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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40화 (140/242)

140화

상념에 잠겨 있던 2황자는 볼에 닿는 서늘한 감촉에 움찔했다.

어딘가 불만 어린 표정의 도로테아가 손을 뻗어 윌리엄의 뺨을 매만지고 있었다.

“왜 자꾸 살이 빠지는 걸까? 열심히 먹이고 있는데.”

슥슥 볼을 매만지는 손길은 그녀치고는 제법 다정했지만, 그 손길을 받는 당사자인 윌리엄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꼭 키우는 강아지를 달래는 듯한 손길인데.’

황자의 홀쭉하게 여윈 뺨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이윽고 말했다.

“새로운 보양식을 생각해 봐야겠어.”

에이든이 잡아 온 웅담이라면 허약한 체질을 바꿀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역시 구렁이를 뼈째로 푹 고아 내는 것이 나으려나?

황자의 상태를 가늠하는 눈빛이 제법 진지했다.

그러려면 우선 황궁 요리사부터 교체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웅담을 가져다주며 요리를 하라 했더니, 벌벌 떨다 기절해 버린 심약한 인간보다는 좀 더 강단 있는 요리사로.

“황궁 요리사를 새로 뽑자.”

기왕이면 구렁이를 삶을 줄 아는 인물이라면 더 좋겠지.

궁에 있던 요리사를 교체하겠다는 산뜻한 발언에 윌리엄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부족해. 황태후가 쓴 독이 너무 오랜 시간 네 육신에…….”

윌리엄은 죽은 황태후를 거침없이 입에 올리는 도로테아의 말을 막기 위해 손을 뻗었다.

곤란한 말만 골라 하는 아가씨 같으니.

때와 장소를 개의치 않는 그녀의 성정이야 익히 알고 있지만 이곳은 곤란했다.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으니까.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나, 장식물들을 품평하며 으스대는 이들도 모두 아닌 척 귀와 눈을 활짝 열어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말실수 한 번이면 저들이 물어뜯을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다.

“모처럼 어려운 발걸음을 하신 두 분의 기대를 준비한 것들로 부응할 수 있을지 염려되는군요. 관람은 어떠셨습니까, 2황자 전하. 그리고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깔끔하게 차려입은 젊은 남작이 미소 지었다.

“던컨 남작.”

도로테아는 남자의 한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에 시선을 주었다.

가죽을 덧댄 새까만 안대의 존재감이 큰 탓에 첫인상이 비교적 강하긴 하지만, 그윽한 눈빛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는 전체적으로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굳이 소개받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자가 4황자 지지 세력의 구심점이자 이 수많은 ‘수집품’을 제공하는, 어마어마한 재력을 갖춘 황자비의 오빠라는 것을.

무릎을 가볍게 굽혀 인사를 건넨 도로테아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던컨 남작님. 이미 들어서 아실지 모르겠으나, 저와 함께 온 일행들이 들뜬 기분에 작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망가진 물건들은 후작가에서 배상해 드릴 예정이니 부디 경솔했던 행동을 이해해 주시길.”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감히 영애께 돈을 받다니. 그럴 수는 없지요.”

케빈 던컨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보고 즐기시라 늘어놓은 물건들입니다. 설령 망가졌어도 손이 뻗는 데에 배치해 둔 저희의 잘못이겠지요.”

먼 이국땅에서 물건들을 들여오려면 비용의 문제도 있겠지만, 여러 까다로운 조건들을 거쳐야 한다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여러 국가의 손익 계산이 얽힌 관계들을 관리하는 인물인 만큼 처세에 뛰어난 것만큼은 확실했다.

무능력한 자보다야 능력 있는 자가 나은 것이 사실이지.

게다가 그것이 가진 것들을 불려 주는 방식이라면 더더욱.

도로테아의 눈이 반짝였다.

“재정 상태가 꽤 풍족하신가 봐요.”

소녀의 목소리에 담긴 짙은 욕망을 읽어 낸 윌리엄이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려 외면했다.

던컨 남작은 도로테아의 직설적인 말에 유쾌한 듯 웃었다.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손님들의 실수에 연연하지 않을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만.”

때마침 멀리서 누군가가 그를 찾자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몸을 돌리려던 던컨 남작이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박람회에 참석해 주신 귀빈들을 위해 선물을 추첨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혹 시간이 되어 그때까지 느긋하게 머물러 주시면 더 좋은 물건들을 구경하실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정보네요.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빙긋 웃으며 그를 보낸 도로테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감탄과 즐거운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곳을 방문한 귀족들 모두가 4황자 지지 세력은 아니다.

누군가는 견제차, 누군가는 아직 의탁할 곳을 정하지 않은 채 탐색차 왔을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단순히 이국의 문물을 관람하러 왔을 수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박람회에서 즐기고 돌아간 이들에게 4황자의 튼튼한 재력과 인맥들을 보일 수 있었다는 점이지.

성향은 몰라도 수완이 좋은 인물인 것은 확실했다.

4황자가 세력을 키우는 데에 가장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은 바로, 4황자비가 명문가가 아닌 상인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 약점을 숨기는 대신, 도리어 그것이 ‘이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뒤집어 보여 주었다.

아닌 척하면서도 속물적인 귀족들에게는 적절한 처방이었다.

“훌륭한 전략이네.”

도로테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윌리엄을 살폈다.

2황자에게는 강력한 군권을 지닌 동생인 루크가 있었고, 권력과 재력을 가진 도로테아가 있었다.

그럼에도 귀족들이 그를 섣불리 지지하려 들지 않는 까닭이라면 역시…….

‘생산 능력이겠지.’

허약한 육신 탓에 후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는 게 그를 ‘황위 계승자’로서 지지하기 어렵도록 만드는 것일 터.

뛰어난 재력이야 어떻게든 선보이면 되지만, 후계 능력은 어떻게 선보인다?

일단 쟤가 그럴 마음이 들게 하려면 미인계를 좀 써 봐야…….

‘아니, 가만. 윌리엄이 여자한테 관심이 있긴 했던가?’

“테아.”

진지한 고민에 잠긴 도로테아를 바라보던 윌리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응?”

“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단호한 2황자의 말에 도로테아가 생긋 웃으며 말을 돌렸다.

“아이들이 늦는걸.”

“안 한다고 분명히 말했어.”

“혹여 길을 잃었을지도 몰라. 찾아보고 올게.”

살랑살랑 부채를 흔들며 사라지는 도로테아의 뒷모습에 윌리엄이 한숨을 삼켰다.

“형님!”

멀리서 4황자가 특유의 쾌활한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형제에게조차 편히 웃을 수 없는 상황에 윌리엄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맺혔다.

*   *   *

오지 않는 아이들을 찾아 복도로 나선 도로테아는, 이내 탈의실 문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두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아이들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딘가 어색한 얼굴을 한 두 아이 위로 반투명한 형체의 정령이 빙빙 맴돌고 있었으니까.

부르지도 않았건만 제멋대로 나타나 아이들 주변을 맴돌고 있는 리리를 본 도로테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미네.”

왠지 그녀의 부름에 화들짝 놀란 아이가 펄쩍 뛰며 뒤돌아 도로테아를 살폈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임을 확인한 순간 아이의 얼굴에 안심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옷을 갈아입으니 한층 더 화사해졌구나. 분홍빛도 너희에게는 아주 잘 어울려.”

그제야 포르르 주인의 품으로 날아든 리리가 애교를 부리듯 도로테아 주변을 뱅뱅 돌았다.

“구경하지 않은 물건들이 남아 있을 텐데. 가서 더 보고 싶니?”

도로테아의 물음에 어린 왕녀는 눈치를 보다 아주 작게 고개를 도리질했다. 옆에 있던 미네도 덩달아 잡은 손에 힘을 준 채로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엇이 두 사람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왔을까?

요란하게 넘어지긴 했지만 모처럼 나온 나들이를 포기할 정도의 일은 아닐 텐데.

구경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이었으니 박람회에 실망한 것도 아닐 테고.

도로테아의 시선이 긴장한 듯 꼭 쥐어 새하얗게 된 미네의 작은 주먹으로 향했다.

“그래, 그럼. 너희가 원한다면 이만 돌아가야겠지.”

도로테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기다려 준 윌리엄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 사람들로 가득 찬 박람회장을 빠르게 벗어났을 뿐이다.

마차 안에서 연신 눈을 마주치는 두 아이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유난히 자주 뒤척이는 왕녀의 드레스 한쪽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소녀의 주먹보다는 조금 더 커다란, 뭉툭한 형태를 갖춘 물건은 분명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없었던 것이었다.

말없이 소녀들을 관찰하던 도로테아가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유독 별난 짓을 하는구나.”

순간 소녀들이 움찔했지만, 도로테아의 말은 그녀들이 아니라 신이 난 듯 마차 안을 돌아다니는 정령을 향한 것이었다.

평소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갓난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장난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곤 했지만, 오늘은 유독 정도가 심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생전의 기억이 지워진 채 ‘정령’이 덧씌워진 혼.

줄곧 스스로의 존재를 숨긴 채 인형처럼 그녀의 말을 따르기만 했던 정령이 그녀의 눈을 피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로테아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줄곧 천진한 아이처럼 굴던 정령이 움직였다는 것은 분명 무언가 그럴 만한 까닭이 생겼다는 뜻일 터.

잠잠하던 일상이 다시 요동칠 준비를 마친 모양이었다.

*   *   *

호황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박람회장을 찾은 귀족들은 저마다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은 채 제각각 구입한 물건들을 마차에 싣고 떠났다.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로 박람회장에 남아 있어야 했던 4황자, 헨드리가 피곤한 듯 눈을 깜빡였다.

“이쯤이면 충분하겠지.”

“시작이 순조롭군요. 폐하께서 오시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만, 기회는 또 있을 테니까요.”

“흥미로워하시리라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국외 흐름이 심상치 않은 탓에 신경을 많이 쓰시는 모양이군.”

모두가 빠져나간 넓은 회장을 가로지르며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가냘픈 여인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초한 분위기의 창백한 미인이 다가오자 4황자가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다.

“왔소?”

“예.”

조그마한 목소리로 짧게 답한 그녀가 그의 옆에 섰다.

파스텔 톤의 옅은 드레스를 걸친 4황자비, 플로렌스 던컨의 등장에 오빠인 케빈은 눈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피했다.

“남매 사이가 지나치게 삭막한 것이 아니오?”

농처럼 던진 말에, 플로렌스의 창백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오랜만에 형님이신 2황자 전하를 뵙게 되어 기쁘셨나 봅니다. 평소에 비해 들뜨셨어요.”

“그런가?”

자각도 없었던 그가 멋쩍게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초에 윌리엄과 그 사이에 형제의 정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했던가.

형제들 가운데 가장 존재감이 없는 2황자는 제 궁 밖으로 나오는 일도 드물었고, 누군가를 초대해 맞이하는 일도 드물었다.

황태자는 그를 무시했고 동생인 3황자는 답답하게 여겼다.

‘그런 그가 오늘날 이런 위상을 갖게 되리라곤 형제 중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겠지.’

하긴 저부터도 다시 이곳에 돌아와, 위선 떨기 바쁜 지긋지긋한 인간들을 상대하게 되리라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자괴감 어린 웃음을 짓던 그는 어둑한 방으로 들어서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침대 위에 걸터앉아 쥐 죽은 듯 조용히 서 있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이리 와 내게 보여 주시오. 자세히 보고 싶구려.”

한숨처럼 뱉은 목소리에 깔린 기대감에 여인은 아무런 말 없이 천천히 드레스의 소매를 내리고 맨 어깨를 보였다.

작은 촛불 하나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 안에서도 불타오를 듯한 붉은 장미 문양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4황자는 마치 수집품을 바라보는 듯한 황홀한 눈으로 붉은 장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뒤로 돌아서 있는 여인의 공허한 표정이 어둠 속에 묻혀 가는, 꽤 오랜 시간 동안.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가 입을 뗐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래 박람회장 밖에 머무는 것 같던데.”

“사소한 오해가 있었어요.”

귀족들을 상대하면서도 아내가 회장 내부에 없음을 눈여겨보고 있던 그의 지적에 플로렌스가 담담하게 답했다.

“일은 처리됐소?”

“걱정 말아요, 여보.”

금방이라도 끊길 듯 가느다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예요.”

응당 그래야만 했다.

마치 스스로를 달래려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4황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이윽고 말소리가 끊긴 방 안에 적막한 고요가 찾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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