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술사 도로테아-154화 (154/242)

154화

“도대체 그놈의 성물은 언제 나온다는 거야?”

“어차피 신의 성물이 판결을 내려 줄 텐데, 다른 판사들의 의견 따위가 무슨 소용이람?”

대배심의 회의가 길어지자 기다리는 군중들에게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다림 탓에 짜증과 분노가 커지면서 이들의 흥분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황제는 여전히 미동 없이 서 있는 도로테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가지런한 자세로 꼿꼿하게 고개를 든 채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

‘참으로 변함없는 아이로다.’

저 아이는 불리할 때나 유리할 때나 좀처럼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마녀로 몰려 수많은 적의를 마주한 지금조차도.

‘그에 비해…….’

황제의 시선이 파랗게 질린 파비안 벨로크에게로 향했다.

고발을 당한 도로테아가 멀쩡한 얼굴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것과 달리, 정작 도로테아를 고발한 그녀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가누지 못하며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등 뒤에 하이에나처럼 눈을 빛내는 벨로크 백작이 보였다.

위태로운 딸아이 따위는 눈에 비치지도 않는 듯, 이미 승리의 달콤함에 취해 달아오른 얼굴을.

의기양양한 기색이 역겹긴 했지만 황제는 인정해야 했다.

‘이 재판은…… 후작이 이기는 순간 곤란해진다.’

도로테아가 마녀로 몰려 ‘처형’당하는 것도 그에게는 씁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후작은 오래 전, 황제의 체통에 손상을 줄 수는 없다며 정략혼을 거부했던 딸을 내치고 죽음까지 외면하는 성의를 보였었지만…… 지금은 두 번 다시 보물을 잃을 수 없다는 의지가 두 눈에 가득 서려 있었다.

후작이 재판에서 이긴다는 건 도로테아의 죄가 없음을 ‘신에게 인정받게’되는 셈.

‘그리되면 후작의 위세가 너무나 높아진다.’

황제보다 인기 좋은 군신이라니.

하물며 후작의 위엄은 다름 아닌 막강한 ‘군사력’에서 나오는 법이었다.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황제와 후작의 관계는 그 전과 같을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손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가야만 해.’

오랫동안 자신의 뒤를 지켜 왔던 후작을 끊어 내는 마음이 무겁지 않을 수 없었다.

문득 고개를 돌린 그가 텅 빈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한때 자신을 도와 제국의 치세를 이어 나가던 국모(國母)는 지금 곁에 없었다.

한때 주변을 지키던 수많은 이들이 하나둘 그의 곁을 떠났듯이.

‘그리고 이번에는 단 한 번도 등을 돌려 본 적 없는 친우까지도 잃어야 하는 건가.’

상념들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사이, 기나긴 토론이 끝났는지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고 법관들이 빠져나왔다.

위엄 가득한 대법관들의 얼굴을 본 군중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대신관은 다소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1황녀를 향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배심은 결론을 내렸습니까?”

“예.”

짤막한 답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숨소리가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고발자는 피고의 혐의를 몹시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증언했으나, 피고는 그 혐의를 일체 부인했습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한 가운데 안타깝게도 피고에게는 혐의를 반박할 수 있는 알리바이나 결정적 증거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뜸을 들인 그녀가 천천히 돌아섰다.

오랜 세월 황실의 일원이자 황제의 장녀로서 그 책임과 의무에 소홀한 적이 없었던 그녀는, 군중의 감정을 고조시킬 가장 극적인 연출에 대해서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고발자의 진술이 몹시 일관되고, 상대적으로 고발당한 피고는 자신의 변호에 적극적이지 않은 점과 그 실행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을 들어…….”

도로테아를 마주한 그녀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을 마무리 지었다.

“대배심에서는 피고에게 유죄를 선언합니다.”

벨로크 백작을 시작으로 그의 곁에 앉은 파벌이 흡족한 얼굴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적절한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 그가 쓴 돈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이클레어 후작 일가의 반발이 만만찮을 것 같아 내심 걱정하던 차였으니 결과에 만족하는 것이야 당연했다.

‘이제 끝났군.’

백작은 희희낙락하며 딸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여간 그나마 봐줄 만한 것이 반반한 얼굴이었건만 어쩌다 꼴이 저리 됐을까.’

야윈 딸을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쯧, 하고 찬 그가 머릿속으로 계산을 굴렸다.

‘이미 평판이 망가져 버린 아이니 시집을 보낼 수는 없을 터. 이번 재판이 끝나면 수도원으로 보내어 가문의 신실함을 증명하도록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군.’

체통도 잃고 히죽거리던 백작이 다시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생애 다시없을 희극을 감상하는 것이 몹시 짜릿했다.

대신관은 1황녀에게 받아 든 ‘결과’를 확인한 듯 손에 쥔 양피지를 군중들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들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지만, 마치 판결 결과를 읽은 것처럼 저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환호했다.

“대배심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피고는 여전히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진실 여부를 ‘성물’을 통해 가리고자 합니다.”

대신관의 엄숙한 말에 새하얀 수단을 입은 신관이 파비안 앞에 섰다.

프란체스코는 이 모든 상황이 그와는 무관하다는 듯 1황녀 뒤에 가만히 서 있었다.

“증인은 이리 가까이, 성물을 향해 손을 주십시오.”

매끄럽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파비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뻗었다.

이윽고 황금 잔에서 뿜어져 나온 눈부신 빛이 그녀를 감쌌다.

긴장 가득한 침 소리들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심지어 결과를 의심해 본 적 없는 벨로크 백작마저도 손바닥을 여러 차례 문질러 땀을 닦아 내야만 했다.

눈부신 빛이 서서히 수십, 수백만 개의 자그마한 빛 알갱이들로 변해 천천히 사람들 사이로 흩어졌다.

이윽고 파비안의 어깨 위에 남아 있던 마지막 알갱이마저 허공으로 흩어지자 성물을 들고 있던 신관이 선언했다.

“성배는 증인의 고발을 ‘진실’로 판단하셨소!”

떠나갈 듯한 함성이 좌중을 가득 메웠다.

*   *   *

흥분으로 가득 찬 군중의 함성 소리에 펠릭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비록 식구들 모두가 의연한 척 견디고 있긴 하지만, 무결한 조카에게 이런 얼토당토않은 혐의가 씌워진 것이 유쾌할 리 없었다.

“숙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테아는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 뿐이에요.”

필립의 의미심장한 말이 아니었더라면 사병을 저택에 대기시킨 채 맨몸으로 이곳을 찾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악녀의 처형을 기다리는 군중들의 흥분된 분위기와 달리 재판정에는 차분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흘렀다.

손을 든 대신관이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증인의 심문에서 성배는 파비안 벨로크의 증언을 모두 사실로 인정했음을 선언합니다.”

벨로크 백작의 의기양양한 얼굴과는 별개로, 파비안은 제 증언의 효력을 입증해 냈지만 그리 기꺼워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여전히 태연한 도로테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봤다.

‘수많은 이들의 눈빛이 느껴지지 않아? 너를 향한 적의, 혐오, 경멸이?’

분노한 군중들이 발을 구르는 소리에 내 발치의 땅조차 울리는데.

너는 어째서 그토록 태연한 건지.

늘 그렇듯 여유롭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내가 드디어 너를 몰아세웠다 생각한 이 순간까지도.’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하고서 널 이기는 것에 최선을 다했는데.

‘어째서 너는 여전히 날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는 거지?’

그 순간이었다.

옅은 기침을 뱉어 내던 파비안의 몸이 들썩였다.

“으욱……!”

재빠르게 틀어막았지만 앙다문 입술 새로 검붉은 피가 새어 나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 광경을 목격한 이들이 하나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은 파비안의 눈에 웃고 있는 도로테아가 보였다.

재판 내내 닫혀 있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조. 심. 해. 야. 지.’

벙긋거리는 입술이 전달한 말을 이해하려 애쓰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마치 뜨거운 불에 데인 듯 어마어마한 통증이 그녀를 덮쳤다.

머릿속에 울리는 낭랑한 방울 소리와 함께, 그녀는 이제껏 목까지 끌어 올려 숨기고 있던 제 ‘낙인’을 풀어 헤치고 손으로 박박 긁어 대기 시작했다.

목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긁는 그녀를 보던 군중들이 술렁였다.

“저, 저게 도대체…….”

눈을 가늘게 뜬 채 상황을 지켜보던 프란체스코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저앉아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가련한 파비안의 곁에 선 그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는 대신 군중들을 향해 소리를 높였다.

“마녀가 또다시 사술을 부려 증인을 겁박하고 있다!”

대배심의 결론도, 성물의 판결도 나왔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황제의 태도로 보건대 그는 이미 ‘선택’을 내린 상황이었다.

비록 모든 것이 사도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로서는 최대한 빠르게 형을 집행하는 것이 좋았다.

자칫하면 신관의 손에 들린 성배를 처리하기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

‘재미난 장난감이라 쓸모 있게 사용하긴 했지만 빨리 처분해 버리는 게 좋을 터.’

물론 그 전에.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의 처리가 우선이지만.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프란체스코가 순백의 검집에서 예기 서린 검을 뽑아 들었다.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성력으로 뒤덮인 검신이 도로테아를 향해 쇄도했다.

*   *   *

같은 시각, 도로테아의 상황을 모르는 벤은 필립과 함께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극장과는 멀리 떨어진 외곽 항구로 향하고 있었다.

어두운 얼굴을 본 필립이 그를 안심시켰다.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고모부.”

“…….”

“그곳에는 할아버님이 계시니까요.”

줄곧 말이 없던 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췌한 얼굴의 남자는 밤새 잠을 설친 듯 그늘진 눈 밑을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테아가 다칠 일은 없다는 네 말을 믿으마.”

“아시잖아요. 그 애는 스스로 손해를 볼 짓을 하진 않는다는 걸. 일을 키울 때에는 다 목적이 있는 법이죠.”

“무모한 면이 있잖니. 이제껏 모두 괜찮은 결과를 얻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단다. 하물며 성국의 사도를 상대하는 건 이제까지와는 다른 이야기야.”

제아무리 ‘귀족’의 세계에 발을 늦게 들이고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는 벤이라 해도, 이런 상황을 읽지 못할 만큼 통찰력이 부족하진 않았다.

도로테아가 무언가 ‘일’을 벌일 때마다 벌어들이는 이득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큰 손해를 감수할 각오 또한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번에 그녀가 감수하고자 하는 위험은 단순히 제국 안에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걱정 가득한 한숨에 필립이 웃었다.

“테아를 그토록 걱정하시면서도 제 부탁에 이곳까지 와 주셨군요.”

“네가 어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벤이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너 또한 내게는 아들이나 다름없단다.”

그의 출신을 생각하면 하이클레어 가문의 직계인 필립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욕일 수 있겠지만, 필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저야말로 감사할 따름인걸요.”

“그래서.”

벤이 웃고 있는 아름다운 소년을 향해 다시금 운을 뗐다.

“이제는 나도 테아가 네게 무엇을 부탁했는지 물어봐도 되는 거니?”

담담한 물음에 필립이 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아, 별거 아니에요.”

슬슬 그들이 타고 있는 마차의 창밖으로 항구의 전경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필립의 가벼운 대꾸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런 폭음이 들려왔다.

지척에서 들려온 폭음과 함께 발생한 진동에 마차의 바닥이 울렸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 속에서 항구에 정박되어 있던 배들이 흔들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유독 항구 구석진 자리에 있던 배에서 물줄기가 치솟았다.

어마어마한 소란에 벤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아아, 벌써 시작해 버린 모양이네요.”

한숨을 쉰 필립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얌전히 기다릴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설마 이렇게 대놓고 소란을 피울 줄이야.

아무래도 도로테아의 일로 심기가 많이 상했던 모양이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르지.’

소란이 커지면 커질수록 다들 수습이 어려운 탓에 쩔쩔맬 테고, 그 덕에 벤의 역할은 더욱 커지게 될 테니까.

필립이 흘끗 벤을 살폈다.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요동치는 배들을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귓가에 도로테아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후작가를 적대하는 이들이 유독 나를 향해 이를 드러내는 건 내가 공격하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야. 내게는 눈에 드러나는 약점이 있으니까.”

‘정령’이라는 가치 있는 힘을 가졌지만, 동시에 천한 피를 타고난 반쪽짜리 귀족이라는 굴레.

‘힘’은 귀족 사회에 속할 수 있게 해 주지만, ‘굴레’는 귀족 사회에서 벗어나게끔 할 수도 있는 요소였다.

서로 얽히고설킨 채 살아가는 귀족들에게 그것만큼 거슬리는 일이 있을까.

“내 아버지는 내가 가진 유일한 약점이지.”

억지로 작위를 만들어 귀족의 호적에 올려놓았다고 해서 벤을 진짜 ‘귀족’으로 여기는 이들은 드물었다.

벤 본인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사교 활동을 자제한 채 저택에서 칩거하며 실력을 기르는 데에 열중하는 것이다.

하나뿐인 딸아이를 위해 그는 평생을 바친 ‘상인’이라는 직업을 버렸다.

인정받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비웃음거리인 껍데기에 불과한 작위를 받아들여 귀족이 되었다.

장인의 가문에, 일찍 떠나보낸 아내에게, 딸아이에게 폐가 될까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일조차 없이 조용히……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나를 향한 비난의 화살이 거세어진다면, 아버지는 언젠가 나를 떠나 버릴지도 몰라.”

하나뿐인 딸을 위해서라면 그러고도 능히 남을 사람이니까.

“나는 그러길 원치 않는걸.”

매일 아침마다 찾아와 건네주는 인사도, 그녀를 염려하는 다정한 잔소리와 쓰다듬도, 함께 식사하며 눈을 마주하는 순간들도.

마음 한구석을 간질이는 ‘가족’이라는 존재 가운데에서도 벤은 그녀의 ‘처음’이었다.

오랜 시간을 누군가의 가족이기보다는 ‘필요한 물건’으로 살아왔던 재신이 처음으로 받아들인 ‘가족’이라는 존재.

“나는 벤이, 아버지가 그 누구보다 이 제국에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귀족들이 아버지 아래에 엎드려 제발 이곳에 남아 달라고 청하도록 만들 거야.”

“어떻게 하려고?”

“그는 제국에 없어서는 안 될 ‘영웅’이 될 거야.”

해사하게 웃으며 건넨 도로테아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했다.

필립이 멍하니 서 있는 벤의 등을 밀었다.

“이제 때가 됐어요, 고모부.”

“응?”

저 멀리서 누군가의 익숙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새끼야?! 내 조카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운 원흉들이 바로 네놈들이렸다! 두목은 어디 있는 게냐. 여기 두목 놈을 데려와!”

“숙부! 두목은 제 몫이에요! 제가 먼저 찾아서 그 새끼 목을 분리시켜 버릴 겁니다!”

“오냐, 이놈아. 누가 됐든 먼저 찾기만 하면 그 두목 놈의 뼈 마디마디를 분쇄해 사지를 도륙내고 머리를 효수해서 뱃머리에 걸어 버리는 거다!”

“그것으로 족할 리가 있습니까! 저는 그놈 모가지뿐만 아니라 발톱부터 시작해서 남아나는 것이 없도록 모조리……!”

얼굴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단박에 파악한 벤이 제 귀를 의심했다.

혼비백산한 얼굴로 배에서 내려 도망쳐 나오는 이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지금 도망치는 자들을 모두 잡아 가두어라.”

함께 온 사병들을 향해 필립이 명을 내리는 것을 보고 있던 벤이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에이든 경과 데인이 어찌 이곳에 있는 게냐?”

“그게 말이죠. 두 사람이 도로테아 고발 사건을 해결하고자 파비안 영애의 실종 단서를 쫓다가, 아주 ‘우연히’ 이 해적(海賊)들이 배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군요.”

“……우연히?”

필립의 웃음이 짙어졌다.

물론 우연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둘이 일부러 이곳에 와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도록 조장했다고 인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요동치는 배에서 미처 도망치지 못한 이들의 필사적인 외침이 들렸다.

“살려만 준다면 내 뭐든 말하겠습니다! 뭐든! 원하시는 모든 것들을 다 털어놓겠습니다!”

“내가 언제 너를 살려 준다더냐?! 죽어라, 네 이노옴!”

착잡한 얼굴을 한 벤의 곁에서 필립이 턱을 괸 채 유감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를 어쩌지. 이대로 가면 성질 급한 두 사람의 손에 ‘증거’가 완전히 소멸될 수도 있겠는걸요? 누군가가 나서서 수습하고 증거를 확보하지 않는다면요.”

“그렇겠구나.”

그리고 너는 이 난장판을 수습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이고.

빙긋 웃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던 벤은 체념한 듯 터덜터덜 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테아야, 나는 참으로 걱정되는구나.’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키우는 거니.

애초에 폐하께 이들을 넘기고 정당한 조사를 부탁드렸다면 폐하께서도 외면하지 않으셨을 텐데.

판박이처럼 닮은 숙부와 조카가 나란히 깽판을 치고 있는 ‘밀수선’으로 향하던 벤이 중얼거렸다.

“돌아가면 진지하게 대화를 해 보아야겠어.”

도대체 자신의 교육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나뿐인 딸의 지나친 창의성이 무척이나 염려스러웠다.

제 앞에서는 천사처럼 방긋방긋 웃는 딸아이인데…….

어깨를 축 늘어뜨린 벤의 뒷모습을 보던 필립이 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어쩔 수 없었다고요, 고모부.’

저나 고모부나 결국은 테아를 이길 수는 없잖아요.

늘 그래 왔듯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