 무능력함은 좋은 인재를 곁에 붙이면 언젠가는 괜찮아질 줄 알았다.

지나친 욕심은 군주의 자리에 오르는 이에게 필요한 덕목이라 여겼다.

제왕이 되는 법을 배우면 차차 나아질 줄 알았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

어리석게도 진작부터 썩어 있던 것들을 골라내지 않았던 내 잘못이겠지.

도로테아는, 담담하게 자신의 잘못을 곱씹는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위에 있는 사람이 군주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내렸던 여러 선택들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따금 들곤 했다.

잘못된 것을 옳고 바르게 세울 때마다 황제는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잃어야 했다.

두 번 다시 손에 쥘 수 없도록 보이지도 않는 곳으로 보내어 폐기 처분해 버렸다.

그렇게 하나하나 잃어 가다, 종국에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아채고 외로움을 느꼈겠지.

흠이 있다는 것을 알아도 차마 전처럼 단호하게 내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제가 폐하께 앗아 간 것들을 돌려 드릴 수는 없어요.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

“그렇지만 새로운 싹을 보내 드릴게요. 폐하는 잃기만 한 것이 아님을 알려 드릴게요.”

몹시 뜬금없는 말에 황제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잃기만 한 것이 아니라니. 새로운 싹이라니.

그녀가 품에 있던 어린 왕녀를 앞으로 내세웠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는 어린 왕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도로테아가 빙긋 웃었다.

“인사드리렴. 네 할아버지시란다.”

“……!”

“……!!”

“……?!”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의 발언에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경악했다.

대신관과 황제, 후작가의 사람들은 제 귀를 의심했고, 왕녀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사도는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으며…….

할아버지를 소개받은 당사자는 눈 뜬 채로 기절했다.

*   *   *

‘말도 안 돼.’

멀리서 들려오는 환호 소리에 파비안은 절망했다.

질질 끄는 발목에는 이미 감각이 없었다.

숨이 가빠 오고 의식이 흐릿하게 깊은 곳으로 잠겨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결말이었다.

그렇지만 가진 모든 것을 걸면 도로테아 한 사람 정도는 같이 데려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았어.’

극장을 떠나 도망치는 동안 그 누구도 쫓지 않을 만큼, 이제 그녀는 가치 없는 돌멩이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뚝뚝, 흘러넘치는 피는 손으로 틀어막기에 역부족이었다.

목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제발 그만해애애!”

새된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비참하게 죽어 가는 자신뿐.

그 순간이었다.

“다행이다! 찾았어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불쑥, 그녀의 앞에 얼굴이 들이밀어졌다.

주근깨가 잔뜩 난 소녀가 그녀를 향해 새하얀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어휴, 하마터면 못 찾을 뻔했어요. 소리를 질러 준 덕에 그나마 늦지 않을 수 있었네요.”

다행이라는 듯 환히 웃은 소녀의 뒤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메릴린. 메릴린 레어.

보잘것없는 남작 가문에, 봐 줄 곳이라고는 없는 수수한 외모.

가진 것이 없으니 기생충처럼 후작 가문에 빌붙어 살아가는 것이라며 비웃어 댄 것이 엊그제처럼 선했다.

‘그런데 지금은 완벽히 달라졌구나.’

끔찍한 꼴을 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여긴…… 왜 왔어요?”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져 나왔다.

“내 비참한 꼴을…… 구경하려고…….”

당신들이 이겼어. 그거면 됐잖아.

여기까지 와서 꼭 사람 속을 뒤집어 놔야겠어?

“…….”

그녀의 말에 메릴린이 곧장 손을 뻗었다.

눈을 질끈 감은 순간, 그녀가 느낀 것은 조심스레 목을 매만지는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역시 상태가 좋지 않네요. 도로테아 영애에게 듣긴 했지만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자못 심각한 목소리로 아버지조차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낙인’을 살피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조심스럽고 신중한 얼굴을 하고서.

“이 정도면 무조건 아가씨가 오셔야 할걸요. 지금은 일단 진행을 늦추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겠어요.”

무언가를 품에서 주섬주섬 꺼내는 제인의 말에 메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을 거야. 그녀는 나보다 왈츠를 잘 추거든.”

“뭐…….”

여기서 왈츠가 왜 나와?

파비안은 순간 몸이 부서지는 고통도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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