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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42화 (142/242)
  • 142화

    “제인, 마차를 준비시켜.”

    “외출하시게요?”

    “응.”

    켈런 심슨은 바보가 아니었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도로테아의 알리바이를 증언해 주었을 텐데도, 그는 굳이 이곳에 와 도로테아를 추궁했다.

    심증보다는 명확한 증언과 증거를 중심으로 수사하는 것을 선호하는 켈런이, 뚜렷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찾았다는 것은…….

    “누군가가 나를 떠보라며 부추겼다는 이야기겠지.”

    하이클레어 후작은 여전히 황제의 신임을 받는 중신 중 하나였다.

    제정신이 박힌 귀족이라면 그녀가 범행을 저지르는 것을 봤다고 한들 증언은커녕 사실을 숨기기 바쁠 것이다.

    정당한 근거 없이 그녀의 이름을 들먹인다 하더라도 치안대가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신뢰를 받는 자.

    또 그녀를 건드린 후 닥쳐올 후환이 두렵지 않은 자.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수고했어. 날 데리러 올 사람이 있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그냥 가.”

    “예.”

    마부에게 약간의 수고비를 건넨 뒤, 도로테아는 독특한 아치형 외관의 저택을 향해 한걸음 내디뎠다.

    내부는 어두웠다.

    그럼에도 도로테아는 조명은커녕 횃대 하나 없는 복도를 주춤대는 기색도 없이 가로질렀다.

    적막이 흐르는 복도를 지나 긴 층계를 내려가자 익숙한 향이 코를 찔렀다.

    철제로 된 문손잡이를 잡아당긴 순간, 별안간 시야가 밝아졌다.

    “조금은 헤맬 줄 알았는데, 실망인걸.”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도로테아가 감흥 없다는 얼굴로 테이블 옆에 마련된 간이 의자에 앉았다.

    “기껏 먼 거리를 달려왔는데 손님 대접이 형편없네요.”

    의자는 지나치게 딱딱했고, 테이블 위의 다과상은 차림새가 형편없었다.

    가벼운 재질의 셔츠를 걸친 키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손 하나만 까딱해도 사용인이 달려 나오는 후작가와 비교해서는 안 되지. 그렇게 보여도 내가 직접 차린 것인데.”

    흘끗, 테이블 위 쿠키를 바라본 도로테아가 하나를 집어 들고 입에 물었다.

    성의가 없다며 투덜거렸지만 마련된 쿠키는 그녀가 좋아하는 제과점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직접 저택을 빠져나가 사 오지는 않았겠지만 신경 쓴 것만은 분명했다.

    그녀가 바삭한 쿠키의 식감을 즐기는 사이, 키엘 스펜서는 서툰 손놀림으로 차를 따라 건넸다.

    “잘못 우렸어요. 향이 부족해요.”

    “미안하지만 나는 차를 좋아하지 않아서. 이걸로 만족해 줘야겠어.”

    도로테아의 까다로운 평가에 키엘이 뜻밖이라는 듯 웃었다.

    “무엇이든 잘 먹는 편 아니었던가? 식성이 그리 까다롭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야.”

    “귀한 찻잎을 낭비하니 그렇죠.”

    먼 군락지에서 가져와 정성 들여 가공한 귀한 찻잎이었다.

    그 정성과 시간을 들인 보람이 없을 만큼 찻잎을 다루는 그의 실력은 형편없었다.

    ‘독한 술에 의지해 지내던 이가 차향의 은은함을 알겠냐마는.’

    가만히 손을 뻗은 도로테아가 냅킨을 집어 들어 찻주전자를 가볍게 어루만져 닦았다.

    느릿한 손길로 천천히 식은 찻물을 버리고 따뜻한 물을 새로 채워 찻잎의 향을 입히는 모습이 제법 진지했다.

    쓴맛이 나는 첫잔을 버리고 마시기 좋은 온도가 될 때까지 잔에 찻물을 옮기기를 반복했다.

    거추장스럽지만 필요한 과정이었다.

    이윽고 긴 기다림이 끝난 뒤 건네받은 차는 옅은 색과 달리 농후한 향을 머금고 있었다.

    “…….”

    조용히 차를 음미하는 도로테아를 보던 키엘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나는 차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

    기왕 쓴 것을 들이켤 바에야 독한 술을 마시는 것이 불면증에는 더 도움이 되곤 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예법을 모르는 건 아니야. 네 ‘차’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는 방식이로군.”

    엉망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행동은 엄격한 규칙과 예법 아래에서 이루어진 다례(茶禮)가 분명했다.

    다만 어디에서 기인한 예(禮)인지, 누구에게 사사(師事)한 것인지 알 수 없을 뿐.

    “늘 내 흥미를 돋운단 말이지.”

    슬쩍 내비친 의문에도 아무런 답을 해 주지 않은 도로테아가 비로소 용건을 꺼냈다.

    “놀란 건 제 쪽이죠. 은인께서 치안대에 심어 둔 ‘끈’은 폐하께서 손수 제거하셨을 터. 심슨 경과는 또 언제 연을 맺으신 건지 그 수완이 놀라운걸요.”

    “딱히 내 사람은 아니야. 조언을 나눌 수 있는 좋은 벗 정도로 해 두지.”

    “이용하라고 있는 게 ‘벗’은 아니죠. 일부러 심슨 경까지 보내 절 움직이게 하셨으면서.”

    매몰찬 추궁에 키엘은 저를 향한 오해가 몹시 애석하다는 듯 씁쓸하게 웃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나에 대한 평가가 몹시 박하군그래.

    “경고해 주려고 했을 뿐이란다. 보다시피 나는 당분간 저택에서 요양해야 하는 신세니까.”

    “경고라…….”

    키엘이 그녀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용건을 끄집어냈다.

    “박람회에서 아주 재미난 일이 있었다기에.”

    “그렇다고 하더군요.”

    눈치 빠른 그는 그 짤막한 답에서 도로테아의 불편한 심기를 포착해 냈다.

    “파비안 벨로크의 실종에 정말로 아는 바가 없었던 모양이군. 뜻밖인데?”

    “나라고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잖아요. 하물며 그녀는 나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인걸요.”

    “건물 내에서 사라진 것이라면 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나 마찬가지였을 텐데?”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그녀의 능력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을 텐데.

    “산 자의 행적 따위를 어찌 알아요.”

    파비안 벨로크가 죽은 후 육신에서 벗어나 제 앞에 나타나지 않는 이상, 제 발로 걸어 달아난 이가 무엇을 하는지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설령 관심이 없어도 관심을 가져야지.”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도로테아를 나무랐다.

    벨로크 백작은 전 재상의 오른팔이자, 폐태자의 힘이 되어 주던 가문 중 하나였다.

    재상의 몰락 이후 그의 가문 또한 평판이 하락했다고는 하나, 죄를 추궁받지 않은 이상 벨로크 백작가는 여전히 상류 계급의 명문 귀족이었다.

    ‘보아하니 이미 상황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로군.’

    설령 파비안의 실종과 무관하다 하더라도 도로테아로서는 파비안을 찾아내는 편이 좋았다.

    귀족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명예와 스스로의 안위다.

    중요한 것은 도로테아와 말다툼을 한 백작가의 영애가 실종되었다는 사실과, 도로테아에게는 그 영애를 아무도 모르게 해코지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점이었다.

    마법사는 마탑과 제국 사이의 약정을 통해 힘을 제약받는다.

    신전도 마찬가지로 제국의 귀족 영애를 어쩌지 못한다.

    그렇지만 황제조차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최연소 정령사는 어떨까.

    ‘이제까지는 후작가라는 배경과, 제국 내부가 혼란스러운 탓에 비교적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지.’

    후계가 불안정한 황제는 그 어느 황자에게든 간에, 큰 지지 세력이 될 수 있는 하이클레어 후작가를 통제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테니까.

    자칫하면 그의 다음 대 황제가 공신에게 휘둘리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폐하는 더 이상 널 비호하려 들지 않으실 게다.”

    제아무리 그녀가 오랜 친우의 손녀딸이라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그녀를 아끼는 마음과는 별개로.

    그는 제국의 ‘황제’였다.

    도로테아를 견제하고자 하는 귀족들이 차고 넘쳐 나는 가운데, 그들로 하여금 그녀가 ‘위험인물’이라는 인식을 남기는 건 곤란한 일이었다.

    실종된 파비안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증거가 있든 없든 귀족들의 뇌리에 도로테아는 그녀를 해한 범인으로 남겠지.

    “팔자에도 없는 탐정 노릇이라니.”

    “그동안은 굳이 할 필요도 없는 일들에까지 머리를 들이밀지 않았던가?”

    웃음기가 담긴 키엘의 물음에 도로테아가 덤덤하게 답했다.

    “등 떠밀려 하는 일은 별로 내키지 않아서요.”

    “그럼 좀 거들어 줄까? 내가 돕는다면 그리 번거롭지 않을 게다.”

    은근한 목소리로 건넨 제안에 도로테아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왜?”

    “은인의 도움에는 큰 대가가 따를 테니까요.”

    복도 너머로 귀를 기울이자,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쇳소리가 느껴졌다.

    옅은 진동과 바람을 타고 드는 미미한 피비린내.

    죽어 가는 자들의 비명 소리가 그녀의 신경을 툭툭 건드렸다.

    “제게 신경 쓸 여유가 없으셔야 할 분이, 이렇게 먼저 나서 주겠다며 팔을 걷어붙이시다니요.”

    그가 그녀를 잘 아는 만큼, 그녀 또한 키엘을 몹시 잘 알았다.

    “그것이 단순한 이타심에서 나온 말일 리가 있나요?”

    빚을 지는 것만큼은 사양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맹수.

    하나를 주는 척 열을 뜯어 가는 포식자가 아닌가.

    무엇 하나 녹록하게 넘어가는 법 없는 도로테아의 말에 키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 호의를 그리 받아들이다니. 조금 애석한걸.”

    “단순한 호의라면 더더욱 받지 않을게요. 마음 써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정말이지 녹록치 않군.

    눈에 스치는 서운함을 읽어 낸 도로테아가 싱긋 웃었다.

    “은인께서 저로 인해 무리하시는 걸 원치 않아요.”

    어찌 생각해 보면 지금 그가 한발 물러서서 저택에 칩거하게 된 것도 반쯤은 도로테아와 관련이 있지 않던가.

    마지막 순간, 그가 바꾼 ‘선택’으로 그의 협력자들은 그의 안위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이 되었다.

    키엘 스펜서는 오랜 시간 그들과 접촉했고, 그들의 ‘계획’에도 자주 관여해 왔으니까.

    “그리 걱정해 주지 않아도 괜찮단다. 불청객들이 저택 안까지 들어온 적은 없었으니까.”

    흘러드는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던 도로테아가 키엘의 말에 빈 잔을 내려놓았다.

    “틀어박혀 있으려니 좀이 쑤시는 건 이해하지만, 치안대를 움직이는 건 되도록 자제하세요. 폐하께서는 여전히 은인의 행적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계실 터이니.”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미소가 키엘의 얼굴에 떠올랐다.

    무엇을 가져도 만족할 수 없는 공허함에 시달리느라 그는 늘 배가 고팠다.

    무엇을 먹거나 가져도 만족을 모르는 것은 모두, 자신이 잃어버린 ‘이름’과 ‘삶’ 때문이라 여겼다.

    그 갈증이 불러온 분노에 스스로를 태웠다.

    낳아 준 어미가 빼앗아 간 오롯한 자신의 삶.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적에 눈이 멀어 무엇이든 했고, 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키엘 스펜서’는.

    “마지막 순간, 은인께서 생각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원하는 바를 이루셨을지도 모르죠.”

    황제는 후계자를 잃은 상태였고, 구심점을 잃은 귀족들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렸다.

    신분으로만 따지자면 그는 선황의 아들이자 황태후의 적장자이니, 현 제국의 황제보다도 더 정통성 있는 핏줄이었다.

    “명분은 충분했고, 귀족들을 누를 수 있는 힘도 ‘그들’이 주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가 목표로 하던 찬란한 자리까지 딱 한 걸음 남았던 그때.

    키엘 스펜서는 뒤돌아서서 그의 오랜 협력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네가 알려 주지 않았니.”

    다정한 목소리가 답했다.

    가지고 싶은 것을 파괴하고 망가뜨려 손에 넣는 건 의미가 없음을. 빈껍데기만을 가져 봤자 그의 공허함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임을.

    저들의 힘을 빌려 차지한 ‘껍데기’는 결국 자신을 옭아매는 더한 목줄이 되어, 스스로를 꼭두각시로 만들게 되리라는 것을.

    그러니 그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물론 그 덕분에 손에 넣었던 것들을 꽤 많이 포기해야만 했지만.”

    제아무리 늙어 빠진 호랑이라도 황제는 황제였다.

    그는 키엘이 가진 야심을 꿰뚫어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공들인 수많은 ‘연’들을 미리 잘라 그의 사지를 묶어 놓았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성가신 불청객들만큼이나 집요한 견제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곳에 앉고 싶으신 거군요.”

    도로테아의 말에 키엘이 말없이 웃었다.

    과정과 방식을 바꾸었을 뿐, 그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높고 외로우며 찬란한 자리를 원했다.

    “그러니 2황자보다 나를 택하는 것이 어떠하냐?”

    “싫어요.”

    꽤 매몰찬 답이 돌아왔다.

    한 번의 망설임조차 없다니, 이건 좀 상처인데.

    눈을 가늘게 뜬 채 새침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도로테아의 뒤로 누군가가 쾅, 문을 두드렸다.

    “빌어먹을! 여긴 왜 이리 어두컴컴한 거야?!”

    걸쭉한 욕지거리가 섞인 분노 어린 목소리에 도로테아가 한숨을 쉬었다.

    ‘이토록 훌륭한 본보기인 내 아래에서 보낸 세월이 몇 년이건만, 아직도 저렇게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으니.’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그녀가 어기적어기적 문을 향했다.

    노크라기에는 지나치게 과격한 두드림이 연이어 들려왔다.

    “그리 참으라 일렀건만.”

    품위는 고사하고 인내심조차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을 보다 보면 새삼 군에 있었던 과거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쿵쿵.

    두드려 대는 소리에 무표정한 얼굴로 문을 홱, 열자 물씬 풍겨 오는 피비린내가 후각을 자극했다.

    뒤이어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에 그가 이곳까지 오기까지의 고생이 선연하게 담겨 있었다.

    머리통 하나 이상 차이가 나는 키 때문에 도로테아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상대의 검이었다.

    아직 채 식지 않은 선홍색 피가 검날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간만의 거친 운동 탓인지 흥분이 어린 눈동자를 번득이는 우드가 보였다.

    살기가 형형한 그의 눈은 도로테아의 차분한 눈동자를 마주하고서야 서서히 가라앉았다.

    “수고했어.”

    좀 전까지만 하더라도 귀에 거슬리던 미미한 소리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저택 주변을 맴돌던 불청객들이 누구의 손에 명을 달리했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던 키엘이 박수를 치며 매너 있게 찬사를 보냈다.

    “그토록 소란스럽던 바깥이 고요해졌군요. 경의 뛰어난 솜씨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

    겨우 진정되었던 우드의 눈동자에 다시 살기가 어렸다.

    “덕분에 오늘 밤은 조용히 잠을 청할 수 있게 되었군요. 그 보답으로 변변치 않지만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싱글거리는 반반한 낯짝에다 침을 뱉어 주고 싶은 충동에 손이 떨렸다.

    도로테아가 못마땅한 듯 부들거리는 우드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운동 부족이야, 그거.”

    칼질 좀 했다고 손이 떨리면 안 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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