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티 파티가 끝나고 도착한 필립이 마차에서 뛰어내려 제 숙모를 향해 다가왔다.
“세상에, 필립. 이게 다 무슨 일이니?”
“별거 아닙니다, 숙모님. 테아가 이번에 좋은 목재를 발견해서요.”
생글거리는 필립의 말에 다이애나의 얼굴에 금세 이해의 빛이 어렸다.
평소 입에 들어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딱히 돈을 쓰는 일이 드문 도로테아지만, 이따금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면 아낌없이 사들여 쟁여 둔다는 사실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은 몰라도 은은하게 나는 향이 꽤 매력적이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마차에 새겨진 낯선 문양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
“우리 가문의 마차가 아닌걸. 어느 상단에서 마차를 빌린 거니?”
“평소 쓰던 짐마차를 정비하기 위해 분해한 참인데, 테아가 오늘 가져와야 한다고 우겨서요. 다행히도 던컨 남작이 호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애도 참. 철이 좀 드나 했는데 아직도 이렇게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떼를 쓰는구나.”
못 말린다는 듯한 어조와는 달리 다이애나는 도로테아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작께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텐데.”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답이라면 이미 충분히 드렸으니까요.”
걱정하는 다이애나를 안심시킨 필립이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데인과 함께 걸어오는 도로테아가 보였다.
핀잔이라도 한마디 들은 걸까.
불퉁한 기색이 역력했던 그녀의 눈이, 짐마차 가득 실려 있는 목재를 본 순간 이채를 띠었다.
이윽고 그녀가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은 채 미끄러지듯 빠른 속도로 가득 쌓인 녹나무 더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뭇결을 따라 단면을 매만지는 손길은 몹시 능숙했다.
‘설마 이곳에서 향장(香樟 : 녹나무를 다르게 부르는 말. 나무로부터 흘러나오는 은은한 향이 삿된 것들을 쫓아낸다고 한다.)을 보게 될 줄이야.’
전생에서도 자생하는 곳이 드물고 조건이 까다로워 쉽게 구하지 못하는 귀한 나무였다.
흡족한 미소를 띤 도로테아가 툭툭, 가볍게 목재를 두드렸다.
이 정도면 상태도 최상급이라 할 만했다.
‘고작해야 내 환심을 사자고 이 물건을 고스란히 내주다니. 어리석기는.’
능력 있는 상인이라더니 물건 보는 눈이 형편없었다.
박람회에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가득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모아 둔 물건들은 거리의 좌판에 펼친 잡동사니처럼 두서없이 진열되어 있는 것이 전부였다.
길(吉)한 것과 흉(凶)한 것들이 제대로 구분조차 되지 않은 것을 본 순간, 도로테아는 그의 명성이 반쯤은 헛된 것임을 알았다.
엉망으로 늘어져 있던 물건들 사이에서 구석에 처박혀 있던 목재 조각상을 발견한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숙모.”
목재를 어루만지던 도로테아가 어딘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제 외숙모를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눈망울이 사랑스러운 것과 별개로 눈을 마주한 다이애나가 주춤했다.
이름난 디자이너의 예쁜 드레스도, 어느 왕국을 휘청거리게 만들었다던 호화로운 보석도.
원하기만 한다면 손에 쥐어 주고자 두 팔을 걷어 붙였을 텐데.
소녀의 관심을 끄는 것은 경험상 언제나 다이애나를 곤란하게 만들곤 했다.
“당분간 연무장을 써도 될까요? 물량을 쌓아 둘 곳이 필요해요.”
“응?”
지금 들어온 것만 해도 짐마차 다섯 대를 꽉 채웠건만, 이보다 더 들일 생각이라고?
“야, 연무장은 안 돼!”
데인이 옆에서 길길이 날뛰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는 도로테아의 모습을 보던 다이애나가 조용히 물었다.
“얼마나 더 들어온다는 거니?”
숙모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필립이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지금 물량의 네 배 정도요.”
“…….”
짐마차 스무 대 이상의 분량이라는 뜻이로구나.
아무리 좋은 나무라지만, 그걸 모두 다 구입했다고?
잠시 말을 잃은 다이애나가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에 잠겨 있을 무렵이었다.
티 파티에 참석했던 손님들을 모두 보낸 후작이 펠릭스와 함께 다가왔다.
“할아버지! 들으셨어요? 얘가 연무장에다가 이 짐 덩어리들을 쌓아 두겠다잖아요!”
씩씩거리며 일러바치는 데인의 말에 멈칫했던 후작의 시선이 이내 손녀에게로 향했다.
‘좀처럼 좋고 싫은 것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 아이인데.’
가문을 향한 귀족들의 견제가 강화되면서 이제까지와는 상황이 달라졌다.
황실을 수호하는 검이라는 명분은 이제 더 이상 귀족들의 견제와 압박에서 그들을 지켜 주지 않았다.
그 ‘수호검’이 황실의 잘못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황위 계승자를 끌어내리기까지 했으니까.
‘제아무리 옳은 일을 위해 정의를 행했다고 말해도 믿어 주지 않겠지.’
중립을 자처하던 하이클레어 가문이 7황자와 손을 잡고 새로운 세력을 구축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터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황제와의 관계도 변화가 불가피하리라.
‘그러니 제 탓이라 여기고 만회하려 애쓰는 것이겠지.’
오늘의 티 파티처럼.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가 사람들을 초대해 위용을 보이려 했던 것처럼.
‘원치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할 필요 없게 해 주고 싶었건만.’
제 어미보다도 더 정치적 입장에 얽매이게 만들었군.
후작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됐다. 내버려 두어라.”
“예?”
연무장에 한해서라면 제 편을 들어 줄 줄 알았던 후작의 말에 데인의 눈이 커졌다.
하늘이 무너진 얼굴을 하고 있는 손자에게서 고개를 돌린 그가, 또 다른 손자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후작의 세 아들 가운데 가장 성향이 다른 콜린의 하나뿐인 자식은,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혹하게 만들 만큼 미형을 갖추고 있었다.
“최근 치안대가 들쑤시고 다닌 탓에 이래저래 신경도 많이 썼을 텐데, 이 정도는 하게 해 주어야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들이라 해라. 구입 비용은 내게로 달아 놓고.”
손녀에게는 늘 관대하고 다정한 후작의 말에 필립이 빙긋 웃었다.
“다행이네요. 실은 테아도 구할 수 있는 한 모두 가져오고 싶어 했지만, 목재의 가격이 너무 높아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만큼만 구입하려 했거든요. 할아버지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남은 목재까지 모두 일괄 계약할 수 있겠습니다.”
“…….”
도로테아의 천문학적인 재산을 알고 있는 후작의 눈썹이 꿈틀, 했다.
싱글거리는 필립을 바라보던 후작이 조심스레 다가서자, 필립이 그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속삭였다.
“……!”
믿을 수 없는 금액을 듣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후작이 신이 난 손녀를 바라보며 서글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아버지의 안색을 확인한 펠릭스가 도로테아에게 나직이 물었다.
“이 목재들을 뭐에 쓸 생각이냐?”
“무엇이든지요.”
뿌리를 잃고도 향을 오래도록 머금고 있는 향장(香樟)은 목질과 수형이 우수하며 벌레가 들지 않아 가치가 몹시 높은 목재지만, 그 무엇보다…….
“관을 짤까 생각 중이에요.”
향장의 향은 죽은 자의 혼백이 무사히 이생을 떠나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누군가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목재인 까닭이 거기 있었다.
“숨이 멎은 자에게 그 어느 누구보다 평온한 안식을 줄 수 있게끔요.”
“…….”
조카를 바라보는 펠릭스의 눈이 가라앉았다.
일견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아이의 행동에는 늘 적절한 까닭이 있었다.
그녀는 수십, 수백의 관을 만들어 누구의 죽음을 기리고자 하는가.
꽃이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정원 한가운데에 서 있는데도, 목재에서 흘러나온 죽음의 향이 그의 머릿속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 * *
“참으로 건방진 계집이 아닙니까!”
벨로크 백작의 말에 블라디미르 공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쓸데없이 목청이 좋군.’
비분강개한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불편한 심기를 조금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뚱뚱한 남자를 바라보던 공작이 한숨을 삼켰다.
역시 백작과 그는 지나칠 정도로 성향이 맞지 않았다.
“이건 벨로크 백작 가문을 향한 도발인 동시에, 우리 공신 가문들을 모조리 우습게 보는 처사입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백작을 불편한 듯 바라보던 몇몇 귀족들 또한 그것에는 동의하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렁찬 목청 탓에 귀가 몹시 아프긴 했지만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일개 후작 영애가 어찌 이토록 광오하단 말입니까!”
가만히 듣고만 있던 노귀족 중 하나가 나직이 덧붙였다.
“손녀를 아끼는 마음은 이해하나, 이번 일은 후작이 선을 넘었소.”
파비안 벨로크가 실종된 이후, 의심의 화살은 당연하게도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에게로 향했다.
입에서 입으로 알음알음 전해지던 소문은 이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 도로테아가 치안대의 조사를 받았으며, 성실하지 않은 태도로 조사에 임하다 그들을 내쫓아 버렸다는 사실까지 모두의 귀에 들어갔다.
누군가 그 자리에서 상황을 직접 본 것처럼 상세한 이야기였다.
“어찌 그리 뻔뻔할 수 있습니까!”
귀족들의 손가락질을 받기 시작한 그녀가 취해야 할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조용히 치안대의 조사에 응하여 행적을 밝히고 심문을 받으며, 사교 활동을 삼간 채 칩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는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이 상황에서 매일같이 연회를 열다니요. 심지어 황궁의 무도회 못지않은 호화로운 규모의 파티를요!”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에 발을 들였던 귀족들도, 좀처럼 사교 활동을 좋아하지 않는 후작이 자주 모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알고부터는 꾸준히 후작저를 드나들었다.
고작해야 실종된 지 닷새째. 귀족들은 파비안의 실종 사실보다도 화려한 연회에 흠뻑 취한 것만 같았다.
후작가에서는 가진 인맥과 돈을 퍼부어 벨로크 백작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낱 백작 영애의 실종이 우리와 관계가 있든 없든 간에 신경 쓰지 않는다.’라고.
이대로라면 백작은 딸을 되찾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되찾는다 하더라도 웃음거리가 되는 일을 피하기 요원해 보였다.
‘파비안의 실종 사실이 알려졌으니, 그 애가 살아 돌아온다 한들 평판은 이미 형편없이 무너진 셈이야.’
예쁘게 길러 가장 ‘쓸 만해졌던’ 딸을 잃게 생겼으니 속이 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적어도 그 손해를 메울 수 있을 만한 활로를 찾아야지.
그것이 벨로크 백작이 이곳, 블라디미르 공작의 저택으로 온 이유였다.
“진정하시게. 딸을 잃은 아비의 마음은 이해하나, 백작은 지나칠 정도로 흥분해 있네. 하이클레어 후작의 처사가 불만이라 하더라도 우리까지 무도한 인간이 되어서야 쓰나.”
손을 올려 만류하는 블라디미르 공작의 목소리가 자못 차분했다.
억울함에 눈을 번득이던 벨로크 백작이 불만 어린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빙 둘러앉은 귀족들 모두 저마다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이 상황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만이 가장 이득을 볼 수 있을지, 저마다 머릿속으로 계산하느라 바쁠 터.
공작 또한 뻣뻣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나이를 먹고도 노쇠하기는커녕 해가 갈수록 정정해지는 노후작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는 내가 상대하기 버거운 상대지.’
군중의 절대적인 지지와 황제의 신임을 동시에 얻고 있는 가문을 등지는 건 그로서도 꺼려지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분명 파고들 구석은 있어.’
3황자와 폐태자의 실각, 황태후의 죽음, 황후의 유폐까지.
황제는 최근 너무 많은 것들을 잃었다.
군중들은 더 이상 황제를 ‘완전무결한’ 군주로 보고 있지 않았다.
죽은 자식들은 다른 황자로 대체할 수 있을지 모르나, 흔들리는 민심은 황제에게도 큰 경각심을 심어 주었을 터.
제아무리 관대한 황제라고 해도 이전처럼 후작을 절대적으로 신임할 수는 없겠지.
‘이번에야말로 내 염원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자신의 영토를 독립된 공국으로서 선포하고 황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염원을 위해, 그는 오랜 시간 때를 기다려 왔다.
흘끗, 그의 눈이 좌중을 훑었다.
대개는 오랫동안 황실에 충성을 다했던 공신 가문들이거나 폐태자의 수족으로 일해 왔던 권세 가문들이었다.
드러나서는 안 되는 추문과 비리가 탄로났으니 칩거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공작에게로 달려온 까닭은 간단했다.
‘움직일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끔찍한 범죄의 용의자 신분인 손녀를 싸고도는 후작을 규탄하고, 그의 세력을 억누르며, 자신들의 명예를 바로 세울 수 있는 명분.
황제는 이들의 말을 무시하고 후작의 손을 들어 줄 수 없다.
그건 황실의 굳건한 지지 세력을 흔드는 동시에, 군권을 틀어쥐고 있는 무장(武將)들을 견제할 카드가 사라지는 셈이나 다름없으므로.
“공, 어찌하실 겁니까?”
곁에 있던 플랑 자작의 물음에 침묵하고 있던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일은 좌시할 수가 없구려. 만일 일을 이대로 넘긴다면 권력을 가진 후작에게 핍박받는 또 다른 무고한 귀족들이 나올지도 모르오.”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설령 후작 영애가 무고하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제국법의 적법한 절차에 따라 누명을 벗으면 될 일이지 이렇게 무작정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 태도는 옳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귀족들 모두 하나같이 제국법을 준수하며, 단 한 번도 어겨 본 적 없다는 듯한 숭고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엄숙한 얼굴을 한 블라디미르 공작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께 정식으로 알현을 요청하겠소.”
어린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그가 오랜 칩거에서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리에 모인 귀족들 모두 저마다의 이득을 머릿속에 그리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