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하얗게 빛을 뿜어내던 검을 틀어막은 것은, 투박한 검을 쥔 남자였다.
이를 악물고 도로테아에게로 향한 검을 막아 낸 우드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젠장. 신의 선택을 받았네 어쩌네 하더니 빈말이 아니었군.’
순식간에 이곳을 향해 쇄도해 온 속도도 그랬지만, 몰아치는 힘 또한 괴물 같았다. 그나마 잠깐이라도 틀어막은 것이 기적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쩌거걱.
우드가 쥐고 있던 단단한 검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상대의 힘에 못 이겨 몸이 뒤로 밀려나는 순간, 펠릭스가 옆을 파고들었다.
그 뒤로 형형한 눈을 빛내던 후작까지 일어서자 황제가 벼락같이 호통을 쳤다.
“지금 신성한 재판정에서 검을 빼 들 생각이오, 후작! 대신관, 당장 사도에게 그만두라 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프란체스코가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신이시여, 제가 당신의 뜻을 거스르는 사특한 존재를 처단하려 합니다. 부디 제게 힘을 주시옵소서.”
나지막한 읊조림이 끝난 순간 맞댄 검에 서린 빛이 더욱 강해지며, 그의 검이 한층 무겁고 깊게 상대를 압박했다.
‘미친놈 아니야?’
반쯤 맛이 간 눈동자를 번들거리는 사도의 공격을 가까스로 흘려보낸 우드가 신음을 흘렸다.
어느새 스친 검이 그의 옆구리에 남긴 상처가 욱신거렸다.
통증으로 잠깐 멈칫한 사이, 그 틈을 노린 사도가 검을 빙그르르 돌려 뒤쪽을 파고들었다.
다시 쇄도한 검을 힘겹게 막아 낸 건 후작이었다.
도로테아는 제 앞을 가로막은 등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후작 영애! 비겁하게 다른 이의 검 뒤에 숨는 겁니까!”
비웃음이 가득 서린 목소리로 사도가 그녀를 도발했다.
“그 잘난 ‘정령’이라도 꺼내 보시지 그러십니까? 이참에 많은 이들 앞에서 보여 주는 겁니다. 신의 피조물로 태어난 인간 따위가 신의 권위를 넘보면 어찌 될지!”
그리고 죽어라.
이 자리에서 신에게 거역한 이의 말로를 보여 주어 모든 이들에게 두려움을 심어 주거라.
도로테아는 저를 향해 온갖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도를 바라보다 눈을 내리깔았다.
광기에 젖은 남자는 이미 그녀를 제대로 볼 생각이 없는 듯했다.
도대체 누가 신의 권위를 넘보았다는 건지.
도로테아를 보호하고자 막아선 이들은 ‘신의 힘’을 부여받아 강력한 힘을 내는 사도의 검에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하나둘 생긴 상처에서 흐른 피가 무대 위를 적셨다.
검이 부딪힐 때마다 눈부신 빛이 사람들의 시야를 가렸다.
그 덕일까.
숨죽인 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그 누구도, 피투성이가 되어 엉금엉금 기어가는 파비안을 눈치채지 못했다.
단 한 사람을 빼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그녀가 무대를 내려가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확실히 나는 몹시 불경하지.’
사도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신 빛과, 그의 괴력을 직접 목격한 군중들이 압도된 것과 달리 그녀는 여전히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신을 찬양하고 싶지는 않아.’
비록 그녀의 몸에 깃든 신의 힘을 이용하고는 있지만.
신이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리라 믿지 않으니까.
신이 인간에게 자애롭다고도 여기지 않고.
그가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공평한 정의를 가져다준다고도,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단 한 번도 신에게 구원받았다 생각해 본 적 없었기에.
‘나는 늘 최선을 다해 발버둥 치며 살아왔을 뿐.’
그 과정에서 신은 단 한 번도 그녀의 편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 정도의 불경함이야 용서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너는 다르다 했지.’
도로테아가 광소를 띤 채 신을 향해 찬사 어린 말을 내뱉는 프란체스코를 바라보았다.
‘오로지 신만을 섬기며, 신의 힘을 사용한다는 신의 종.’
그녀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의 신실함이 정말 오롯하게 신을 위해서만 쓰이고 있는 것인지.
그녀가 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과, 사도가 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 정말로 다른지.
‘어쩌면 너도, 그저 신의 이름에 기대어 네가 좋을 대로 행동하며 그 힘을 이용하는 건 아닌지.’
그가 하고자 하는 것들이 정말로 신의 뜻인지.
“귀를…….”
침묵으로 가만히 자리를 지키던 도로테아의 입술이 열리자 프란체스코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귀를, 기. 울. 여. 봐. 요.’
마침내 그녀의 입술 모양을 읽어 낸 사도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잠시 멈칫했다.
그 순간이었다.
검이 맞부딪치고, 군중들이 발을 구르고, 주변을 둘러싼 성기사들과 황제의 근위대가 대치하는 소리로 가득 메워진 무대 위로……
아주 가녀린 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울지 마라, 나의 작은 꽃아.
오늘은 너를 위해 달님이 노래를 준비했단다.
해가 다시 나올 때까지 네 친구가 되어 줄 거야.
웃으려무나, 아가 곰아.
푸른 잎사귀를 흔들며 춤을 추는 나무를 보렴.
너를 못살게 구는 뜨거운 햇살을 가려 줄 거야.
그것은 자장가였다.
아이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언어로 자신이 가장 안심할 수 있는 노래를 불렀다.
도로테아가 자신에게 부탁했던 그대로.
덜덜 떨리는 목소리는 작아졌다, 커졌다를 반복하며 끊어질 듯 용케 노래를 이어 나갔다.
제국어가 아닌 노래 가사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가사의 뜻을 이해한 듯 당황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는 귀족들도 있었다.
노랫소리를 들은 프란체스코가 우뚝 그 자리에서 멈췄다.
“이게 뭐야?”
“세상에…….”
대부분이 외투조차 입지 않은 따스한 날씨에 하얀색의 빛 알갱이들이 눈처럼 사람들 사이로 쌓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검 위로 쌓이는 ‘성스러운’ 신의 은총을 바라보던 프란체스코가 둔탁한 소리에 뒤를 돌았다.
“성배가……!”
성배를 받쳐 들고 있던 신관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비단으로 감싼 단상 위, 곱게 놓여 있던 성배에 빛 알갱이들이 몽글몽글하니 모여들더니, 이내 황금빛 성배가 쩌적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두 번 다시 붙을 수 없도록 반으로 갈라진 성배를 보던 대신관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대신관의 행동에 다들 눈이 번쩍 뜨인 듯 재빠르게 꿇어앉았다. 그러고는 눈앞에서 목격한 기적과도 같은 신의 응답에 환희의 기도로 답하기 시작했다.
성배가 망가졌으며, 죄인을 처단하려던 사도의 검이 멈췄다.
“도로테아.”
떨리는 목소리로 제 손녀딸을 끌어안은 후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되었구나. 되었어.
중얼거리는 거친 목소리를 잠자코 안겨 듣던 소녀가 천천히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이게 무슨 일이냐? 이게 도대체…….”
황망한 듯 중얼거리는 황제 앞에 선 도로테아가 나직이 누군가를 불렀다.
“이제 그만 나오렴.”
놀랍게도 아직까지 날이 선 성기사들 사이로 삐죽삐죽 걸어 나오는 것은, 이제 막 열 살이 넘었을까 싶은 어린 소녀였다.
느릿하게 고개를 내민 어린 왕녀는 주변의 눈치를 보다 재빠르게 도로테아의 품에 안겼다.
“사도님.”
도로테아는 미소 띤 얼굴을 하고서 왕녀를 그의 앞에 보였다.
어린 왕녀는 두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이는 도로테아의 손에 온전히 저를 맡겼다.
그녀가 결코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할 리 없다는 평온한 얼굴로.
“이 아이의 노랫소리가 아무래도 성배를 망가뜨린 것 같습니다. 진실의 재판에 쓰인 성배를 망가뜨리고, ‘이단 행위를 저지른 죄인’의 목숨을 구명하려 든 이 아이에게는 어떤 벌이 필요할까요?”
“…….”
조곤조곤한 도로테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사도를 향해 내리꽂혔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희열 어린 미소로 가득했던 프란체스코의 얼굴은 서늘하게 굳어 있었다.
눈앞의 아이는 분명 자신과 마찬가지로 ‘신의 은총’을 받아 기적을 선보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노래는 거짓된 성물에 걸어 놓은 조잡한 주문을 완벽하게 파훼했다.
“너…….”
눈앞의 계집은 감히 신에게 선택받은 사도를 향해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신을 향한 그대의 마음은 과연 그대가 가진 ‘권위’를 내려놓을 만큼 진실하고 순수한가.
지금 그가 이 소녀에게 일어난 기적을 ‘신의 뜻’이라 인정한다면, 그는 성물까지 사용해 조작한 재판의 결과를 뒤집어야 했다.
기껏 가져온 성물의 진위 여부를 의심받아야 하며, 성국으로 회부되어 가뜩이나 사도들의 기를 꺾어 놓으려는 교황의 면전에서 창피를 면치 못하겠지.
그는 선택할 수 있었다.
눈앞의 기적을 목격한 자들 앞에서 이 소녀를, 그리고 이 방자한 계집의 목을 치고 ‘이교도의 조잡한 사술’이었을 뿐이라고.
성물은 잘못되지 않았으며 신의 뜻은 여전히 사동(使童)인 제게 머물러 있다고.
군중들은 우매하게도 이 모든 기적을 사술이라 믿고 사도의 말에 따를지도 모른다.
‘신이시여.’
프란체스코의 눈이 위를 향했다.
좀 전까지 빛이 쏟아져 내리던 하늘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청명하고 맑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그가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본 우드가 재빠르게 도로테아를 막아서려 했지만, 사도의 움직임이 한발 먼저였다.
털썩.
어린 왕녀의 앞에 무릎을 꿇은 사도의 모습에 대신관도, 황제도 모두 경악했다.
왕녀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신의 선택을 받은 열세 번째 사도, 프란체스코가 기적을 이어받은 성녀를 뵙습니다.”
누구에게도 꺾일 것 같지 않던 고고한 머리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도로테아는 마치 제가 그의 예를 받는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빙그레 웃는 얼굴은 마치 ‘당신의 신실함만큼은 인정해야겠군요.’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엉거주춤하게 그녀의 앞을 가리고 있던 우드가 뜻밖의 상황에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작은 소녀 하나 죽이겠다고 눈깔을 뒤집고 달려들던 미친놈이 이제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얘가 또 뭘 했구나.’
이제는 놀라지도 않았다.
슬쩍 상황을 살피다 아직도 경악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우드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띄었다.
‘응?’
지친 얼굴을 하고 있는 벤의 뒤로 험악하게 생긴 남자들이 물고기처럼 줄줄이 꿰어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다 해괴한 광경을 목격하고 힘없이 물었다.
“저건 또 무슨 일인가?”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선 벤이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폐하.”
차분한 목소리가 웅성대는 사람들 사이를 갈랐다.
그의 뒤에 선 남자들은 하나같이 질린 얼굴로 훌쩍이거나 혹은 체념한 얼굴로 뜻 모를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제국과 타국을 넘나들며 허가받지 않은 물건들을 취급하며 불법 밀수를 저지르고 있던 죄인들입니다.”
“죄인이라?”
머리를 짚고 있던 황제가 흘끗 뒤에 선 남자들을 바라보자 화들짝 놀란 이들이 벤의 다리며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고는 겁먹은 얼굴로 제가 지은 죄를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그 새낍니다.”
“저는 경매에 올라올 뻔했던 황자 전하의 개인 소장품까지 팔아 치웠습니다.”
“허가받지 않은 물건들을 몰래 제국으로 들여온 게 접니다!”
“가끔씩 돈 받고 애도 빼돌렸습니다.”
“저는…….”
“제가……!”
앞다퉈 죄를 토설하는 이들을 바라보던 황제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이윽고 듣다 못한 그가 손을 들어 이들의 말을 멈췄다.
“그만, 그만하라. 도대체 왜들 이러는 것이냐.”
“제발 저희의 죄를 물어 감옥에 가두어 주십시오!”
“기왕이면 소드마스터고 나발이고 아무도 오지 못하는 깊고 깊은 감옥이면 좋겠습니다!”
소드마스터?
지금 소드마스터라 했나?
어색하게 시선을 돌린 벤을 빤히 바라보던 황제가 한숨을 삼켰다.
제국에서 저들을 저렇게 공포에 떨게 만들 만큼 말이 통하지 않는 어마어마한 인간은 아마도 하나뿐일 터.
“그, 그리고 그 머시기냐. 푸른색 검기를 뿜어내는 그 무식한 남자애도.”
그리고 그 소드마스터 곁에 껌딱지처럼 붙어 함께 다니는 수제자인 조카 또한.
‘그런 이가 둘 있으면 제국의 재앙이지.’
그나마 재판에 안 보이는 것을 내심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더니 엉뚱하게도 해적을 때려잡고 있었다니.
엉엉 우는 해적들은 하나같이 벤의 다리, 등, 팔, 손목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죽을 때 죽어도 몸은 깨끗하고 싶습니다.”
“목을 뱃머리에 걸어 놓고 다니는 사람마다 침을 뱉는다니. 그런 끔찍한 일이…….”
그리고 벤은 그런 이들을 다정하게 토닥이기 바빴다.
“자, 다들 자신이 저지른 죄만 털어놓는다면 무사히 감옥에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시고 최대한 솔직하게 고백하는 데에만 집중하십시오.”
“네에, 네!”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순순히 머리를 조아리는 해적들은 하나같이 험악하고 더러운 인상을 갖고 있었다.
황제는 뭐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얼빠진 채 해적들을 구경하는 이들 앞에서 연신 헛기침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고했네.”
“감사합니다.”
위엄 있는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으어어엉엉.”
다 큰 남자 놈들이 목 놓아 우는 소리를 이길 수가 없었다.
다들 하나같이 참으로 우렁찬 목청과 끊이지 않는 눈물샘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고생…… 했군.”
다른 의미로.
벤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머리를 조아렸다.
“괜찮습니다.”
떼를 쓰고 엉엉 우는 이들을 달래는 내내, 도로테아를 키우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육아의 맛을 잠시 엿본 기분이었다.
매일이라면 힘들겠지만 어쩌다 한 번이라면 이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딸아이가 원하는 바를 이뤘다면 그것으로 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