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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44화 (144/242)
  • 144화

    설마 도로테아가 아이들을 감싸고자 자신과 척을 질 것이라 생각지 못했던 벨로크 백작이 돌처럼 굳었다.

    몇 번을 곱씹고 난 그가 뒤늦게 노염 가득한 포효를 뱉어 냈다.

    “감히!”

    상대는 고작해야 부랑아 출신의 천민에 불과했고, 그의 딸은 벨로크 백작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적녀(嫡女)로 명실상부한 상류 계급이 아니던가.

    모욕을 받은 백작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기사들 또한 흉흉한 살기를 내뿜었다.

    이를 악문 백작의 입에서 거친 말이 흘러나왔다.

    “짐승처럼 길에서 떠돌던 가축들을 모아 극장 하나 세워 줬다고 해서 저 아이들의 신분이 바뀌기라도 한 것 같나?”

    아무리 예쁜 나들이옷을 입어도, 고귀한 부잣집 딸아이처럼 꾸미고 박람회장을 돌아다녀도 아이들의 출신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계급의 귀천은 황제가 바뀌어도 달라지는 법이 없다.

    “내 딸은 서거하신 전 황태후께서 아끼던 귀한 아이야!”

    도로테아의 입지가 제아무리 튼튼해도, 부랑아 출신의 아이들에게서 딸을 되찾고자 한 그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영애는 오늘 실수하는 거요.”

    오늘의 일이 알려지는 순간, 귀족들은 그녀의 행동에서 잊었던 과거를 떠올리겠지.

    비쩍 곯아 꾀죄죄한 거지 몰골을 하고 7황자의 품에 안겨 가문으로 돌아갔던 그녀의 ‘과거’를.

    그리고 다시 한번 인지하게 될 것이다.

    그녀가 상인 아비의 핏줄을 빌어 타고난 반쪽짜리라는 사실을.

    도로테아는 목에 뻣뻣하게 힘을 주고 선 백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품에 안긴 아이들에게서는 여전히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고 있었다.

    레번이 불안한 듯 그녀를 흘끗거리는 것이 보였다.

    침묵하던 도로테아가 별안간 빙긋,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저희 사이에 작은 오해가 생긴 모양입니다. 제 말솜씨가 그리 좋지 않아 백작님으로 하여금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었으니 사과드려야겠군요.”

    “오해라니. 무엇이 오해란 말이오!”

    “이 아이들이 제 보호 아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좀 전에 드린 말씀은 백작님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스윽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기사들을 훑었다.

    개중에는 아직도 검을 집어넣지 않고 그녀를 향해 겨누고 있는 이도 있었다.

    “이 아이들의 출신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벨로크 백작 영애께서는 확실히 태어날 때부터 이 아이들과는 다른 삶을 누리며 살아오셨죠.”

    한발 물러서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꺼내는 도로테아의 태도에 의구심이 어린 백작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제가 비록 작은 사업으로 이 아이들의 숙식을 책임지고 있지만, 이 아이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바로 폐하이시지요.”

    “……!”

    도로테아가 폐하를 입에 올린 순간 벨로크 백작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지금,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질 수 없는 조커를 꺼내든 셈이었다.

    승기를 잡은 붉은 입술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황도에서는 자기 방어가 필요한 순간을 제외하면 폐하의 허락 없이 사사로이 기사를 움직여 무력시위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레번의 얼굴에 난 상흔만 보더라도 서로 간의 충돌이 아니라 일방적인 무력시위였음을 증명할 수 있었다.

    “한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에게 영주민을 처벌할 권한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분.”

    황가의 중앙 직할령에서 그의 권한을 넘을 수 있는 귀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치안대의 권한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고.

    “폐, 폐하를 들먹이다니…….”

    백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도로테아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파비안 벨로크의 실종에 이 아이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황제는 벨로크 백작의 손을 들어 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달라.’

    아직 정식으로 수사가 진행되기 전이니까.

    지금처럼 황위가 혼란한 상황에서는 황제 또한 제국의 법률을 최대한 존중해야만 했다.

    ‘백작의 인내심이 부족했던 것이 오히려 호재로 작용한 셈인가.’

    정식으로 실종 수사가 진행되고, 치안대가 움직여 아이들을 심문하고자 했다면 제아무리 도로테아라 하더라도 무조건적으로 반대할 수는 없었을 터.

    딸의 평판을 걱정하여 지나치게 빠르게 움직여 준 백작 덕에 오히려 이쪽에서도 할 말이 생겼다.

    “하이클레어 후작이 이토록 광오할 줄은 몰랐군. 일개 영애가 폐하의 권한을 무기로 백작을 핍박하려 들…….”

    쉬이 물러나지 않으려는 듯 지지 않고 소리를 높이던 와중이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혀 있던 극장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열린 문으로 스며든 피비린내가 흘러드는 방향으로 기사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체격의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헉.

    남자의 몰골을 본 누군가 놀란 듯 숨을 크게 들이켰다.

    산발이 된 머리.

    핏자국으로 가득한 옷.

    검집에서 삐져나온 검은 말라붙은 핏물로 뒤덮여 얼룩덜룩하기까지.

    조금 전까지 전장에서 뒹굴다 온 듯한 남자는 제 어깨에 호리호리한 여인을 둘러메고 있었다.

    짐승 같은 꼴을 한 남자의 안구에서 시퍼런 빛이 흘러넘쳤다.

    기세에 눌린 백작의 기사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백작님.”

    도로테아의 나직한 부름에 저도 모르게 정신을 놓고 있던 벨로크 백작의 얼굴이 붉어졌다.

    은은한 미소를 띤 그녀가 도망칠 퇴로를 마련해 주듯 부드럽게 물었다.

    “정식으로 수사가 시작되면 이 아이들은 당연히 최선을 다해 협조할 겁니다. 물론 백작 영애께서 수사가 진행되기 전에 아무 일 없다는 듯 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저 역시 바라고요.”

    “그, 그건…….”

    “지금은 저택으로 돌아가서 영애를 기다리시는 것이 어떨까요?”

    “…….”

    “어쩌면 백작님의 애타는 마음에 신께서 따님을 돌려보내 주실지도 모르니까요. 그렇죠?”

    벨로크 백작은 어깨 위로 사람을 둘러메고 있는 남자를 힐끔 보고는, 이내 미소를 띠고 있는 도로테아를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이대로 얻은 것 하나 없이 물러서기에는 입안이 썼다.

    ‘후작이 끔찍이 아끼는 하나뿐인 손녀에게 그저 그런 쭉정이를 붙여 놓았을 리 없지.’

    자존심을 세우자고 아까운 기사들을 잃는 것보다야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도로테아를 보는 백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명분’이 갖춰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주 잠깐,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영애의 말에 따르지. 저택에서 내 딸아이가 돌아오길 기다려 보겠소.”

    그렇지만 오늘이 지나고 나서도 파비안이 돌아오지 않으면…….

    말에 담긴 속내를 모를 리 없는 도로테아가 웃는 얼굴로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기사들을 끌고 극장을 빠져나가는 백작을 배웅했다.

    일행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고 나서야 그녀의 시선이 우드에게 향했다.

    “마차를 세우고 오랬더니, 대체 누굴 데리고 온 거야?”

    “아아, 별것 아니다. 수상하게 주변을 맴도는 이가 있길래 누구인지 물어보려 했더니 별안간 기절해 버려서.”

    도로테아의 눈이 힐끗, 축 늘어진 채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여인의 복색을 살폈다.

    수수한 색에 단조로운 모양이기는 하나 쉽게 구하기 힘든 재질로 만들어진 옷이었다.

    ‘저런 옷을 입은 여자가 이곳을 우연히 지나가고 있었을 리 없지.’

    우드가 천천히 여인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윽고 밝은 조명 아래 여인의 얼굴을 확인한 도로테아가 탄식했다.

    “하아…….”

    주인의 얼굴에 짧게 스쳐 지나가는 표정을 살핀 우드가 제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물었다.

    “아는 인물인가?”

    “응.”

    그럼 오히려 다행이로군.

    그저 수상한 움직임을 보고 누구인지 물어볼 생각으로 다가갔건만, 기겁을 하고 도망치다 기절까지 하는 통에 곤란하던 차였다.

    아는 인물이라면 차라리 해명하기가 수월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우드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도로테아의 눈빛에서 묘한 감정을 읽어 냈다.

    ‘안쓰러움?’

    저 빌어먹을 ‘주인’에게 그런 감정이 있었나?

    연민 어린 시선을 못 이긴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난 참 많은 것들을 네게 베풀어 주었다고 생각해. 과거의 악연을 끊어 줘, 죽은 누이의 제를 지내 줘, 신분 세탁을 통해 과거의 죄까지 묻어 줘…….”

    “왜 또 그 얘기를 꺼내는 거냐.”

    우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도통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어 재차 물으려던 찰나 도로테아의 입술이 열렸다.

    “내가 널 아끼는 건 사실이지만, 무려 제국의 4황자비를 납치해 온 것까지 덮어 주기는 힘들 것 같아서.”

    “뭐, 뭐?”

    게다가 피투성이 차림새에 검을 든 채로 둘러업었으니, 그녀의 고귀한 신분을 생각해 보았을 때 명예에 타격을 입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상류 계급의 ‘자부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아는 우드가 쩡, 하고 얼어붙었다.

    “우리의 인연은 어쩌면 여기까지인가 봐.”

    씁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우드는 제가 내려놓은 여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안색이 창백한 여인은 여전히 미동 없이 누워 있었다.

    도로테아가 진지한 얼굴로 권했다.

    “그나마 자수하면 사형은 면할 수 있을지도 몰라.”

    “…….”

    헉.

    때마침 상처를 치료하고 돌아오던 레번이 제가 들은 무시무시한 이야기에 몰래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의 도주를 허락할 리 없는 도로테아가 재빠르게 그를 불러 세웠다.

    “레번, 넌 당장 들어와.”

    “옙! 지금 가고 있습니다.”

    멍하니 자신이 둘러업고 온 여인을 내려다보던 우드 데버가 그 앞에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그런다고 해서 커다란 덩치가 작아질 리 없지만, 왠지 모르게 넓디넓은 등짝이 유독 쪼그라들어 보였다.

    *   *   *

    인생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며 적군을 베어 넘길 때만 하더라도 언젠가 나는 이 전장에서 죽겠지, 라는 생각으로 매일을 살았는데.

    ‘이게 다 이 영악해 빠진 계집애에게 발목이 잡힌 탓이다.’

    수많은 적군을 눈앞에 두고도 물러선 적이 없었던, 용맹하던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던가.

    넓은 어깨가 자각도 없이 움츠러들었다.

    우드는 제 옆구리를 콕콕 찌르는 미네의 손을 걷어 내지도 못한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응?”

    “지금이라도 깨워서 서로 오해가 있었음을 알려야 하지 않겠나? 먼저 극장 주변을 맴돈 것은 그녀이니, 우리가 4황자에게 다시 데려다주면서 설명하면 되겠지.”

    “글쎄.”

    도로테아의 눈이 4황자비의 차림새를 훑었다.

    누가 보아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끔’ 몰래 나온 것이 분명했다.

    4황자비쯤 되는 인물이 호위 하나 없이 이 먼 극장까지 나들이를 나온다는 것은, 그녀가 주변 사람들 모르게 이곳에 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뜻이겠지.

    “호위도 없이 홀로 나온 4황자비와 네가 마주치는 순간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설상가상으로 벨로크 백작은 네가 그녀를 둘러업고 들어오는 장면을 목격했지.”

    짧은 순간이라 그가 여인의 얼굴을 확인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만에 하나 그의 호위 중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그녀가 4황자비임을 알아봤다면…….

    “만일 깨어난 황자비 전하께서 네 위협에 정신을 잃었고, 그 틈을 타 네가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왔다고 주장한다면?”

    몰래 나온 것을 들켰으니, 상대에게 죄를 덮어씌워 그 사실을 숨길 가능성은 충분했다.

    도로테아의 말이 일리가 있다 여겼는지 우드가 침음을 흘렸다.

    “대관절 황자비 전하씩이나 되는 분이 왜 이런 차림으로 이곳까지 홀로 온 거지?”

    “글쎄.”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도로테아의 시선이 안절부절못하는 두 아이에게로 향했다.

    “그건 저 아이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책망 한 점 보이지 않는 고요한 눈동자와 마주한 미네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런 미네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왕녀의 어깨가 덩달아 움찔, 하고 옅게 반응했다.

    *   *   *

    모두가 잠들었을 야심한 밤.

    2황자의 궁은 유독 고요했다.

    북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주인 덕에 윌리엄의 궁은 늘 최소한의 경비로만 채워져 있었다.

    덕분에 비교적 편하게 2황자의 침실로 들어선 누군가의 실루엣이 곤히 잠든 윌리엄에게로 다가선 순간이었다.

    “누구지?”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던 윌리엄이 나직하게 물었다.

    “살기가 없는 것은 보니 자객은 아닌 듯하고.”

    궁의 시중인이나 호위라면 몰래 숨어들 필요가 없으니 더더욱 아닐 텐데.

    어둠 속에 녹아들어 있던 소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에 반사된 머리카락이 시리게 빛났다.

    은은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소녀의 머리카락에 시선을 빼앗긴 듯 물끄러미 보고 있던 윌리엄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초대 없이 궁을 들어오는 건 그렇다 쳐도, 수면 시간 정도는 지켜 줘야 하지 않을까?”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는 그를 바라보던 소녀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해. 수면 시간이 부족하면 건강에도 문제가 생긴다더라.”

    윌리엄은 오늘도 어김없이 만나자마자 제 건강부터 들먹이는 도로테아의 말을 들으며, 머리맡에 놓여 있던 물병의 물을 따랐다.

    보온 마법이 걸린 병에 든 물은 마시기 딱 좋을 정도로 미지근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 궁까지 쳐들어온 소녀는 손에 쥐어진 물잔을 내려다보다 불만 어린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도로테아의 불손한 눈빛을 눈치챈 윌리엄이 옅게 웃었다.

    멋대로 궁에 들어와 휘젓고 다니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잠을 방해했으니 화를 내야 할 텐데.

    “나도 참 큰일이구나.”

    오자마자 뻔뻔하게 간식부터 찾는 너를 보며 자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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