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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43화 (143/242)

143화

“도대체 이 저택은 어떻게 돼먹은 게 실내가 이토록 어둡고 복잡한데 안내인 하나 없는 거냐? 주변을 맴도는 수상한 놈들은 또 뭐고?”

미간을 좁힌 우드의 물음에 키엘이 미안한 듯 미소 지었다.

“요즘 저를 찾는 과격한 손님들이 좀 많습니다. 괜스레 귀한 목숨 낭비할 까닭이 없다 싶어 사람을 두지 않았는데, 그로 인해 경께서 고초를 겪으셨군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개의치 마세요.”

아니, 개고생한 건 나인데 왜 괜찮다는 말은 네가 하냐.

기가 막힌 우드의 눈이 뒤늦게 테이블로 향했다.

막 티타임을 끝낸 듯 빈 찻잔과 접시가 눈에 들어왔다.

도로테아는 그렇다 쳐도 키엘 정도 되는 인물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을 리가 없을 텐데.

자신이 주변의 날벌레들을 쓸어 내느라 고생 고생하는 사이 이곳에 앉아 함께 유유자적 차를 마셨겠다?

우드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 해. 가자.”

어느새 옷차림을 정리한 도로테아가 막 입을 열려던 우드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늦지 않으려면 지금 출발해도 아슬아슬한걸.”

“어디를 가자는 거냐? 그보다도 지금 이 꼴을 하고 다른 곳을 가자고?”

신음하듯 물은 말에 도로테아가 조용히 우드의 몰골을 훑었다.

철벅거릴 정도로 바닥에 고인 핏물들을 밟고 오느라 엉망이 된 신발.

군데군데 찢어진 의복. 피가 말라붙은 검신.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로 뒤덮인 그의 몸과 산발이 된 머리.

백정이 따로 없었다.

“음…….”

떨떠름하게 내려다보는 우드에게 도로테아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몰골을 보아하니 생각했던 것보다 도움이 되겠어.”

“……?”

“겁먹고 짖어 대는 개한테는 더할 나위 없는 위협이 되겠네.”

때로는 말로 밀어붙이는 고상한 협박보다 직접 눈에 보여 주는 자극이 더 효과적인 법이니까.

“얼른 나와.”

도로테아는 사뿐한 걸음으로 우드를 지나쳐 문을 나섰다.

찝찝한 듯 키엘을 돌아보던 우드가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녀의 뒤를 쫓았다.

잘 있으란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난 이의 빈자리를 보던 키엘이 웃었다.

“벗은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더니.”

내게서 원하는 답을 듣기가 무섭게 돌아서는군.

“참으로 매정한 아이란 말이지.”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가 말없이 빈 잔을 내려다보았다.

원체 차를 좋아하지 않던 주인이 모처럼 차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비워 냈다.

하다못해 키워 준 양부모조차도 그가 차 한 잔을 모두 비우게끔 만들지는 못했건만.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는 매번 주인에게서 새로운 면을 이끌어 내는 재주가 있었다.

무엇 하나 집착하는 법이 없던 주인이 인사말 한마디에 서운함을 표하는 지금처럼.

“원하신다면 곁에 데려다 놓을까요?”

무뚝뚝한 그림자의 마음 씀씀이에 키엘의 입꼬리에 미미한 웃음을 매달았다.

“아서라.”

넌 그 아이를 못 이겨.

괜스레 심기를 건드렸다 골탕이나 먹으면 모를까.

“차라리…….”

말꼬리를 흐리며 곰곰이 생각하던 키엘이 고개를 들었다.

저택 주변을 맴돌던 벌레들을 한번에 쓸어버렸으니, 다시 새로운 이들이 모여들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터였다.

누군가를 초대하고자 한다면 지금이 적기가 아닌가.

“친애하는 콜린 경께 초대장을 보내야겠군. 저택의 밤공기가 차니, 이곳을 방문해 잠자리를 데워 주십사 하고 말이지.”

“…….”

이미 마흔 번 이상 차이셨잖습니까.

서신을 전하러 갈 때마다 수차례 경멸과 혐오 어린 시선을 받아야 하는 그림자가 침묵했다.

심지어 지난번에는 소금 세례에 이어 오물 세례까지 받아야 했건만.

‘해야 하는 일이라면, 하는 것이 옳겠지만…….’

실패할 것임이 분명한 일에 굳이 뛰어들어야 하는 건가.

아무리 무엇이든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그라도, 요즘 주인이 던져 주는 일거리만은 의심 없이 따르기가 곤란했다.

*   *   *

“그래서, 이 꼴을 하고 어디로 가자는 거지?”

우드의 물음에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던 도로테아가 그제야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밝은 햇살 아래서 보니 그의 꼴은 한층 더 처참했다.

“아주 신나게 날뛰었구나.”

“이상하다 싶을 만큼 집요하게 달라붙어서 그런 거다. 치명상을 입혀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니, 원.”

조금 전의 난투를 떠올린 우드가 얼굴을 굳혔다.

기괴하다, 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대의 그 움직임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처럼 굴었단 말이지.’

분명히 움직이지 못할 만큼 치명상을 입혔는데도 상대는 멈춰 서기는커녕 고통에 주춤하는 법도 없었다.

다리가 부러지면 기어서라도 그를 잡으려 허우적댔고, 팔을 다치면 물어뜯기라도 할 기세로 이를 들이밀어 댔다.

“움직임 자체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지만.”

명백히 이쪽의 경지가 한 수 위였음에도 시간이 오래 걸린 까닭은 그 때문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다들 합이 잘 맞더군. 마치 원래 한 몸이었던 것 같은 움직임이었어.”

“그게 왜?”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서로 움직임이 닮았다는 소리다.”

평범한 인간의 경우, 같은 훈련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처럼 균등한 속도, 동일한 움직임을 보이기는 어렵다.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속도도 제각기 다르거니와, 훈련 도중에 생기는 본인의 궤적이나 습관 같은 사소한 것들이 큰 차이를 만드니까.

그러나 그에게 달려들었던 습격자들은 모두 소름 돋을 만큼 동일한 형태의 궤적을 띠고 있었다.

“꼭 인간다움을 배제해 버린 것 같다고나 할까.”

“흐음…….”

그제야 도로테아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가 끝내 아무런 귀띔 없이 마차에 올라타자, 은근히 답을 기다리던 우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 어디로 가자는 거냐?”

“말했잖아. 개가 짖어 대는 곳.”

“개라는 생물은 원래 짖어 대는 거다. 어디 사는 개인지를 말하란 말이다. 설마 또 어디 사는 영애가 짖어 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얼마 전에 봤던 한 영애를 떠올린 우드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투명한 형태의 정령이 도로테아에게로 날아들었다.

평소와 같이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주변을 돌아다니던 리리는 무엇인가 설명이라도 하듯 허공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 분주한 몸짓에 도로테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생각보다 행동력이 빠른걸.”

“누가?”

“극장으로 가자, 우드.”

그제야 튀어나온 행선지를 들은 우드가 힐끗, 그녀를 봤다.

극장이라고? 몹시 뜬금없는 장소였다.

‘거기 무슨 개가 있다는 거지.’

만날 때마다 벌벌 떨며 돈을 건네는 레번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와르르 몰려들어 자신을 관찰하는 단원들을 떠올린 우드가 한숨을 쉬었다.

이 꼴을 하고 지금 그곳엘 가자는 건가.

“괜찮아. 지금 네 모습이야말로 딱 내가 필요로 하던 차림새니까.”

전(前) 군인이자 현(現) 호위 기사를 맡고 있는 그는 당최 저 조그만 머리통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딱히 알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우드는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털어 버리며 마차를 출발시켰다.

제 무릎 위에 드러누워 애교를 부리는 정령을 내려다보는 도로테아의 눈은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   *   *

이른 낮 시간이라 그런지 극장 주변은 한산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극장은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극장의 공연은 주로 저녁 시간대에 오르는 편인 데다, 박람회가 개최되고부터는 손님 자체도 많이 줄은 탓에 이른 시간부터 이곳을 기웃거리는 이들은 없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낮부터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던 때를 생각해 보면 위세가 상당히 줄어든 셈이었다.

“누군가가 방문한 모양이군.”

아직 문이 열리려면 시간이 남은 극장 앞에 세워진 마차를 본 우드가 말했다.

마차를 이끄는 말들은 하나같이 관리를 받아 윤기가 반지르르 흘렀고, 마차의 사방에는 멋들어진 문양이 조각되어 있었다.

‘신분이 꽤 높은 인물인 모양인데.’

우드가 상대를 가늠해 보려는 듯 주차되어 있는 마차를 흘끔거렸다.

“저 옆에 세워 두고 들어와.”

도로테아는 마차가 채 멈추기도 전에 문을 열고 폴짝 뛰어내렸다.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뒤로 우드가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못 들은 척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

평소 자주 드나드는 쪽문을 열자마자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귀를 쨍하니 울렸다.

“제대로 설명해라! 내 딸아이를 만나 무엇을 했지?! 하이클레어의 잡것이 내 딸아이에게 무슨 짓을 했느냔 말이야!”

우렁찬 목소리를 보아하니 귀족답게 좋은 보양식을 드신 모양.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들어 본 적 없이 생경했지만, 주인이 누구인지 유추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소란의 진원지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도로테아의 걸음이 느릿해졌다.

멀리 줄리앙이 붉어진 얼굴로 주먹을 쥐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제법 잘 참고 있네.’

충심 가득한 그로서는 왕녀를 함부로 대하는 귀족의 태도를 참고 넘기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웅크리고 있는 것은 그 또한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타국의 기사가, 그것도 로헨 왕국의 근위대 출신이 이곳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벌어질 심각한 문제들을.

‘다행히 아주 돌머리는 아니었네.’

도로테아가 고개를 돌려 그 앞에서 길길이 날뛰는 남자를 심드렁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건 돌머리가 확실하고.

“후작가의 위세 따윌 등에 업었다고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이로구나. 오냐, 내 오늘……!”

남자가 자신이 데려온 기사들을 향해 막 명을 내리려던 찰나였다.

지켜보고 있던 도로테아가 그늘진 곳에서 걸어 나와 입을 뗐다.

“미네.”

어린 왕녀와 손을 꼭 맞잡은 채 잔뜩 움츠러들어 있던 미네가 고개를 들었다.

“이리 오렴, 얘들아.”

두 아이 모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그녀의 품에 달려가 안겼다.

어린 소녀들이 숨조차 고르지 못하도록 몰아세우던 백작이 그제야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도로테아의 얼굴을 확인한 그의 낯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섣불리 입을 떼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 도로테아가 먼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와 가까운 사이라도 되는 양 친근하고 다정한 어조였다.

“놀랐어요. 백작님께서 이렇게 이른 시각에 저희 극장을 찾아 주시다니요.”

“아가씨…….”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레번이 몹시 안도한 얼굴을 하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의 뺨에 난 옅은 상처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깊지는 않았지만 날카로운 검에 그인 터라 피가 쉬이 멎을 것 같지 않았다.

“누군가 지혈을 돕는 약을 사 오렴.”

도로테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붙박이처럼 서 있던 단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작의 얼굴에 불쾌한 빛이 서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딸과 비슷한 또래의 어린 계집이 지금 이곳에서 자신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은 응당 불쾌한 일이었으므로.

바득, 이를 간 벨로크 백작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영애의 재능을 높이 사는 것은 사실이나, 이토록 안하무인으로 구는 것을 용납하지는 않으실 게요!”

도로테아는 흥분한 나머지 토마토처럼 붉어진 백작의 얼굴을 보다 눈을 내리깔고서 물었다.

“안하무인이라니, 실로 당황스러운 말씀이네요. 아직 열리지도 않은 극장을 막무가내로 찾아와 아이들을 다그치고 계신 건 백작님이 아닌가요?”

“…….”

백작의 시선이 한층 사나워졌지만 이를 가볍게 흘려 넘긴 그녀가 말을 이었다.

“고작 아이들을 추궁하고자 이토록 많은 기사들을 대동하시다니요. 단원들 대부분은 검을 들어 본 적조차 없는 이들이 태반인 것을요.”

도로테아가 흘끗, 그의 뒤로 늘어선 살벌한 기세의 기사단을 보고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박람회장처럼 붐비는 장소였으면 모를까.”

애초에 파비안에게 제대로 된 기사들을 붙여 주었다면 실종될 일도 없었을 테고, 그녀가 이렇게 귀찮은 탐정놀이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그녀의 말속에 깔려 있는 의미를 읽어 낸 백작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어린 계집이 말끝마다 사람을 농락하려 드는구나.

그렇지만 좋은 시절도 끝났다.

제아무리 대단한 후작가라 해도 이번 일만큼은 별것 아닌 것처럼 넘어갈 수 없을 터.

백작이 눈을 부릅떴다.

“당연히 기사를 대동해야지! 뻔뻔하게도 백작 영애를 납치한 놈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도로테아는 제 품에 웅크려 있는 두 아이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농이 지나치시네요.”

허리춤에도 오지 않는 여자아이들을 두고 납치니 뭐니.

스스로도 말을 뱉으면서 우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가.

벨로크 백작의 얼굴이 구겨졌다.

“손님들을 안내하던 사용인들 중 하나가 복도에서 내 딸을 봤다 하더군. 딸아이가 저것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이야! 그 아이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접촉한 게 저것들이란 소리잖소!”

삿대질하는 손가락에 아이들의 몸이 움찔, 하고 떨렸다.

천천히 고개를 숙인 도로테아가 나직이 물었다.

“정말이니? 그녀를 봤어?”

움츠러든 아이들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서로 시선을 맞추고 어쩔 줄 몰라 하던 두 아이 중, 미네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들에게 물어보러 왔더니, 깜찍하게도 눈 하나 깜짝 않고 헛소리를 지껄이더군. 내 딸아이가 박람회장으로 돌아가기는커녕 건물 깊숙한 복도로 향했다나. 내 딸이 초대받은 장소에서 그렇게 비상식적으로 굴었을 리 없소. 안내받은 것도 아닌데 건물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일이 뭐가 있단 말이오?”

백작의 말이 이어질수록 두 아이의 동공이 어찌할 바 모르고 흔들렸다.

물음에 완벽히 솔직하지 못했던 것만은 확실했다.

아이들을 살핀 도로테아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굽혔던 몸을 펴면서 담담하게 답했다.

“그렇군요.”

“그래, 그러니……!”

도로테아가 고개를 들어 백작을 향해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정식으로 수색을 시작하고 치안대에서 아이들의 진술을 요구한다면, 출석하여 아는 것들을 모두 털어놓으라 이르겠습니다.”

아직 ‘정식’ 수색은 시작되지 않았다.

실종으로 단정 짓기까지 하루 남짓의 시간이 남았으니까.

그렇기에 켈런 심슨도 사전 청취라는 애매한 말을 갖다 붙여 그녀에게 상황을 떠보려 찾아오지 않았던가.

게다가 백작은 정식 수사권을 갖고 있지 않았다.

“곧 ‘때’가 오면 최대한 협조할 테니 백작께서는 염려를 놓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때까지는 아무도 이 아이들을 위협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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